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현질 전사
-4권 11화
"어젯밤에 재미있었지?"
"응, 그런 곳은 처음이었어."
"요새 헌터들 사이에서는 핫한 곳이지."
자신 같은 헌터들이 그곳을 돌아다니며 돈을 물 쓰듯 해 대니,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자기도 그런 곳에 들어가 장사나 해 볼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팬텀이나 가드너처럼 볼거리가 되는 이능이 없는 이상에는 별로 남는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돈벌이가 되는 이능이라니, 부럽긴 한데.'
정대식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
"집 좋은데! 자가야? 전세? 월세?"
"자가야."
"자가라고? 얼마나 주고 샀는데?"
"뭐, 적당히 주고 샀지."
그때 언제 일어났는지 소강두가 배를 북북 긁으며 나타났다.
"적당히 주고 사긴. 엄청 비싸게 주고 샀지. 저 자식은 돈에 대한 개념이 좀 없어. 슈퍼카를 무슨 장 보듯이 사 대는 거 보면 모르겠냐?"
알고 보니 유태훈은 굉장한 자산가였다.
그는 헌터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여기저기 투자를 했고, 몇 년은 죽을 쒔지만 마침내 성공했다.
그가 전 재산을 밀어 넣다시피 했던 히드라 독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히드라 독에는 놀라운 재생 효과가 있었는데, 특히 피부에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히드라 독으로 만들어진 화장품을 바르면 피부가 깐 달걀처럼 고와진다나, 어쨌다나.
그 화장품은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지만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하니, 유태훈이 떼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태훈은 이제 살 빠지는 성분만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혁신적인 체지방 분해 성분을 찾을 수만 있다면 코카콜라 사장 버금가는 부자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니라며 열심히 여기저기에 투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좋은 투자 정보가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지.'
정대식은 술김에 추태를 부린 것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유태훈에게 부럽다는 말을 한 백 번쯤 한 것 같았다.
생긴 것도 잘난데 돈 버는 수완까지 있으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유태훈조차 계속 헌터 생활을 하는 이유가 의아하기도 했다.
그 이유를 묻는 말에 유태훈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으니까?'
어젯밤의 일을 반성하며 커피 한 잔을 비우고 있노라니, 소강두가 해장국 타령을 했다.
숙취도 없으면서 해장을 하다니 웃긴 노릇이지만, 식사는 해야 했으므로 그들은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해장국을 한 그릇씩 해치우고, 다 함께 쇼핑을 가게 되었다.
남자 셋이서 무슨 쇼핑이냐 싶었지만, 유태훈은 어제 정대식이 주절거린 말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정대식이 그의 외모와 재력을 부러워하며 옷 입는 센스도 같이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러자 유태훈이 선뜻 정대식에게 자신이 잘 가는 곳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정대식은 고맙다고 말을 하기는 했으나.......
'부티크라니!'
그는 다소 기가 막힌 기분으로 눈앞에 보이는 가게를 올려다보았다.
쇼핑이라고 하면 보통은 백화점이나 아웃렛 같은 곳을 가는 게 아니었던가?
적어도 명품 매장 같은 걸 상상했던 정대식으로서는 뜻밖의 장소였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유태훈이 웃으며 설명했다.
"남성복으로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개인 숍이야."
그 말을 듣고 옆에서 소강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키야, 멋쟁이는 옷도 그냥 브랜드는 안 입는다 이거지?"
"요즘엔 디자이너 의류가 대세거든. 평상복이라면 몰라도 정장 한두 벌 쯤은 이런 곳에서 맞춰 두는 편이 좋아."
정대식은 유태훈에게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고 정장 몇 벌이 벽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
곧 유태훈을 알아보고 디자이너가 직접 인사를 나왔다.
"오셨습니까, 유태훈 씨? 오랜만이시네요. 어떻게, 새 옷을 맞추러 방문하셨습니까?"
"아뇨, 오늘은 여기 이 친구 옷이 필요해서요. 보다시피......."
유태훈은 정대식이 입은 옷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디자이너는 약간 난감한 표정이었고, 소강두가 그들의 심경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었다.
"입대식에 저런 싸구려 정장을 입고 왔으니 통탄할 노릇이지!"
정대식은 입대식에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가평까지 놀러 갔다가 오늘 아침에도 그걸 그대로 걸친 상태였다.
확실히, 듣고 보니 좀 후줄근하기는 했다.
간밤에 계속 이 옷을 입고 있었던 탓만은 아니다.
인근 기성복 할인 매장에서 대충 골라 산 거라 빈말로라도 근사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정대식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제가 옷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서요. 그런데 입대식을 치르고 보니 괜찮은 정장 몇 벌 정도는 필요할 것 같네요."
정대식이 하는 말에 디자이너가 과장스런 표정을 지었다.
"입대식이라고요? 그럼 유태훈 씨와 소강두 씨와 마찬가지로 타이탄 공격대시란 말인가요?"
"예에, 그렇습니다."
"호오, 그렇군요. 대단하십니다. 타이탄 공격대는 사람을 가려 뽑기로 유명한 곳인데...... 굉장한 실력을 갖추신 모양이군요!"
디자이너는 칭찬을 몇 마디 늘어놓으며 정대식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신체 치수를 재고 옷감을 몇 종류 대보았다.
"확실히 헌터셔서 그런지 체격이 아주 다부지군요. 키도 크고 비율도 좋으십니다. 제대로 차림을 갖추시면 여자들이 아주 쓰러지겠는데요?"
정대식은 뭘 또 쓰러지기야 하겠느냐고 받아쳤다.
