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1화 (1/297)

# 1

현질 전사

-1권 1화

Chapter 0. 각성

새하얀 공간.

위를 봐도 희고, 밑을 봐도 희다.

오른쪽도, 왼쪽도 마찬가지다.

온 사방이 눈이 멀어 버릴 듯 희었다.

보통이라면 자신이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대식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동안 수많은 각성자를 만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곳이다.

'신의 공간!'

정대식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깨달았다.

'내, 내가 신의 공간에 불려 오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신의 공간에 불려 가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어쩌면 지나치게 간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각성자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신의 공간에서 신을 대면하게 될 경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러고 나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면,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지나치게 피로한 밤, 도리어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항상 생각했다.

로또 1등 당첨 생각보다 더 자주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각성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진짜로 신의 공간에 불려 왔다고 생각하니까 도통 실감이 안 났다.

상상력이 지나쳐 환각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대식은 자신의 뺨을 소리 나게 후려쳤다.

짜악!

"으윽."

그리고 신음을 삼키며 볼을 부여잡았다.

'이게 꿈이라면 얼른 깨라...... 아, 아니! 깨지 마!'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 뺨을 문지르면서 정대식은 고개를 홱홱 저었다.

'꿈이라도 좋아, 영원히 깨지 않을 수 있다면 꿈이라도 상관없다고!'

그때였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누구냐?>

영혼을 뒤흔드는 것처럼 묵직한 음성.

그것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신의 공간에 불려 간 인간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신에게서 특별한 힘을 얻게 되는 자들.......

이른바 선택받은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같이 똑같다고 했다.

'이계의 존재를 처단하라, 그리하면 힘을 얻게 될지니.'

그런데 정대식에게 들려오는 말은 그와는 달랐다.

어째서인지 자신의 정체를 물어 와, 그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정, 정대식."

그러면서 아무래도 이건 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자신도 다른 자들과 똑같은 말을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에게만 다른 말이 들려왔다는 건,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았을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는 기적일 뿐.

평범하다 못해 하찮기까지 한 보통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꿈이라면 될 대로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정대식은 잔뜩 굳었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침착한 태도로 허공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재물과 탐욕, 그리고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

"데모...... 뭐라고?"

<내게 돈을 바쳐라.>

"돈?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을 바치라니.

돈이라면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바쁜 사람에게 돈이라?

이게 웬 사이비 종교스러운 말인가 싶어서 정대식은 투덜거렸다.

"개꿈이네, 개꿈이야."

지나치게 실감나기는 하지만, 똥꿈도 아니고 그냥 개꿈이라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

시간 낭비일 뿐인 이런 얼토당토않은 꿈은 빨리 깨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허공의 목소리가 뒷북치는 소리를 했다.

<그리하면 힘을 얻게 될지니.>

그래 봤자 이미 늦었다.

개꿈이란 걸 알아 버렸다고!

정대식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의 빛이 팍 꺼졌다.

정확히는 온통 희게 빛나던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대신 끝도 없는 암흑이 펼쳐졌다.

마치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

그게 정대식을 덮쳐 왔다.

순간, 감각이 흐트러지며 격심한 혼란이 찾아들었다.

끝없이 어디론가 추락하는 것처럼 온몸의 피가 격동했다.

뇌까지 뒤흔들리며 심장이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그 바람에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죽어라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 * *

"야, 정대식! 정대식!"

"으아아아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정대식은 질겁했다.

누가 어깨를 붙잡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내고 눈을 번쩍 뜨자,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면면들이 보였다.

개중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홍, 홍만기?"

흔히 같이 일하곤 하는 홍만기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모르는 얼굴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으음?"

정대식은 퍼뜩 사태 파악을 하지 못했다.

'뭐야?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저 눈을 빠르게 끔벅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었나? 이상한 개꿈을 꿨는데...... 그럼 지금 이부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왜인지 입을 쩍 벌리고 선 홍만기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홍만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너...... 설마 각성한 거야?"

"각성이라고?"

어안이 벙벙해 묻는 정대식을 보고 홍만기가 소리쳤다.

"그래! 각성! 너 방금 전에 각성한 것처럼 보였다고!"

"내가?"

"전신에서 빛이 났잖아!"

홍만기가 흥분해 하는 말을 듣고서 정대식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제야 천천히 기억이 복구되어, 어찌 된 일인지가 떠올랐다.

'맞아, 난 자고 있던 게 아니었어. 일하러 나왔었지. 북한산에 있는 던전으로.......'

정대식은 고아였다.

정확히는 고아가 되었다고 할까.

