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현질 전사
- 5권 1화
Chapter 25. 최씨 자매
띠리링~ 띠리링~.
어디선가 울리는 벨 소리에 정대식은 게슴츠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보니 아직 오전 11시였다.
물론 잠을 자고 있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으나 어젯밤 새벽녘에나 귀가한 탓에 몹시 피곤했다.
던전에서 귀환한 직후,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에 휩쓸렸을 뿐만 아니라 최희를 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으며,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기자들이 던전 앞에서 철수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안으로 되돌아갔다.
실종자들을 찾느라고 보스몹을 처치하고 나온 마정석만 확보해 놓고 다른 건 하나도 못 건졌던 것이다.
키클로페스를 죽이기 전에 꽤 많은 몬스터들을 처치했던 관계로, 정대식은 그걸 가지러 다시금 던전에 들어갔다.
물론 키클로페스와 같은 초대형종, 초거대종이라 불릴 만한 몬스터가 한바탕 난리를 부린 직후라서 몬스터 사체 따위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정대식은 손수 사냥에 나섰다.
이미 던전이 공략된 상태였으므로 몬스터는 활동성이 낮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정대식에게는 주의 확장 스킬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몬스터를 추척해 사냥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또다시 아공간을 꽉꽉 채워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변장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즉시 나타난 변장수는 알고 보니 대단한 인물이었지 않느냐, 며 아부 아닌 아부를 떨었다.
TV에 나온 정대식을 본 것이다.
정대식은 그와 같은 불법 매입자에게 신원이 노출된 것이 마뜩찮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변장수가 그걸로 정대식을 협박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는 정대식이 가져온 몬스터의 부산물에 마땅한 가격을 쳐주었다.
그 가격은 무려 60억!
지난번에 실종자를 찾느라고 날려 먹은 금액을 한 방에 만회하고도 남았다.
다시금 잔고가 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여유로워져, 정대식은 다음 날 있을 기자 회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희가 무분별한 추측성 기사가 남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자 회견을 약속했고, 지난번의 실종 사건이 나동일로 인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기에 한 번쯤은 언론과 인터뷰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던전에서 번외 사냥을 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정대식은 곧장 타이탄 공격대로 갔다.
그곳에서 강영후가 불러들인 이미지 메이커를 만났다.
김혜민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녀는 헌터는 아니었으나 이능을 갖추고 있는 각성자였다.
한때는 헌터로 활동하기도 했다는데, 전투와는 체질이 맞지 않아 지금은 자신의 이능을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쪽으로 개발해 쓰고 있었다.
정대식은 그녀의 지시대로 머리와 옷을 갖추고 메이크업 아닌 메이크업을 받았다.
김혜민은 자신의 능력을 메이크업이라고 불렀으나 그건 분명 화장이나 분장과는 다른 효과를 발휘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호감과 선의를 느낄 수 있도록 암시를 걸어 놓은 것이다.
정대식은 모르고 있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김혜민의 이미지 메이킹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격대의 공대장이나 여러 유명 헌터들이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즐겨 찾는다고 했다.
어쩐지 사기라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대식도 그녀의 이능에 혜택을 보았다.
스스로 거울을 보니까 지지리 궁상 수전노 정대식은 어딜 가고 매우 멀끔한 청년 한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올림픽 스타를 보는 것처럼 뭔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용감하고 올곧아 보였다.
비록 효과는 단 한 시간뿐이었으나 기자 회견은 그보다 더 짧았으므로 충분했다.
함께 기자 회견장에 나가기로 한 강영후도 같은 처치를 받았다.
강영후는 정대식의 넥타이를 고쳐 매 주며 몇 마디 기자 회견할 때의 요령을 일러 주었다.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솔직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못했다.
막상 언론 앞에 나서서 던전을 막 나왔을 때와 같은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기자 회견장으로 걸어나갔다.
대부분의 말은 강영후가 다 했고 정대식은 주로 질문을 받을 때만 대답을 했다.
혹여 말실수를 할까 봐 대답은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요점만을 간단히 짧게 말했다.
그게 시건방져 보이지는 않았나, 기자 회견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강영후가 잘했다고 격려하는 것을 보아하니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기자 회견이 끝나고 강영후 주최로 기자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대접했다.
그동안 실종자 수색에 참가했던 대원들에게도 조촐한 연회가 있었다.
당연히 주인공은 사전 답사를 갔던 정대식과 기철민, 김또시온, 허미래, 소강두, 이 다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3억이라는 금일봉을 받았고, 나동일과 최선, 최희 자매가 개인적으로 보낸 선물도 받았다.
나동일은 지난번의 일로 자신의 인기 랭킹 순위가 2위로 올라섰다며 감사하다는 영상 편지와 함께 최근 값어치가 폭등하고 있다는 별수정으로 만들어진 피규어를 보내왔다.
약 30cm 정도 크기의 그 피규어는 답사 팀 다섯 사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본떠 만든 것이었다.