디자이너는 껄껄 웃으며 옷감을 추천해 주었다.
정대식은 잘 몰라서 되는 대로 만들어 달라 그랬고, 결과적으로 셔츠 다섯 벌과 정장 세 벌, 코트 한 벌, 롱 재킷 한 벌을 맞추게 되었다.
가격은 솔직히 말해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정장 한 벌 가격이 싸게는 800에서부터 비싸게는 2,000 가까이에 이르렀다.
'맞춤이라 그런가? 되게 비싸네. 거의 명품 가격에 맞먹잖아? 아니...... 더 비싼 거 아냐?'
정대식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1억 2천만 원 가까이를 선 결제했다.
현질 금액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는 가격이라지만 고작 옷 몇 벌에 1억을 쓰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솔직히 동료들과 같이 온 게 아니라면 생각 좀 해 보겠다고 뒷걸음질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디자이너는 웃으면서 서비스로 넥타이와 양말, 모자를 갖추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옷이 다 만들어지면 연락 주겠다고 연락처를 받아놓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그걸 대충 받아 챙기고 밖으로 나오자, 마음이 헛헛했다.
1억 2천만 원어치나 옷을 샀는데 빈손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소강두 역시도 그 점을 지적했다.
"뭐, 쇼핑을 했다고는 해도 아무것도 산 게 없는 기분이잖아? 정대식이 얘 꼴을 봐라. 이게 타이탄 공격대원의 모습이냐?"
"음, 당장 입을 옷을 몇 벌 사긴 해야겠네."
"근처에 옷 가게 많잖아! 거기서 옷 좀 사 입으라고!"
이번에는 소강두가 앞장을 서서 정대식을 여기저기로 끌고 다녔다.
소강두는 유태훈보다는 덜 고상한 취향이라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명품 매장으로 그를 데리고 다녔다.
유태훈은 명품을 기성복 취급하며 떨떠름해했지만, 소강두는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건 명품 로고가 떡하니 박힌 물건이라고 티셔츠며 운동화 따위를 이것저것 골라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쇼핑백이 유태훈의 차 트렁크에 꽉 들어차다 못해 뒷좌석까지 점령을 했다.
정대식도 제법 볼만한 꼴이 되었다.
한데 아직도 멀었는지 소강두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옷은 이제 좀 괜찮은데 머리가 영...... 이거 어디서 잘랐어? 설마 블루클럽이니 하는 데서 자른 건 아니지?"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했다.
"목욕탕 이발소에서 잘랐는데."
"뭐? 목욕탕 이발소? 요새도 그런 데가 있어?"
소강두는 경악하며 그를 미용실로 데리고 갔다.
또 거울 앞에 앉게 된 정대식은 헤어 디자이너와 마주했을 때쯤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덕분에 어떤 스타일을 원하느냐는 말에 식상한 대답을 해 버렸다.
"알아서 해 주세요."
두 시간 후.
머리를 솜씨 있게 자르고 가볍게 염색을 한 정대식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유태훈과 소강두도 그런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이야! 사람이 다르네!"
"이렇게 보니까 꽤 그럴싸하게 생겼잖아?"
진작 좀 꾸미고 다니지 그랬느냐는 말에, 정대식은 새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머리를 새로 하고 옷을 사 입으니 모양새가 남달랐다.
유태훈처럼 TV에 나오는 연예인 수준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길에서 보기 드문 훈남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헛...... 이래서 다들 남자도 꾸며야 한다는 건가?'
낯선 자신의 모습에 적응이 되질 않아, 정대식은 솔직하게 기분을 드러내지 못했다.
신난 건 유태훈과 소강두였다.
그들은 이왕 머리도 하고 옷도 산 김에, 차도 새로 뽑으라고 부추겼다.
"회사에서 차를 지급해 주기는 하지만, 그거 타고 다니는 대원들은 거의 없어."
"그래, 돈 벌어다 어디다 쓰겠냐! 이런 데 쓰지."
어영부영, 자동차 매장까지 둘러보게 된 정대식은 삐까번쩍하게 닦인 외제차들을 둘러보았다.
최근 몇 년 간, 슈퍼카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나 온갖 유명 자동차 회사들이 매장을 확장해 놓은 탓에, 전시장이 무슨 모터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자동차 딜러들은 그들이 타이탄 공격대 소속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허리를 90도로 숙여 보였다.
약간은 비굴하다고 느껴질 만치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시승을 권유했다.
본디 시승은 예약제였으나 그들은 앞다투어 차 키를 내밀어 보였다.
정대식은 벤츠와 랜드로버, 포르쉐와 마이바흐 등, 일대에 모인 자동차 매장들을 돌며 시승을 해 보았다.
하나같이 핸들의 감촉이 끝내주었다.
은은하게 들리는 자동차 엔진음도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썩 끌리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 매장을 나오면서 말했다.
"차는 됐고, 오토바이나 좀 보자."
"오토바이라고?"
"차는 회사에서 받은 걸로도 충분해. 하지만 오토바이는 없으니까."
몇몇 오토바이에 취미가 있는 이들을 빼놓고, 헌터들은 오토바이를 타지는 않았다.
멋을 부리거나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서라면 외제차 쪽이 더 효과적이었고, 실용적인 측면을 따지자면 짐을 실을 수 없는 오토바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정대식은 아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기동력 측면에 있어서는 오토바이가 더 나은 부분이 있었다.
오토바이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던전의 좁은 길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공격대와 함께 다닐 때는 가져갈 필요가 없겠지만, 혼자 사냥할 때는 오토바이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물론 오토바이가 근사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