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현질 전사
- 5권 19화
"그 말뜻은, 상점을 업그레이드하면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아시다시피, 확답을 드릴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대식은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네가 뭣도 모른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네 깡통 같은 머리로도 논리적인 사고는 가능하겠지. 난 가능성에 대해 묻고 싶은 거야. 상점을 레벨 5까지 업그레이드해 놓았으니 6에서는 이 정도 스킬은 가능하겠다는 정도의 추측은 할 수 있지 않겠어? 정확한 레벨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야."
엔트로피는 잠시 침묵했다.
정대식은 자신이 전에 없던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기다렸다.
그동안은 엔트로피와 이렇다 할 대화를 하지 않았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도우미였고, 정대식은 여태까지 정보의 전달 외 다른 것을 질문한 적이 없었다.
엔트로피 역시 묻지 않은 말에 답하거나, 모호한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또 상점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으나, 상점이 발전함에 따라 엔트로피 역시도 성장한 덕분일까?
엔트로피는 매우 그럴싸한 추리를 내놓았다.
<제 생각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대답하겠습니다.>
"어? 응. 그래, 맞아. 네 생각이 궁금한 거였어. 말해 봐."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대식 님이 최초에 타고난 능력은 강화였으니까요.>
"그게 왜?"
<강화는 정대식님 본인에게도 적용이 되는 능력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각성이나 교란 같은, 강화계가 아닌 다른 계열의 능력에 속해 있는 스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하! 상점에서 구입한 스킬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강력권이나 무적권과 같은 공격용 스킬도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강화가 그런 셈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상태를 증진시키거나 능력을 계발하는 그런 스킬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77%에 달합니다.>
"77%라, 재수 좋은 수치인데?"
정대식은 엔트로피가 하는 희망적인 말에 기대를 가졌다.
만약에 엔트로피의 추측처럼 자신의 현질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최희나 기철민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랴?
부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효과적일 터였다.
잘만 하면 자신의 공격대를 최강으로 키워 내는 것도 가능했다.
정대식이 그 생각으로 운전을 하면서 싱글벙글하고 있자, 엔트로피가 의아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요?>
이 역시도 처음이었다.
엔트로피가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것도 정대식의 생각을 묻다니.
역시, 상점의 레벨이 오를수록 엔트로피는 지식이나 성능뿐만 아니라 지능과 감성 역시도 성장하고 있었다.
상점 레벨이 6이 되면 진짜 사람 같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대답했다.
"왜는, 궁금하니까 묻는 거지. 왜 그게 궁금해졌느냐고 한다면...... 좀 찜찜해서 말이야."
<찜찜하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찜찜해. 남들에게 말 못할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정대식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죽자 사자 아등바등 애를 써도 쉽게 강해질 수 없지. 마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거고, 이능 역시도 주어지는 거니까.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아마 최희나 기철민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난 다르잖아? 엄청난 거금을 들이기는 하지만, 바꿔 말하면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거니까. 실제로도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강해졌어. 누가 날 보고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짐꾼 신세였다고 하겠어?"
<그게 왜 찜찜한 것입니까?>
"역시, 레벨 5 수준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인가 보네? 공감도나 이해력이 딸려."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으이그...... 혼잣말이었다. 됐냐?"
정대식은 무어라 더 설명할 말을 찾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을 놓고 보면 정대식이 그들에게 괜히 찜찜한 기분을 가질 이유는 하등 없었다.
사실을 말 못하는 건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고, 정대식도 아무런 대가 없이 강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정대식에게 강해지는 것은 수단일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돈이었고, 최희나 기철민처럼 보다 강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는 않았다.
정대식이 만약 기철민의 입장이었으면 절대 펜리르 부대에 들어가겠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펜리르 부대의 임무는 기철민의 능력으로 소화하기에는 버거운 것이고 까닥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안정적인 외눈박이 부대에 눌러 있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그런데도 기철민은 그곳을 박차고 나와 굳이 펜리르 부대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정대식에게서 강해지는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좀 안쓰럽기도 하고,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 이같이 느낄 것이다.
정대식은 이 현질의 능력이 자신과 같은 무사태평, 물질주의자에게 오는 게 아닌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을 다 말하지 못하고 정대식은 대충 대꾸했다.
"아, 몰라. 그냥 그래. 네가 지금보다 더 수준이 올라가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엔트로피는 대답하지 않았고, 정대식도 입을 다물었다.
