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2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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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납의 맹렬한 질주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트라이크 앞에서 도망치던 기병이 엉겁결에 던진 창이 정면에 덕지덕지 붙인 장갑판 사이 눈구멍에 턱 걸리면서 자이납의 시야가 딱 막혀버렸다.
“으익!!!”
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앞을 못 보게 된 자이납은 정면의 깊숙한 포탄구멍을 미처 보지 못하고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앞바퀴부터 바닥에 꽝 소리를 내고 착지했다.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을 뻔했던 트라이크는 뒤쪽의 엔진 무게 덕분에 그럭저럭 착지했지만 그 위에 앉은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착지 충격에 몸이 풀썩 들린 자이납은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흙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우악!!!”
보호장구도 없이 내동댕이쳐진 자이납을 가디언들이 급히 일으켜 주었지만 그는 머리와 턱, 무릎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의식을 찾지 못했다.
“씨발! 다 뚫고 나서나 떨어질 것이지!!!”
보다 못한 베흔이 앞부분이 절반 부서진 트라이크에 후다닥 뛰어올라 엔진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무작정 출발시켰다. 앞바퀴 축이 부러졌는지 심하게 흔들렸지만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자이납이 미처 돌파하지 못한 나머지 기병들을 향해 악을 쓰고 속도를 붙였다. 맞은편에는 이미 헬리노스와 그의 근위기병들이 빽빽하게 집결해 방공포대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저게 왜 또 움직여!”
다시 움직이는 트라이크를 발견한 헬리노스는 교단군에서 탈취한 마우저를 번쩍 들어 불안하게 달리는 이 표적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본 친위군 가디언들이 베흔에게 고함을 질렀다.
“대장! 1시 방향 조심하십시오!”
베흔이 막 고개를 든 순간, 헬리노스가 쏜 마우저가 이미 휘어진 트라이크의 앞쪽 차축에 명중하며 급조 전차의 짧은 수명은 눈 깜짝할 새 막판으로 치달았다.
“헬리노스?”
상대를 알아본 베흔은 앞바퀴가 거의 빠져 미친 듯 덜덜거리는 트라이크를 헬리노스 쪽으로 향하고 무작정 속도를 붙였다. 저들의 스크럼만 돌파하면 바로 그 뒤로 방공포대로 이어진 길이 열려있었다. 베흔이 헬리노스를 노리고 엔진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헬리노스 저자만 죽이면 기병대는 머리를 잃는 셈이었다.
트라이크는 엔진이 깨지기 일보 직전의 비명을 내며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저 새끼, 지 어미처럼 여기서 개망신을 당하고 싶구나!”
베흔은 이 트라이크의 엄청난 덩치를 믿고 헬리노스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무시무시한 트라이크에 놀란 헬리노스는 물론이고 그의 근위기병들까지 트라이크의 돌격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앞축이 꺾인 트라이크도 느려졌지만, 희박한 산소에 기운이 빠진 말들은 그보다 더 느렸다.
“저 미친놈!!! 우리 포대는 어디 있어!”
당황한 헬리노스가 급히 말을 돌리며 마우저를 쏘아댔지만 생전 처음 잡아본 마우저 사격은 그리 정확하지 못했다. 한 발은 괴물 트라이크의 바퀴에 맞았고, 또 다른 두 발은 트라이크의 정면에 댄 고물 장갑판 두 장을 갈가리 찢어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가속을 받은 트라이크는 덜덜거리며 계속 전진해왔다.
“누가 저 놈 좀 막아!”
그때, 칼데아군 포병들이 뒤늦게 끌고 온 소형 발리스타가 이미 절반 부서진 급조 전차의 앞쪽을 때리면서 앞바퀴와 차축이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다.
“으익!”
포격에 부서진 앞축이 땅에 박히고 뒷부분이 공중으로 확 치솟으면서 육중한 트라이크는 공중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날아올라서는 앞에서 어물거리던 헬리노스와 근위기병들을 덮쳤다.
“아쿠!!!”
