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2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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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 오래된 기계를 조심스레 만졌다. 탑 안의 특수한 공기 덕분인지 지난 수백 년 세월 속에서도 기계는 손때와 광택, 심지어 윤활유까지 그대로 남은 완벽한 상태였다. 기계는 3척(120㎝)이 넘는 길이에 중간쯤에는 손잡이가, 앞에는 긴 파이프 하나와 짧은 파이프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한쪽에는 이 기계가 원래 담겨있던 듯한 나무상자가 MAG이라는 희미한 글자만 남은 채 뚜껑이 열려 있고, 도시락 상자만한 사각형 금속 상자들이 여러 개 보였다.
“그게 실탄인 것 같습니다.”
야투가 가리킨 금속 상자에는 [7.62㎜철갑고폭탄]이라는 스탬프와 함께 뚜껑이 모두 열려있었다. 실탄은 카히나가 이미 거의 써버려 이젠 남은 것이 몇 발 없었다.
“자넨 카히나가 이걸 쓰는 걸 봤지?”
카렐의 물음에 야투 박사가 양손으로 기계를 들고 한쪽 끝을 어깨에 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덩치 큰 마우저 비슷한걸.”
한 팔밖에 못 쓰는 카렐은 작은 마우저를 잡듯 손잡이에 손을 끼워 한 팔로 들어보았다. 3관(11.25kg) 남짓 되는 것이 보통 사람에겐 제법 묵직하게 느껴질 듯했지만 카렐에겐 도리어 너무 가벼워 안정감이 없었다.
“가만, 하나가 또 있는데?”
카히나의 ‘기계’가 들어있던 상자 옆에는 카렐의 키만 한 육중한 나무상자가 보였다. 상자에는 12.7㎜라는 스탬프가 찍혀있지만 그것 말고는 좌우가 뒤집어진 이상한 문자뿐이었다. 카렐은 잠겨 있는 상자를 힘으로 힘껏 비틀어 열었다.
“흐음.”
새 상자 안에는 카히나가 썼던 기계와 거의 비슷한, 하지만 크기는 훨씬 큰 또 다른 [검은 기계]가 들어있었다. 카렐은 기계를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고, 누군가 손으로 써 놓은 매뉴얼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서투나마 이곳 문자를 읽을 줄 알고, 마우저와도 어느 정도 비슷해 내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히나가 왜 이걸 안 가져갔는지 알겠군.”
카렐은 자신의 키에 육박하는 긴 기계를 겨드랑이에 끼고 한 팔로 번쩍 들었다. 카히나가 들었던 것에 비해 족히 두세 배는 될 육중한 무게라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겠지만 카렐이 한 팔에 끼고 들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상자 한쪽에는 이 무기를 고정하는 데 썼음직한 묵직한 삼각대가 함께 있지만 카렐에겐 굳이 필요가 없었다.
“나한테는 딱 좋은데.”
카렐이 방아쇠로 생각되는 것을 당기자 철커덕 하며 격발되는 소리가 났다. 삼각대 한쪽에 쌓인 [12.7mm철갑고폭탄] 상자를 내려다보는 카렐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카렐은 철성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이 돌연 커지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했지만 할룩스로는 아무 연락도 들어오지 않았다. 인력은 한정되었고, 워낙 상황이 계속 급박하게 움직이다보니 일이 벌어지고 한참 후에야 실제 보고가 들어와 카렐의 속을 바싹바싹 태워놓았다.
“내가 나가 있는 게 낫겠다.”
참다못한 카렐이 무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소한 바깥을 볼 수라도 있는 곳에 있어야 무어라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제발.”
에스더가 당혹스런 얼굴로 황제의 앞을 막아섰지만 카렐은 그를 능청맞게 안고 입술에 짧은 키스를 해 주었다.
“오늘이 그대를 애타게 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겁니다. 정말입니다.”
“……알면서도 또 속네요.”
한숨을 푹 내쉰 에스더는 황제의 어깨에 은빛 늑대털을 덮어주고는 품을 한 번 꼭 안아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렐은 원래 있던 끈에 [검은 기계]를 묶어 등에 비스듬하게 짊어지고는 자이납에게 [12.7mm 철갑고폭탄]이라 쓰인 큰 상자와 예비총열을 가리켰다.
