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현질 전사
-3권 15화
심장이 없다 뿐, 그레이트 킹 슬라임은 살아생전과 한 치도 다름없어 보였다.
이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선보인 유태훈은 정대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놈을 고스란히 잡기 위해서는 먹이 역할을 할 인물이 꼭 필요하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굉장했어."
정대식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김시온 또한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린 채 인색한 칭찬을 건넸다.
"시건방진 만큼이나 간덩이도 큰 모양이지. 새로 온 얼간이가 애송이일지언정 겁쟁이는 아닌가 봐? 바지에 똥 지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어쨌든 칭찬은 칭찬인 것 같았다.
정대식은 자신이 맡은 바를 제대로 해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자 그레이트 킹 슬라임의 머리 위로 허공이 나타나며 마정석이 출현했다.
던전 공략이 끝난 것이다.
나타난 마정석은 비록 옐로 스톤에 불과했으나 어차피 훈련 삼아 나온 것이었고, 진짜 돈이 되는 것은 형체가 온전한 그레이트 킹 슬라임이었기에 아쉬워할 것은 없었다.
정대식은 저걸 어디다 갖다 쓰나 싶었는데, 의외로 쓰이는 데가 많은 모양이었다.
각종 연구 시설에서 비싼 값에 사갈 뿐만 아니라 박제로 만든다나 어쨌다나?
곧 생겨날 몬스터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했다.
"별거 아니게 보여도 그레이트 킹 슬라임을 저런 식으로 잡는 것은 매우 어려워. 미끼가 되어 위장 속으로 들어갈 헌터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거든. 겁에 질리거나 해서 아무것도 못하거나, 과한 공격을 한다거나 하면 심장뿐만 아니라 몸체까지 터져 버리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끝까지 침착을 유지하고 요구하는 바대로 정확히 행동해야 해.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는 단번에 해내는 사람이 별로 없어. 슬라임이 토하는 게 조금만 늦으면 질식사해서 죽으니까 말이야."
자칫하다간 정대식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은 유태훈은 씩 웃어 보였다.
"이걸로 신고식은 치른 셈이지?"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소강두가 끼어들었다.
"오늘은 회식! 무조건 회식이다! 그렇죠, 부대장님?"
소강두의 말에 김시온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법인 카드였다.
"애송이 기저귀 값 대신이다."
곧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이로써 정대식은 아무 문제없이 신고식을 마치고 던전을 빠져나갔다.
* * *
그날 회식은 모처럼 즐거웠다.
소강두가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다가, 유태훈도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망가지길 즐겼다.
허미래는 수줍음 타는 성격과는 다르게 말술이었고, 박무원은 말이 없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부대장인 김시온은 답지 않게 가장 모범적인 상사의 모습을 보였다.
식사만 간단히 하고 법인 카드를 넘겨준 후 자리를 뜬 것이다.
덕분에 눈치 볼 필요 없이 맘껏 놀았더니 부대원들과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정대식은 밤늦은 시간까지 그들과 어울려 놓고도,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웠다.
이런 느낌은 낯설었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이후로는 거의 처음이었다.
간혹 짐꾼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비슷한 기분을 느끼기는 했으나, 혼자서 초라한 여관방으로 돌아갈 때는 허탈감이 더 컸다.
하지만 오늘은 아쉬움과 동시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해서,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소속감인가 싶었다.
'타이탄 공격대의 정식 대원이 된 게 이제 이틀이다. 벌써부터 소속감이라고?'
정대식은 코웃음을 치고 아직은 낯선 새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동이 터 올 무렵이라 잠자리에 들기가 애매했다.
별로 졸리지도 않아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여유를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대식은 익숙지 않은 커피 메이커와 한참 씨름을 한 끝에야 간신히 커피 한 잔을 내렸다.
그걸 들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TV를 켜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좋은 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몹시 안락해서, 그간 자신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왔는지가 실감이 됐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으니 당분간은 편안하겠지.'
하지만 이 편안함에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공격대에서 재계약을 거듭하며 붙박이로 살아간다지만, 정대식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독립이었다.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겠다 다짐하는데, 뉴스에서 몇몇 주요 공격대의 근황이 흘러나왔다.
개중엔 조디악 공격대의 소식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한데 그 내용이 매우 놀랄 만했다.
'뭐?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이 바뀌어?'
조디악 공격대의 새로운 공대장이 선출되었다는 헤드라인을 보고 정대식은 TV의 볼륨을 높였다.
'새로이 부대장을 뽑는다고 하더니만, 아예 공대장이 바뀌다니?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TV 화면에는 조디악 공격대 본사 건물이 비쳐지고 있었고, 그 앞에서 기자가 서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제2대 조디악 공격대의 새로운 공대장으로 선출된 인물은 매우 뜻밖의 인사로서, 공격대 안팎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정식 공격대인 조디악 공격대의 새 얼굴은 광필두로.......
정대식은 놀란 나머지 새된 목소리를 냈다.
"광필두? 광필두라고?"
TV 화면이 곧장 그 이름의 주인공을 비춰 냈다.
실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얼굴이었으나 그게 누군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조디악 공격대와 함께 사냥을 나갔을 적에 정대식의 강화를 받아 가시전갈의 꼬리를 잘라 냈던 인물이었다.