서너 기의 기병들이 말과 함께 나동그라졌고, 베흔도 자리에서 튕겨나 공중을 붕 날아가 칼데아 기병들 사이에 떨어졌다. 트라이크의 육중한 앞바퀴와 부품들이 날아오르고 끊긴 트랙이 채찍처럼 주변을 마구 휘저으면서 엄청난 모래먼지가 사방으로 날아올라 시야를 가렸다.
마지막 방어선을 이루고 있던 헬리노스의 근위기병들도 튀어나가는 파편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아아악!”
거무튀튀한 흙먼지 속에서 몇 명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지만 아직 밖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염병할, 페로 그 새끼가 가져온 게 다 이렇지.”
흙먼지 속에서 건장한 형체 하나가 바닥을 짚고 엉금엉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칼을 짚고는 부서진 트라이크 파편 쪽으로 씩씩대며 다가갔다. 부서진 엔진과 끊긴 트랙 밑에는 허리가 절반 잘린 헬리노스가 영혼이 이미 빠져나간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베흔이 굳이 칼을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눈이 감기며 고개가 꺾이는 헬리노스의 모습을 보며 베흔이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돌파해!”
기회를 잡은 3백의 가디언들이 흩어진 기병들과 여기저기 날아오른 부품들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헬리노스까지 죽었고, 방공포대가 이제 코앞이었다.
“우와아아!!!”
뒤에서 칼데아 보병들과 맞서며 이 긴박한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 가디언들의 환호성이 올랐다. 하지만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순전히 정신력 하나로 몇 걸음을 내디딘 베흔은 이미 한계를 맞고 있었다. 다른 가디언들의 뒤를 쫓으려던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디언들은 멀어지고 있고, 그들을 쫓는 칼데아 기병들의 말굽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일어나야 하는데…….’
베흔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과 씨름하며 적 기병들을 돌아보았다. 영광은 길지 못했다. 베흔은 미처 돌아서서 칼을 휘둘러 볼 새도 없이 말굽에 머리와 어깨를 채이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누군가가 내려찍은 창끝이 쓰러진 그의 등과 어깨를 푹 찔렀다.
“끄윽!!!”
등 뒤에서 우드득 하고 창끝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베흔은 부러진 창을 몸에 꿴 채 주르르 밀려가 헝겊인형처럼 몸이 구겨져 포탄구멍에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포탄구멍 밑에 팽개쳐진 베흔은 등을 뚫고 들어와 배꼽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창끝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내 운도 이제 다했나봐.’
지금껏 그에겐 항상 행운이 따랐었다. 별의별 위험한 상황에서 자잘한 부상 정도는 입었지만 그는 항상 최고지휘관이었고, 전장에서 이렇게 버려진 채 치명상을 입고 죽음만을 기다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우러 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뱃속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남쪽에서는 방공포대에 진입하라며 다룬이 고래고래 질러대는 함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의 할룩스로는 코리온이 자폭셔틀을 켜라며 외치는 고함과 페로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그는 쓰러졌지만, 결사대는 성공한 듯했다.
‘오르마즈 그놈도 여기서 죽었지.’
창끝을 움켜쥔 베흔은 희미해지는 의식을 천천히 놓으며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하긴, 영웅이 되려면 영웅답게 죽어줘야지. 이젠 내 차례인 거야.’
베흔의 입으로 한 무더기의 피가 터져 나왔다. 불량품 가디언으로 놀림을 받던 어린 시절, 어쩌면 진짜 전성기였을지도 모르는 [민병대 암살1팀] 시절, 그를 항상 돌봐주었던 오르마즈의 든든한 모습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그의 인생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가장 잘 나갔던’ 근위대장 시절에 떠오르는 기억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먼 옛날, 페로관에서 자신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해맑게 웃던 그레이오팔 소녀의 순수한 표정을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젠 내가 하임달의 영웅이 되는 거지. 오르마즈가 아니고.’
포탄구멍에 드러누운 베흔은 엷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떨어뜨렸다. 철성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회색빛 하늘은 그새 더 무겁게 변해 어느새 거무튀튀해져 있었다. 습한 바람이 전장을 한 번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반역도로 죽을 뻔했었는데 이게 어디야.’