“옆에 있는 내 큰 배낭에 최대한 넣어서 메고 따라와라.”
실탄 상자를 들어 본 자이납이 기겁을 했다.
“엑, 이 큰 가방에 이렇게 무거운 걸 가득 넣으면 어떻게 들라고요!”
“아니면 네 작은 배낭에 든 거 다 꺼내놓고 거기 담던지?”
카렐의 능청스런 눈짓에 화들짝 놀란 자이납은 찍 소리 한 마디 못 하고 거의 어른 몸통만한 큰 가방에 탄통을 꾸역꾸역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흡기구 댐퍼에서 몰래 떼어 온 황금판이 잔뜩 든 개인 배낭은 한쪽에 슬며시 감춰놓았다.
“쳇, 맨날 이런 때 시다바리만 내 일이야.”
자이납은 입으로 연신 구시렁거리면서 실탄이 가득 든 큰 배낭을 끄응 하고 짊어지고 일어나 황제를 따라나섰다.
어른 서넛 체중에 육박하는 무게를 지고 끙끙대며 뒤따라가던 자이납은 가방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들었다. 분명 할룩스 소리이지만 카렐의 공용 할룩스는 그의 허리춤에 있었다.
“누가 연락했나 봐요, 저 잘못한 거 알지만 요놈 무게라도 좀 덜어줘요.”
자이납이 할룩스를 꺼내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할룩스를 받은 순간, 카렐은 누가 보낸 건지를 직감했다. 이 할룩스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할룩스를 열어보니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 이미 지난 새벽에 보냈던 이디나의 연락이 찍혀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카렐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철성 밖을 공격하고 있는 이디나가 출정 전 한바탕 욕이라도 쏟아 부으려 연락한 것인지, 아니면 항복 권유라도 하려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룩스를 꺼버리려던 카렐은 통화 외에 [영상 데이터]가 들어와 있다는 표시에 멈칫했다.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도 되었지만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확인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흐읍.”
카렐의 커진 눈은 할룩스의 작은 화면에 딱 멎어 움직이지 않았다. 영상에는 자궁 속의 작은 생명체가 꼬물거리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빈트 다하카르’ 성을 가진 여자아기는 손발을 조몰락거리고, 고개를 까딱이며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기의 이름을 본 카렐의 가슴속이 먹먹해졌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구나.’
손끝을 가늘게 떨던 카렐은 입술을 깨물며 할룩스를 닫아버렸다. 그때, 철성 바깥에서 웬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금껏 들리던 친위군과 교단군의 전투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천, 수만이 전투를 앞두고 지르는 거대한 함성이 분명했다. 자리에 멈춰 서서 의아해하고 있는 카렐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철성 밖 아샤드 경의 연락이 들어왔다.
“남부제후군 4만이 기습 상륙해 교단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샤드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카렐은 전문을 받은 순간 어찌된 것인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카나르 그놈이 완전히 미친개가 되었구나.”
카렐은 한 손에 이디나와 연결된 할룩스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철성 밖에서는 막 고원에 상륙한 4만의 칼데아군이 질러대는 함성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때, 카렐은 손에 쥐고 있던 할룩스가 다시 울리는 것을 느꼈다. 카렐은 할룩스를 켜지 않은 채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룩스를 켜지 않아도 그가 연락을 한 이유를 익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이디나.”
카렐은 할룩스가 울리도록 놓아둔 채 다시 걸음을 옮겨 철성 입구로 나아갔다. 철성의 내장 같은 길고 긴 회랑이 끝나고 환한 빛이 거대한 문틈으로 스며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느린 걸음 때문에 한참이 걸렸지만 할룩스는 애가 탈 만큼 계속 울리고 있었다.
“황상께서 납신다!!!”
철성의 회랑 입구 부근에 모여 있던 부상병과 그들을 돌보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금탑을 나선 황제를 향했다. 왼팔에 보호대를 하고 등에는 육중한 기관총을, 양쪽 어깨에는 금빛 실탄 띠를 건 카렐이 그들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 출구 쪽으로 향했다.
“폐하?”
부상병들이 엉거주춤 머리를 숙였다. 비록 수술로 기운은 잃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무지개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그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스며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어깨의 탄띠가 철렁거리고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일어나지 마라.”
