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현질 전사
-3권 20화
그때였다.
"고생했다. 이제 내 차례다, 끝을 내자고! 일어서라!"
명쾌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김시온의 지휘를 받고 있기에 정대식은 여태껏 잠잠하던 유태훈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알았다.
"그오오오오!"
"그오오오!"
놀랍게도 죽어 자빠졌던 주위의 크레이지 버팔로 시체들이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그것들의 눈은 희게 뒤집어져 있었고, 무리를 따라 달려가는 다른 크레이지 버팔로들과는 명확히 구분되어 보였다.
마침 대부분의 크레이지 버팔로가 그들을 지나쳐 간 관계로, 주위에는 수많은 크레이지 버팔로의 시체와 그랜드 몰 한 마리만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되살아난 크레이지 버팔로들이 유태훈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상황이 아주 잘 보였다.
'저게 바로 네크로맨서의 능력!'
네크로맨서, 일명 시체 조종자는 말 그대로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가 있었다.
물론 마력치나 등급에 따라서 효과 범위와 효력 시간이 대폭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실로 놀라운 능력임에는 틀림없었다.
쓰러트린 몬스터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네크로맨서의 능력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방금 전까지 골칫거리이던 크레이지 버팔로들은 외인부대의 훌륭한 전력이 되어 주었다.
"그오오오!"
크레이지 버팔로들은 울부짖으며 유태훈의 손짓에 따라 그랜드 몰을 에워쌌다.
그들이 꾸역꾸역 달려들어 그랜드 몰의 거대한 몸뚱이를 뿔로 치고 발굽으로 짓밟았다.
그랜드 몰은 분노하여 크레이지 버팔로들을 앞발로 마구 쳐내고 촉수로 휘감아 던졌으나 머릿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그 틈을 타 막딜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외인부대는 모든 공격력을 총동원했다.
"대공포!"
그랜드 몰이 크레이지 버팔로들을 상대하는 사이, 박무원이 다시 자신의 무기를 변화시켰다.
그의 양날 도끼가 이번에는 대공포가 되었고, 박무원은 즉시 총구를 그랜드 몰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규모가 규모인 만큼, 마력탄을 장전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김시온과 허미래가 그를 엄호하는 사이, 소강두와 정대식이 유태훈과 함께 시간을 벌었다.
유태훈이 크레이지 버팔로들을 이용해 그랜드 몰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완전히 에워쌌다.
그동안 소강두와 정대식은 덜렁거리는 왼손을 마저 끊어 내기 위해 박무원이 공격하던 손모가지로 공격을 집중했다.
먼저 정대식이 마력 변환 자동 소총으로 빙결탄을 수차례 쏘아서 손모가지를 단단히 얼렸다.
얼어붙은 왼손의 움직임이 느려진 틈을 타, 소강두가 유성추를 날렸다.
"헤비 메테오!"
그가 마력을 날아가는 유성추에 싣자, 그것이 진짜 떨어지는 유성처럼 파르라니 빛났다.
소강두의 무기 다루는 솜씨가 절묘하여 그것은 정확히 그랜드 몰의 얼어붙은 왼 손모가지를 쳤다.
그러자 꽈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이 완전히 절딴 났다.
"됐어!"
소강두가 쾌재를 외치는 사이, 대공포의 장전이 끝났다.
박무원은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일시에 쏟아부어 대공포를 발사했다.
콰아-----앙!
거대한 마력탄이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분리됐다.
동시에 앞서 나온 허미래가 그랜드 몰에게 디버프를 썼다.
"방어 약화."
여섯 가닥으로 나뉜 마력탄이 그랜드 몰의 머리, 가슴 양쪽, 주둥이와 아랫배 등을 직격했다.
콰지지직!
그랜드 몰의 살갗이 터지면서 거대한 몸이 찢어져 나갔다.
그러자 그랜드 몰이 괴성을 울리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캬하아아앗!"
다시 용수철처럼 몸을 길게 늘어트린 그랜드 몰이 아래로 쏟아졌다.
피와 체액, 살점과 정체 모를 내장 기관들이 동시에 쏟아지며 시야를 가렸다.
그 가운데, 정대식은 끔찍한 것을 보았다.
그랜드 몰의 둥근 주둥아리.
그 안에서 또 다른 입이 튀어나온 것이다.
흡사 에이리언 같은 꼴이었다.
그랜드 몰의 원래 입보다는 작은 크기이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씹어 발길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그게 정확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미래에게로 날아갔다.
"헉."
허미래는 헛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에겐 아마도 공격을 지연시킬 만한 수많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맨드 모드인 김시온조차도 반응이 한 발짝 늦었다.
박무원을 커버하느라 김시온의 주의가 그쪽으로 돌려져 있었던 것이다.
"피해!"
김시온의 명령이 머릿속에 들려왔을 땐 이미 공격이 직격한 후였다.
하지만 처참한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에 뼈가 마찰하는 것 같은 기묘한 소음만이 울렸다.
카그극!
정대식의 몸이 뒤흔들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던 허미래를 정면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놀란 두 눈이 등잔만 하게 커진 것이 보였다.
어쩐지 겁 많은 인상이다 싶었더니 진짜로 눈이 컸다.
얼굴의 절반이 눈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짧게 웃었다.
그런 뒤 자신의 어깨와 등짝을 깨문 채 뒤흔들어 대는 그랜드 몰의 입 또는 혀라고 짐작되는 기관을 향해 말했다.
