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11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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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이 이번에도 조심하며 물었다.
“어젯밤에 올린 제 작전 계획 보고서는 보셨나요?”
“그대의 작전이 아니고 바에자 현신의 작전이 아니던가?”
“……아무렴 어떤가요. 폐하께서 승인만 해 주시면 그대로 진행합니다.”
평소 틈만 나면 카나르의 권위에 일부러 생채기를 내려 했던 마누엘은 오늘만은 대충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오늘 같은 날 이런 인간 잘못 건드렸다가는 괜스레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이미 그대로 진행하고 있고만.”
이미 포진을 시작한 칼데아 연합군을 내려다보며 카나르가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마누엘의, 아니 바에자의 계획이 맘에 안 들어서는 아니었다. 칼데아군의 전방에는 주력군인 중장보병 20만이 이미 땅을 하얗게 뒤덮고 전투 준비를 갖추는 중이었다. 갑주와 무장까지 갖춘 그들은 분대별로 모여앉아 사역병들이 가져다준 아침을 먹거나 무기, 장비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이들 보병만으로도 숫자로는 맞은편의 황실-서부-북부의 동맹군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교단에서 보내 준 코런덤 2천은?”
“코런덤 헤네티들은 황실군과 맞설 중군 보병대에 함께 배치했으니 황실군 가디언 사관들도 두렵지 않습니다.”
마누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20만이나 되는 칼데아군의 중장보병대가 숫자도 적은 황실군 보병대를 가장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건 분대장을 맡은 가디언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양손검을 휘두르며 파고들면 아무리 견고한 중장보병대도 선두부터 썩썩 쓸려나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디나가 쌍둥이로 깨어난 2천의 코런덤 X들을 칼데아군에 지원해준 덕분에 최소한 일방적으로 밀리는 건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신경 쓸 건 황실군 포병대뿐인가?”
“보병대가 바싹 붙으면 그때부턴 황실군의 잘난 포병대도 소용이 없어지니까요. 북부군은 아직 오합지졸이고, 서부군은 그냥저냥 상대할만하니까요.”
중장보병대장 마누엘이 으스댔다. 1선에서 소위 몸빵을 할 중장보병대의 뒤편 2선에는 사실상 전투를 결판낼 기동부대가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왼쪽에는 황제 카나르가 직접 지휘할 4만의 제1기병대가 언제든 적의 측면을 돌아서 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편 오른쪽에는 바에자가 이끄는 3만의 근위대와 네코가 맡은 1만의 제2기병대가 역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장보병대가 두세 시간만 버티어 주면 우리가 여유 있게 이기겠소.”
적과의 엄청난 군세 차이를 확인한 카나르가 억지로 웃었다. 맞은편에는 칼데아군의 절반 조금 넘는 21만의 황실 동맹군이 마찬가지로 대오를 갖춰가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진 덕분에 망원경 없이 딱 보기만 해도 그들의 포진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철성에 있는 것 같다고 그랬는데, 아직도 저 위에 있으려나?”
“글쎄요, 본대를 지휘하러 내려왔을 수도 있긴 한데 아직 적진에 황제기는 안 보입니다. 그 성격에 깃발 감추고 숨어있지는 않을 텐데요.”
마누엘이 망원경의 배율을 최대한 높이고 이번엔 황실 동맹군 진영을 유심히 살폈지만 제국 황제기 [다라프시 카비아니]는 보이지 않았다. 헬리노스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죽을 둥 말 둥 한다더니 이미 황천에 있는 건 아닐까요?”
“글쎄. 그러면 대환영이지만……황제가 죽은 군대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좋은데. 철성에서 교단과 붙으려고 준비 중인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저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기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뭔가 생각은 있을 텐데.”