카렐은 상처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보급품을 찾으며 고함을 지르는 병사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지나 철성의 문을 나섰다. 퍽이나 오랜만에 보는 환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멀리 고원 반대편의 유리상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리상자 주변은 수천, 아니 1만 가까운 세닉 가 보병들이 이미 새카맣게 에워싸고 있어 가망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화단을 공격하는 1천 조금 넘는 코런덤과 1천여의 일반 헤네티들 뒤로는 3만 가까운 플라칼 가 보병대가 카나르의 깃발을 앞세우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카렐?”
계단 한쪽에서 참호에 숨어 포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페로와 코리온이 정색을 하며 카렐을 동시에 돌아보았다.
하지만 수술을 끝낸 카렐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기쁨은 잠깐이었다. 등에 검은 기계를 늘어뜨리고 어깨에 긴 탄띠을 두른 그는 계단 꼭대기, 화단 아래 코런덤들의 눈에 훤히 띄는 곳이 보란 듯 우뚝 서 있었다. 코런덤 누군가가 마우저를 당기기라도 했다가는 큰일이 날 위치였다.
“맙소사, 빨리 피해! 왜 꼼짝 않고 서 있는 거야!”
페로가 비명처럼 고함을 지으며 카렐에게 뛰어나왔다. 하지만 카렐은 그에게 손을 뻗어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며 손짓했다. 더 놀라운 건 화단 아래의 코런덤들이었다. 그들은 언덕 위의 황제를 빤히 보면서도 마우저를 당기지 않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페로는 그제야 화단 아래 적군이 이미 사격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성을 공격하던 코런덤들에게 공격 중지 명령이 내려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렐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모든 사격 중지.”
황제의 명령에 이번엔 친위군의 포격과 석궁 사격도 뚝 멈추었다. 계단 위의 친위군과 코런덤 모두 사격을 중지한 채 서로를 말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카렐은 멀리 1천여의 부상병과 헤네티들에 옹색하게 보호받고 있는 이디나의 유리상자를 다시 응시했다. 손 안에 있는 할룩스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때마침 이디나의 유리상자를 포위한 1만의 세닉 가에서 큰 함성을 올리며 진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카나르가 직접 지휘하는 3만의 플라칼 가와 호지 가 보병대는 이미 코런덤과 친위군의 피로 물들어있는 고원 위로 큰 함성을 올리며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렐과 교단 모두를 이곳에서 끝장내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카렐은 그제야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이디나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짧게 한 마디를 전했다.
“기다리시오.”
이디나에게서는 거친 숨소리 뿐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카렐은 할룩스 너머 그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카렐은 화단 밑에 있는 코런덤들을 굽어보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대신관의 공격 중지 명령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그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렐은 몇 달 전, 암살교단의 궁전에서 자신과 혈전을 치렀던 사카의 모습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는 당시 카렐의 팔꿈치에 맞아 턱이 부서졌던 흉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차마 카렐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카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의 눈을 내려다보며 살짝 송곳니를 드러냈다.
“여전히 날 두려워하고 있구나.”
사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그에게 후방의 유리상자를 가리켰다.
“돌아가라. 우리가 여기서 남부를 상대하고 있을 테니.”
카렐을 다시 한 번 올려본 사카는 부하들에게 손을 저어 후방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철성을 무너뜨리려 기를 쓰고 이곳까지 달려왔던 2천 가까운 병사들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친위군과 자신의 대장 사카, 그리고 후방의 유리상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카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위대한 현신께 되돌아간다! 쐐기꼴 예진으로! 코런덤이 선봉에 서고 헤네티들이 뒤에 서서 지원 사격한다! 플라칼 가 새끼들 따위는 바로 돌파한다!”
기수를 동반한 사카가 방패와 칼을 뽑아들고 선봉에 직접 앞장섰다.
2천의 헤네티들은 지금껏 죽어라 싸웠던 철성의 친위군에게 등을 보이고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며 이번엔 남쪽으로 되돌아 돌진하기 시작했다. 맞은편에는 카나르 황제가 이끄는 3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가 100명씩 묶인 거대한 대오 수십 개로 웅장한 장성을 그리며 철성을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들의 전면은 사격과 포격 파편을 막기 위한 전차가 막아서고 있고, 그 뒤로는 방패와 창, 칼로 중무장한 보병들이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뒤따랐다.
