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현질 전사
- 5권 17화
엔트로피가 즉각 그 의사를 전달받아 스킬을 시동했다.
<강화.>
"신속!"
<교란>
"은신!"
강화를 더한 신속에 교란과 은신까지 한꺼번에 쓰자 정승채가 마침내 멈칫했다.
정대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별렀던 기술을 터트렸다.
"마기장!"
정대식은 마기전을 시동하며 왼손을 몇 번이나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마기장이 둥근 구슬과 같은 형태로 쏘아져 나갔다.
개중 몇 개가 재빨리 피하던 정승채의 몸에 맞았고, 정대식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포박!"
"어억?"
그 구슬은 정승채의 몸에 흡수될 것처럼 쑤우욱 들어갔다.
그러더니만 도넛처럼 납작하게 커진 상태로 정승채의 몸을 구속했다.
정대식은 그것만으로도 안심하지 못하고 마기장의 크기를 더 키웠다.
"감금!"
부우우웅!
마기장은 순식간에 지름 2m짜리의 구체로 커졌다.
정승채는 정대식이 만들어 낸 마기장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정대식은 어떠냐는 식으로 씩 하니 웃어 보였다.
'마지못해 받기는 했지만, 마기전이라는 이 물건은 역시 놀랍다!'
정대식은 최선에게 마기전을 받아 가지고 시착을 해 보면서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었다.
마기전에는 기본적으로 마기장, 마기력, 마기포, 이 세 가지 기능이 있었는데 보통의 무구들과는 달리 마기전은 어떤 식으로 응용하느냐에 따라 수십 종류의 방어와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능인 것은 아니었다.
최선이 경고한 대로 마기전은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었다.
정대식의 마력을 그냥 생짜배기로 짜낸다고 해야 할까?
다른 무구나 스킬이 정대식이라는 탱크에 가득 차 있는 마력을 절수 기능이 있는 수도꼭지로 뽑아낸다 치면, 이건 튜브를 꽂아서 쭉쭉 빨아내는 셈이었다.
지금도 고작 정승채 한 명을 상대했을 뿐인데 예상외로 마기전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바람에 마력이 닳아 버린 게 느껴졌다.
극심한 운동을 한 것처럼 몸에 힘이 빠져서 다리가 다 후들거렸던 것이다.
마력을 바닥까지 써 버리면 체력에도 타격을 입는다.
마찬가지로 체력을 다 써 버리면 자연히 근력이나 민첩, 마력이나 오감 수치도 떨어졌다.
모든 상태는 정대식의 신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하나라도 바닥나면 다른 상태에도 영향이 갔다.
모든 상태가 다 바닥을 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더 이상 마기전을 사용하면 안 되겠다. 팔용대를 상대할 때는 마기전을 배제하고 싸워야겠어.'
정대식은 마기전의 사용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낸 마력의 감옥 안에 갇힌 정승채를 보고 말했다.
"항복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정승채가 진 게 맞았다.
그는 순순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항복이다."
팟!
정대식은 서둘러 마기장을 없앴다.
그제야 몸에 기운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정승채는 아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아무리 공격력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맞히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그래서 이 승부는 내가 다 이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널 만만하게 본 건 내 쪽인 것 같군."
정대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몇 마디 겸양의 말을 했다.
그리고 정승채 역시도 훌륭했다, 고 예의를 차렸다.
그러자 다음 타자인 팔용대가 앞으로 나와서 물었다.
"계속해 싸울 수 있겠어? 뭣하면 조금 기다려 줄 수도 있는데."
"물 한 모금만 마시고요."
"응응, 얼마든지 마셔!"
팔용대는 손수 생수병을 가져다주었다.
정대식은 그걸로 목을 축였고, 그동안 팔용대가 거대한 어깨를 뒤틀면서 말했다.
"승채와 싸우는 거 아주 잘 봤어! 무구를 새로 갖추어서 그런가, 실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 같던데? 나랑 싸울 땐 좀 살살해 줘. 이래 보여도 연약한 남자라궁!"
콧소리를 가득 섞어 되지도 않는 아양을 떨어 가며 말하는데 진짜 눈이 썩는 것 같았다.
정대식은 자신의 전의를 꺾기 위한 지능적인 기선 제압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외눈박이 부대장 팔용대의 캐릭터가 원래 저런지라 무어라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빨리 싸워서 치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생수병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어엉!"
발랄하게 걷는 팔용대와 함께 정대식은 다시금 훈련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 * *
훈련장 한가운데서 팔용대는 "그럼 시작해 볼까요?" 하고 자세를 잡는 정대식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와는 달리 점잖은 태도로 말했다.
"자네 공격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정대식도 들었던 주먹을 내리고 대꾸했다.
"저 역시 외눈박이 부대장의 공격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외눈박이 부대는 답사, 맵핑, 하우징, 파밍 등등 직접적인 사냥보다는 정보수집이나 사전 조사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만큼 공격력이 강한 대원들보다는 다양 다종한 능력을 갖고 있는 대원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부족한 공격력을 팔용대 혼자서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기철민이 외눈박이 부대로 들어가면서 그의 짐을 덜어 주긴 했지만, 여전히 외눈박이에서...... 아니, 타이탄 공격대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팔용대였다.
"여태까지 공격력 하면 나, 팔용대가 최고라고 여겼지만 최근 자네의 성장을 보아하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군."
"예에, 뭐. 제게는 버퍼의 능력도 있으니까요."
"버프든 뭐든 그것 역시도 자네 능력이니 공격력이라고 쳐야겠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대결은 순수한 공격력을 겨루어 보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나?"
팔용대는 주먹 대 주먹으로 한번 맞붙어 보자고 말했다.