클리멘트가 연신 망원경을 눈에 댔다 떼었다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실 동맹군 중앙에는 3만의 황실군 보병대가 명문 1군단과 3군단의 깃발을 경쟁적으로 세우고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양옆으로는 서쪽의 서부군 보병대 6만, 동쪽의 북부군 보병대 6만이 각각 자리를 잡고 아침을 먹는 모습들이었다. 결국 황실 동맹군의 1선 부대 15만은 중앙의 황실군 3만을 빼면 모두 제후군들이었다.
“저기 후미를 봐, 솔직히 우리가 숫자는 많아도 저 정도면 만만하지는 않지.”
마누엘이 황실군의 2선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실 동맹군의 가장 위협적인 기동부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 2만과 서부 낙타병단 1만이 두툼한 포진을 이룬 것이 칼데아군 지휘관들의 속을 불편하게 했다.
“가만, 저거 베아트릭스 그년 깃발 아냐?”
“뭐?”
‘베아트릭스’라는 말에 카나르와 헤즈가 동시에 망원경을 들었다. 황실군의 2선에 있는 황실군 기병대에는 지휘관기로 대장군이며 황빈인 베아트릭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의 깃발을 본 카나르와 헤즈의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플라칼 종가에서 전투 끝내고 바로 달려왔나 본데.”
마누엘이 카나르 부자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저 위치라면 베아트릭스가 카나르의 4만 기병대와 딱 맞서게 될 판이었다. 비록 베아트릭스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무리한 탈출을 감행한 자업자득이었지만 지금 카나르와 헤즈에겐 베아트릭스의 깃발 자체가 가족 원수의 표식처럼 보였다.
마누엘이 카나르 부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 있으시겠죠?”
마누엘의 생뚱맞은 물음에 카나르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칭 유목민이니 지네 전통대로 저년 머리를 말굽으로 짓밟아 죽으로 만들어놓으면 되겠나. 저쪽은 나와 헤즈 둘이서 맡겠다.”
‘어휴, 제대로 만났으니 사단 나겠네.’
카나르의 험악한 표현이 마누엘도 헛기침을 했다.
클리멘트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얼른 돌렸다.
“그래도 저기 사령부 주변에 있는 놈들만 하겠어요?”
“하긴.”
클리멘트의 말에 무장들도 모두 수긍했다. 적 후방의 사령부 부근에는 친위군 가디언군단 1만과 에키트 보병대 1만이 1번함 주변을 빽빽이 에워싸고 전장의 동쪽 서쪽 어디든 달려 나갈 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저들은 전투 중 어디든 조금이라도 약한 곳을 찾으면 순식간에 뛰어들어 무너뜨릴 터였다.
“그러니 우리도 준비해 놨잖아.”
마누엘이 사령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가벼운 갑주에 창과 방패로 무장한 5만의 경보병대가 말을 탄 1천의 코런덤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몸빵 소모품들이죠.”
카나르를 따라온 헬리노스 호지 경이 킬킬거렸다. 카나르가 눈치 없는 소리를 하는 그에게 얼른 입조심을 하라며 손짓했다. 그런 만큼, 헬리노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페즈가 맡고 있는 경보병부대 5만은 황실과의 회전에서 가디언들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하고 훈련한 일회용 부대였다. 가디언에게 필요도 없는 중갑옷을 아예 내버리고 대신 크고 두꺼운 방패와 창을 들려 숫자와 기동성만으로 몰아붙여 1만의 친위군 가디언들의 돌격을 막아내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이 한 번의 전투로 죽으리라는 건 지휘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오르마즈 놈은 우리가 자기 돌격에 영감을 받아서 저 부대를 만들었다는 걸 알면 저승에서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마누엘의 농담에 헬리노스가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런 질문은 저네들이 그때 북부기병대만큼 밥값을 한 후에 하시죠.”
“그나저나 저놈들 좌익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클리멘트가 조금 전과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이 자리에서 그나마 가장 진지한 것이 그였다. 그의 말대로 황실군의 좌군을 맡은 북부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온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철성에서 내려온 송풍로와 분지가 만나는 나팔 모양 지점을 딱 차지하고 있었다.
