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1화 (2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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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

-1권 21화

그녀가 가고 난 뒤, 정대식은 뭔지 모를 여운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손에 들린 사인지를 들여다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땡잡았다."

그가 알기로 최희의 사인지는 꽤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경매에 내놓으면 짭짤할 거라고 생각하며 구김이 가지 않게 아공간에다가 고이 넣어 두었다.

* * *

정대식은 굳이 병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누차 말했으나, 그의 의견은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보아하니 정대식의 안전이 염려된다기보다는, 이계에서 온 몬스터에 의해 어떤 바이러스나 정체 모를 물질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 그게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병원까지 실려 가 온갖 검사를 다 받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하루 동안은 입원해 있어야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온갖 매스컴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 난리였다.

몬스터 브레이크로부터 시민을 지킨 영웅이라나 어쨌다나.

진짜로 자신이 영웅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그러한 칭호를 기꺼워했을 것이다.

TV 방송에 나가서 겸손한 척도 좀 하고 감사장 받으면서 국회의원이랑 악수도 나누고...... 교양이나 다큐 프로에도 좀 나가고.

그러다 보면 예능에까지 진출해 CF 출연 제의도 들어오고, 일약 스타가 되어 떼돈을 벌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정대식은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돈 10억이 없어서 하지를 못했다.

뭔가를 했다고 해 봤자,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도운 정도?

실제로 무언가를 한 건 최희였다.

그녀가 나타나 몬스터를 소탕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도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테다.

최희야말로 진짜 영웅인데, 아무것도 못한 자신이 영웅 취급을 받는 건 쪽팔린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정대식은 모든 방송사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병원에서도 기자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그는 얼굴을 파는 일 없이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젠장, 하루 공치기만 했잖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아 들고 퇴원 길에 오른 정대식은 병원 앞에서 조사원과 맞닥뜨렸다.

"정대식 씨?"

한데 웬일인지 요전번과는 구성원이 좀 달랐다.

전에는 누가 봐도 공무원이라 여겨지는 헐렁한 남자 둘이었는데, 이번에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정대식은 마찬가지로 괴수 무슨 부서에서 나왔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 하고 인사를 해 보이자 일전에 그에게 명함을 주었던 조사원이 예의상 안부를 물어 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처음부터 멀쩡했으니까요."

"그럼 잠시 대화 가능하실까요?"

정대식은 그들을 따라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조사원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했다.

그러고 나서야 정장 차림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질문이라면 다 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묻는 건 비공식적인 겁니다."

"같은 소속이 아닙니까?"

의아해하는 정대식에게 정장 차림의 여자는 약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제 소속이 국민안전처가 아니기는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일이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무슨 비밀 요원이라도 되는 양 말을 돌리며 구체적인 대답을 피했다.

모르긴 몰라도 국민안전처와는 조금쯤 성격이 다른 정부 기관...... 국정원이나 뭐 그런 데서 나온 사람 같았다.

어차피 여자의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고, 달리 거리낄 것도 없었기에 정대식은 애써 캐묻지 않았다.

그냥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대답해 주겠다 말했고, 여자는 녹음기를 꺼내 든 후 입을 열었다.

"일단은 무슨 일을 겪으신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그거라면 벌써 여러 번 여기저기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저희는 매우 구체적인 대답을 원합니다. 그때 느꼈던 인상이나 감정, 냄새, 촉각, 시각 등, 어떤 사소한 것이든 생각나는 전부를 말씀해 주세요."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냥이었죠?"

"그것이......."

여자의 질문은 매우 상세했다.

어떤 몬스터를 맞아 무슨 무기를 써서 어떻게 싸웠고, 동선을 어디서부터 어디로 움직였는지, 부상자의 말과 행동이 어떠했는지, 특별한 냄새나 특이한 무언가를 본 적은 없는지 등을 낱낱이 캐물었다.

덕분에 정대식은 뜻밖의 난처함을 느껴야 했다.

그가 제아무리 거리낄 게 없다 한들, 본인이 가진 진정한 능력.......

현질이라든가 엔트로피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다들 날 이상하게 보겠지.'

정대식 또한 처음에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기에, 남들이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섣불리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보통과는 다른 식으로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찜찜하고, 아직 현질 능력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다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그 바람에 그런 부분을 어물쩍 넘기자 여자가 놀랍단 식으로 말을 했다.

"당신이 부상자들에게 응급 처치를 했다고요? 그것도 초능력으로?"

"예에, 그런 셈이죠."

"그럼 강화 능력과 치유 능력,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인데."

"......강화계와 변화계를 다 보유하고 있기는 합니다."

