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4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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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여의 가디언들을 모두 불러내 별궁까지 급히 달려온 페로가 발견한 건 유령의 집처럼 변해버린 타르서스 별궁, 무수한 시체들, 그리고 부상을 입은 코리온과 사에나, 자이납을 혼자 돌봐주고 있던 니사와 얼마 남지 않은 보안국 헌병들이었다.
“코나 시디크는?”
별궁에 들이닥힌 페로가 제일 먼저 물은 건 코리온 일행들의 안부가 아니었다. 그는 환자들의 후송을 지켜보던 니사의 멱살을 잡으며 다짜고짜 자신의 용건부터 물었다.
“코나 시디크가 여기 있다고 미리 알리지 않았나? 그놈은 어디로 갔나?”
“도망갔습니다.”
그의 거친 손아귀에 붙들린 니사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무어?”
붉게 달아오른 페로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니사를 구석에 팽개치고는 혼자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씩씩대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물에 흠뻑 젖은 채 절벽 밑에 혼자 ‘버려져 있던’ 우베를 위로 끌어올리느라 헌병들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상께서는 이번 결과에 크게 만족하고 계십니다.”
페로는 절룩거리며 다가온 낯선 여자를 곱지 않은 눈길로 노려보았다. 마르고 큰 키에 사나운 눈길을 하고 있는 그 여자는 페로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을 이었다.
“황상의 신임 보안비서관 사에나 쉐너입니다. 슈엘러 쉐너 전 총리 각하의 딸입니다.”
‘쉐너’라는 말에 페로가 그제야 떨떠름하던 표정을 얼른 풀었다. 쉐너 가라면 페로에게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호족들을 죽인 건 코나 시디크의 소행입니다. 이번 일에 코나 시디크가 개입한 것이 확실해졌으니 여론을 납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상께서는 이곳 타르서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말하는 걸 들으니 최소한 아버지보다는 훨씬 똑똑한 것 같군.”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페로의 한 마디에도 사에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페로의 눈길이 자신의 화려한 팔찌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얼른 소매를 내렸다.
“가문의 물건입니다.”
“그 따위 건 관심 없다. 코나 시디크에 관해 알게 된 내용들을 당장 보고해 줬으면 좋겠다.”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자블리스 아크반이 반역을 위해 그자를 고용했고, 북부에서 데려온 50여명의 용병들, 호족들의 개인 경호원, 그리고 일부 경비병들이 이번 일에 관여했습니다. 용병들은 대부분 사살했지만 십여 명 정도가 살아서 도주한 것 같습니다. 코나 시디크도 놈들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페로는 이 무표정한 여자가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지만 당장은 꼬투리잡을 거리가 없었다.
검은 무명포에 감싸여진 채 헌병들의 손에 들려 나오는 들것을 발견한 페로는 그들을 잠시 정지시키고 무명포 안쪽을 들쳐보았다. 피로 흠뻑 젖었던 샤드니의 얼굴은 누군가 급히 닦았는지 그새 깨끗해져 있었다. 순간 사에나는 그의 턱에 핏줄이 곤두서는 것을 보았다.
“코리온 리쿠 학장은 이제 혼자가 된 건가?”
페로가 다분히 감정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레 물었다. 사에나는 서부 섭정공 샤드니의 죽음에 서부의 정세 걱정보다 학장이 혼자 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페로를 대번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물론 그는 카렐과 학장 사이를 내심 걱정하고 있는 페로의 속내를 알 리가 없었다.
그의 묘한 눈길을 뒤늦게 눈치 챈 페로가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황상께는 보고드렸나? 뭐라고 말씀하셨지?”
“섭정공의 누이이신 네페티 황비 전하께 어떻게 알려야 할지 심려하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섭정공 할 놈은 어차피 또 있으니 내 걱정할 일은 아니지.”
페로가 평소처럼 거친 말을 툭 뱉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명포를 다시 덮었다. 네페티의 사촌이고 다음 순위 계승자인 두겐이 어차피 카렐 휘하에 있으니 서부를 계속 장악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의 걱정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라즈를 잃고 허전해하고 있는 카렐과, 약혼자를 잃고 실의에 잠긴 코리온이 동병상련의 서로를 위로해주는, 생각하기도 싫은 광경이 자꾸 스치고 있었다.
‘너무 쌀쌀맞게 대했나…….’
페로는 요즘 부쩍 외롭고 우울해하는 카렐에게 의도적으로 냉담했던 자신의 행동이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에게 잠시나마 눈을 돌렸던 그를 위로해 준다는 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쓸데없는 잡생각’ 따위는 접고 총리로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황상께 위임받은 권한으로 타르서스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반역도인 코나 시디크와 그 무리들을 고용해 황실에 반역을 꾀한 아크반 가는 직계 전원을 멸족할 것이며, 나머지 9개 가문도 재산을 몰수하고 모두 평민으로 강등시킨다. 이번 사건에 관여한 자들 역시 불문곡직하고 처단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제 헌병들을 모조리 아크반 가에 투입하겠습니다.”
“집행관은?”
“상께서 제게 명하셨으니 모두 제가 처단하겠습니다.”
사에나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페로였지만 이 여자의 살벌한 표정에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수백 명은 될 ‘어찌 보면 무고한’ 호족들을 몰살시켜야 하는 끔찍한 일이었고, 누구나 꺼릴만한 일이었지만 이 비서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 일을 자진해 맡고 나선 것이었다.
“코나 시디크 그놈이 고마워 보기는 또 처음이군.”