"소용없어. 내 몸뚱이는...... 강철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는 몸을 돌리며 아다만트 너클로 그것을 후려쳤다.
콰아앙!
"찌에엑!"
단말마와 함께 그 기관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정대식은 허미래를 품에서 놔주고 팔을 한 바퀴 휘돌렸다.
그러자 탈로스 방어구에 박혔던 이빨이 아래로 후둑후둑 떨어졌다.
그 광경을 얼빠지게 쳐다보고 있던 김시온이 정신을 차리고 물어왔다.
"괜찮나?"
정대식은 씩 웃었다.
"멀쩡합니다."
강철 신체의 레벨을 올린 게 주효했다.
그랜드 몰의 마지막 발악은 꽤 기습적이었다.
그러나 정대식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놈의 이빨이 탈로스 방어구를 뚫고 들어오지도 못했을뿐더러, 사람 하나를 프레스처럼 찌그러트릴 수 있었을 아귀힘도 무용지물이었다.
정대식의 몸은 이미 강철 신체 스킬을 통해 쇳덩어리만큼이나 단단해진 상태였다.
그 바람에 도리어 놈의 이빨만 부러졌던 것이다.
김시온은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정대식을 보고 안도했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어떻게 된 물건이야?"라고 중얼거리고는 전투 상황 종료를 선언했다.
그리고 커맨드 모드를 해제해 의식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가까이 서 있던 허미래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정대식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주자, 허미래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고, 고마워요. 제 목숨을 살려 주셔서......."
정대식은 부대원 전원과 말을 놓기로 했으나, 허미래는 낯을 가리는 탓인지 아직까지도 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말투 따위가 아니었다.
정대식은 혀를 차고 그녀를 나무랐다.
"감사 인사 같은 걸 받고 싶어서 한 일이 아냐. 우린 같은 부대원이니 내가 널 구하는 일은 당연한 거겠지. 당연하지 않은 건 위기의 순간에 얼어붙은 네 태도다. 만약 내가 아닌 소강두나 유태훈이 널 구하기 위해 나섰더라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거야. 네가 아무리 디버프라 전투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 적다고 하더라도, 몬스터에게 겁을 집어먹고 얼어 버리진 말았어야지!"
정대식의 지적에 허미래의 얼굴이 천천히 빨개졌다.
이윽고는 새카맣다고 표현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눈까지 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고 정대식은 혹 울음을 터트리지나 않을까 싶어서 겁을 집어먹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황급히 무어라 달랠 말을 찾으려 하는데 김시온이 다가와 말했다.
"정대식의 말이 옳다. 우리는 최정예, 소수 인원으로 움직이는 부대다. 단 한 명이라도 얼간이 같은 짓을 저질러선 안 된다!"
허미래는 두 손을 꾹 모은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좋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대식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김시온이 애송이, 얼간이, 코흘리개 등등이 아닌, 정대식이라고 제 이름을 똑바로 부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대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을 김시온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허미래가 여전히 빨간 얼굴을 들고서 정대식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던 것이다.
"지적해 주신 것도...... 감사히 듣겠습니다."
비록 낯가림 심하고 소심한데다 겁도 많지만, 역시 헌터는 헌터다.
외인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대식은 그녀를 성가신 울보로 취급하려던 판단을 재빨리 수정했다.
대신 머쓱한 기색으로 뒤통수만 긁적거렸다.
* * *
무리에서 뒤처진 크레이지 버팔로 몇 마리가 사나운 기세로 달려 사라졌다.
그런 놈들까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간신히 크레이지 버팔로 떼에서 살아남은 천군만마 공격대와 그 조사 팀이 보였다.
"그쪽 피해는 어떻습니까?"
피터 장이 다가와 하는 말에 김시온은 외인부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했다.
"딱히 없습니다. 그쪽은요?"
피터 장은 뒤에 쓰러진 그랜드 몰의 처참한 시체를 보고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랜드 몰을 처치하고서도 다들 무사하다니, 실력들이 대단하시군요! 다행히 우리 쪽도 사망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상자가 다소 있어 몇 명은 짐꾼과 합류해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상자가 몇 명이죠?"
"다섯입니다."
"다섯이라, 꽤 많군요."
"사냥 팀을 재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상자들을 처치하는 동안 사냥 팀은 지원 팀과 통신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사이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목표한 와이번의 구역까지는 대략 40km 정도.
평탄한 길이라면야 하루 만에도 주파할 수 있는 거리지만 몬스터가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오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흘 내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면 내일까지는 둥지에 당도해야 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다섯 명의 대원이 부상으로 낙오되어, 외인부대가 가장 전방을 도맡게 되었다.
1조가 조사 팀을 경호하고 2조가 후방을 감시하는 형태로 이동을 시작했다.
크레이지 버팔로 떼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적막만이 가득할 뿐, 조용했다.
그 덕분에 10km까지는 아무런 장애 없이 이동했으나, 곧 하늘 위에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악!"
와이번의 등장이었다.
"와이번이 온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피터 장의 신속한 명령이 떨어졌다.
"전 대원, 전방의 구덩이로 이동한다. 황유미, 은신술을 펼쳐!"
대원들이 구덩이 안으로 구르다시피 들어가 몸을 피하자, 천군만마 공격대의 버퍼인 황유미가 나서서 능력을 펼쳤다.
그녀가 무어라 시동어를 중얼거리며 허공에 손가락을 그으니 사방이 약간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공격대의 모습을 은폐하는 수를 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