"듀얼 능력자라. 대단하군요. 딜러와 버퍼, 두 가지 포지션을 한꺼번에 소화할 수 있는 것만도 굉장한데. 강화계가 두 사람 몫을 하려면 마력량이 그만큼 받쳐 줘야 하잖아요. 거기다 치료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라? 그럼 엄밀히 말해 힐러까지 포함해 세 가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거 아녜요?"

"어, 음...... 그게 실은 여태까지는 제가 변화계 능력자인 줄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렇담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번째 능력을 각성했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겠죠?"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그렇게 된 건가요? 그 부분을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군요."

정대식은 별생각 없이 질문에 응했던 걸 약간 후회하며 그럭저럭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정신계 능력까지 갖추었다는 걸 알면 기절하겠군.'

스스로도 소설 쓴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아무튼 간에 남들이 듣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짜 맞추긴 했다.

원래 정대식은 없는 일을 지어내는 데 능숙한 편이었다.

평소에도 벌거벗은 진실보다는 적당한 거짓이 더 옳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만족했는지 어쨌는지, 여자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기를 껐다.

"오늘 이야기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한 40%쯤은 지어낸 이야기였지만 정대식은 얼굴에 철판을 딱 깔았다.

그러자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새삼 악수를 청해 왔다.

"이번에 정대식 씨가 한 일로 여러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요. 몬스터를 처치한 것도 최희 씨였고, 저는 그저 승객들을 데리고 도망친 것밖엔......."

정대식이 겸양을 떤다고 생각한 것일까.

여자는 정대식의 손을 힘주어 꽉 붙잡았다.

그리고 목소리에도 힘을 주어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최희 씨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 분은 한 명이니까요. 만약에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정대식 씨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헌터 한 분 한 분의 활약이 더 필요해질 겁니다."

그녀가 하는 말에 정대식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무슨 일? 몬스터 브레이크 말인가?'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평화로움이 자각되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 한낮의 커피숍은 일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아무리 한 거리에서 몬스터 브레이크가 있었다고 한들, 지금 이곳은 그런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고, 길에 지나가는 사람도 각자의 일로 바빠 보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니?

정대식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자가 그의 손을 놓으며 웃었다.

"물론 정대식 씨는 평범한 헌터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각성한 지 며칠 만에 7등급 헌터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듀얼 능력자가 되다니. 앞으로 더 얼마나 성장할 지 기대가 됩니다. 줄곧 정대식 씨를 지켜보고 있겠어요."

"아뇨, 지켜보실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아 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안 했군요. 전 장한나라고 해요. 다음부터는 한나 씨라고 불러 주세요."

또 만나서 대화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대식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한나가 오늘은 고마웠다고 말하며 다른 조사원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보내고 정대식은 커피숍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장한나와 대화하면서 느낀 바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어제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하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지.'

그러자 평온한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는 광경이 쉽게 상상이 되어졌다.

'10년 전에 몬스터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실제로 이곳에 트롤 한 마리만 풀어놓아도 아비규환이 일어나겠지. 드래곤이라도 나타났다가는...... 서울 전체가 폭사할지도 몰라.'

그런 일을 떠올리자 목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럼 건물을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이클롭스 발길질 한 번에 왕창 무너져 버릴 텐데. 제아무리 재산이 많다 한들 몬스터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어.'

정대식은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도 흡사 던전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더 이상 몬스터가 던전 안에만 존재하는 우리 안 맹수가 아니라는 게 여실히 와 닿았다.

그때였다.

<그것이 욕망이다.>

정대식은 놀라서 멈칫했다.

'......뭐?'

<생존 욕구. 그것 또한 욕망.>

'이 목소린...... 데모크리토스?'

신의 공간에서 들었던 목소리.

재물과 탐욕, 그리고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의 음성이었다.

<너는 세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에 각인하였다. 그것을 이겨 내기 위해 너는 더욱 욕망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를 욕망하라!>

정대식은 귓속에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 사람들이 왜 저러나 힐끗힐끗, 쳐다봐 왔으나 데모크리토스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머쓱해진 정대식은 슬그머니 커피숍을 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걸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젠장.......'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를 욕망하라니.

그것은 그에게 대가를 종용하는 말이었다.

그 대가란 다름 아닌 돈!

'불안하면 현질을 해서 강해지란 말인가...... 그래. 강해지면 되잖아, 강해지면.'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뛰쳐나와 무슨 지랄 발광을 떨든, 상관없을 만큼 강해지면 그만이다.

그럼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돈 10억이 없어서 죽겠다는 생각은 안 해야 할 거 아냐.'

정대식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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