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현질 전사
-4권 25화
* * *
최희는 최선과 나동일이 실려 간 바로 그 병원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특별 병동으로 옮겨져 다행히도 곧장 힐러의 치료를 받았다.
그동안 정대식은 복도에서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강영후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정대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최희의 마력이 온전히 차단되었다고 알려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라면 최희가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 경위를 소상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영후는 침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자신의 마력이 여동생의 수색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해를 했다고요?"
"그렇네."
"그럼 여동생을 찾고 나서 직후에 처치를 했을 게 아닙니까? 포션이든 뭐든......."
"알다시피 일반적인 포션으로는 부상을 낫게 하는 데 한계가 있어. 그게 최희만 한 헌터가 스스로 입힌 상처라면 더 그렇겠지. 생각을 해 봐. 그녀는 우리나라 최고의 헌터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 몸에 피 한 방울 흘리게 할 수 없어. 그런데 마력이 탐지되지도 않을 만큼 생명에 손상을 입히려면 그 부상이 얼마만 했겠는가?"
설마설마했는데, 최희는 본인의 목숨을 내 버릴 각오를 하고 여동생을 구했던 모양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강영후의 말이 옳았다.
정대식 또한 강철 신체를 갖고 있었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멍 하나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자신을 해쳐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무리일 것이다.
아예 자살을 한다 생각하고 혹독한 수를 써야만 할 것이다.
"최희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세계 최강이라, 무적이라 불리지만, 그만큼 일단 그 벽이 뚫리고 나면 상처를 회복하기가 어려워져. 그녀에게는 치유 능력이 없다. 그런데 여동생을 구조할 때까지는 치료도 안 받겠다고 버티고 있는 바람에 저 지경이 된 거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실컷 여동생을 구해 놓고 어디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싶어서 하는 말에 강영후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기다려 봐야지. 이곳은 한국 최고의 힐러들이 모여 있는 헌터 전문 병원이야. 각성자를 고치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지. 좋은 소식이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대식과 강영후는 잠시간을 기다렸고, 그동안 외인부대원이 그들을 찾아왔다.
김시온과 허미래, 소강두를 비롯해 미처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던 유태훈과 박무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불어 함께 구조 작업을 벌였던 기철민과 외눈박이부대장 팔용대가 함께 왔다.
그들은 강영후에게 인사를 하고 정대식과도 안부를 나누었다.
"키클로페스를 처치하고 의식이 없던 저를 여러분이 구해 줬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대식의 정중한 인사에 소강두가 멋쩍은 듯 손사래를 쳤다.
"동료인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최희 씨가 다친 상태라고?"
김시온의 묻는 말에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부상이 심각한 상태인 걸 제가 발견해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말꼬리를 흐리는 김시온을 보고 강영후가 물었다.
"지금 바깥 상황은 어떻지?"
김시온이 답했다.
"일단 최희 씨에 대한 것은 아직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회복한다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녀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다. 항상 건재한 모습인 게 좋아. 구조된 최선 대원은? 상태가 좀 어떤가?"
"다친 게 아니라서 금방 기력을 회복하고 지금은 입원실에서 쉬는 중입니다."
"당연히 언니에 대한 부분은 숨겼겠지?"
"예,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동일 씨도 마찬가지고요."
"그 친구는 지금 어떡하고 있나? 아직도 그 방송을 하고 있어?"
"병원 내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이능을 사용할 수 없어 현재는 잠자코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자 회견은 언제 열리느냐고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최희 씨나 나동일 씨도 함께 나오는 것인지도 묻고 있고요."
김시온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나동일이 일을 크게 벌려 놓은 덕분에 한동안은 뒷수습을 하느라 주변이 소란스러울 것 같았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김시온의 보고를 듣고 있던 강영후는 곧 정대식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까 던전 앞에서 겪어 보았듯이, 지금 세간의 관심이 정대식 자네에게 쏠려 있는 상태야. 더불어 우리 타이탄 공격대도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지."
"예, 그런 것 같더군요."
"여태까진 최희가 우리 공격대의 투자자이고, 최희 씨의 여동생이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 일로 그녀와의 관계가 드러나 버렸으니 공격대 분위기가 예전 같지는 않을 거야."
"예전 같지 않다면......."
"나쁜 쪽으로도, 좋은 쪽으로도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나쁜 쪽으로는 활동의 방향이 제한될 거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말은 그만큼 공격대의 내부 사정이 노출되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는 최희와의 관계를 드러내 놓지 않고 있었지. 하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야. 좋은 쪽으로는...... 그만큼 우리 타이탄 공격대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기회."