정대식은 공격력을 겨루어 보는 것은 상관없었다.
불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오디션을 볼 때 홀로그램 룸을 망가트린 전적이 있는 것이다.
정대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팔용대가 말을 이었다.
"건물이 무너질까 걱정이라면, 여수희가 도와줄 거야. 여수희!"
여수희는 잠자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충격이 외부로 새 나가지 않게 막아 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녀는 희한하게도 훈련장 옆에 딸린 샤워실에서 호스를 가지고 나왔다.
그걸 틀기가 무섭게 안에서 물이 쏟아졌고, 여수희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마력을 거기에다가 불어넣었다.
"와!"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수도에서 흘러나온 물은 여수희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녀의 마력을 먹고 마치 수은처럼 번들거리는 광을 띤 물이 훈련장을 둘러쌌다.
흡사 물로 만들어진 돔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만한 규모를 유지하려면 마력이 엄청나게 드니까, 가급적 빨리 끝내주었으면 좋겠는데."
여수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강영후가 나섰다.
"내가 거들어 주지."
강영후는 자신의 안에서 그가 쓰는 무기, 고스트를 꺼내 들었다.
강영후의 몸속에서 검이 튀어나오는 광경은 또 봐도 신기했다.
강영후는 그걸 사정없이 여수희의 등에 찔러 넣었다.
여수희는 눈을 크게 뜨며 헉, 하는 소리를 질렀으나, 다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강영후가 그녀의 몸속에 찔러 넣은 고스트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사람의 신체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그 검을 통해서 본인의 마력을 흘려 넣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됐다."
준비가 끝나자 정대식과 팔용대는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여수희가 언제까지 이 방어막을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승부는 세 번 만에 끝내기로 했다.
방식은 단순했다.
서로 공격력을 모아 주먹을 부딪쳐, 먼저 깨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곧, 강영후의 신호가 떨어졌다.
"시작!"
<강화.>
"강력권!"
정대식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즉시 엔트로피와 협동해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공격 스킬을 펼쳐 냈다.
파르라니 빛나는 마력이 그의 주먹에 맺히고, 팔용대도 기합을 담아 시동어를 외쳤다.
"천하제일권!"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유치한 기술 명이었으나, 그 위력은 유치해 보이지 않았다.
정대식은 서로 주먹을 내지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눈을 크게 떴다.
팔용대의 주먹에 맺힌 마력이, 마력 그 자체로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꽈--------------------앙!
주먹과 주먹이, 정확히는 거기에 맺힌 마력과 마력이 맞부딪치는 순간.
섬광과 굉음이 터져 올라 사방에 충격을 가했다.
여수희가 만들어 낸 방어막이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듯 출렁거렸고,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격돌의 여파가 가신 다음 순간.
정대식과 팔용대는 한 발짝씩 물러나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얼얼한 주먹을 늘어트린 채 안 믿긴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정대식도 팔용대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일격을 상대에게 먹였다.
그런데 공격력이 상쇄되어 서로에겐 눈곱만큼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순수하게 공격력만을 놓고 겨루기로 했기에, 두 사람은 각자의 무기를 벗어 둔 상태였다.
특히 정대식의 너클 글러브는 마력을 있는 대로 실으면 큰 규모의 폭발이 일어날 테니 상당히 위험했다.
정대식은 빨갛게 달아오른 주먹을 털면서 말했다.
"역시, 대단하신데요!"
"너야말로."
둘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해 두 번째 격돌을 준비했다.
두 사람은 표정이 침착했는데 여수희의 얼굴만 새하얗게 변했다.
여수희가 죽상을 한 상황에서 정대식과 팔용대가 동시에 땅을 박찼다.
<강화.>
"강력권!"
"천하제일권!"
정대식은 일견 아까와 똑같은 스킬을 쓰는 것 같았으나 실은 아니었다.
그는 강철 신체와 부유 신체라는 패시브 스킬을 갖고 있었다.
그 스킬은 정대식이 어떻게 마력을 운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졌다.
'주먹은 더 단단하게, 몸은 더 무겁게!'
단순히 주먹을 부딪치는 부분에서는 정대식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팔용대에 비해선 그의 체급이 형편없는 것이다.
팔용대는 210cm의 거한이었고 온몸은 스테로이드를 때려 부은 것처럼 커다란 근육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제아무리 몸을 단련해 왔다고는 해도, 정대식은 그에 비해선 절반 가까운 크기였다.
엄청난 마력을 주먹에 실어 날려도 그것을 지탱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먹에 딸려 몸이 날아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대식은 그 핸디캡을 강철 신체와 부유 신체로 메우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 더 단단하게, 더 무겁게 그의 몸을 조정함으로써 내뻗는 주먹에 전신의 힘을 싣는 것이다.
그러자 정대식의 발밑에 있는 훈련장 바닥이 쩌적 소리를 내면서 꺼졌다.
그의 발가락이 땅속에 깊숙이 파묻히며 강철처럼 강화된 전신의 관절이 쇠가 맞부딪치는 것 같은 굉음을 울렸다.
정대식은 단순히 주먹을 내지르는 게 아니라, 발끝으로 몸을 지지하고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을 다 써서 하반신을 단단히 고정해 허리를 뒤틀며 등과 어깨를 있는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팔과 주먹은 그 연장선상일 뿐이었다.
온몸을 다 써서 주먹을 내지른 셈이다.
아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려는 것은 팔용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움켜쥔 주먹은 마력으로 둘러싸여 팔과 어깨가 전부 크리스털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가 결정화되어, 여느 신비 금속 못지않은 강도를 자랑할 정도로 단단하게 결집한 것이다.
그 주먹이, 정대식의 주먹과 맞부딪쳤다.
꽈아------------------------앙!
사실상,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