“북부군이 지난 제위전쟁 때만큼 해 주리라고 믿는 걸까요?”
“어림도 없지.”
헬리노스 호지 경이 정색을 했다. 6만의 북부 장창보병대와 1만이 창기병대가 맞서야 할 부대는 헬리노스가 지휘할 칼데아군 7만의 중장보병대와 기병 1만, 그 뒤의 무시무시한 근위대 3만이었다.
“그때야 황실의 걸출한 가디언과 무장들이 이끌었으니 무적이었지만 이젠 북부에 그때만한 무장이 없으니 우리랑 잘해야 비등비등할걸.”
“다 필요 없어. 2선이 돌아서 치면 저긴 한두 시간이면 끝나.”
카나르의 냉정한 평가에 무장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쪽 1선의 보병대끼리야 머리 맞대고 줄다리기를 한다손 쳐도 정작 중요한 건 그동안 돌격해 결판을 지을 2선이었다. 칼데아군의 2선에는 이쪽의 최정예부대인 바에자의 근위대 3만과 중장기병 1만이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금세 승부가 날 테니 아버지께선 너무 늦지 않게 베아트릭스 년을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확 끝나버리면 큰일입니다.”
헤즈의 자신에 찬 말에 몇몇 무장들이 박수까지 쳤다. 포진을 보아선 바에자의 근위대 손에 전투가 결판이 나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잠시나마 밝아졌던 분위기는 누군가 절룩거리며 들어오는 발소리에 일순간 잠잠해졌다.
“이렌느 경?”
카나르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참모장 이렌느를 보며 반색을 했다. 지난 철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이틀간 병원 신세를 졌던 이렌느가 부러졌던 발목에 프레임까지 하고 절룩거리며 지휘소에 들어서고 있었다. 원래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제대로 독기가 오른 모습이었다.
“어젯밤부터 이미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역병단도 후방에서 부상병과 보급품을 수송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포병대도 방열이 거의 끝나가고요.”
이렌느는 병세에 관해 물으려는 사람들을 슬며시 무시하며 바로 사무적인 이야기로 건너뛰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300문이 넘는 크고 작은 칼데아군의 발리스타 포대가 촘촘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포병대는 칼데아군이 황실군에 비해 질에서도, 양에서도 눈에 띄게 처지는 유일한 부대였다.
“이참에 이기면 저 포대부터 싹 다 우리가 먹어버려야겠어.”
카나르가 망원경으로 황실군의 어마어마한 포병대를 지켜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카렐 황제의 즉위 이후 대폭 증강된 황실군 포병대에는 기계식 가속에 전자기 가속 기능까지 더해진 장거리 발리스타 아나콘다가 400문이 넘게 보여 이들을 오싹하게 했다.
“적 포병대 강하다는 걸 모른 것도 아니고……약은?”
“아침 식후에 비타민제라고 말하고 전원에게 지급했습니다. 전투부대와 사역부대 사관급 이하 전원에게 강제로 먹이게 했으니 슬슬 효과가 나타나겠죠.”
냉큼 대답했던 이렌느는 자신을 향해 불편한 표정을 짓는 다른 무장들의 시선을 눈치챘다. 지금까지도 전투를 앞두고 가벼운 흥분제를 먹인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 이렌느가 전군에 지급한 건 거의 환각제 수준의 약물이었다. 전투에서 장병들에게 마약을 먹이자는 건 전투보다는 심리를 주무르는 데 더 능숙한 이렌느다운 발상이었다. 이미 한 번 참패를 경험했던 그는 이번에 이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이렌느가 그들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나팔소리와 격려만으로 가디언에게 덤비게 할 자신들이 있으신가 보오?”
