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84화 (84/297)

# 84

현질 전사

-4권 9화

불가해한 표정을 떠올리는 정대식을 보고 기철민이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기엔 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뭐가?"

"너 전에 그랬잖아? 넌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 하지만 난 내 삶을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버는 거야. 돈을 벌기 위해서 버는 게 아니라."

"그거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지 않나?"

"응?"

"너 그간 모은 재산만 해도 상당할 거 아냐. 다소는 헌터 생활을 하느라 이리저리 썼다고 해도 몇십억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그 정도면 충분히 삶을 누릴 정도는 된다는 말이야. 근데도 넌 헌터 노릇을 계속하고 있잖아?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그게 더 강해지고 싶다는 거랑 무슨 차이야?"

"당연히 차이가 있지."

"드라마틱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고."

정대식은 불만스러운 기분이 되었으나 무어라고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정대식이 말이 궁한 것을 보고 이때다 싶었는지 기철민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삶을 누리는 것과 돈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본다. 너 그 조사 결과도 못 봤어? 어느 정도 이상의 수입에 도달하고 나면 더 많은 수입은 사람의 행복 지수에 영향을 못 미친다는 거."

"몰라, 그딴 거."

정대식은 그런 건 누가 조사하는 거냐고 구시렁거리며 말을 잘랐다.

기철민하고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안 통했다.

아마도 그가 최희와 똑같이,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물인 탓일 것이다.

그와 자신의 적당히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지도 모르겠다.

그때 소강두가 펄쩍 뛰어와 느닷없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신입 대원들끼리 뭔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설마 타이탄 공격대에 벌써 막대한 불만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 별로. 딱히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정대식이 하는 말을 듣고 기철민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러자 소강두가 정대식의 어깨에 팔을 걸고 그를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그럼 제대로 즐겨 봐야지!"

"제대로 즐겨 보다니?"

정대식의 반문에 소강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설마 입대식 뒤풀이가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정대식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면, 뭐가 더 있는데?"

"크아~!"

과장스런 탄식을 내뱉은 소강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딱 치고 말했다.

"너, 오늘 술 사!"

"엉?"

"일단 술을 사. 오늘은 네 입대식이었으니까."

"......그래, 뭐. 술 정돈 사 줄 수 있지."

"좋아. 그럼 가자!"

어디로 가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강두는 정대식을 끌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박무원과 허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을 보아하니 기철민도 외눈박이부대원들에게 끌려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마 입대식을 한 날에는 신입이 술을 사는 게 관례인 모양이었다.

"유태훈이! 어디 있어!"

길가에서 소강두가 크게 소리를 치자 어디선가 '부아아아앙!'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마치 날아오르듯 멋들어진 슈퍼카 한 대가 나타났다.

무려 차 뚜껑이 위로 열리는 람보르기니였다.

"여기 있지."

유태훈이 차에서 내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자, 무슨 자동차 광고를 보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인데다가 정장까지 멋들어지게 빼입고 슈퍼카에서 내리니 마치 화보를 보는 듯했다.

소강두는 그의 차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허얼~ 너 또 차 샀냐?"

"어떠냐? 근사하지?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이다. 완전 멋지지 않냐? 엔진 소리 죽여줘."

유태훈이 자랑하는 말에 소강두는 호들갑을 떨며 부러워했다.

듣자 하니 해외에서 어렵게 들여온 차인 모양이라, 소강두는 자신에게 팔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너 차 다섯 대인가 있잖아? 근데 이 차가 왜 또 필요하겠냐. 그냥 이건 이 형님한테 양보해라. 내가 새색시처럼 애지중지하면서 타고 다녀 줄게."

소강두의 말을 듣고 유태훈이 정색을 했다.

"차가 아무리 많대도 이건 안 판다. 내가 어떻게 구한 차인데."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정대식은 내심 놀랐다.

'차가 여섯 대나 있다고?'

그런 그들을 보고 묵묵히 서 있던 박무원이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멋진 차긴 한데, 이걸 타고 갈 순 없잖아?"

그러자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소강두가 소리를 질렀다.

"앗, 그러고 보니 그렇잖아! 너 왜 이 차 끌고 나왔어! 순전히 자랑하려고 가지고 나온 거지!"

유태훈은 어깨를 으쓱했고, 허미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강두가 태훈이랑 이 차 타고 가. 대식이랑 무원이는 내 차 타고 가면 되니까."

소강두는 유태훈의 람보르기니가 타 보고 싶었던지 냉큼 그리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먼저 출발하고 허미래가 잠시 후 자신의 차를 끌고 나왔다.

정대식은 그녀는 회사에서 지급한 국산차를 타고 오겠거니 했다.

한데 뜻밖에도 람보르기니만큼이나 희귀해 보이는 차를 몰아 가지고 왔다.

"이 차는......?"

"클래식 카야. 예쁘지?"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고전적인 모양새의 벤츠였다.

그런데도 관리를 잘했는지 흠집 하나 없이 도장이 매끈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내부도 고급스러웠다.

"히야...... 나 이런 차 처음 봐."

정대식이 감탄하며 말하자 허미래가 선뜻 말했다.

"한번 운전해 볼래?"