베흔은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저승에서 만날 오르마즈와 이트닌, 와헷의 모습이 한 번씩 스치며 배의 찢어지는 고통도 점점 엷어졌다. 죽음이라는 게 생각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그는 낮잠이 들듯,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
“이봐, 죽은 척 하지 말고 눈 떠.”
누군가 뺨을 찰싹 후려치는 느낌에 눈을 번쩍 뜬 베흔은 베의 찢어지는 고통이 갑자기 심해지며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피투성이 도끼를 쥔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그의 뺨을 다시 후려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베흔은 자신을 깨운 놈에게 대뜸 욕을 내뱉을 뻔했다. 당장의 심정은 이 고통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아아악.”
베흔은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창끝을 쥐고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베흔의 뺨을 다시 치려고 했던 네피가 얼른 압박붕대를 꺼내 그의 배에 꽉 돌려 감았다.
“한숨 자려는 거 깨워서 미안한데 마리안이 콧수염 할아버지 무사하시냐고 물어보길래.”
네피는 배에 창이 꽂힌 채 신음하는 베흔을 바닥에 질질 끌고 포탄구멍에서 서둘러 기어나왔다.
“빨리 나와! 빨리!”
만신창이로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온 자이납이 네피와 위아래에서 베흔을 붙들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포탄 구멍에서 빠져나온 베흔은 트라이크에 올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카렐과 눈이 딱 마주쳤다. 베흔은 그가 자신을 구하러 일부러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피는 베흔의 몸을 그의 플람베르주에 묶어 고정시키고 카렐의 다리 위에 올려주었다. 카렐은 베흔을 허벅지에 눕히고 바로 트라이크에 속도를 붙였다.
“폐……하?”
베흔은 ‘감히’ 황제의 허벅지에 누운 채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렐이 한 손으로 트라이크를 몰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역사책에 오르고 싶겠지만 이 전투에서 짐 말고 누구도 감히 영웅이 되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베흔은 피냄새가 섞인 황제의 체취를 느끼며 혼자 엷게 웃었다.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가슴이 저리기는 처음이었다.
“자폭셔틀이 올라갑니다!”
옆을 함께 달리던 자이납이 외침과 함께 가디언들의 환호성이 주변을 흔들었다. 페로와 코리온이 차지한 2개의 교단군 방공포대에서 20개가 넘는 자폭셔틀이 긴 꼬리를 그리며 차례로 날아올라 산 중턱을 따라 올라오고 있던 칼데아군의 수송선을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 떨어뜨려버려!!!”
가디언들이 두 팔을 치켜들고 고함을 올렸다. 아무 경계도 없이 저고도에서 낮은 속도로 접근하던 칼데아군의 수송선은 자폭셔틀에게는 이미 목을 잡힌 사냥감이나 마찬가지였다. 3만의 칼데아군 기병대를 태운 10척의 수송선들은 미처 자폭셔틀을 피할 새도 없이 엔진과 함교에 차례대로 명중당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몇 척은 그 와중에도 이 좁은 고원에 접근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도착하지 못하고 주변 골짜기나 산 아래에 비상착륙을 해야 했다.
“우와아!”
자이납이 손뼉을 쳤다. 치명타를 입은 수송선들이 사방에서 추락하거나 비상착륙을 하면서 철성이 있는 고원 주변은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은 연기기둥에 둘러싸였다. 산 곳곳에 추락해 흩어진 3만의 기병들은 걸어서도 움직이기 힘든 이 험악한 산악 곳곳에서 졸지에 조난자의 처지가 되었다.
“이겼다!!!”
가디언들의 성급한 승리의 함성이 고원을 쩌렁쩌렁 울렸고, 3만의 기병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던 이곳의 칼데아군의 의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전의를 절반 상실한 상태에서 힐러가 이끄는 3천의 가디언들을 상대로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2만의 플라칼 가 보병들까지 우르르 대오를 무너뜨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전쟁을 끝낸다!”