무장들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가디언들이라고 천하무적이 아닌 이상, 여럿이 동시에 덤비면 분명 죽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전에 공황상태에 빠져 무기도 못 휘두르는 것이었다. 병사들에게 더 강한 마약을 먹이는 건 무장들에겐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병사들이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거나, 전투가 길어졌을 때 약기운이 떨어져 금단현상에 오합지졸로 무너지게 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까짓 거 이번 한 번 전투인데 환각제 아니고 독약은 못 먹이겠소? 어차피 살아 돌아가서 사회에 득이 될 놈들은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이렌느의 악마 같은 미소에 다른 무장들이 오싹함을 느꼈다. 애당초 그다지 인간적인 면모는 없었지만 이번에 자식들을 둘이나 잃고 패전을 겪으면서 그는 더 극단적으로 변해 있었다. 카나르가 얼른 대화를 돌렸다.
“그럼 우리 쪽 준비는 다 끝난 셈이군. 저 동네는 어떻지?”
카나르와 지휘부는 교단 지휘부가 있는 숙영지 동쪽 크테시폰 궁 방향으로 움직였다. 보안국 특공대의 공격으로 반파된 크테시폰은 훼손된 연구소 블록을 아예 떼어내고 급한 복구를 대충 마친 상태였다. 그 옆에서는 1, 2천 남짓이 타는 소형 수송함 4척이 해치를 벌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카나르가 수송함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정말로 대신관이 철성에 직접 가겠다고 그러나?”
“9시가 되면 구름이 덜 걷혀도 무리해서라도 출발할 거랍니다. 적이 철성에 지원군과 방공부대를 보내기 전에 빨리 들어가려 하나봅니다.”
“배도 부른 여자가 조용히 궁 안에 붙어나 있지 어딜 전쟁터에 싸돌아다닌다고.”
“산꼭대기에 무슨 금송아지라도 숨겨놨나 보죠.”
마누엘이 툴툴거리는 소리에 지레 놀란 카나르와 헤즈가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마누엘이 그들의 가슴을 다시 철렁하게 했다.
“아참, 아트위야 현신 보셨습니까? 어제부터 그 양반이 영 안 보이고 연락도 안 받는데요.”
“내가 교단 사정을 어찌 아나!”
처자식 일로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카나르는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미처 인식 못하고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뭐 그런 걸로…….”
평소답지 않은 카나르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마누엘이 말끝을 어물거렸다. 눈치빠른 그의 딸 클리멘트가 아트위야 이야기에 지나치게 놀라는 카나르와 헤즈 부자를 슬쩍 곁눈질했지만 그도 이들의 속사정을 아는 건 아니었다.
“아트위야 현신은 여기 하임달의 주인이고……저 꼭대기의 통제소를 되찾으면 아트위야 현신이 있어야 거길 제대로 다루지요.”
“대신관한테 물어보든가.”
때마침 한쪽에서 8시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작전 계획대로라면 이제 본격적인 포진을 시작할 때였다. 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보병들이 무기를 들고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고, 제대별로 지휘관과 사관들의 고함이 울리기 시작했다. 카나르도 각군 지휘관들에게 내려가라며 손짓했다.
“9시를 알리는 나팔이 울리는 대로 우리의 영광스런 성전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
산 밑의 분지에서 대 회전을 앞두고 팽팽한 긴장이 높아지는 그 시각, 제플린 산 꼭대기의 검은 철성은 그보다 더한 공포와 기대가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코리온은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마비가 된 왼손을 꽉 움켜쥐고 세네피스와 아트위야의 병실을 나섰다.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세네피스가 황상의 상태를 알려달라며 쉰 목으로 악을 쓰는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도대체 손목이 얼마나 아프길래 이 난리야!”
평소 코리온에게 접근도 하지 않던 페로도 이번엔 비틀거리는 그를 주페와 함께 양옆에서 부축하고 방을 나섰다. 세네피스와 페로의 고함에 놀란 사람들이 주변에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 난 거야?”