"엉? 아냐, 아냐."

혹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사고라도 낼까 봐 겁이 났다.

물러서는 정대식을 보고 허미래는 몰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하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정대식은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고, 박무원은 뒷자리에 걸터앉았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정대식은 박무원을 힐끔 돌아보았다.

박무원이 할 말 있으면 하라는 식으로 쳐다봐 와, 정대식은 질문을 던졌다.

"너도 회사에서 지급한 차 말고, 이런 차 갖고 있어?"

박무원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이런 차는 없지. 지프차는 한 대 있지만."

분명히 그냥 지프차는 아닐 것이다.

지프차 중에서도 명품 축에 속하는 차일 것이다.

그제야 정대식은 타이탄 공격대 대원들 중에서 협찬받은 국산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회사 주차장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그 수많은 외제차들은 전부 대원들이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 가만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군. 실력 있는 헌터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타이탄 공격대에 소속된 헌터들도 당연히 수입이 상당하겠지. 그러니 거저 받는 차를 끌고 다니지는 않는 거야.'

매우 새삼스러운 깨달음 속에서 차는 도로를 내달렸다.

술을 먹자기에 강남이나 신촌 같은 번화가로 갈 줄 알았더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여긴 가평 가는 쪽 아냐?"

한때 펜션이 즐비했던 가평은 지금은 폐가가 들어찬 곳이 되어 있었다.

몬스터가 존재하는 곳으로 세상이 바뀌다 보니, 옛날보다 여행 인구가 대폭 줄어 버린 탓이다.

가평 부근에 위험한 던전이 몇 개 자리해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

이따금 그곳 던전으로 사냥을 떠나는 헌터들이 캠핑을 할 뿐,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왜 하필 그곳엘 가는 것인지 의아했다.

한데 허미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에는 가평이 많이 달라졌어. 가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뭘 또 깜짝 놀라기까지야......라고 생각했지만, 가평에 도착했을 때 정대식은 진짜 깜짝 놀랐다.

가평의 계곡과 숲 사이로 신비한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던전 안의 이계를 보는 것 같은 광경에 정대식은 입을 쩍 벌렸다.

정대식이 모르는 새, 가평이 헌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락 단지로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 * *

본디, 어둠 속에 휩싸여 있어야 할 계곡은 던전 안에서 캐 온 온갖 종류의 야광석으로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야광석이 내뿜는 녹색과 푸른색, 보라색과 붉은색이 어지러이 춤을 추는 가운데 정대식은 처음 문명을 접하는 촌뜨기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온갖 주점이 들어선 거리에는 헌터들이 바글바글했다.

갓 사냥을 마치고 나왔는지 몸에 피와 체액을 그대로 뒤집어쓴 사람도 있었고, 등에 정체 모를 몬스터의 털가죽을 둘러싸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몬스터와 같이 뿔을 달거나 귀를 늘리거나 하는 식으로 멋을 낸 여자도 보였고, 과연 인간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거대한 덩치의 남자도 눈에 띄었다.

그런 가운데 정대식은 부대원들에게 이끌려 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요란하게 물들이고 고양이 요괴처럼 코스프레를 한 여자아이가 뛰어나와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머! 외인부대 아니세요?"

외인부대라는 말에 가게 안에 흩어져 있던 여직원들이 "어디, 어디?" 하고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이 하던 일을 마다하고 우르르 몰려와 아는 체를 하는 것이, 다들 이곳의 단골인가 보았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를 받아 간 곳은 바깥 경치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

야광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테이블에 좌식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천장에는 던전에서나 자라는 발광 식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흡사 던전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났다.

"뭐 주문하시겠어요?"

여직원의 묻는 말에 소강두가 윙크를 날리며 "늘 먹던 걸로!"라고 소리쳤다.

곧 그녀가 사라지고 예의 늘 먹던 것들이 나왔다.

사람 머리만 한 거대한 게를 통째로 찐 요리와 얼음 잔에 담긴 칵테일, 그리고 웬 물담배가 나왔다.

"이게 뭐야?"

정대식이 물담배를 가리켜 보이자 소강두가 킬킬 웃으며 그걸 내밀었다.

"한번 해 봐! 이거 아주 재밌다고."

"......일단 술부터 한 잔 하고."

"그럴래?"

정대식은 술잔을 들었고, 나머지 부대원들도 다 술잔을 들었다.

유태훈이 입대식을 치른 기념으로 한마디를 하라고 해, 정대식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으음. 뭐, 딱히 할 말은 없고. 파이팅! 타이탄 공격대!"

"파이팅!"

다 같이 외치며 술을 쭉 들이켜자, 갑자기 머리가 짜릿해졌다.

보통 술을 마시면 목구멍이 타거나 위가 화끈거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술은 머릿속이 불타는 듯했다.

순식간에 술기운이 오르면서 눈앞이 어지러워져, 정대식은 깜짝 놀라 잔을 놓쳤다.

"뭐, 뭐야, 이거?"

"짜식! 뭐기는, 술이지!"

장담컨대 보통 술은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 이상한 게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전신이 이완되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체불명의 술에 대한 불안감도 달아나 버리고, 영문도 없이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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