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현질 전사
-2권 7화
정대식은 신이 나서 차례대로 덤벼드는 새끼 거미들을 정확한 잽으로 처치해 나갔다.
침착하게 주먹으로 갈기자 백발백중, 맞는 족족 새끼 거미들이 곤죽이 되어 죽어 나갔다.
그렇게 여유가 있다 보니 문득 상황 파악이 됐다.
앞서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임시 대원인 근딜들이었다.
정식 대원들은 팔짱을 낀 채 뒷전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진즉에 앞서 나갔어야 할 탱커 팀, 백양좌는 임시 대원이 아예 없는 관계로, 저만치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겨우 새끼 거미들 상대로는 싸울 마음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하긴, 이런 때 써먹으려고 딜러들을 고용한 거긴 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진짜 방패막이 신세라는 게 실감이 나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정대식은 괜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건성으로 새끼 거미들을 처치했다.
그래도 새끼 거미 정도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상황이 정리되고, 몇 마리 살아남은 새끼 거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부상자 하나 없는 수월한 싸움이었으나, 적잖이 긴장한 탓인지 임시 대원들은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정대식을 제외하고는 기철민만이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역시도 적당히 싸운 게 틀림없었다.
똑같이 농땡이를 피우고 있어서 그런지, 단번에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싸구려 철검이 비교적 깨끗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대식과 눈이 마주치자 씩 하고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전력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 다른 임시 대원들은 벌써부터 죽을상이었다.
더위와 긴장에 지쳐 땀을 한 바가지는 흘리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 어떻게 핵이 있는 곳까지 가겠다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자자, 대열 정비하고 출발한다!"
황미건이 약간 넋이 나간 임시 대원들을 채근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서 행군이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 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번엔 집채만 한 애벌레였다.
온몸에 징그러운 털이 숭숭 나 있었고,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선발대를 적으로 판단하기가 무섭게 온몸에서 이상한 체액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독가스다!"
"버퍼! 방어막을 쳐!"
"마법사들은 독가스를 밀어낸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이 쳐지고, 마법사들이 바람을 이용한 마법으로 독가스를 애벌레 뒤쪽으로 보냈다.
그 틈을 타 황미건이 딜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이번에도 싸우는 건 임시 대원들뿐이었다.
기철민을 비롯해 창검을 쓰는 근딜들이 애벌레의 물렁한 몸뚱이를 날붙이로 마구 쑤셨다.
그러자 애벌레가 상처에서 산성의 끈적한 피를 질질 흘려 댔다.
그 피 때문에 원딜들이 제대로 공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잘못해 상처가 터지기라도 하면 산성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버퍼가 제대로 보호를 해 주거나 힐러가 힐을 써 주면 될 일이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힘을 아끼기 위해 그냥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애벌레에게 죽자고 덤벼들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임시 대원뿐이었다.
"으아악!"
"죽어, 죽어랏!"
다들 악다구니를 쓰며 애벌레를 쑤셔 대며 산성 피에 화상을 입어 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대식은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건 기철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뀌에에에엑!"
마침내 애벌레가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려 죽었다.
"끝냈다!"
"죽었어!"
다들 기뻐하는 것도 잠시, 황미건은 갈 길을 재촉했고 그제야 다른 임시 대원들도 사태 파악을 한 모양이었다.
자신들만 아등바등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하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이 됐다.
얼마간 더 나아가자 정찰조가 표시해 둔 세이브 포인트가 나타났다.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뜻이었으므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임시 대원들은 쉬어 간다는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거나 땀을 닦으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건가?"
누군가 꺼낸 말에 기다렸다는 듯 한두 마디씩 여기저기서 말들이 튀어나왔다.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금방 끝낼 텐데. 아무리 우리가 임시 대원이라도 너무하잖아."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던데. 이래 가지고 어떻게 저 안까지 따라 들어가지?"
그렇게 웅성거리는 말들이 시끄러운 듯 기철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비호감 인물답게 그는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거참, 되게 말들 많네.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돌아가든가. 어차피 방패막이 노릇할 거 알고 따라 들어온 거 아냐?"
누가 그 말에 발끈했다.
"방패막이라니?"
기철민은 이를 드러낸 채로 이죽댔다.
"그럼, 방패막이지. 그게 아니고선 별 볼 일 없는 딜러들을 뭐 하러 이런 데까지 끌고 와?"
그의 말이 옳다고 느낀 건지 이번에는 대꾸하는 말이 없었다.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기철민은 끝까지 빈정거렸다.
"다들 주제 파악하고 적당히 싸워. 괜히 잘해 보겠답시고 온 힘을 다했다가 토사구팽당하지 말고."
기철민의 충고 아닌 충고에 임시 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슬슬 봤다.
그들도 비로소 임시 대원으로서의 생존 방식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잠시 후, 선발대는 다시 출발했다.