황금탑 옆에서 꿀잠을 자고 있던 네피도 눈곱을 떼며 일어났다. 막 잠에서 깬 마리안도 어른들을 헤치고 고개를 디밀었다. 수술 시작을 도운 후, 피곤을 이기지 못해 살람과 잠시 교대하고 밖에 나와 눈을 붙였던 야투 박사가 일어나는 모습에 코리온이 눈을 흘겼다.
“황상의 수술을 도우라고 기껏 살려놨더니 결정적인 때 고작 잠이나 자고 있던 거냐!”
“아, 아니 그게……전 절개까지만 도왔고 빼기 전에 깨우라고 했는데……절 깨우지도 않고 뽑은 겁니까?”
잠이 덜 깬 야투 박사가 시계를 보고는 지레 놀라 기겁을 했다. 그의 말에 코리온은 덜컥 불안감을 느꼈다. 신중한 니사가 야투 박사를 자고 오라고 내보내놓고 혼자 잔딕을 확 빼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코리온 손목의 통증은 잔딕을 빼냈다는 게 아니고 수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코리온은 수술실 문 앞에 선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1분을 기다리고, 2분을 기다리고, 3분을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사이, 남쪽의 황실군 본대에서 크바르나 1천이 이곳을 향해 출발한다는 연락도 들어왔지만 그 소식에 흥분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코리온의 손목을 울린 지독한 아픔은 순식간에 사라져 이젠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황제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설마…….”
그때, 문 안쪽에서 에스더의 울음과 마하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페로가 결국 참다못해 문짝을 쾅쾅 두들겼다.
“무슨 일이냐! 당장 문 열지 못해!”
결국 페로가 발로 철문을 꽝 걷어찼다. 한 번에 열리지 않자 그는 두 번, 세 번, 미친 듯이 문을 걷어찼다. 평소라면 말렸을 가디언들도 총리의 이 난동을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녹슬고 삭은 경첩이 통째로 떨어지며 문이 안쪽으로 덜크덩 소리를 내고 밀려들어갔다.
“카렐! 카렐!”
페로는 위생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무작정 안에 뛰어들었다. 카렐의 얼굴을 안고 떨어지지 않는 마하와 몸싸움을 하던 니사가 당혹스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페로의 눈은 수술대 밑으로 축 늘어져 있는 카렐의 오른손과, 그 옆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바이탈사인 계기 사이에서 몇 번을 오갔다.
“어찌된 거냐?”
카렐의 심장은 분명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손에서는 움직임이 없었다. 피곤에 절어 눈 크기가 절반이 되어버린 니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제의 키를 잔딕 뒤에 꽂았는데……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으십니다. 어쩌면…….”
페로를 따라 들어온 코리온이 그를 옆으로 밀치고는 황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하까지 거칠게 밀어냈다. 니사의 말대로, 카렐은 호흡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뒤로 떨군 채 축 늘어져 아무 반응이 없었다.
“폐하?”
코리온은 카렐의 눈을 열고 불빛을 대 보았다. 반짝거리던 그레이오팔은 이미 빛을 잃었고, 동공도 좁아지지 않았다. 에스더가 왜 그리 서럽게 울고 있는지, 마하가 왜 반쯤 미쳐서 날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렐의 뇌간이 죽었다는 뜻이었다.
“이, 이런.”
코리온은 아직 절개된 상태 그대로인 카렐의 왼쪽 손목을 보았다. 근육과 뼈, 신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곳엔 살점과 뒤엉켜 검붉게 변한 13번 잔딕이 꽁무니에 사제의 키를, 양쪽 옆에 2개의 잔딕을 꽂고 십자 모양이 되어 빼다 만 모양으로 손목 안에 여전히 묻혀 있었다.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은 머리에 있어야 할 뇌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분명히 매뉴얼대로 빼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태가……어쩌면 뇌사인지도…….”
니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뭐? 뇌 뭐?”
