# 126
현질 전사
- 6권 2화
<현재 상점 레벨에서는 없습니다. 만약 더 많은 스킬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상점 업그레이드하라고? 그거야 다 아는 이야기고. 저번과 같은 이야기를 해 보지. 그런 종류의 스킬이 나올 가능성은 있나?"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스킬의 획득은 가능할 겁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타인의 심리나 정신 상태에 관계할 수 있는 스킬의 획득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래?"
정대식은 대꾸를 하기는 했으나 눈살을 찌푸렸다.
감정 없는 엔트로피가 말을 해서 그런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상당히 비도덕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타인의 심리나 정신 상태에 관계를 하다니?
세뇌나 조종과 똑같은 말로 들렸다.
정대식은 단순히 대원들의 사이를 개선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이런 문제까지 일일이 현질에 기댈 순 없지. 돈이 썩어 나는 것도 아니고.'
정대식은 구겨진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지고는 몬스터 처리반으로 가 아르고스 사체를 넘겼다.
아르고스는 눈 한 알 한 알이 돈이 되기 때문에 정산금은 제법 나올 터였다.
그 사실을 위안 삼아 다시금 사무실로 돌아간 정대식은 거기에 누가 있는 것을 보았다.
"최선 씨?"
사무실에는 정대식이 벗어 놓고 간 마기전이 있었다.
최선은 그걸 살펴보고 있었다.
정대식은 자신이 진귀한 무구를 아무렇게나 벗어 두고 다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머쓱하게 말했다.
"여긴 펜리르 부대 사무실인데...... 어쩐 일로......?"
최선이 무심코 그를 쳐다보자 별안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대식은 최선이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바꿨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칙칙한 긴 생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한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어 죽을 맛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대식은 자신의 취향이 이런 오타쿠 같은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말을 하라면 최희 쪽이 더 취향에 맞다고 해야 하나?
최희가 워낙에 호불호가 없는 미인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화려하고 당당한 미인 쪽을 더 선호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최희에 비해서는 볼품없다 해도 무방한 정도인 최선에게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쳤군, 미쳤어."
"예?"
"아, 아닙니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최선은 의아해했지만 그것을 캐묻는 대신 마기전을 손짓해 보였다.
"지나가다 열린 사무실 문 사이로 마기전이 있는 게 보여서요."
"아,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누가 훔쳐가라고 그냥 놔둔 건 아니었어요."
"걱정 말아요. 타이탄 공격대 내에서 누가 감히 도둑질을 하겠어요?"
"하하, 그건 그렇겠네요."
"그보다, 아직 인챈트를 안 하셨네요?"
"아, 인챈트요.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요즘 좀......."
"네, 펜리르 부대 일로 바쁘시겠지요. 하지만 언니가 인챈트를 해 줄 장인과 다시 약속을 잡았다고 그랬거든요. 저더러 대신 그 말을 전해 주라고 했어요."
저번에 최희가 인챈트 장인을 수소문해 약속을 잡아 주었지만, 기철민만 다녀오고 정대식은 사양을 했었다.
그 이후 거기에 대해서는 여태껏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약속이 언제죠?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내일 오후예요. 가능하시겠어요?"
"내일 오후라면......."
본래는 또 다른 사냥 계획을 잡아 놓았었다.
값비싼 마정석이 나온다는 곳을 수소문해 놓았던 것이다.
꽤 위험한 던전이라 레이드를 잡아 놓았다.
다른 헌터들에게는 몬스터 부산물을 넘기고 자신은 마정석만 갖는 조건이었다.
정대식은 거기에 나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돈을 모아 봤자 헛짓 거리지. 레이드는 취소하는 편이 좋겠어. 차라리 마기전에 인챈트를 하는 김에 머리를 식히며 대원들을 어찌할지 방법을 찾는 게 나을지도.'
정대식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위치가 어디죠? 많이 멉니까?"
최선이 대답했다.
"멀어요. 혼자선 이동하기 힘드실 겁니다. 저희 집에 있는 포탈을 이용해야 할 거예요."
"포탈이라고요?"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포탈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간 이동을 가능케 하는 장치다.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의 능력자만이 포탈을 장치할 수 있었는데, 그게 최희의 집에 있다고?
경악하는 정대식을 보고 최선이 후후 웃었다.
"놀라실 만도 하죠. 저희 언니가 거금을 들여 포탈 제작자를 불러다 만든 거예요."
"예, 놀랐습니다. 최희 씨가 왜 이사 오라고 자신 있게 권했는지 알 것 같네요."
"아무튼 포탈을 써야 하니까 제가 같이 동행해 드릴게요. 저희 집 주소를 보내 드릴 테니 내일 오후 한 시까지 마기전과 인챈트 스크롤을 챙겨서 와 주세요."
정대식은 최선에게 주소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본디 타이탄 공격대원들은 동일한 휴대용 단말기를 쓰는 관계로 타이탄 공격대 전용 메신저를 이용하면 언제든지 서로 연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디로 쓰는 거였고, 전화번호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늦지 말고 오세요."