한데 잠자코 운전을 하다 보니 엔트로피와 대화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깨달아졌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생각은 절대 안 했을 거야. 내 능력에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낄지언정, 쓸데없는 미안함이나 부채감 같은 것은 갖지 않았겠지. 내 코가 석 자인데 뭣하러 다른 사람을 신경 쓴단 말이야? 설령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괜한 오지랖이라 생각했을 거라고.'
정대식은 자신이 최희와 기철민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흠칫했다.
'내가 변했나?'
정대식은 여전히 강해지기를 오매불망 바라는 최희나 기철민 같은 사람들의 심정에 동조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현질로 보는 혜택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는 했다.
정대식은 그 기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래! 가성비. 이건 가성비 문제야. 현질을 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드는데, 그걸 나만 써야 한다면 좀 아깝잖아? 본전을 뽑으려면 다른 사람한테도 쓸 수가 있어야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니 좀 안심이 됐다.
혹시라도 자신이 목적을 잊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내 목적은 억만장자가 되는 거다!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돈벌이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정대식은 그제야 맘 놓고 히죽거렸다.
비로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확실히 돈에 여유가 생기니까 사람 마음이 너그러워지네. 만약에 다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스킬이 생긴다면, 뭐...... 도와주면 어때, 나쁠 건 없잖아?'
정대식은 일말의 찜찜함을 털어 버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엑셀을 밟았다.
* * *
짹짹짹!
요란한 새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정대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늦잠을 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난 셈이다.
펜리르 부대원이 확정되는 대망의 날인지라 저도 모르게 일찍 깼나 보았다.
정대식은 샤워를 하면서 엔트로피를 불러내 오늘의 주요 뉴스를 확인했다.
타이탄 서버에 접속해서 오늘 있을 펜리르 부대원 선발에 대한 대원들의 반응도 살펴보았다.
다들 부대장이나 동료들의 눈치를 봐서 그런지 열광적인 반응은 아니었으나, 오늘 대원들끼리의 대결이 볼만할 거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정대식도 기대감 속에서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차를 몰아 타이탄 공격대 본사로 간 그는 강영후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강영후는 직접 지원자 명단을 비서에게 받아서 정대식에게 건네주었다.
"이 네 명이 지원자들이다."
예상대로 지원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자신의 부대를 옮기고 싶은 대원들이 많다면 지원자가 넘쳐났겠지만, 기본적으로 타이탄 공격대의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정대식이 그랬듯이 각자 자신이 속한 부대에 애착이 있을 테고, 괜히 펜리르 부대로 옮기겠다고 나섰다가 떨어지면 민망한 꼴이 되니 자중하기도 했을 것이다.
기철민이 포함된 그 명단을 훑어보던 정대식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김태희? 이 대원은 누굽니까? 전에는 못 보던 인물 같은데요."
정대식은 지난번 대원들을 뽑으면서 타이탄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대원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한데 이런 이름을 가진 헌터는 없었던 것이다.
의아해 묻는 말에 강영후는 답지 않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대원은 특수 임무를 맡고 외부로 나가 있었어. 그 임무가 타이탄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되는 종류라,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그 임무가 해제되어 돌아오게 된 거야."
특수 임무라니?
여기가 무슨 공작 부대도 아니고, 신원을 감추어야 할 만한 임무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대식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강영후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굳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단독 임무를 맡을 정도라면 실력자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외 다른 두 사람도 정대식이 눈여겨봤을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기철민은 상대적으로 수수했다. 그의 능력을 봐도 그렇고, 등급을 봐도 그랬다.
기철민이라는 인물은 헌터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가 고루 발달해 있었다.
상황 판단도 빠르고, 전투 감각도 훌륭하고, 신체 수준이나 마력 응용력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기철민은 타고난 마력량이 적었고, 그의 능력 자체도 별의별 희한한 능력을 갖고 있는 각성자들 틈에서는 크게 별 볼 일이 없었다. 정교한 절삭 능력을 갖고는 있다지만, 값비싼 무기 하나만 갖고 있어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었다.
괜찮지만 훌륭하지는 않은, 그런 헌터인 셈이다.
아마도 본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강해지는 데 그리 집착하고 있을 테다.
'과연, 이 사람들을 다 제치고 부대원이 될 수 있을지...... 에이, 몰라. 본인이 실력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정대식은 공정함을 위해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강영후와 함께 훈련장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