코리온은 완전히 넋이 빠진 얼굴로 카렐을 내려다보았다. 뇌간이 죽었다면 심장만 혼자 뛸 뿐 카렐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수술실은 물론이고 그 밖에서 황제가 깨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던 가디언과 크바르나들이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말도 안 돼요! 나 술 사주신다고 했는데!”
자이납은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몸부림을 쳤고, 딸이 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네피도 얼이 빠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판단력을 잃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코리온은 속살과 뇌간이 드러난 카렐의 손목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멍청한 햇병아리 같으니!”
수술실이 떠나갈 듯한 야투의 고함에 울고불고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자다 말고 황망한 얼굴로 코리온을 따라들어온 이 늙은 의사는 수술용 집게를 왼손으로 덥석 집더니 황제의 손목에 꽂힌 13번 잔딕을 물고는 그대로 힘으로 확 빼내버렸다.
“으, 으앗! 뭐 하십니까!”
니사가 비명을 지르며 야투의 팔을 붙들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잔딕이 뽑혀나간 카렐의 손목에서 피가 벌컥 솟구쳤다.
“뇌간 역할을 대신하던 잔딕을 껐으니 당연히 뇌사상태지! 이 멍청아! 껐으면 바로 빼내야지 왜 못 뽑고 질질 짜고 있는 거냐! 외과의사라는 것이 왜 이리 간이 작아!”
야투는 피곤함과 긴장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후배에게 목에 핏발이 곤두서도록 호통을 쳤다.
같은 순간 손목에 아픔을 느낀 코리온이 다시 휘청거렸다.
“이익.”
코리온은 손목을 쥔 채 실실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통에 이토록 기뻐보기는 처음이었다. 까마득한 선배 의사에게서 제대로 혼구멍이 나고 비로소 정신이 퍼뜩 돌아온 니사가 급히 카렐의 눈에 불빛을 댔다. 눈은 아직 탁했지만 동공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잔딕이 빠지면서 비로소 카렐 자신의 뇌간이 제대로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움직이십니다!”
의사로서 거의 저승에 다녀온 니사도 그대로 다리가 풀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분을 죽일 뻔했습니다.”
카렐의 몸도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에스더는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카렐의 몸을 꼭 안았고 마하는 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며 손뼉을 쳤다.
“빨리 봉합하고 마무리해라.”
코리온은 여전히 절개된 상태 그대로 열려 있는 카렐의 손목을 가리키며 니사와 야투에게 수술실을 맡기고 밖으로 나섰다. 잠시 충격을 받았던 페로가 나가지 않겠다고 어린애처럼 떼를 썼지만 다룬이 그를 억지로 달래어 다시 수술실 밖으로 끌어냈다.
“황상의 수술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코리온이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황제의 안전을 확인한 황금탑 주변 장병들이 비로소 안도하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이 다 좋아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제 그럼 살아나신 거예요?”
지옥과 천당을 오간 자이납이 눈물을 닦아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철성 바깥에서 경계병들이 울리는 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세하의 고함이 방송을 타고 안으로 전해졌다.
“본대에서 출발한 크바르나 1천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 수송함 4척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크테시폰에서 출발한 교단 수뇌부인 것 같다는 연락입니다.”
‘교단 수뇌부’라는 말에 자이납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코리온이 그런 자이납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이긴다면 그렇겠지.”
방금 전까지 수술실 앞에서 환호성을 울렸던 장병들은 부랴부랴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고 철성 밖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샤드가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닦아내며 그들 모두에게 고함을 질렀다.
“크바르나여! 기뻐하라! 드디어 우리가 수백 년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단 무리와의 마지막 성스러운 싸움이다!”
지난 수백 년간 아샤드를 따랐던 크바르나들도, 카렐이 새로이 키워낸 시라즈 출신의 크바르나들도 그의 포효에 맞받아 폭발하는 함성으로 황금탑과 검은 철성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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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의 부제는 [짬밥은 괜히 먹는 게 아니다] 입니다. ㅋㅋㅋ
그러고보니 이번이 1111(!!!) 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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