“놈들은 오합지졸이다! 우리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카와 코런덤 지휘관들이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들의 말대로, 마약까지 먹었는데도 지독한 고도 때문에 칼데아군의 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저 너머에 위대한 현신과 우리 동료들이 있다!”
1천의 코런덤 X들과 1천의 시민 헤네티로 이루어진 쐐기꼴의 대오는 15배나 되는 플라칼 가 보병대 중앙을 향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악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나아갔다. 헤네티들이 아니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나콘다는 저들의 전방을 쏴라.”
카렐은 코런덤들이 돌진하고 있는 전방의 플라칼 가 보병대를 가리켰다. 잠시 포격을 멈추었던 철성 앞 친위군 아나콘다 20문이 이번엔 새로운 적, 새 표적을 향해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돌진하는 코런덤들의 머리 위를 넘어간 친위군의 포탄이 단단한 밀집대오를 이루고 다가오는 플라칼 가 보병대의 머리 위에 떨어지며 수십의 병사들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쿵쿵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탄두 파편과 기화탄의 불꽃이 사방에서 터지며 코런덤들의 진로를 따라 플라칼 가 보병대의 대오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돌격! 단숨에 못 뚫는 줄은 남아서 버티고 죽어라!”
선봉에 선 사카는 친위군의 포격에 짓이겨진 플라칼 가 보병의 시체를 밟고 그들의 견고한 대오 중앙에 뛰어들었다. 방패와 칼로 무장한 코런덤들의 뒤를 따르는 일반 헤네티들은 앞서가는 코런덤들의 길이 막히지 않도록 마우저로 지원사격을 퍼부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막아! 뚫리는 소대는 목을 벤다!”
순식간에 손을 잡고 반격을 해 오는 친위군과 교단군의 연합공격에 당황한 플라칼 가 지휘관들의 악에 찬 고함이 울렸지만 죽으려고 맘먹고 덤비는 무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철성 공격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헤네티들도 코앞에서 대신관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중 포격에 초토화된 플라칼 가 보병대의 중앙을 무서운 속도로 갈랐고, 그들의 코앞으로 후방에서 쏘아주는 친위군의 포탄이 자로 잰 듯 쾅쾅 떨어지며 진로를 열어주었다.
“바로 앞에 위대한 현신께서 계신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사카는 플라칼 가 보병대의 제일 후미에 있던 보병대 연대장의 머리와 몸통을 단숨에 대각선으로 갈라내며 그의 피보라를 헤치고 적진을 완전히 갈라내며 빠져나왔다. 뒤이어 그를 바싹 따라온 코런덤들도 놀라 흩어지는 플라칼 가 보병들의 등에, 뒤통수에,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대장의 뒤를 따라 플라칼 가 보병대 한복판을 돌파해냈다.
“우와아!”
마약과 어마어마한 숫자로 무장한 3만의 견고한 대오도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2천의 광기어린 전사들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앞으로 나가! 뒤는 돌아보지도 마라!”
중간중간 플라칼 가 보병대 중간에 붙들려 뒤처진 헤네티들 수백이 새카맣게 몰려든 칼데아 보병들에게 끔찍하게 도살당하는 광경도 펼쳐졌지만 그들도 동료들이 자신을 구해주러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팔다리가 잘리고, 몸에 구멍이 나면서도 적의 다리에 매달리고, 무기를 붙들고 몸부림치며 적을 최대한 붙들고 늘어졌다.
살아남은 1천 5백 남짓의 헤네티들은 동료 헤네티들이 대신관이 있는 유리상자를 결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고원 남쪽으로 계속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피 튀기며 싸웠던 놈들이지만 존경해 줘야겠어.”
카렐은 3만의 보병대를 돌파해 이디나를 지키러 달려가고 있는 코런덤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페로와 코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수술을 받는 몇 시간 동안 이곳을 지켜낸 두 남자들은 지치고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살아서 두 발로 나온 그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살아나와 고마워.”
페로가 먼저 카렐에게 달려와서는 사람들이 보건 말건 가슴을 와락 껴안았다. 수술을 막 마친 카렐의 여윈 얼굴을 더듬으며 무어라 말을 하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도로 입술을 닫으며 말없이 어깨에 뺨을 기댔다. 그뿐이었다. 그의 한 손은 막 잔딕을 빼낸 그의 왼쪽 손목을 꼭 붙들고 있었다.