줄줄이 실려 나오는 호족들의 시체를 지켜보던 페로는 조금은 허탈한 기분으로 타르서스 별궁의 절벽 위에 섰다. 타이밍, 조건 모두 완벽했다. 아크반 가는 제국 제일의 악당으로 이미 사방에 잘 알려진 코나 시디크와 공모했고, 증거도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멸문의 이유는 충분했다. 일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황제 카렐은 그동안 호족들이 멋대로 통치해 온 타르서스를 관료제에 편입시켜 장악할 수 있는 ‘빌미’를 얻은 셈이었다.
“두겐 그 놈이 섭정공이 되면……법무대신이 곧 공석이 될 테니 아리아노 그놈도 쓸모가 있겠군.”
페로가 묘한 미소와 함께 혼자 중얼거렸다. 아들을 인질로 내주고 풀려난 적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은 약속대로 무언가 보내올 테고, 이제 그는 아리아노와의 접촉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것이 인질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더 큰 목적을 위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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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태자들의 죽음은 세나우스 1세에게는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 셋은 아버지를 대신해 정계에서 그 역할을 조금씩 키워가는 중이었고, 유능한 인물들은 모조리 떠나버린 황실에서 황제가 믿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신하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오르마즈는 ‘쓰기에는 어딘지 찜찜하고, 안 쓰자니 너무 아까운’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르마즈를 어렵게 설득해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다시 불러올렸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금껏 마음에 안 들면 걸핏하면 사표를 던져 온 그의 전적 때문에 괜스레 소심해진 황제는 가끔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미 ‘남부제후’를 선언한 테번은 사실상 자치를 선언했고, 그에 질세라 코윈의 카파키 가 역시 더 이상 황실 행정관을 파견하지 말라며 일방통고를 하고 난 후였다.
이렇게 외부적인 상황이 악화되고, 황실의 권위가 몰락해가는 와중에도 황제에게 계속 걸리는 것은 남극성당에 재학 중인 유평이었다. 황제에게는 유평 말고도 많은 서자, 서녀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유평은 이제 공식적으로 엄연한 맏이였고, 누가 보기에도 가장 똑똑한 재목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렇다보니 정작 새 비서실장이 된 오르마즈는 유평의 거취에 관해 별 말이 없었지만 도리어 황실 대신들이 나서서 ‘만일을 대비해’ 일단 유평을 예비 후계자로라도 정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심심찮게 내고 있었다.
황후 테나스의 측근들이 온통 점령하고 있는 내각에서 이런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에강한 거부감을 보인 것은 도리어 오르마즈였다. 그는 ‘테나스 황후께서 새 태자를 수태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황상께서 아직 건재하신데 그런 논의는 시기상조다’라며 못박았지만 유평을 후계논의로 끌어들이자는 대신들의 제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무언가 뒤집어진 이런 상황에 황제 역시도 당혹스러웠지만 즉위 후 40년이 가까워오는 황제 역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도 아직 젊은 박사생도에 불과한 유평에게 일찌감치 정적을 만들려는 조강지처 테나스 이그나토 황후의 음모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쨌든 유평은 황제의 친자식이 아니었고, 황제가 제정신이라면 중론이 어떻든간에 그를 후계자로 삼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 정치적 기반이 없는 유평을 잔혹한 정치판의 광풍에서 지키려는 오르마즈의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모조리 잃고 실의에 빠진 부인 테나스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렵게 정계로 불러올린 오르마즈가 다시 홧김에 사표를 쓰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결국 둘 중 어느 쪽도 확실하게 선택하지 않은 채 그렇게 ‘될 대로 되라’고 방치한 황제의 무능함, 혹은 게으름은 또 다른 비극을 조용히 잉태하고 있었다.
태자들의 몰살로 흉흉해졌던 민심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이후, 여전히 남극성당 부근에 살던 유레트는 오르마즈의 주선으로 소원하던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조금은 서두른다 싶을 정도로 급히 약혼까지 했다.
어머니 유레트의 약혼에 그 본인만큼이나 기뻐한 것이 딸 유평이었다. 남자는 남극성당 부근의 작은 어촌에서 배를 수리하는 기술자였고, 유레트의 소원대로 정치나 군대 따위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이도 적당히 많아서 풍파를 지독히도 겪은 이 모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너그러움까지 함께 가진 좋은 사람이었다.
자존심강하고 콧대높고 성깔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유평도 웬일인지 어머니가 약혼을 하기가 무섭게 이 평민 남자를 바로 ‘새아빠’라고 부르며 누구보다 잘 따랐다. 그 역시 이 ‘옹주’를 처음에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했지만 친딸처럼 살갑게 구는 그에게 결국 마음을 열고 친아버지처럼 대해줄 수 있었다.
물론 서류상으로나마 황제의 여자였던 유레트가 황제가 멀쩡히 살아있는 와중에 감히 재혼을 한다는 소식에 황실 사람들이나 내각의 대신들이 발끈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결혼을 막아야 한다는, 혹은 유평만이라도 궁에 데려와야 한다는 대신들의 불만에 ‘저 모녀는 이제 남남이니 내 참견할 일 아니다.’라며 무시해 버렸고, 심지어는 ‘앓던 이가 알아서 빠진 기분’이라며 싱글거리기까지 했다.
황제의 반응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유레트는 이런 소식에 일단 안도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안도했던 것이 도리어 실수였다.
어느 날, 황실 내명부에서는 유레트에게 ‘재혼하는 김에 궁에서 보관중인 개인 물건은 모두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며 연락해왔고, 짐들을 한데 묶어 남극성당에 보내놓았으니 유평을 시켜 가져가라며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당초 유레트는 학교에 가 있던 유평에게 짐을 가져오라고 말할 참이었지만 짐도 제법 무거운 데다가 그가 강론에 들어가 있다는 말에 결국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새 가족이 될 약혼자와 데이트도 할 겸, 딸과 모처럼 저녁이라도 할 겸, 함께 남극성당에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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