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현질 전사
- 5권 9화
트롤이 출몰하는 이 CC9D는 다 허물어진 성곽과 유적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소였다.
정대식이 수련을 할 동안 부대원들이 미리 사전 답사를 해 두었기에, 그들은 베이스캠프로 삼을 세이브 포인트로 이동했다.
그곳에 지원 팀을 남겨 놓고 대형을 짜서 예정된 길로 향했다.
이 던전은 공략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것에 비해서는 맵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워낙에 길이 복잡해서 보스몹까지 가는 루트가 딱 정해져 있는 탓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므로, 보스몹의 영역까지 가는 길은 오히려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출몰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트롤 한 종인 탓도 있었다.
지하형이나 비행형 몬스터가 한꺼번에 출몰하면 자연히 보스몹까지 가는 루트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트롤은 육상형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구치지는 않았으므로 비교적 맵이 평면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던전은 난이도가 크게 올라갔을 것이다.
그만큼 트롤 한 마리, 한 마리가 처치하기가 힘이 들었다.
트롤은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별것 아닌 싸움에서도 진을 빼거나 마력을 탕진하기 십상이었다.
던전 공략이 목적인 경우에는 보스몹에 도달하기까지 전력을 아껴 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길이 한곳으로 정해져 있는 관계로, 덤벼드는 트롤들을 피해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을 가능케 하려면 정찰이 필수적이었다.
완전히 세이브 포인트를 벗어나기 전에, 정대식은 김시온에게 새로이 획득한 능력을 알렸다.
"엔트로피."
정대식은 김시온과 대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재깍 나타나는 엔트로피를 보고 놀란 대원들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이게 대체 뭐야?"
"인형?"
"호문클루스인가?"
제각기 추측을 내뱉는 가운데 정대식은 간단히 설명했다.
"이번에 제가 새롭게 획득한 능력 중의 일부입니다. 이 녀석과는 기본 3km 내에서 통신이 가능하니 먼저 정찰을 보내도록 하지요."
김시온은 엔트로피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이지?"
"음, 제 마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우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만든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정대식은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조작계 능력을 개화한 덕분이라고 말씀드리지요."
김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조작계라고!"
"예."
다른 대원들도 놀라서 술렁거렸다.
정대식은 천연덕스레 말했다.
"수련을 하는 도중에 네 번째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그걸 통해 엔트로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정대식의 대답에 유태훈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조작계로 저런 게 가능한가? 구현계라면 또 모를까."
그 말에 박무원이 말했다.
"마력을 조작, 변환해 저런 것을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 보아하니 구현계와는 다르게 물리적인 능력은 행사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정대식은 박무원에게 내심 감사를 표시하며 이때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엔트로피는 직접적으로 몬스터를 공격할 수는 없어. 여기서 내 능력이 더 발전을 하면 모를까. 지금은 정찰을 하고 전투를 보조하는 정도의 기능밖엔 없지."
정대식이 하는 말을 듣고 허미래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데!"
기철민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엔트로피라는 걸 조작하는 데 소모되는 마력이 얼마나 되는 거야? 이걸 유지하면서 전투를 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거야?"
정대식은 답했다.
"걱정 마.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애초에 이런 걸 만들어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엔트로피를 불러낸 상태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어."
정대식의 말에 기철민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뇌까렸다.
"넌 괴물이냐? 아직 6등급밖에 안 되는 녀석이 무슨 마력량이 얼마나 되기에......."
헌터들이 드론을 비롯한 이런저런 전자 장비를 지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구현계든 변화계든 조작계든, 보통 그런 것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데 막대한 마력을 소모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최첨단 기기의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
한데 정대식이 거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니 놀랍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김시온은 수런거리는 대원들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정대식, 네 말대로 운용에 문제가 없다면 정찰을 보내도 좋겠지."
"알겠습니다."
정대식은 엔트로피와 링크하고 그를 전방으로 날려 보냈다.
일행은 그 뒤를 뒤따라갔다.
오래지 않아 정대식은 앞쪽에 버티고 있는 트롤 한 마리를 발견했다.
공교롭게도 한 길목에 무려 세 마리나 되는 트롤이 서서 철저히 진로를 막고 있었다.
정대식은 자신이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 상황을 확인하고 김시온에게 설명했다.
김시온은 커맨드 모드를 발동시켜 작전을 지시했고, 그것을 즉각 숙지한 대원들은 신중하게 트롤들이 잠복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트롤이 선 길목은 일종의 교차로였다.
던전 입구에서 꼬불꼬불 이어진 길이 처음으로 나뉘는 자리인 것이다.
자그만 공터를 중심으로 외인부대가 진입하고 있던 길이 나 있었고 공터 뒤쪽으로 세 갈래의 좁은 길이 있었는데, 그 각자의 길목에 트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외는 전부 높은 돌담으로 막혀 있었다.
물론 헌터들의 뛰어난 신체 능력상 그 정도 높이의 담을 뛰어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이 던전의 지형이라 할 수 있는 미로에는 일종의 주술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감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제아무리 맵핑을 철저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런 이유로 정대식도 엔트로피를 그렇게 멀리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대략 300~700m 정도를 앞서 가며 앞에 뭐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외인부대가 진입해야 하는 길은 바로 정면에 나 있는 길이었다.
모든 길을 트롤이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그놈들을 전부 쓰러트릴 필요는 없었다.