매우 거한인데다가 인상도 몹시 험악하고, 불꽃이 치솟는 특이한 무기를 쓰고 있어 기억에 안 남으려야 안 남을 수가 없었다.
의아한 것은, 정대식이 알기로 그는 부대장이 아니었다.
부대장은커녕 부대장 후보군에도 들지 못하는 일개 딜러였다.
부대장 자리를 노리는 팀장들이 여럿이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광필두가 하루아침에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이 된 것일까?
의문스러운 기분 속에서 뉴스가 다른 소식으로 넘어갔다.
정대식은 TV 볼륨을 다시 줄이고 어젯밤 싸 온 짐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이 시동되기를 기다리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아, 속 터져. 상점을 업그레이드하든지, 이놈의 노트북을 갈아 치우든지.......'
정대식은 이를 북북 갈며 간신히 켜진 노트북으로 헌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시판들이 완전히 불붙은 벌집과 같았다.
다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제법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몇몇 소문들도 눈에 띄었다.
'광필두가 기습적으로 공대장을 습격해 그를 살해하고 무구를 빼앗았다고? 하긴 그 정도 하극상이 아니라면 광필두가 단번에 공대장의 지위에 오를 수는 없었을 거야.'
문제는 조디악 공격대의 공대장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디악 공격대를 창설해 대형 정공으로 키워 낸 사람은 강철우라는 남자로, 1세대 헌터들 중에서도 걸출했다.
특히 그가 가진 무구는 전설에 가까웠다.
처음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지고 인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그때.
세상을 구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 아이템이 있었다.
일명 7성 무구라고 불리는 신물로써, 유일하게 등급 판정 불가를 받은 무구였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라는 뜻이니, 그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그런 무구를 가진 남자를 쓰러트렸다고?
정대식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반대일 가능성이 높아. 어떤 방법으로든 그 무구를 먼저 손에 넣고 강철우를 쓰러트렸을 거다.'
강철우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방에 대한 소식은 아무런 화제도 되지 못했다.
무슨 수법을 썼든지 간에 광필두가 이미 조디악 공격대를 장악하고 내부 사정을 완전히 은폐했을 터였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놀랍긴 하네.'
별로 야욕이 넘쳐 보이지는 않았는데.
사람이라는 게 참 겉보기로는 모르는 법이라고 중얼거리며 정대식은 혹시나 조디악 공격대에서 돈을 떼먹을까 봐 걱정했다.
정산이 늦어지고 있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입 닦는 거 아닌가 싶어서, 정대식은 조디악 공격대의 홈페이지로 들어가 문의 글을 남기려 했다.
그 전에 혹시나 싶어서 잔고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돈이 들어와 있었다.
'정산이 됐구나!'
공대장이 갑자기 바뀌면서 외부의 이런저런 간섭, 혹은 참견을 피하기 위함인지 밀린 정산을 모조리 끝내 놓은 모양이었다.
정대식은 조디악 공격대에서 입금된 금액을 보고 콧노래를 불렀다.
'역시 마정석이 있어서 그런가, 짭짤하잖아!'
겨우 짭짤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는 금액이었다.
무려 20억이 넘는 금액이 거래 내역에 찍혀 있었다.
'남아 있던 잔고가 10억 정도. 거기에 조디악 공격대에서 받은 정산금이 19억 8천만 원가량. 타이탄 공격대 계약금인 10억은 아직 입금 전이니까 대강 30억 정도가 있다고 보면 되겠네.'
30억.
불과 얼마 전까지의 정대식에게는 꿈의 숫자였다.
그만한 현금이 통장에 떡하니 들어와 있는 것을 보니 꿈만 같았다.
'캬...... 이게 다 내 돈이라니! 믿기질 않아.'
잠시 감격해서 그 기분을 음미하고 있던 정대식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현질할 걸 생각하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지.'
정대식은 오랜만에 도우미라기에는 밉상인 녀석을 불러냈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엔트로피는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속한 등장에 정대식은 미소를 지었다.
"야아, 오랜만이야. 그렇지?"
<무슨 용무이십니까? 정대식 님.>
"짜식, 뻣뻣하긴. 내가 널 왜 불렀겠어? 현질할 일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무엇을 구매하고 싶으십니까?>
"으음, 일단 내 상태창 좀 보자."
정대식은 상태창을 열어서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상점 Lv : 3
근력 : 22
마력 : 35
체력 : 40
오감 : 14
민첩 : 18
행운 : 16
강화계 스킬 : 강화, 강력권, 신속, 강철 신체, 오감 강화
변화계 스킬 : 지혈, 각성, 치료
정신계 스킬 : 관측, 도발, 적의 집중
정대식은 그것을 쳐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또 마력이나 체력을 높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낮은 오감이나 민첩 같은 걸 높이는 쪽이 나을까? 아냐...... 포인트 가격이 너무 올랐어. 무턱대고 사 대다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질 거야.'
무엇보다 상태 항목은 정대식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포인트 구매 없이도 높일 수가 있었다.
실제로 정대식의 근력은 막 헌터가 되었을 땐 21이었지만 지금은 22로 높아져 있었다.
물론 제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현질을 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경험을 쌓고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높아질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아직까지는 지금 정도의 상태 수준으로도 전투에 무리가 없다. 일단은 제껴 두자. 차라리 새로운 능력을 개화하거나, 아니면 스킬을 사는 편이 낫겠지. 상점을 업그레이드하는 방법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