“궁에 있으라니까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카렐이 그나마 성한 오른팔로 페로의 등을 토닥이며 맘에도 없는 말을 속삭였다. 코리온이 한 발 늦게 다가와 두 팔을 벌렸지만 페로가 카렐의 가슴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다친 왼팔을 어렵게 움직여 코리온을 심장 위에 꼭 안았다. 그의 몸이 닿자 왼팔의 욱신거리는 아픔이 눈 녹은 듯 싹 사라졌다.
“이렇게 셋이 안고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카렐이 두 남자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모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셋이 이런 기쁨을 나누고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코런덤들에게 돌파당하고 잠시 혼비백산했던 3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가 그새 전열을 재정비해 함성을 울리며 철성을 무너뜨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남자들은 그제야 마지못해 카렐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양옆을 마치 옹위하듯 지키고 섰다. 카렐도 이제 황제로 돌아가야 했다.
“포탄은 얼마나 남았소? 학장?”
“집중 포격을 10분 정도 지속할 만큼입니다.”
“……상태가 가장 좋은 3문은 황금탑 앞으로 미리 옮겨놓으시오. 나머지는……있는 만큼 쏘고 불태워버리시오.”
카렐은 멀리 남쪽 하늘에서 보이는 검은 구름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마른번개가 쳤다. 느닷없는 벼락에 놀란 양측, 아니 세 측의 장병들이 화들짝 놀랐지만 워낙에 마른번개가 흔한 곳이라 전장의 분위기가 딱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우르르 하는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천둥번개가 치는 하늘을 올려보는 카렐의 입술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남풍이 부는구나.”
“응?”
페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치켜든 카렐의 붉은 머리칼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늘게 흩날리고 있었다.
“왜 기분이 갑자기 좋아질까?”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뜬금없이 웃는 황제의 모습에 페로와 코리온이 슬쩍 눈을 흘겼다.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카렐은 무언가에 취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손끝을 적진에 향했다.
“우린 절대 철성을 포기하지 않으니 저자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려라.”
코리온과 페로의 지휘를 받는 포병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발리스타와 포탄을 주변을 새카맣게 뒤덮은 3만의 보병대를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발사!”
먼지를 까맣게 뒤집어쓴 페로가 칼끝을 적진에 향하고 악을 썼다. 발 빠른 코런덤들과는 달리 느린데다가 밀집대오를 이룬 중장보병대는 포병대에 손쉬운 표적이었다.
“포탄을 한 발이라도 남긴 포반은 모조리 목을 베겠다! 포탄 지고 저승에 갈 것 아니면 지금 다 쏴버려!”
20문의 아나콘다에서 경쟁적으로 날아오른 포탄이 하늘에 수십 개의 긴 꼬리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대오 곳곳에서 굉음을 내며 파편을 터뜨렸다. 이런 고지대에 처음 올라와 본 칼데아군 중장보병들은 무차별로 쏟아 붓는 발리스타의 파편과 기화탄의 불꽃에 수십 명씩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포격으로 속속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3만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워 한 발 한 발 계속 철성에 가까워졌다. 마약에 절반 취한 그들은 상대가 X들이라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고 그저 상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노예가 되어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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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계산해보니 이제 7편쯤 남았군요, 카렐은 작중 베스트 두 남자들을 한 품에 안은.....복 받은(죄 많은?) 뇨자입니다.
참고로, 다음회에 등장 예고된(?) 12.7mm(50구경) 철갑고폭탄(APHE)은 저격용으로는 이미 쓰이고 있는 탄종 중의 하나이고요, 원래는 장갑차 등에 쓰는 대물용입니다. 대인용으로는.....비인도적인 무기(?)로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 (물론 기관총탄과 저격탄은 차이가 있지만요;;)
옆동네 예스24 연재 중인 콜로니-사르코시스트는 오늘 18화가 올라오는 날입니다. 출판사에서 프로모션하는 작가들과 커X에서 단체로 유치한 작가분들 사이에서 저 혼자 개인 작가라 고군분투 중이네요. 흑, -_-;;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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