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현질 전사
- 5권 2화
말을 막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차 한 잔도 마실 수 없는 곳이라니."
"대접이 소홀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최희는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정대식에게 메시지를 한 통 날렸다.
"괜찮으면 여기로 이사 올래?"
"예?"
정대식이 그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웬 주소였다.
최희는 그것을 턱짓하며 엄청난 소리를 했다.
"우리 집이야. 남는 방은 충분하니까 오늘이라도 당장 들어와."
정대식은 머리가 띵했다.
말만 한 다 큰 처자들이 낯선 남자에게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고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최희가 보통 여자가 아니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이 갖는 감각이 좀 떨어지는 건지도 몰랐다.
정대식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보이는 최선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도 언니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자코 고개를 수그린 채 앉아 있어 정대식은 애꿎은 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 왜?"
"왜라뇨...... 제가 두 분께 집을 빌리거나 함께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대식의 항변에 최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없어? 내가 말했잖아? 은혜를 갚겠다고."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
"은인이 이런 썰렁한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가만있을 순 없잖아?"
정대식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말했다.
"은혜고 뭐고...... 그런 것도 좋지만 세간의 눈이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두 분 다 미혼이고 저도 그런데, 우리가 함께 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특히 최희 씨는 대중에게 관심을 받는 몸이니 그런 스캔들은 지양할 필요가......."
"그럼 사귀지, 뭐."
정대식은 또다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누가 있는 힘껏 뒤통수를 때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 정대식을 보고 최희가 생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잖아. 사귀는 사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겠어? 아, 차라리 결혼해 버릴까?"
"최희 씨!"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치고 나서야 아차 하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죽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전 최희 씨의 팬들에게 뭇매를 맞고 싶진 않은데요?"
"에이, 그런 게 무서워?"
"아무튼,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지금은 누구랑 결혼할 마음도...... 사귈 마음도 없으니까요."
"흐응."
최희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이번엔 최선을 턱짓했다.
"내가 그러면 내 동생은 어때?"
"예에?"
"뭐야, 내 동생이 싫다는 거야, 지금?"
별안간 최희가 네 주제에 감히 내 동생을 거절하는 것이냐는 듯 흉흉한 눈을 해서 정대식은 말을 버벅거렸다.
대놓고 거절을 하려니 최선이 워낙 소심해 보여서 혹 상처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 전에 최선이 먼저 마다해 주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그녀를 바라보는데, 고개를 푹 수그린 최선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언니도 참...... 나 같은 게 어떻게...... 저, 정대식 씨하고 사귄다는 말이야?"
"어어? 네 어디가 어때서! 네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데! 세상 어느 남자가 너를 싫어한다는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최선은 최희에 비해서 한참이나 달렸다.
최희는 누가 봐도 팔등신의 쭉쭉빵빵에 일러스트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신비로운 용모를 가졌다.
그녀가 부동의 인기 랭킹 1위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 최선은 최희와는 자매라고 생각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최희와 닮은 데는 눈곱만큼도 없을뿐더러, 결정적으로 지나치게 소심해 보였다.
긴 머리와 뿔테 안경으로 얼굴을 죄 가리고 말 한마디를 해도 소극적으로 하니 매력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언니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그만해...... 정대식 씨도 있고 한데...... 사실이 아니잖아......."
"사실이 아니긴 뭘! 저 녀석이 뭘 몰라서 그렇지, 일단 널 제대로 알고 나면 그 매력에 푹 빠져서......."
"그만해!"
최선은 귀까지 새빨개져 별안간 소리를 버럭 쳤다.
그 바람에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애먼 꼴이 된 정대식은 안절부절못했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지 왜 하필 제집에서?
최선은 울기라도 할 것처럼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대식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최희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둘러 "오늘은 이만 가 볼게" 하고는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정대식은 황당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도대체 뭐야?"
* * *
정대식이 아침에 있었던 사건의 진위를 깨닫게 된 것은 기철민 덕분이었다.
"그거네, 그거."
"그게 뭔데?"
의아해하는 정대식을 보고 기철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널 곁에 두고 관찰해 보겠다는 거지."
"날? 대체 왜? 내가 무슨 희귀 동물도 아니고."
"희귀 동물은 아니지만 희귀 각성자인 건 맞지. 올인원의 가능성이 있는 트리플리스트니까."
"아!"
그제야 정대식은 입대식 날에 최희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에 정대식을 못마땅해 하고 있던 최희는 정대식이 올인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쉬이 수긍하지 못했다.
그 이면에는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엿보였었다.
그러니 어쩌면 정대식과 가까이 지내며 그 방법을 찾아보려는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랬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대식을 보고 기철민이 얄미운 소리를 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최희 같은 여자가 왜 너랑 같이 살려고 하겠냐?"
'내가 어디가 어때서......?'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기철민의 말이 옳았다.
구애하는 남자들이 동구 밖까지 줄을 이을 텐데 제아무리 여동생의 일로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단지 그것 때문에 정대식과 같이 평범한(?) 남자에게 같이 살자고 말을 하겠는가.
정대식은 아무런 반박을 못하고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러는 것을 보고 기철민이 비웃으며 말했다.
"안 그럼, 최희가 너한테 딴 맘이라도 먹었으려고? 아서라."
"시끄러."
"아님 모르는 척하고 그 집에 들어가 살지 그랬어?"
"아, 그건 사양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일 있냐?"