승전의 냄새를 맡은 가디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칼데아 보병들의 뒤를 쫓았다. 초반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철성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던 크바르나들까지 승리를 직감하고는 성한 병사에 부상병 할 것 없이 모조리 무기를 들고 몰려나와 이 마지막 승리의 돌격에 함께했다.
“승전을……축하드립니다.”
베흔이 찢어질 듯 아픈 등과 배를 쥐고 힘겹게 이 한 마디를 뱉었다. 칼데아군 보병들만 물리치고 적 사령선의 카나르 황제를 붙들면 이제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피와 힐러는 넌 적 사령선으로 먼저 돌진하고 다룬은 이렌느 그년을 잡아서 내 앞에 대령해라!”
베흔을 내려놓은 카렐은 트라이크 방향을 돌려 이번엔 세닉 가가 공격하고 있는 유리상자 쪽으로 향했다. 기병대를 태운 수송선들이 우르르 주저앉으면서 패색을 직감한 이렌느의 세닉 가 보병대도 공격을 늦추고 물러나고 있었다.
“적이 물러난다!”
이디나의 유리상자 앞에서 보병들 수십을 혼자 쓰러뜨리며 사투를 벌였던 사카가 칼을 번쩍 들며 함성을 올렸다. 배가 찢긴 채로 함께 유리상자를 지켰던 슈라는 발리스타에 다리가 절단되어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그나마 나은 사카는 다리에 파편이 박히고, 투창에 찔려 안구가 박살난 눈에서는 온통 피가 흘러 뺨과 턱까지 범벅이었다.
그 와중에도 씩씩대며 적을 쫓으려는 사카의 걸음을 슈라의 찢어지는 고함이 붙들었다.
“뒤를 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사카는 카렐과 함께 몰려오는 수백의 친위군 가디언들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어쨌든 교단군은 친위군과는 ‘공식적으로 적’이고, 세닉 가 보병들을 쫓아야 할지, 친위군들에게서 자신들의 대신관을 지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유리상자가 안에서 철커덕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방에 금이 가고 움푹움푹 들어간 강화유리 상자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이젠 ‘유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모양새였다.
“나오지 마십시오! 적이…….”
사카가 절룩거리며 유리상자에서 나오는 이디나의 앞을 막아섰다. 한쪽 팔로 어렵게 트라이크를 몰아 온 카렐이 그들 몇 발짝 앞에서 트라이크를 세웠다. 그리고는 두 발로 바닥을 딛고 내려섰다. 대신관의 화려한 로브를 입고 선 이디나와,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전투 수트 위에 피와 먼지로 물든 늑대털을 걸친 카렐이 몇 달 만에 다시 서로를 코앞에서 마주했다.
카렐은 사카와 유리상자 주변에 쓰러진 수많은 코런덤과 헤네티들을 한 번 빙 돌아보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사카, 슈라.”
어처구니없어진 사카가 무어라 대꾸하며 칼을 세우려 했지만 이디나가 그의 손을 막았다. 카렐이 성큼 다가와서는 씩씩대는 사카를 옆으로 휙 밀어내고 이디나와 가슴이 닿을 듯 마주섰다. 여전히 입술을 굳게 다문 이디나의 시선은 붕대를 감아 고정해 놓은 카렐의 왼팔과 그 손등에서 빛나고 있는 대신관 팔찌에 멎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팔찌를 들어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이디나의 팔찌를 본 코런덤들이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손목에서 빛이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전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반짝거리던 대신관의 팔찌에서 빛이 사라진 모습에 당황한 이 광신도들이 고개를 저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사카는 마시고 있던 물통을 떨어뜨렸고, 슈라는 절망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지금껏 목숨과 믿음을 바쳐가며 지켜낸 대신관이 이젠 더 이상 ‘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의 절망감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갔다.
“도태시켜야 돼.”