중앙의 한 놈만 쓰러트리고 달려서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김시온은 작전을 지시하며 신속할 것을 당부했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고 있으면 다른 트롤 두 마리와 전부 상대해야 한다. 재생력이 뛰어나 단번에 처치하기가 어려운 만큼, 바로 머리를 노려!'
침묵 속에서 작전이 시작됐다
'Go!'
김시온의 신호에 따라 소강두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2단계 변신!"
동시에 허미래의 디버프가 다른 트롤 두 마리를 훼방 놓았다.
"디스터브!"
화아아악!
검은 나비들이 화르륵 솟구쳐 트롤 두 마리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 틈을 타 소강두가 앞으로 달려 나온 중앙의 트롤과 맞부딪쳤다.
꾸웅!
육체와 육체가 부딪치는 데 무슨 포탄이 부딪친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소강두가 중앙의 트롤을 붙잡고 있는 사이, 다른 대원들이 박무원과 유태훈의 엄호를 받아 공터로 달려나갔다.
그들은 소강두와 대치하는 트롤을 빙 돌아 중앙의 길로 진입했다.
김시온과 허미래, 유태훈이 길목을 차지해 섰고, 박무원과 정대식, 기철민, 그리고 최선이 뒤돌아섰다.
"스나이퍼 라이플!"
박무원이 저격 총으로 등을 보이고 선 트롤을 겨냥했다.
하지만 마력탄 한 방으로는 트롤의 머리를 박살 내기 어려웠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정도일까?
대신에 정대식과 기철민이 트롤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최선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샤프닝!"
반짝반짝, 별 가루 같은 마력이 정대식과 기철민 위로 뿌려졌다.
버프가 걸린 상태에서 정대식이 왼쪽으로, 기철민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마치 수십 번, 수백 번 호흡을 맞춰 본 사람처럼 완벽한 타이밍으로 트롤의 양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천래일섬!"
"강력권!"
기철민의 검이 번쩍, 하는 빛을 내뿜으며 트롤의 목을 썩 베어 냈다.
트롤의 목은 아름드리나무만큼이나 굵었지만, 최선의 버프 덕분에 검에 입혀진 마력이 아주 날카롭게 갈린 상태였다.
덕분에 기철민은 한 번에 트롤의 목을 잘라 냈고, 그것이 허공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정대식이 강력권으로 그 커다란 머리통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퍼어억!
트롤의 머리가 박살 나며 사방에 머리 가죽과 뇌수, 눈알, 척수 등등이 비산했다.
트롤의 정면에서 그놈을 붙잡고 있던 소강두는 완전히 트롤 부산물로 목욕을 하게 됐다.
"에퉤퉤!"
욕지기가 난다는 듯, 토악질을 하는 소강두를 손짓하고 정대식과 기철민, 최선이 다시 뒤돌아 뛰었다.
허미래가 가로막고 있던 양쪽의 트롤들이 덤벼들기 전에 빨리 몸을 빼내야 하는 것이다.
"달려!"
외인부대는 그들이 가야 하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한데 달려가는 도중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대식은 링크된 엔트로피에게 물었다.
'전방에 트롤이 있어, 없어?'
500m쯤 전방에서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가고 있던 엔트로피가 즉각 답했다.
'없습니다.'
'없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대식의 감은 달랐다.
주의 확장 스킬로 인해 그는 몬스터의 존재를 직감할 수가 있었고, 그의 직감은 전방에서 트롤이 오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 트롤이 있어!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야!'
정대식은 발을 박차 다른 대원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커맨드 모드로 의식이 이어져 있기에 다른 대원들은 그런 정대식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김시온도 침묵으로 허가를 했고, 정대식은 앞서 달려나가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적권!"
파바바바바밧!
일견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정대식의 주먹이 작렬했다.
1초 만에 다섯 차례나 뻗어 나간 그의 주먹 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퍼어억!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눈앞에 장막이 걷힌 것처럼 네 마리의 트롤이 나타났다.
개중 정면에 있던 트롤 한 마리의 명치가 터져 나갔고 놈이 비틀거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트롤 두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크워어어어엉!"
김시온이 다급한 맘에 고함을 질렀다.
"주술사다! 주술사 먼저 처치해!"
김시온이 커맨드 모드를 통해 순식간에 상세한 작전 지시를 내렸다.
정대식이 중앙의 트롤이 재생하기 전에 놈의 머리를 날리려는 동안, 기철민과 최선, 소강두와 김시온이 양쪽의 트롤을 한 마리씩 상대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허미래가 유태훈의 엄호를 받으며 뒤쪽의 트롤 주술사를 붙잡아 둘 작정이었다.
그동안 박무원이 트롤 주술사를 저격하는 작전이었다.
문제는.......
"포위당했다!"
박무원이 낭패한 듯 뒤를 보고 말했다.
그들이 따돌리고 온 트롤들이 뒤를 쫓아온 것이다.
애초에 그들을 따돌릴 만큼 멀리 가지 못했다.
애초부터 트롤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위해 이 같은 작전을 짠 거였다.
"과연, 똑똑한 놈들인데!"
소강두가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4단계 변신!"
"포 섀클스!"
김시온이 블랙 스캘럽으로 트롤의 사지를 구속하고 소강두가 트롤의 머리를 박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기철민이나 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선이 기철민을 보호하는 동안 그가 트롤의 목을 잘라 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여러 개의 치명상을 트롤에게 입혔으나 트롤은 놀라운 재생력으로 즉시 회복했다. 그러는 사이, 뒤쪽에서 다른 트롤들이 육박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