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케메니안 궁으로 돌아온 야푸르 대신관은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욱리하변에 위치한 이 거대한 궁전은 콜로니를 이끄는 12개 교단의 통합본부인만큼 규모부터 주변을 압도하는 거대한 형상이었다. 사실 높이만으로 치면 후세에 이 위치에 세워질 ‘제국 황궁’에 비해 훨씬 낮은 40층 정도였지만 검은 유리로 뒤덮인 이 피라미드형 건물의 연면적은 그보다는 훨씬 더 컸고, 정원까지 포함한 전체 단지의 면적도 이후 자리잡을 황궁 컴플렉스 2배가 넘는 정도였다.
사실 이 피라미드가 완전한 오면체였다면 그 높이도 거의 60층에 육박했겠지만, 그 꼭대기 부분은 마치 칼로 뚝 잘라낸 듯한 모양의 ‘특별한 옥상’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콜로니에서 가장 큰 종교행사가 열리는 제단이었고, 12명의 신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옥상에 위치한 제단에는 교단 통합조직을 상징하는 ‘날개를 펼친 새’의 형상이 중앙에, 그리고 각 교단을 뜻하는 12개의 신상이 그 주변의 각 방향을 마치 시계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야푸르와 6명의 마구스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멤버’를 신들에게 소개하는 간단한 행사를 치렀지만 오르마즈는 의도적으로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척 했다. 아니, 아직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오르마즈에게 야푸르가 새로 마련해 준 처소는 바로 그 제단 바로 옆에 있는, 한때 자신이 머물던 작고 예쁜 유리 펜트하우스였다. 물론 그 ‘시큰둥한 후계자’가 대놓고 좋아해 줄 리는 없었고, 도리어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건 야푸르 쪽이었다.
“내 혼자 지낼 때는 썰렁하고 무언가 허전해 보였는데, 이렇게 함께 있으니 신의 품 안에 안겨있는 것 같다.”
야푸르가 창가에 멍하니 선 오르마즈의 어깨를 뒤에서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꼼꼼한 그가 직접 고른 만큼, 사방으로 탁 트인 너른 전창 너머 아케메니아 시의 전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환한 공간이었다.
“나도 그렇게 느끼기를 바라는 건가요?”
오르마즈가 어깨를 안은 그의 팔을 쳐내려 했지만 야푸르는 도리어 힘을 주어 그를 더 꽉 안았다.
“몇 가지만 확실히 해 주시죠.”
“뭘?”
“당신과 나의 관계는 도대체 뭐죠?”
순간, 지금껏 태연하던 야푸르의 표정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연인인가요? 아니면, 나와 혈연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당신이 원칙 없이 멋대로 선택한 후계자일 뿐인가요? 왜 내게 아무 것도 말을 안 해 주는 거죠? 자식까지 있는 남자가 미혼남이라고 속이고 고작 16살짜리 소녀를 품에 안은 이유가 도대체…….”
오르마즈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대답이 없던 야푸르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내 실수였다고 해 두지.”
“뭐라고요?”
오르마즈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야푸르를 향해 휙 돌아섰다. 배신감에 떨고 있는 그에게 야푸르가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며 다시 대답했다.
“그날 널 남극성당에 불러들인 건 네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작하려는 것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런데 다 자란 네 모습을 보고 품지 말았어야 할 감정을 품었으니…….”
나름대로 간직해 온 생애 첫사랑을 고작 ‘실수’ 정도로 평가절하당한 오르마즈가 분노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동시에 야푸르의 눈가에서 처음으로 묘한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오르마즈에게서 시선을 돌린 야푸르는 어딘지 진심 같지는 않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네겐 이미 운명이 정해 준 짝이 둘이나 있어. 그러니 내 이전 모습은 잊고……대신관으로만 대하도록 해. 나도 앞으로는 널…….”
야푸르는 멍해진 오르마즈를 놔둔 채 혼자 터벅터벅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배신감, 그리고 지독한 혼란에 사로잡힌 오르마즈의 귀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건 이 한 마디였다.
“이 자리가 세상을 지배할지는 모르지만……내 감정까지 지배할 수는 없구나.”
“이번 후계신탁이 무리수인 것인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오르마즈를 놔둔 채 펜트하우스를 나선 야푸르에게 ‘흰 베일의 여인’ 수나 마구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도무지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 여인은 대신관의 표정이 변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런 전례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의는 해 드렸지만 하마피타들이 반대하는 것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과반수를 확보했으니 됐소. 수나.”
“정작 본인이 인정치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이겠지. 지금 조금씩 설득하고 있는 중이니.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딴사람이 되지 않았소.”
야푸르가 조금은 궁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수나의 지적은 끝도 없었다.
“어미가 잘 가르쳤고, 나름 똑똑했다고는 하나, 어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젠 무학력에, 교리에 관해서도 전혀 모르는 포로 출신의 무지렁이 암살수입니다. 심술궂은 신관들을 경연에서 상대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경연에서 탈락한 후계 도전자는 어찌되는지 아시겠죠? 바로 제거되어야 합니다.”
수나 마구스의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평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야푸르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드러난 학력이 없을 뿐이요.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이니.”
야푸르도 속으로는 답답한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경연에 당장 내보내야 하는 건 아니니 내 그 전에 하마피타들을 설득해 보겠소. 저 애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내 직접 이끌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제니안 놈들이 물들여놓은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평생 못 버릴지도 모르지요. 그 사고방식에서는 스스로의 출생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테고.”