다소 희한한 선물이기는 했으나 나름 의미도, 가치도 있는 선물이었다.
최희와 최선 자매가 보낸 것은 보다 실용적인 물건이었다.
그들은 무구의 성능을 강화할 수 있는 인챈트 스크롤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자가 수복 기능이 깃들어 있어, 일단 인챈트를 하고 나면 마력을 흘려 넣는 것만으로도 파손된 무구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가 있었다.
물론 인챈트를 실패 없이 하려면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가야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가 수복 기능의 인챈트 스크롤은 그냥 갖다 팔기만 해도 몇십억은 쳐 받을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기대치 않았던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 정대식은 연회가 끝나고 나서도 부대원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했다.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았던 소강두가 모든 술값을 자기가 내겠다고 장담했으므로 부담 없이 밤을 즐겼다.
그 바람에 새벽에나 귀가하여 해가 뜰 때쯤에나 침대에 고꾸라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전 11시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야?"
정대식은 낯선 알람 소리에 한참을 헤매었다.
거실로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인터폰이 홀로 울어 대고 있어 정대식은 연결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 거기...... 정대식 씨 집이죠?
"그런데요?"
-여긴 경비실입니다만, 그게, 바, 방문자가 와 있어서.......
"방문자라고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싶어서 정대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외판원이나 종교인 같은 시답잖은 인물이면 이미 쫓아 보냈을 것이다.
굳이 연결해 준 것을 보면.......
'혹시 기자인 건가?'
어떻게 자기가 사는 곳을 알았을까 싶어서 정대식은 좀 불쾌해졌다.
그는 상대가 기자일 거라 단정하고 곧장 거절의 말을 입에 올렸다.
"만날 사람 없습니다. 방문자는 다 거절할 테니까 돌려보내 주세요."
그 말에 경비원이 기겁을 했다.
-자, 잠깐만요!
"왜 그러시죠?"
-최희...... 최희 씨가 와 계시는데요?
"최희 씨라고요?"
정대식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기분이 멍해졌다.
최희?
벌써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는 말인가?
퇴원하면 퇴원한 것이지, 왜 제집까지 찾아온 것일까?
정대식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왜 경비원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지 깨달았다.
최희만 한 인물이 와 있으면 그리 쉽게 돌려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대식은 경비원의 난처함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겠습니다. 들여보내 주세요."
정대식은 인터폰을 끊고 후닥닥 옷을 껴입었다.
얼굴에 눈곱이 주렁주렁했으나 미처 세수를 할 시간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집 앞 도로에 빨간 오픈형 미니카 하나가 달려와 섰던 것이다.
두 개뿐인 좌석에는 최희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최선이었다.
'최선까지? 자매가 다 무슨 볼일이지?'
정대식은 황급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자 바깥의 햇살이 눈이 부셨다.
"어서 오세요."
정대식이 썩 달갑지는 않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하자 최희가 얼굴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들며 생긋 웃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하네. 미리 연락하고 싶었는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아...... 전화하셨습니까?"
어젯밤 술을 퍼마시느라고 휴대폰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최근 기자다 누구다 성가신 연락이 많이 와서 부재중 전화가 있어도 제대로 확인 안 했다.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고 있기라도 한 듯, 최희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뒷전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던 최선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물어보니까 글쎄, 이 애가 아직도 당신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예의가 아니다 싶어, 부랴부랴 달려왔지."
"어, 음...... 전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선아, 인사해야지."
최선은 주저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고, 고맙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대식은 멋쩍어 뒤통수를 득득 긁었다.
"아닙니다. 같은 공격대의 동료잖아요? 함께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최선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허리까지 드리우는 치렁치렁한 머리와 묵직해 보이는 뿔테 안경이 그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죽다가 살아나도 음침한 면은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정대식은 한쪽으로 비켜섰다.
"현관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정대식은 자매를 거실 소파에 앉혀 놓고 주방으로 갔다.
뭐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할 텐데 찬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긴 냉장고도 마찬가지라 물밖에는 내갈 게 없었다.
정대식은 정수기의 물을 받아 두 여자에게 내밀고 맞은편에 앉아서 말했다.
"그나저나 벌써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되는 겁니까? 부상이 위중하다고 들었는데."
정대식의 묻는 말에 최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힐러에게 처치받았으면 됐지, 뭐. 아직 포션을 먹기는 해야 하는데 그냥 돌아다니는 건 상관없어. 이능만 안 쓰면 괜찮아."
"그런가요."
안부 한마디 묻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거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정대식은 날씨 이야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입을 다문 채로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최희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혼자 살고 있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살림살이가 별로 없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별로 집에 있는 편도 아니고."
정대식은 어느새 최희가 지극히 자연스레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덩달아 반말을 할까 싶기도 했으나 괜한 오기를 부리고 싶지 않아 관두기로 했다.
실제로 최희가 그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고, 아무래도 세계 최강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