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현질 전사
-4권 18화
정대식은 서둘러 엔트로피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레벨 2로 업그레이드된 관측을 실행해 보았다.
"관측."
우우웅-.
약간의 마력이 소비되는 느낌이 들면서, 허공에 그가 살피고자 하는 몬스터의 정보가 떠올랐다.
몬스터의 이름은 키클로페스.
초대형종에 파충류계, 고정형의 몬스터로 왕관을 쓴 보라색의 문양이 붙어 있었다.
아마 퍼플 스톤을 생산하는 보스몹이라는 뜻일 테다.
'과연, 아까보다 정보가 구체화되었어!'
엄청난 수치의 생명력이 가득 차 있어서 놈을 죽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데 보통은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화하는 생명력 수치가 희한하게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의아해하며 그것을 살피던 정대식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래. 푸른색은 활동이 정지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마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면 생명력 수치가 제 색깔로 표시되겠지. 어디 보자, 그럼 놈의 약점 부위가.......'
키클로페스의 크기가 워낙에 거대하다 보니 약점 부위를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적어도 이 인근에 심장이 없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더 이동해야 할 것 같군.'
정대식은 대원들에게로 돌아가서 말했다.
"이 근방에서는 몬스터의 심장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던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던전의 중심으로 이동해야 심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던전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다 위험한 곳으로 간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원들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묵묵히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파다다다다!
파드드드득!
사방에서 혼 배트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대원들은 혼 배트 떼가 나타나기 전부터 정대식의 경고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혼 배트 떼가 덮쳐들었을 때에도 침착하게 대응해 싸우고 있었다.
"나인 테일!"
카르르르릉!
김시온의 블랙 스캘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홉 가닥으로 나뉘어 허공을 할퀴었고, 허미래가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마력이 혼 배트들을 무력화시켜 땅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으루루루룽!"
3단계로 변신한 소강두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혼란을 일으킨 혼 배트들이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흩어졌고, 그런 놈들을 정대식이 무적권을 남발해 가며 물풍선처럼 터트렸다.
찍! 퍽퍽! 찌직!
괴상한 소리를 내며 찢어지는 혼 배트 떼의 공세가 주춤한다 싶더니 저쪽에서 보다 큰 덩치의 박쥐 여러 마리가 날아들었다.
뿔이 두 개인 그 박쥐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정대식은 놈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먼저 발을 박차 달렸다.
"기철민, 등 좀 빌리자!"
그는 신속 스킬을 사용해 놀라운 속도로 내달려 한창 싸우는 중인 기철민의 등을 짓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연을 날려 올린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와!"
전투 상황인 것도 잊고 허미래가 감탄사를 터트리는 가운데, 정대식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지며 지상의 동료들을 향해 날아가던 대형 박쥐들의 날개를 움켜잡았다.
"찌지지직!"
별안간 무거워진 정대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쥐들의 날개가 북 찢어졌다.
정대식은 재차 몸을 가볍게 하여 한 번 더 허공에서 발을 굴렸다.
그런 식으로 다시금 등을 바닥으로, 가슴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자동 소총을 쥐고 화염탄을 내쏘았다.
화르르르륵!
솟구쳐 나온 불길이 대형 박쥐들을 몽땅 불태웠다.
순식간에 숯검댕이가 된 박쥐들이 땅에 구를 때쯤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재를 박차고 아래로 내려앉은 정대식은 크게 소리쳤다.
"엎드려!"
대원들이 기겁해 머리를 싸안고 엎드리자, 정대식은 강화를 스스로에게 건 상태로 붉은 버튼을 누르고 자동 소총에 마력을 주입하여 내쏘았다.
콰르르르르르!
마치 붉은 혀가 넘실대듯 불꽃이 공중으로 쏘아져 나가 크게 용트림을 했다.
거기에 굽히거나 데인 박쥐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푸화악!
혼 배트가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자 대원들이 한숨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이 살짝 탄 소강두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대머리 되겠네. 너, 대머리가 변신하면 얼마나 웃긴 꼴이 되는지 알아?"
정대식은 씩 웃었다.
"그거 한 번 보고 싶네."
대원들은 농담할 기력은 있었으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던전 깊은 곳으로 진입하면서 몇 번이나 혼 배트나 켈피, 리저드맨, 드레이크 등을 마주쳤다.
가급적 싸우지 않고 피해 가려고 했으나 피치 못하게 싸워야 할 상황도 있는 법이다.
사방이 늪지라서 몸을 숨길 때가 마땅찮았던 것이다.
그나마 전투가 육상에서 벌어진 덕분에 늪 속에 숨은 키클로페스가 여태껏 잠잠했다.
첫 번째 싸움처럼 늪에서 피를 흘렸더라면 키클로페스가 또다시 깨어났을 테니까 말이다.
김시온은 정대식에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심장은 아직 감지되지 않는 건가?"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그렇다면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를 벗어나 잠시 쉬자고 말했다.
그러나 대원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정대식이 관측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푸른색으로 잠잠하던 키클로페스의 생명력이 점차 녹색 빛을 띠고 있었다.
아마 완전히 녹색이 되면 놈이 다시금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 심장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적극적인 저항에 부닥칠 터였다.
