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39화 (39/297)

# 39

현질 전사

-2권 14화

정대식은 설유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순간 찰싹 달라붙어 정대식의 옷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쳐. 오늘 밤의 일도 없는 일 셈 치라고. 부담 가지지 말라는 뜻이야."

스카우트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설유란이 왜 이런단 말인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질문은 이내 덮쳐 오는 입술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뭘 발랐는지 설유란의 입술은 향기롭고 달콤했다.

돈벌이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면서 여자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가난이 죄인 세상이라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아름다운 여자가 알몸으로 덮쳐 오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황미건까지는 어떻게든 거절을 했는데, 이건 도무지 무리였다.

'에라, 모르겠다!'

정대식은 설유란을 확 쓰러트리고 거침없이 덤벼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설유란은 이미 가고 없었다.

출발 준비를 하는 대원들로 인해 사방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여우에 홀리기라도 했나?'

정대식은 머리를 긁적거리고 간밤의 여운을 털어 버린 채 사냥 떠날 채비를 했다.

옷과 장비를 갖추고 식사를 배식받으러 밖으로 나가자, 기철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대식을 보고 야릇한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어젯밤엔 재미 좋았냐?"

설유란은 꽤 시끄러웠다.

지척에 대원들이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슴없었다.

정대식이 괜한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이자, 기철민이 킬킬거렸다.

"그래도 조디악 공격대 최고 미인과 재미 봤네. 뭐, 마력 좀 잃는다 해서 아깝진 않았겠어."

"응? 마력을 잃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기철민은 정대식의 멍청한 질문에 폭소를 터트렸다.

"이야, 너 그거 몰라?"

"뭘?"

"아하하하! 진짜 몰라?"

"그러니까 뭘 말이야?"

정대식이 참다못해 성질을 내자 기철민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말했다.

"여자 헌터들이 잘나가는 남자 헌터들과 한 번 자 보려고 육탄 공격을 서슴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속설 때문이야."

"속설이라고?"

"진짠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지만, 우리 같은 능력자끼리 관계를 하면 마력이 섞인다고들 하지. 그래서 뛰어난 마력을 가진 사람이랑 하면 그 능력을 나눠받는다는 소리가 있어."

"말도 안 돼...... 무슨 근거가 있어?"

"없어. 그러니까 속설이지. 그런데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

기철민은 정대식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여기 있는 여자 대원들은 다 안달이 나 있을 걸? 설유란이 스타트를 끊었으니 오늘 밤부터 네 막사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을 거다. 보기 드문 트리플 포지션 능력자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너랑 자고 싶어 할 거야."

정대식은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애매한 표정이 됐다.

갑자기 인기 폭발이 된 건 좋아야 마땅한 일인데, 능력을 뺏긴다고 하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제아무리 속설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정대식뿐만 아니라 던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면 전부가 미신에 약했다.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다 보니, 징크스나 징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대식이 여자들의 목표물이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평소엔 눈이 정수리에 붙어 있어 콧대가 에베레스트만큼이나 높은 게 여자 헌터였다.

험난한 헌터 세계에선 여자가 살아남기 어려웠다.

또한 헌터 중에서는 여자의 비율이 낮은 편이었다.

그만큼 여자 헌터는 남자 헌터보다 실력이 괜찮았다.

육체적 핸디캡을 이겨 내고 버텨 온 만큼, 똑같은 연차라면 여자 헌터의 실력이 월등한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그런 여자 헌터들은 자신보다 못난 남자를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보다 등급이 낮은 헌터들은 거들떠도 안 봤다.

기철민이 말한 속설에 따르자면, 그런 놈들과 자 봤자 능력만 빼앗길 뿐이기에, 무조건 본인보다 높은 등급의 잘나고 강한 남자만을 원했다.

그렇다 보니 트리플 포지션의 능력자라고 추측되는 정대식은 동급이거나 그 이하의 여자 헌터들에게는 좋은 상대였다.

말이 좋은 상대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기분 탓인지, 식사를 하는 내내 정대식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자 헌터들이 하나같이 번쩍번쩍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미건의 눈에는 아예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녀는 설유란에게 정대식을 뺏겼다는 분노로 아예 그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냥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자들에게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곧, 식사가 끝나고 하루 일정이 시작되었다.

팀 별로 대원들이 모여 짧은 브리핑을 들었다.

그런 뒤,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열을 갖춰 사냥터로 나아갔다.

"출발!"

* * *

C구역으로 진입하는 길.

설유란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상큼한 윙크를 날려 왔다.

남자라면 충분히 가슴이 설렐 만했으나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런지 썩 달갑지는 않았다.

정대식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영입 내지는 능력 탈취를 위해 몸만을 노린 것이니, 제아무리 남자라 하더라도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옆에서 기철민이 연신 킬킬거리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는 하루 만에 붕대를 풀었다.

얼굴 한가운데 보기 싫은 흉터가 남기는 했으나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었다.

그 놀라운 회복력에 누구 하나 의문을 품을 법도 하건만.

임시 대원에 불과한 그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다쳤다는 사실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탓이다.

