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현질 전사
-4권 21화
정대식의 반문이 본인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최희는 불쾌한 듯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내가 SS급 헌터인 것은 맞지만, 내 능력은 그렇게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지 않아요. 키클로페스를 처치하라면 몇 마리든 할 수 있지만, 누굴 찾으라고 하면 못한다는 말이에요. 실종자들이 키클로페스의 위장 속에 들어 있는 이상, 함부로 키클로페스의 몸뚱이를 폭파하거나 해체할 수도 없으니 지금 상태에서 내 능력은 무의미해요."
"어...... 음. 그렇군요. 그래도 타이탄 공격대 내에 수색 능력이 뛰어난 대원이 있지 않나요?"
"있기는 한데 그 대원은 현재 해외 출장 중이에요. 여기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걸려요.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급히 수소문하고는 있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요. 자칫 잘못하다간......."
최희는 몹시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정대식은 상황이 여전히 위급하다는 사실을 알고 물었다.
"그들이 무사하기는 한 건가요?"
"당신이 키클로페스를 처치한 덕분에 소화 활동이 멈추었어요. 그들이 갇혀 있는 위 속에 차오르던 위산의 수위가 제자리예요. 하지만 밀폐된 공간이라 산소가 부족한 상태예요. 당장 몇 시간을 더 버틸지 몰라요. 다른 대원들이 닥치는 대로 지하를 쑤시고 돌아다니며 수색을 하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가망이 없어요."
그때서야 정대식은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서 최희가 자신의 옆에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자 최희가 정대식의 손을 덥석 붙잡고 간곡히 말했다.
"그들을...... 내 동생을 구해 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당신뿐이에요!"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동생이라고? 그러고 보니 최희, 최선...... 이름이 비슷하잖아!'
최선의 분위기가 하도 어두워서 최희와 자매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갸름한 턱이며 조그만 입이며 몸매 같은 게 엇비슷했다.
'그래! 여동생이 이 공격대에 있어서 투자자로 관계하고 있었던 거야.'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최희가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눈물을 보였다.
"그 애는 단 하나 남은 내 가족이에요. 여태까지 힘든 일만 겪어 왔다고요. 여기서 그 애가 이런 식으로 죽어 버린다면 난...... 난......."
정대식은 적잖이 당황했다.
최희가 누구인가?
세계 최고의 강자.
유일무이한 SS클라스의 헌터.
천둥 번개를 몰고 다니는 폭풍의 여신이 아니던가!
늘 오만하리만치 당당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다니던 여인이, 이렇게 눈물을 보이자 가슴이 아파 왔다.
그녀가 줄곧 정대식을 냉대해 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정대식은 다른 손을 내밀어 최희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동생은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누구 동생인데요. 무려 최희의 동생이잖아요?"
정대식이 짐짓 가벼운 어조로 하는 말에 최희는 눈물 맺힌 얼굴로 살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이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겠죠? 잘 버티고 있는 거겠죠?"
"물론이죠."
"그렇다면 그 애를 찾아 주는 건가요?"
정대식은 간청하는 최희를 보고 머뭇거렸다.
맘 같아선 얼마든지 그러겠노라고 하고 싶었지만, 현재 그가 보유한 능력으로는 최선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망설이는 그를 보고 최희는 손아귀에 힘을 꽉 줬다.
아프도록 단단히 정대식의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마. 너만이 내 동생을 구할 수 있어. 올인원의 가능성을 지닌 유일무이한 헌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가는 너라면 어떻게든 내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최희는 돌변해 대답을 강요했다.
최희는 사뭇 성격이 변덕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예의도 못 차릴 만큼 절박한 건지도 몰랐다.
정대식은 입술을 어물거렸다.
솔직히 말해 지금 가지고 있는 자금 17억 7천만 원 정도로는 현질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스킬이나 상점을 한 번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고 있는 최희를 보자 못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대식은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가능한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최희가 벌떡 일어나 이번엔 두 손으로 정대식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노력하는 정도로는 안 돼!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애를 구해 내!"
그렇게 말하는 최희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못해냈다가는 애먼 원망을 들을 판국이다.
SS급 헌터의 원망을 사다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적잖이 부담스러운 기분 속에서 정대식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 안 되면, 돈 좀 빌리지, 뭐. 동생 구하는 데 쓰겠다는데 설마 안 빌려주기야 하겠어?'
* * *
정대식은 최희를 내보내고 한동안 궁리를 했다.
정 안 되면 최희에게 돈을 빌려 현질로 어떻게든 해 보자고 생각했지만, 그리하면 현질 능력에 대해 감추기가 힘들어진다.
돈을 빌려주는 것과 최선의 구조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존재를 비밀로 해야 하는 이상, 현질의 능력에 대해서도 비밀로 해야 했다.
가뜩이나 올인원의 가능성으로 인해 그녀의 주목을 끌고 있는 터.