최희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녀의 사인 한 장이 10억에 팔리는 것만 봐도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그만한 인기를 구가하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녀 역시도 위험한 스토커와 과격한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인터넷에 최희에 대한 악플 한 줄만 달아도 신상이 죄다 까발려져 손가락질당할 지경인 것이다.
"그건 그래. 최희가 아무리 미인이라지만 목숨은 소중히 여겨야지."
기철민은 그렇게 말을 하며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아, 다 왔다. 저기야."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용산의 한 거리였다.
오래전에는 전자 상가였다고 하는데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일대가 다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재는 대장간을 비롯한 여러 공방들이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대장장이 총연합회도 이 근방에 자리해 있어 서울 최대 규모의 아이템 제작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하겠다.
정대식과 기철민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일전에 최희와 최선 자매에게 받은 인챈트 스크롤 때문이었다.
그것을 무구에 입히려면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필요한 관계로, 기철민이 아는 대장간이 있다고 해서 찾아온 참이었다.
"김 씨!"
기철민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며 크게 소리쳐 부르자, 안에서 웬 덩치가 하나 나타났다.
네모난 얼굴에 가느다란 눈이 꼭 고렘 같은 인상이었다.
"여어, 기철민이. 오랜만이다."
"어어, 내가 좀 오랜만에 왔지?"
잘 아는 사이인지 두 사람은 말을 편하게 했다.
기철민은 곧 정대식을 그에게 소개시켰다.
"여긴 정대식. 소개는 생략해도 되겠지?"
"암, 요즘 화제의 인물이잖아?"
김 씨라 불린 남자는 씩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박영입니다. 편하게 김 씨라고 부르세요."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대식입니다."
기철민은 곧 그를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내가 귀한 걸 좀 얻었는데. 이걸 내 장검에 입힐 순 없을까 싶어서."
"어디 보자."
기철민에게서 스크롤을 받아 든 남자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이거 자가 수복 아냐?"
"엉."
"도대체 어디서 얻었어?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닌데. 게다가 이렇게 스크롤 형태로 연마되어 있는 거면, 가격이 엄청나겠는데?"
"착하게 살다 보니 복 받은 거지."
기철민이 하는 소리에 김 씨는 말도 안 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 스크롤을 도로 돌려주면서 말했다.
"안타깝지만 이건 우리 대장간에서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이 아냐."
"진짜야? 왜 약한 모습 보이고 그래? 인챈트 실패할까 봐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보통 가격이 아닌데 망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그럼 어디로 가란 말이야?"
"최소한 장인급은 되어야 해."
"어휴...... 장인을 고용할 돈은 없는데. 게다가 장인한테 물건 맡기려면 최소한 몇 달씩 걸리고 그러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
김 씨는 곧 충고했다.
"이걸 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쪽에다 물어봐. 이만한 스크롤을 줄 정도면 그만한 장인도 알고 있겠지. 다리 좀 놔달라고 해."
"그럴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싸구려 철검에다가 이만한 걸 입히긴 좀 아깝다. 돈 벌었으면 수준에 맞춰서 무기를 바꿔."
"그렇잖아도 바꿀 때가 되기는 했는데......."
주저하는 기철민을 보고 김 씨가 씩 웃었다.
"나한테 괜찮은 물건 있는데. 누가 주문 제작해 놓고 안 찾아간 거야."
"너 그거 팔아먹으려고 꺼낸 말이지?"
"너에게 딱이라서 그래."
기철민은 투덜거렸으나 무기는 보여 달라고 말했다.
김 씨가 내놓은 것은 컴포즈 메탈로 만든 장검이었다.
"은철에다 골든 티타늄에 소량이나마 미스릴과 용의 피가 들어간 거야. 폼멜에는 정화석을 박아 넣어서 언데드 종류에는 효과가 직빵이라고. 저주 내성도 있어. 공들여 만들어서 균형감도 좋고, 무게도 가벼워. 어디 한 번 들어봐."
"흠, 가격이 중요하지. 얼마야?"
김 씨는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쳐 보였다.
기철민은 기겁을 했다.
"50억이라고?"
"이만한 물건에 그 정도면 싼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비싸잖아!"
"그럼 47억에 어때?"
기철민은 몹시 갈등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갖고는 싶어도 가격이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정대식은 옆에서 적당히 그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45억에 검집과 벨트까지 포함하면 되겠네."
참견하는 정대식을 보고 김 씨는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47억도 이미 크게 깎아 준 거예요. 거기에 칼집과 벨트까지 내놓으라니. 말이 안 되죠."
정대식은 콕 집어 지적했다.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다른 사람이 주문 제작했던 물건이라고. 그럼 어차피 그 사람에게 재료비랑 선금이랑 다 받아 놓았을 거 아닙니까? 아마 잔금을 치르지 못했거나 무슨 사정이 생겨 검을 못 찾아간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잔금 가격만 받고 팔아도 손해는 아니잖아요?
아니지, 인건비 쳤을 테니까 이익이죠. 그리 따지자면 45억도 비싼 거 아닙니까? 한 40억만 받아도 되겠구먼. 이만한 물건을 가져갈 만한 사람도 흔치 않을 텐데. 장검을 쓰는 헌터는 한정적이라고요. 기철민이 안 사가면 당신은 무조건 손햅니다."
거침없이 가격을 깎아 대는 정대식의 말에 김 씨는 기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