"그래. 이번 일로 타이탄 공격대의 명성이 높아졌다. 거기에 정대식 자네가 큰 보탬이 되겠지. 올인원의 가능성이 있는 트리플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는 공격대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앞으로 더 많은 의뢰와 투자가 물밀 듯 할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
"제 역할이요?"
"최희는 엄밀히 말해 투자자일 뿐, 우리 공격대 소속은 아니야. 그녀가 타이탄 공격대를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하지만 자네는 달라. 대중은 타이탄 공격대를 정대식, 자네라고 인식할 거야."
"제가 공격대의 얼굴이 된다는 말입니까?"
"이미 그래."
정대식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타이탄 공격대에 그리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계약 기간은 1년으로 짧았고, 연장을 한다 하더라도 공격대를 창설하는 즉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이번 사건으로 유명해져, 타이탄 공격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고 하니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타이탄 공격대에 들어온 것은......."
"알아,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겠지. 우리도 자네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최소한 타이탄 공격대에 있는 동안에는 자네가 우리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만한 책임감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네."
"책임감이라 하심은......?"
"거창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냐. 그냥......."
강영후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한 힘엔 그만한 책임이 뒤따른다, 는 흔해 빠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군."
정대식은 약간 기가 막힌 기분이 되었다.
"저어, 저는 한물간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평범한 헌터입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건 최희 씨 같은 슈퍼스타한테나 어울리는 거죠."
정대식은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갑부가 되어 호화찬란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즐기다 가고 싶었다.
영웅이랍시고 높은 도덕적 수준과 막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기는 싫었다.
치졸하고 이기적이라고 욕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쳇, 애당초 날 선택한 신이 누군지를 보라고. 재물과 탐욕의 신이라고! 정의니 뭐니 하는 것과는 억만 광년쯤 떨어져 있지.'
정대식은 자신이 지나치게 속물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 마지못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타이탄 공격대에 있을 동안 물의를 일으킬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 말하는 정대식을 보고 강영후는 말했다.
"내 충고는 타이탄 공격대를 나간다 하더라도 유효해. 사람들은 타이탄 공격대의 정대식을 보는 게 아니라, 정대식의 타이탄 공격대를 보는 거니까. 타이탄 공격대를 나간다 하더라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야."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중이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건다 해서 반드시 거기에 보답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기대하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세상천지에 가장 변덕스러운 게 군중이라는 존재지. 아마 병신 짓 한 번 하고 나면 나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을 걸?'
어찌 되었든 자신으로 인해 타이탄 공격대가 성장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재계약을 할 시에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공격대 창설 시 투자금도 넉넉히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치료실의 문이 열리고 힐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피로한 기색을 하고 밖으로 나와 보호자를 찾았다.
일단 강영후가 앞으로 나섰고 정대식이 그 옆에서 경과를 들었다.
"일단 고비는 넘겼어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내장이 몽땅 뒤틀린데다가 마력도 역행하고 있어 바로잡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겁니다. 효과 좋은 포션을 며칠 간 지속적으로 투여해 주면 깨끗이 나을 거예요."
"그거 다행이로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마력 사용을 자제하고 회복에만 전념해야 할 겁니다. 만약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이능을 쓰면 마력의 흐름이 완전히 헝클어져 큰일이 날 수도 있어요.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 힐러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강영후가 반드시 단속하겠다 몇 번을 약속했고, 잠시 후 최희가 입원실로 옮겨 가기 위해 실려 나왔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입원실로 실려 가던 최희는 도중에 정대식과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대식이 엉겁결에 그 손을 마주 잡기 무섭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정대식이 귀를 기울이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동생을 살려 줘서...... 고마워.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정대식이 느끼기에 최선을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희였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지 않았더라면 특정 마력 스킬 탐지도 효과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정대식이 머쓱해하며 하는 말에 최희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듣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소리를 했다.
"정대식, 너는 내 여동생뿐만 아니라 나까지 살려 준 거야...... 그 애가 죽었으면 나는 틀림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앞으로 우리 자매의 목숨은 네 것이나 마찬가지야. 정대식, 이 은혜를 평생 갚으면서 살겠어."
"아뇨, 뭐 그렇게까지나......."
정대식은 깜짝 놀라 만류하는 말을 했지만 최희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를 입원실로 보내고 정대식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세계 최강자의 은혜 갚기라...... 그거 참, 부담스럽네.'
왠지 모르게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멋들어지게 들어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