최선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나가자, 정대식은 엉뚱한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거 설마 데이트인가?'
* * *
정신을 빼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 날 정대식은 왠지 모르게 옷차림에 힘을 줬다.
차도 괜히 한 번 닦아 주고 마기전을 잘 챙겨서 운전석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고 최 씨 자매의 집으로 달려가는데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정대식은 자신이 지나치게 들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고.'
정대식은 왠지 모르게 최선에게 끌리는 마음을 단속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희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라니?
보나, 안 보나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연애나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닌지라, 정대식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정대식은 약 30분가량을 더 달려 시가지를 벗어났다.
엔트로피가 내비게이션에 접속해 알려 주는 길은 다소 외진 곳으로 향해 있었다.
이윽고 차를 멈추었을 땐 주위에 산뿐이었다.
길게 이어진 길 끄트머리에 커다란 철문이 하나 있었고, 사방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정대식이 대문 앞에 차를 멈춰 세우고 안에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 하는데,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정대식은 다시 차를 몰아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갈이 깔린 길 주변으로는 다소 관리가 덜 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곧장 숲으로 이어져 있어 저택 부지가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왔다.
아마 이 일대의 산이 모조리 최희의 소유인 것 같았다.
'최희쯤 되면 기부를 몇백억씩 해 대도 끄떡없겠지.'
정대식은 광활한 내부에 감탄하며 약 5분가량을 더 달려서 저택 입구에 멈춰 섰다.
저택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현대적인 분위기가 뒤섞여 있었다.
보아하니 오래된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았다.
옛날식의 벽돌 건물에 피라미드 형태의 유리 돔이 결합되어 있어 마치 루브르 박물관을 보는 듯했다.
정대식이 차에서 내리자 안에서 곧 최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웬일로 머리를 묶고 안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으나 평소 하고 다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역시, 맨 얼굴은 미인이네.'
"안녕하세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정대식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고 최선도 마주 인사했다.
하지만 정대식은 최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최선이 몹시 민망해하며 물었다.
"어, 어디가...... 이상한가요?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
"아뇨, 맨 얼굴이 예쁘시네요. 그렇게 예쁜 얼굴을 왜 가리고 다니시죠?"
정대식이 하는 말에 최선은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러나 기뻐한다기보다는 뭔지 모를 수치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정대식이 의아해서 "섣부른 소릴 한 거라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자 최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칭찬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어요. 언니에 비하면 저는 전혀 예쁘지 않은 걸요?"
"예?"
정대식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보니 최선은 최희에 빗대도 손색없을 만큼 미인이었다.
단, 최희가 워낙에 눈에 띄는 미인이라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장담컨대 남자들이 더 선호하는 여성상은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대식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으나 칭찬 한마디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최선에게 그런 소릴 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해 봤자 사실로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아서, 정대식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최선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3중의 문을 지나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대저택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정대식이 감탄하며 "집이 참 좋네요"라고 말을 하자 최선은 그조차도 부끄러워했다.
"집이 좀...... 요란스럽죠? 하지만 언니 취향이 화려해서."
"요란스럽긴요. 아니에요. 아주 근사합니다. 들어와서 살겠다고 할 걸 그랬나, 막 후회가 되던 참인데요?"
정대식이 하는 말에 최선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전 정대식 씨가 사는 집이 훨씬 더 보기 좋았어요. 이 집은 너무 넓고 크고...... 아무도 없어서 안정이 되질 않아요."
"그러고 보니 최희 씨가 안 보이네요?"
"언니는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당분간은 여기에 없을 거예요. 사실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죠."
그렇게 말하는 최선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이런 커다란 집에 혼자 있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가능하면 자신도 사택에 머물고 싶지만 언니가 걱정되어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식구라곤 둘뿐이라 적은 시간만이라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최선은 정대식을 데리고 거실을 관통해 테라스로 나갔다.
저택의 후면부에 해당하는 테라스는 수영장과 이어져 있었고, 수영장을 빙 돌아가는 작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간 최선은 정대식을 후원 한가운데의 작은 건물로 안내했다.
"여기가 포탈이에요."
그곳은 마치 서양식 정자처럼 생긴 곳이었다.
둥근 단상 위에 기둥이 솟아나 있었고 그 위에 돔 형태의 지붕이 얹혀 있었다.
그 기둥 한가운데, 포탈이 그려져 있었다.
"포탈은 처음 보는데, 마치 마법진처럼 생겼네요?"
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유일의 포탈 제작자는 공간 전이 능력을 가진 마법사예요. 현재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은 전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예, 그에 대해서 들은 바는 있습니다만...... 그가 공간 전이 능력자라고요?"
"공간 전이 능력자니까 포탈을 만들 수 있죠. 모든 마법사가 다 포탈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 그런데 저희 펜리르 부대에도 공간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있습니다만."
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분이 포탈 제작자와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죠."
정대식은 설마, 하던 생각이 사실인 것을 알고 손바닥을 탁 쳤다.
"역시! 똑같은 게 맞습니까? 그렇다면 저희 부대원도 이런 포탈을 만들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