임시 대원 중에서 C구역까지 들어온 사람은 딱 세 명.

정대식, 기철민, 그리고 사자좌의 이름 모를 딜러 하나였다.

그 딜러도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정도가 경미했다.

그래서 기철민처럼 끝까지 사냥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간에, 임시 대원의 대부분을 베이스캠프에 남겨 두고 온 탓에 인원이 어제보다 훨씬 줄었다.

기분 상 거의 절반 가까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발대에 긴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임시 대원들을 치우고 직접 싸울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하다는 분위기였다.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몬스터가 출몰하기 시작했다.

과연, C구역답게 모조리 덩치가 산만 했다.

그런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정식 대원들의 움직임이 매우 일사불란했다.

여태껏 임시 대원들이 싸워 온 것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신속하고, 명쾌하며, 부드럽다.

다섯 개 팀은 마치 한 몸처럼 무리 없이 움직였다.

"백양좌! 어그로를 왼쪽으로, 왼쪽으로!"

"사자좌는 오른쪽 옆구리를 노린다! 지금이다! 나왔다!"

"해좌, 아직 아니야. 마력을 아껴! 신호를 기다린다!"

"황소좌는 후면으로 돌아간다! 기척을 죽여!"

"사수좌! 재장전, 재장전!"

통신기를 통해 바쁘게 오가는 명령을 따라 정식 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런 조합으로 수십 번, 수백 번 싸워 왔다는 게 티가 났다.

그래서인지 전투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대형종 몬스터가 나타나도 금방 해치우고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러던 중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몬스터의 출몰 횟수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행군을 멈추고 팀장들이 모였다.

이 순간만큼은 황미건과 설유란도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일단 접어 두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몬스터들이 사라진 걸 보면, 틀림없겠지?"

"그래, 맞아. 보스몹이 등장하는 구역일 가능성이 높아!"

"여태까지 봐 온 몬스터의 종류로 봐서는 마찬가지로 곤충계일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대형종이겠지."

"비행형일까?"

"아냐, 육상형일 가능성이 높아. 비행형은 보기 드물잖아."

"초대형종은 아니겠지?"

"그 정도 급의 던전은 아니야."

"대강 대형종의 육상형 곤충계 몬스터라, 이 말이군."

각 팀장들은 논의를 마치고 다시금 대열을 짰다.

보스몹을 상대하는 싸움이라 그런지 여태까지와는 작전이 달랐다.

선발대는 총 세 개 조로 나뉘었다.

그 세 개 조에 탱커, 근딜, 원딜, 버퍼가 고루 배치되었다.

오로지 딱 한 명 있는 힐러만이 황미건의 보호를 받아 후방으로 빠졌다.

탱커 팀의 우두머리인 박무식이 세 개 조를 총괄 지휘하고, 각 세 개 조에 팀장이 한 명씩 배치되었다.

"그럼 간다!"

다시 행렬이 전진하고 얼마 안 있어, 마치 동굴처럼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정글처럼 사방이 나무로 우거진 장소였으나,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으며 습기 찼다.

거기에 사방으로 식육 식물들이 입을 쫙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곳의 식육 식물은 크기가 작아서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침의 점도도 약해 닿는다고 하더라도 살짝 물집이 생기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가신 건 당연하다.

팀원들이 식육 식물이 우거진 덤불을 피해 이동하고 있자니, 갑자기 앞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아아!"

"보스몹이다!"

박무식의 외침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던전의 핵을 지키고 있는 보스몹이 나타났다.

"가시전갈이다!"

그 몬스터는 정대식이 강력권으로 처치한 가시거미의 진화판으로 보였다.

집채만 한 크기에 온몸에 촘촘히 돋아난 털이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거기다 큰 집게발이 한 쌍이었고, 여덟 개의 두꺼운 다리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뒤쪽에 높직이 치솟은 꼬리였다.

외갑피로 둘러싸인 굵직한 꼬리 끝에는 독침이 달려 있었다.

그 독침에서는 독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독액이 닿는 자리마다 치이익,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모르긴 몰라도 스치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타 버릴 만큼 강력한 산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그 턱이라니!

흉악하기 짝이 없는 턱이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 닫힐 때마다 철컹철컹, 쇠사슬이 부딪치는 것 같은 굉음이 났다.

외피의 연장선상으로 보이는 그 턱이 상당히 단단해 보이는 걸로 봐선, 갑피도 무지하게 튼튼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로 좌중을 압도하는 모양새였으나, 박무식은 당황하지 않고 소리쳤다.

"우리 A조가 먼저 진입한다! B조와 C조는 양옆으로 벌려!"

작전인즉 이랬다.

상대가 대형종의 곤충계 몬스터로 짐작되는 바.

외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전투가 길어질 확률 역시도 높았다.

역할 분담이 된 채로 각 팀이 덤벼들었다가는, 집게발이나 독침 등에 탱커나 딜러가 먼저 나가떨어질 수가 있었다.

그럼 원딜이나 버퍼만 남게 되는데, 그리 되면 사냥은 물 건너가는 셈이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각 팀원이 고루 분배된 세 개 조가 번갈아 가면서 보스몹을 두드리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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