'그 전에 심장을 찾아야 할 텐데.'
정대식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마른자리를 골라 주저앉았다.
그리고 비상식량을 꺼내어 허기를 달랬다.
마침 기철민이 옆으로 다가와 물을 건넸다.
그걸로 목을 축이자 그가 물어왔다.
"아까, 너 내 등 밟았지?"
"아, 급해서. 미안."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별 느낌도 없었으니까. 마치 깃털처럼 가볍던데?"
그렇게 말하는 기철민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그때의 네 움직임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어. 네가 예전에 싸우던 방식과도 많이 달라. 아니,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
정대식은 뜨끔했다.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만 꼴깍꼴깍 마셨다.
일전에 부유 신체를 획득해 두기는 했으나, 거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물에 빠져 죽을 뻔하면서 부유 신체의 이점을 깨닫고 그것을 전투에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철민은 계속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쓰는 건지는 몰라도 놀라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군.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거야."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좀 빨리 배우기는 하지."
기철민은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쓰게 웃었다.
"너라면 정말로 올인원이 될지도 모르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기철민의 본심이 무엇인지 짐작키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강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그보다, 그저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게 분할 터였다.
'아마 최희도 마찬가지였던 거겠지.'
지금도 강하지만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어 하는 최희 역시, 자신이 아닌 정대식이 올인원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데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표가 그저 부자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억울한 나머지 화를 낼지도 몰랐다.
'나도 공짜로 강해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매번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면서 강해지고 있는 거란 말이야.'
데모크리토스의 비밀만 아니라면, 하고 정대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현질 능력에 대해 털어놓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 능력을 다른 사람과 나눠 쓸 수 있어야 의미가 있었다.
'차라리 돈을 받고 능력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야. 나로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데.'
기철민의 부러움에 찬 말을 듣고 정대식은 처음으로 높은 금액이 아닌, 다른 부분에 대해 현질 능력에 아쉬움을 느꼈다.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능력을 팔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직접 사냥터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일도 없을 텐데, 하고 정대식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어쨌든 부유 신체와 무적권, 은신과 교란 등 새로운 스킬을 획득한 덕분에 전투가 보다 쉬워졌다. 다채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
전투 능력이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기철민뿐만 아니라 정대식 본인 또한 체감하는 바였다.
예전엔 그저 자동 소총으로 원거리 공격을 하고, 아다만트 너클과 강력권을 이용해 근거리 공격을 하는 정도로 패턴이 단순했다.
하지만 지금은 은신으로 기습을 하고, 교란으로 혼동을 더해 무적권으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하고, 강철 신체와 부유 신체를 적절히 이용해 가며 전신을 무기화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나타날 때마다 거의 혼자서 싸우다시피 하면서도 마력의 소비가 그리 크지 않았다.
무식하게 강화로 마력을 때려 부어 가며 싸우던 때와 달리 스킬을 여러 가지로 섞어 쓰면서 효율이 좋아진 것이다.
'이대로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겠는데.'
정대식은 묘한 자신감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짧은 휴식을 마치고 걷는 대원들과 함께하며, 관측을 사용해 키클로페스의 동태를 살폈다.
'색이 변하는 속도를 보아하니...... 대략 한 시간. 그 정도면 키클로페스가 깨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혼 배트를 마지막으로 몬스터의 습격이 중단되었다.
놈의 활동을 앞두고 잔챙이들이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는 것이다.
'키클로페스가 한 번 움직이고 나면 몬스터들이 난립하게 된다. 키클로페스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몬스터의 공격으로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아. 죽이 됐든 밥이 됐든 한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도대체, 심장은 어디에 있는 거지......?'
정대식은 조급함에 김시온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한 시간쯤 더 있으면 키클로페스가 활동할 거예요. 그러고 나면 몬스터들의 습격이 줄을 이을 테니 소모적인 싸움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심장을 찾아야 해요. 제가 먼저 가서 심장을 찾는 것이......."
그때 김시온이 물었다.
"키클로페스라고?"
"아, 예."
"정대식, 네가 어떤 식으로 이 키클로페스라는 놈의 심장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각 확대 능력으로도 심장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다. 이미 우리는 던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고, 더 들어갔다가는 되돌아 나오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심장 찾는 것을 그만둔다."
대원들은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자는 거냐는 듯, 놀란 눈으로 김시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이어 말했다.
"놈이 심장을 갖고 기어 나오게끔 유인한다."
"아!"
깨달음을 얻은 정대식을 보고 김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몬스터가 지나치게 거대하고 고정형인데다 위험한 나머지, 약점인 심장을 우선 찾아야 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어. 하지만 사냥에 있어서 본질은 한 가지지. 잡아서 죽이면 돼. 심장을 찾을 수 없다면 찾을 수 있게끔 놈을 끌어내면 된다. 키클로페스가 코앞에 있으면 정대식 네가 손쉽게 심장을 찾아낼 수 있겠지. 그럼 우리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약점을 공략해 죽인다."
역시, 기철민은 사리 판단이 냉정했다.
김시온의 말을 듣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놈과 정면 승부하자는 것 아닙니까?"
김시온은 대담하게 웃었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