“다 알고 있다니까 그래요.”
야푸르가 짜증스레 대꾸했지만 수나의 냉혹한 평가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람다 아스탈과 델타 밀리타는 이제 폐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막 돌아서려던 야푸르는 수나의 한 마디에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수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시그마 오르마즈를 후계자로 삼으신다면 그 둘은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밀리타는 애당초 아스탈의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면 이젠 둘 다 폐기하는 것이 순리에 맞습니다. 둘을 없애고 뮤 세네피스를 빨리 데려오셔야 합니다.”
수나의 강력한 요구에 야푸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뮤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어미가 잘 가르치고는 있지만 수용소에만 있어서 현실감각도 떨어지고요. 아직 저애를 보필할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스탈은 내 따로 생각이 있소.”
수나 마구스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뺨에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대신관께선 다른 쪽에는 단호하시나 혈육에만 너무 약하신 것 같습니다.”
야푸르가 눈동자를 움직여 수나를 힐끔 돌아보지만 그는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제 아버지께선 양쪽 손의 크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갓난 손녀를 목 졸라 죽이셨습니다. 후천 형질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어미인 저 역시도 그 일로 폐기처분을 당했겠지요.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혈통을 발전시켜 온 방법인데, 정작 대신관께선 왜 못 하십니까?”
모질게 몰아붙이는 수나에게 야푸르가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수나 당신은 아직 혈육을 직접 죽여 보지 않으셨죠? 그것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피가 흐르는 친자식을 말입니다.”
“예?”
수나 마구스는 대놓고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맘만 먹으면 그까짓 것 왜 못 하냐’라는 말이 입 안에서 뱅뱅 맴돌고 있었다.
야푸르가 눈을 부릅뜨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더 이상 그 짓은 안 합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개인적인 욕심에 영생을 원하셨지만 전 다릅니다. 더 이상 위험한 근친혼도 필요가 없고, 불량한 형질 제거를 빌미로 혈육들을 죽일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스탈도, 밀리타도 제게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혈육을 아끼시는 분께서 시그마 오르마즈를 후계자로 삼으시다니,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길 만도 하지요.”
수나가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하자 야푸르가 살짝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저었다.
“밀리타가 저 애의 분신이 될 것이고, 세네피스도 조금만 더 크면 불러들일 겁니다. 다하카르의 신성한 유전자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니 제 결정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야푸르가 딱 잘라 말했다.
“새 아르잔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은 이미 알지만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시는 건 이전의 수나 마구스답지 않으십니다. 혹시 자질이나 혈통 말고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순간 수나 마구스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최소한 표정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런 그에게 야푸르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단호한 명령조로 일렀다.
“아르잔 오르마즈 빈트 다하카르는 이제 그대보다 상급자입니다. 그러니 나를 대하듯 존경해 주시면 좋겠군요.”
TSG민병대 지도자인 파냐드가 근거지인 판지셰르에서 벗어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아랫사람을 워낙에 못 믿다보니, 이런 중요한 만남을 안심하고 맡길 만한 심복이 없었고, 결국은 이렇게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곁을 호위하고 있는 사령부 정보참모 베흔 중령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믿어서 수하로 삼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 하나는 확실하게 잡는 녀석인 만큼, 최소한 ‘얼마간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 아니 계산이었다.
파냐드와 함께 차에 오른 베흔은 차 뒤쪽에 실린 4개의 넓적한 상자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정보참모인 그는 지난 며칠간 자그룰라 모렌 박사와 함께 동료 X들에게서 회수한 인식표, 그리고 허름한 유전자 연구소 창고에서 꺼내 온 비슷한 은빛 캡슐 8천여 개를 정리했고, 다 끝내고 나니 그것들을 꽤 큰 나무상자 12개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가져온 건 그 중 4개였다.
지난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저것들을 차에 싣게 한 파냐드는 별다른 설명조차 없이 이 길을 나선 터였다. 저것들을 왜 가져가는지, 누구를 만나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판지셰르를 나선지 2시간 가까이 지난 후, 파냐드 일행의 차가 멈춰 선 곳은 인적이 뜸한 한 골짜기 초입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먼저 와 기다리는 차 한 대가 보였다.
베흔은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파냐드의 얼굴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번 일이 파냐드가 언젠가 말했던 ‘새 시대’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지고 오셨소?”
막 차에서 내린 파냐드에게 건너편 차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물론.”
파냐드가 침착하게 대답하며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쪽은?”
잠시 머뭇거리던 상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가는 충분히 준비했소.”
파냐드의 뒤를 호위하던 베흔은 상대의 말투에서 교단의 성직자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성직자들이 잘 쓰는 특유의 억양, 어휘를 읽어내는 것도 그가 긴 암살수 생활동안 몸에 익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베흔은 잠시 혼란에 사로잡혔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 남자의 이마에는 간택자를 상징하는 조각이 박혀 있지 않았다.
‘성직자가 아니었어? 그럼 뭐 하는 놈이지?’
베흔이 마스크의 남자를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중간 정도의 키, 눈썹까지 내려온 은발 아래에는 유난히 매서운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얼굴은 전체적으로 매끈하게 잘생긴 동안(童顔) 같아 보였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2부 엔딩인 파트 10이 드디어 시작 시작입니다만 내용이 좀 긴 파트다보니 연재 도중 둘로 자를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