배신감에 격분한 코런덤 사관 한 명이 칼을 빼들자 두셋이 뒤따라 무기를 빼들고 이디나를 겨누었다. 카렐은 그런 그들을 못 본 척, 이디나의 손목에서 팔찌를 빼냈다. 빛을 잃은 이디나는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카렐은 핏구멍이 남아있는 그의 손목에 자신의 머리를 묶었던 비단끈을 풀어 꽉 매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디나가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카렐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디나의 팔찌에 코런덤들의 시선이 온통 쏠린 것을 느꼈다. 그들을 한 번 돌아본 카렐은 팔찌의 고리를 풀어 자신의 비어있는 오른쪽 손목에 끼웠다. 그리고는 이를 꽉 악물고 철컥 소리가 나게 채웠다.
“이익.”
팔찌 채워지는 소리에 지레 놀란 코런덤과 카렐의 가디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카렐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자신의 양 손목을 얼굴 양 옆으로 들어보였다. 한때 잔딕과 가디언 팔찌가 조이고 있던 그의 손목 양쪽 모두에서 이제 은회색의 마구스 팔찌 2개가 동시에 빛을 내고 있었다.
“도태시켜! 도태시켜!”
흥분한 코런덤들의 외침이 주변에서 하나 둘 목소리를 높여갔다. 운명을 직감한 이디나가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카렐이 늑대털을 벗어 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도태는 너희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건방진 것들.”
카렐은 칼을 들고 다가오려는 코런덤 사관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그의 양 손목에서 빛나고 있는 팔찌에 기가 죽은 코런덤들은 하나 둘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났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대장인 사카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카렐은 그의 눈가에 작은 눈물방울이 맺힌 것을 보았다. 카렐이 사카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디나를 대하는 태도는 교리와 원리원칙에 모든 것을 헌신하던 앞뒤 꽉 막힌 헤네티답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 카렐의 후방에서 가디언들의 찢어지는 고함이 들려왔다.
“폐하! 적 사령선이 달아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카렐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고원 남동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칼데아군의 사령선이 엔진에 예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나르 그놈이 미쳤나!”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쪽에서 방공포대를 장악한 상황에서 그 코앞에서 사령선을 이륙시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카렐도 카나르가 지금쯤 울면서 항복문서를 쓰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도망친다고 저러는 거지?”
카렐은 눈가에 힘을 준 채 적 사령선과 그 주변에 생기는 큰 먼지구름을 노려보았다. 카나르는 고원에 흩어진 부하 장병들을 태우지도, 심지어 지휘관급들을 거두지도 않은 채 혼자 엔진을 켜고 있었다.
“맙소사.”
적 사령선을 노려보는 카렐의 눈썹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을 쳐들고 가디언들에게 찢어져라 외쳤다.
“여기서 모두 최대한 흩어져!!!”
카렐은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이디나를 휙 돌아보았다. 1초도 되지 않을 짧은 순간, 카렐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위대한 제국과 자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자신과 바로 앞에 있는 이 여자와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새 생명까지, 모든 것이 지금 자신의 행동 하나에 걸려있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카렐은 이디나를 덥석 낚아채 트라이크로 뛰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의 뱃속에 든 생명에 탈이 날까 하는 맘에 힘은 주지 않았지만 그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놀란 이디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사카의 비명과 코런덤들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카렐은 개의치 않고 이디나를 데리고 트라이크 뛰어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적 사령선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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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놀라셨나요? 여름이라 잠시 땀 닦고 가시라고요~ 덤으로 팔찌 2개를 모두 낀 카렐의 간지도 즐기시고요.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슬퍼요~~~( ̄∇ ̄)ブ~~★
프리미엄에 연재중인 출판본은 광속질주해서 내일부터는 엔딩본인 9권 연재에 들어갑니다.
옆동네 예스24의 e연재의 콜로니-사르코시스트는 오늘 시나 아버지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33회 연재가 올랐습니다.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
여기는 이제 도입부를 넘어 슬슬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새 파트가 시작되는 다음주부터는 화/금요일로 주 2회 연재됩니다. 대신 분량은 약간 키울 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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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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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프리미엄에도 출판본이 올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