어설프게 설명했다가는 모든 것을 의심받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멋대가리가 없지 않은가!
정대식이 여태껏 없이 살아왔다지만, 그래도 남한테는 아쉬운 소리 한 번 않고 살았다.
쌀을 살 돈이 없어 한 달 내내 밀가루에다가 고추장을 넣어 장떡만 부쳐 먹는 한이 있었어도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았다.
그것이 밑바닥 인생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으며, 힘든 상황에서도 그를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무엇보다 최희에게 돈을 빌린다라.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랬다.
그 금액이 한두 푼도 아니라서 더 그랬다.
적어도 몇십억 가까이가 될 텐데.
그만한 돈을 어떻게 빌린다는 말인가?
'가능한 내가 가진 금액 내에서 방법을 찾는다. 잘 궁리하면 틀림없이 무슨 수가 있을 거야.'
정대식은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엔트로피를 불렀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그, 저번에 내가 물었던 실종된 사람을 찾는 방법 말인데."
<특정 마력 탐지 스킬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반드시 먼저 그 마력의 특징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긴장 속에서 물었다.
"그럼, 유사한 마력을 찾는 건 가능해?"
정대식이 착안한 부분은 최희와 최선이 자매 사이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혈육이라면 타고난 마력의 특성 또한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획득한 뒤 최희의 마력을 기억하고, 그것과 최대한 비슷한 마력을 찾는 것이다.
그럼 최선을 찾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대식의 질문에 엔트로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엔트로피 역시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 정대식이 재촉을 할 때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은 레벨을 올릴수록 더 광범위한 영역을 보다 또렷하게 탐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획득한 뒤, 레벨을 올린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니? 너도 확실히 모른다는 말이야?"
<특정 마력 탐지 스킬 같은 경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수가 많습니다. 그것도 유사한 마력을 탐지할 경우에는 온전한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기랄, 뭐가 그래?"
정대식은 입술을 질근거리며 고민했다.
현재 그가 가진 금액으로는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획득한 뒤, 한 단계만을 업그레이드할 수가 있었다.
그럼 기껏해야 Lv2라는 말이니 소용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끄응......."
아니면 상점 업그레이드를 해서 보다 뛰어난 탐지 스킬을 획득하는 방법이 있는데, 상점을 겨우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고 그런 스킬이 존재하는지가 문제였다.
이 부분은 엔트로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만약 상점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그런 스킬이 없다면, 헛돈을 쓰는 셈이 된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쪽에 걸어 봐야겠지?'
일단은 첫 번째 방법이라도 시도를 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정대식은 말했다.
"엔트로피,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구입하겠어."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구입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그리고 그걸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줘."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을 Lv2로 업그레이드하고 10억을 차감합니다.>
정대식은 잔액을 확인하고 신음을 뱉었다.
"커억."
남은 돈은 7억 6천만 원.
정대식의 기분으로는 파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 좀 찾자고 이 많은 돈을 쓰다니.......'
특정 마력 탐지 스킬은 여태껏 획득한 다른 스킬과는 달리 전투 상황에서는 쓸 일이 없다.
즉,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젠장...... 아냐, 어쩌면 이 스킬로 실종자를 찾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부수입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일단 획득해 두면 어디든 쓸 데가 있지 않겠어?'
정대식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엔트로피를 돌려보내고 밖으로 나갔다.
급히 마련된 베이스캠프는 몹시 어수선했다.
베이스캠프를 치다가 만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한자리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뭐지?'
정대식은 그쪽으로 다가가 목을 길게 뺐다.
그러자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그들이 보고 있는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최선과 나동일!'
어두컴컴한 화면에는 땀으로 얼룩진 나동일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낙담과 피로, 그리고 두려움이 얼룩진 표정을 하고 말했다.
-벌써 이곳에 들어온 지 한나절 가까이가 흘렀습니다. 더 이상 위액은 스며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최선 씨와 저.......
그렇게 말을 하며 나동일은 카메라를 잠시 옆으로 돌렸다.
그곳엔 최선이 마찬가지로 땀에 얼룩진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 쪽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으나 금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들은 위벽 위쪽의 우묵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플래시 불빛으로 거대한 가죽 주머니 같아 보이는 울퉁불퉁한 위장이 보였고, 그 바닥에 위산이 가득 고여 있는 게 얼핏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은 여기서 나가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위장 벽이 워낙 튼튼해 조금의 구멍도 뚫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위장을 찢고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이 괴물의 몸속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자칫 잘못하다간 이놈의 피에 익사하는 게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일단은 타이탄 공격대가 구조를 시작했다고 하니,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정대식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동일이 자신의 상황을 생중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상황 역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즉, 온라인에 온전히 접속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한데 철저히 고립되어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산소가 부족한 모양입니다. 얼마나 더...... 이렇게 여러분을 뵐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타이탄 공격대가 빨리 저희를 찾아내면 좋으련만. 저도 제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