세이브 포인트를 벗어나 전진하자, 그때부터는 쉴 새 없이 온갖 몬스터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색색깔의 새끼 거미들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애벌레가 수두룩 빽빽했다.
적당히 피해 갈 수 있는 건 피해 가고, 진행을 목적으로 빠르게 이동했으나 오래지 않아 요령을 피울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다.
"으아아악!"
느닷없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것은 큼지막한 지네였다.
전신이 시뻘겋고 다리만 노란 것이 무지하게 끔찍스러웠다.
크기만도 성인 남자만 했다.
그게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나무 위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끄아아악!"
"우와아아아!"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혐오감에 사방이 아수라장이 됐다.
황미건은 아담한 체구답지 않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질겁하는 임시 대원들을 내몰았다.
"뭣들 하는 거야! 생긴 것만 징그럽지 별 볼 일 없다고! 머리를 뭉개, 머리를!"
황미건이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으나 당황한 임시 대원들은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지 못했다.
애먼 몸통만 갈라놓으니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몸체가 두 개로 늘어나는 결과만 됐다.
결국 지네 독침에 쏘여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참다못한 누군가 소리를 쳤다.
"도, 도와줘!"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임시 대원들이 목청을 높였다.
"방어막 좀 쳐 달라고!"
"힐...... 힐러는 뭐 하는 거야!"
"살려 줘!"
다들 패닉에 빠져 고함을 질러 대는 가운데, 황미건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그녀는 귀여운 이목구비를 험상궂게 일그러트린 채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쾅!
꽈르르릉!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우르르르 울렸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라 동작을 그쳤다.
심지어는 대형 지네들까지도 꿈틀거림을 멈출 정도였다.
황미건은 흉흉한 눈으로 임시 대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히 중도 포기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여기서 죽어 자빠지고 싶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싸워!"
그녀가 내뿜는 살기에 다들 대형 지네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싸우지 않고 있으면 황미건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찾아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라고 아무 생각 없이 협박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황미건은 대형 지네 몇 마리를 손쉽게 터트려 죽이고 정대식에게 말했다.
"거기 너!"
"예?"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존댓말을 쓰더니 어느새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걸 트집 잡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6등급에 버퍼도 된다고 했겠다? 그럼 인센티브 받는 만큼의 값을 해!"
정대식이 요령을 피운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나 보았다.
정대식은 속으로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강화 스킬을 펼쳤다.
"강화!"
파아아아-.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싸우던 임시 대원들이 힘을 받았다.
그들은 갑자기 높아진 공격력에 당황하며 전투를 재개했다.
곧 상황이 정리되고 지네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숨 고를 여유도 없이 다시금 대열이 출발하고, 정대식 역시도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아까 휴식 시간에 제일 먼저 불만을 터트렸던 남자가 정대식을 보고 화를 냈다.
"야, 너!"
"......나?"
정대식이 서느렇게 쳐다보자 그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머리카락을 금발로 요란하게 물들인, 꼭 양아치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래, 너. 너 버퍼면서 왜 여태껏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별안간 왜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정대식은 미간을 찌푸렸다.
"별것도 아닌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까지 일일이 버퍼를 걸어 줄 순 없잖아?"
금발 머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벼, 별것도 아니라니!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정대식은 콧방귀를 꼈다.
"엄살은. 아까 보니까 곧잘 싸우던데."
"아, 아무튼...... 임시 대원들이 전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네가 뭐라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야? 너도 임시 대원이잖아?"
"그래서, 너희 편이라도 들어 줘야 한다는 거야?"
정대식은 차갑게 말했다.
"겨우 이 정도로 죽는 소릴 할 거라면 애당초 여길 들어오면 안 됐지. 아까 그 지네도, 죽네 사네 할 만큼 위험한 몬스터가 아니었다고. 단지 징그럽게 생겼을 뿐이잖아?"
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이런 데 지원할 정도면 어느 정도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 아니었나? 그렇담 본인 목숨은 본인이 챙겨야지."
정대식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으므로 금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분한 표정으로 정대식을 노려보다 앞서 걸어가 버렸다.
* * *
우여곡절 끝에 선발대는 정찰조가 먼저 도착해 구축해 놓은 두 번째 베이스캠프에 당도했다.
첫 번째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거의 열두 시간만의 일이었다.
도중에 세 번의 세이브 포인트가 있기는 했으나, 제대로 쉰 건 처음뿐이었다.
말이 세이브 포인트지, 정찰조라고 모든 사항을 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쉴라 치면 몬스터가 튀어나와 재차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정대식은 상당히 많은 마력을 소비했다.
버퍼 역할을 거의 혼자서 도맡다시피 한 탓이다.
그나마 마력이 충분하고 체력이 넘쳐나서 다행이지 요전번, 포인트를 구입하기 전이었더라면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