10년 전, 그가 열두 살 때 '확장 현실 세계'가 시작되었다.

게임이나 소설, 옛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던전'이 곳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괴물들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고,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식은 가족을 잃었다.

혼자가 된 그는 보육원으로 가게 되었으나 그와 같은 처지가 된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는 넘쳐 나는 고아들 가운데서 방치되다시피 컸으며, 열여덟이 되던 해 반 강제적으로 자립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온갖 험한 일을 전전하며 살아오기를 4년 여.

정대식은 그의 행복을 집어삼킨 던전에서 일을 하게 됐다.

던전의 존재가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게 되며 그곳에 일자리가 늘어났던 것이다.

개중에 가장 손꼽히는 직종은 당연히 헌터였다.

헌터란 '각성'을 통해 특별한 힘을 얻게 된 초인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흔히 각성자, 능력자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던전의 출현과 동시에 나타났다.

몇몇, 특정한 사람들이 신의 공간이라 불리는 곳에 가서 신의 음성을 듣고 추방당했다.

그러고 나면 초능력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능을 얻게 된다.

그들은 신의 목소리가 말했던 임무.

'이계의 존재를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게 바로 몬스터 사냥이었다.

던전 안에는 이계의 존재, 즉 온갖 몬스터들이 우글우글했다.

각성자들은 던전으로 들어가 놈들을 처치해 나가며 실력을 쌓아 나갔다.

그들의 활약으로 베일에 싸여 있던 던전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던전 안에는 몬스터뿐만이 아닌 온갖 신비로운 것들.......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 가득했다.

그게 밖으로 흘러나오며 세상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현재.

세계 경제는 던전이 생산하는 자원으로 굴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정대식 또한 그러한 경제 활동에 일조하고 있었다.

바로 헌터들이 죽인 몬스터를 지고 나르는, 짐꾼으로써 말이다.

물론 말이 일조를 하는 거지, 짐꾼이 하는 일이라고 해 봤자 뻔했다.

헌터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허드렛일에 불과했다.

던전 개막 시대에 생겨난 대표적인 3D 업종이라고 해야 할까.

과거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하는 일용직, 즉 노가다와 별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수입 정도?

던전에서 일하는 짐꾼은 벌이가 상당했다.

아무리 못 벌어도 몇 백은 건져 간다.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서 그렇다.

제아무리 능력 없는 보통 사람이라 하더라도, 던전 안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몬스터가 각성자와 일반인을 가려서 덮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놈들과 싸우는 건 헌터라지만, 몬스터들이 습격해 오면 헌터들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한낱 짐꾼의 목숨까지 보살펴 주지는 않는다.

언감생심,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걸리적거린다고 업신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랄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꽤 많은 헌터들이 짐꾼들을 천대했다.

운이 나쁘면 성질 더러운 헌터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정대식에겐 오늘이 바로 그 운이 나쁜 날이었다.

흐물거리는 슬라임 시체를 수레에 싣다가, 지나가던 헌터에게 체액이 튀어 버린 것이다.

상대는 정대식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헌터였다.

그녀는 전신에 새것으로 보이는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다.

갓 장만한 방어구를 더럽혔다며 정대식에게 몹시 화를 냈다.

정대식으로선 아니꼬운 노릇이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방어구라고.

딱 보기에도 그 방어구는 싸구려로 여겨졌다.

물론 제아무리 싸구려라도 몇 억쯤은 하겠지만, 아무튼 값비싼 방어구를 착용할 정도면 고작 슬라임 따위나 잡고 있지도 않을 테다.

한마디로 정대식이 보기에 별 볼 일 없는 작자였다.

그런데 그 알량한 방어구에 슬라임 체액 좀 튀었다고 지랄지랄을 해 대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대식이 누구냐.

그는 돈 앞에서는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 돈이 최고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그였으므로, 정대식은 거리낌 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비굴하리만치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로...... 얼른 닦아 드리죠!"

정대식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여자의 방어구에 묻은 체액을 닦아 주려 했다.

한데 그게 화근이었다.

"아니, 지금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정대식의 행동을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라도 한 것인지, 여자는 앙칼지게 소리를 치며 그를 떠밀었다.

그리고 당장 정대식을 후려칠 듯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

정대식은 그냥 맞아 주자는 생각으로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 불벼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실눈을 떠 보니 온 사방이 희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었지.'

정대식은 신의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찬찬히 돌이켜 보았다.

'돈을 바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꿈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그게 진짜로 신의 목소리였다고?'

그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뇌까렸다.

"내가 각성을 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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