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17화 (1,111/1,132)

< -- 1117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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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지셰르 분지의 전장에서 황실 동맹군 임시 사령관을 맡은 릴라크는 초조함을 감추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원래는 지금쯤 철성의 황제가 이곳으로 내려와 주거나, 최소한 그곳에서 지휘라도 해 주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지만 황제는 내려와 주기는 고사하고 여전히 수술대에 누워 연락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자리는 대장군인 자신의 지위로 이끌기는 버거웠다. 각 단위부대를 이끄는 내로라하는 지휘관들이 모두 그와 같은 계급이라는 것도 부담이 되었고, 특히나 언제 자신을 밟고 튀어나오려 들지 모르는 베흔을 다스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릴라크는 사에나를 통해 황제에게서 받은 작은 메모를 꾸깃꾸깃 접어 손에 꽉 쥐었다. 메모에는 [혹 내가 죽으면 베흔을 즉시 사살할 것] 이라는 섬뜩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황제는 베흔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릴라크도 동감이었다. 유사시 베흔을 사살하는 임무는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명사수 사에나의 역할이었다.

“1선의 보병대는 굳건히 자리만 지켜주고 있으시오. 기다리는 타이밍이 올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고.”

언제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냐는 일선의 거듭된 물음에 릴라크가 짜증스레 대답했다. 분지의 전장은 1시간이 넘게 정체상태였다. 양쪽 모두 1선은 보병대이고, 지금까지는 양쪽 모두 진짜 칼날을 2선 부대에 감춘 채 힘 싸움만 거듭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싸움은 예상대로였다. 서쪽의 서부보병대는 대충 현상유지만 하고 있고, 동쪽의 북부보병대는 도리어 남부에 밀리고 있었다. 그 중간에 낀 황실군 1, 3군단은 약간 전진하다가 중단한 상태였다.

“1, 3군단은 실망이네.”

릴라크는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말이 많은 베흔의 참견에 눈을 흘겼다. 황실 동맹군의 1선 중앙은 가장 역사 깊은 정예군단인 1, 3군단 3만이었다. 평상시 이들의 전력이라면 남부보병대 정도는 순식간에 압도하고 무너뜨려야 정상이지만 이번엔 마누엘과 클리멘트가 지휘하는 칼데아군 중군의 숫자가 2배나 되는데다가, 독한 마약을 먹은 보병들은 이전처럼 가디언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그들과 합류한 코런덤들이 문제였다. 릴라크가 야전군의 편을 들어주었다.

“저 정도면 할 만큼 하는 거요. 클리멘트 년이 술수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빤히 알면서 왜 그러시오? 적 후방에 근위대 3만이 있는데 혼자 밀어붙이는 건 자살행위지.”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속을 긁으려 드는 베흔에게 따끔한 경고로 보답했다.

“그대는 맡은 가디언부대나 신경 쓰지 않고?”

“그나저나 마누엘 놈 딸은 잘 키웠나 보오.”

뚱해진 베흔이 말을 돌렸다. 차마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적 중군을 맡은 마누엘과 클리멘트 부녀는 굳이 마약이나 코런덤의 도움이 아니고서도 생각 외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질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 황실군에 정면으로 덤비지 않고 시작부터 살짝 발을 빼고 우묵한 U자 주머니를 만들어 도리어 상대의 돌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놈들은 언제 칼날을 보여줄 참인 거지.”

이래저래 답답해진 릴라크는 다시 할룩스를 보았다. 때마침 그의 할룩스로 철성에서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 황상께서 깨셨음. -

릴라크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며 베흔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황제에게서 받은 메모를 밑에 있는 폐기함에 얼른 넣어 태워버렸다.

“황상께선 무사하시다는 연락이요.”

베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지만 이번만은 릴라크도 그에게서 기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릴라크는 두 번째로 동쪽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바에자가 맡고 있는 북부군이 산 위에서 내려오는 송풍로의 나팔 모양 끝자락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6만의 북부보병대는 3제후 헬리노스가 지휘하는 7만의 칼데아 보병대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칼데아군 뒤에 대기하고 있는 근위대 3만은 끼지조차 않았는데도 북부군은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저 찌질이들 같으니.”

베흔이 다시 전황을 비꼬아댔다. 북부군이 이전 오르마즈 때만큼의 전력을 되찾지 못했다 해도 천하의 명장 바에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예상외의 부진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주특기인 장창 대오도 펼치지 못한 채 방패와 도끼만으로 어설픈 접근전을 펼치느라 쩔쩔 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릴라크의 입가에는 도리어 미소가 감돌았다.

“바에자 그 양반이 잘 하고 있네.”

눈치 빠른 베흔은 그제야 북부군의 졸전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눈을 흘겼다.

“그나저나 난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 거야.”

릴라크는 자꾸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지막으로 ―제일 걱정덩어리인―서쪽을 돌아보았다. 원래는 황제에게 사령관 자리를 넘겨준 후, 릴라크가 바로 저곳에 있는 2만의 황실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못 내려오고, 릴라크도 사령부를 못 떠나면서 지휘관이 애매해졌지만 다행히 오늘 새벽 베아트릭스가 비엔에서 막 도착해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런데 릴라크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황후가 안 왔길 다행이지, 염병할, 비빈 집합소가 다 됐네.”

릴라크는 황제가 들으면 식겁할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지난 사오시안트 전투 당시 ‘상전’ 네페티의 돌발행동에 큰 낭패를 겪었던 그로서는 또다시 그 말썽꾼이 저 전장에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보니 저쪽을 볼 때마다 불안하고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황상께서 지휘권을 넘겨받으셔야 여길 좀 나가지.”

그때, 그의 할룩스에 달리의 다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릴라크가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저어, 그 그게……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달리의 당혹해하는 말투를 들은 순간, 릴라크는 ‘올 게 왔구나’ 싶은 마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확 높아졌다.

“황비께서 또 문제를 일으키셨다고?”

놀라 펄쩍 뛰는 릴라크에게 달리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뇨, 황비가 아니고……베아트릭스 대장군께서…….”

베아트릭스가 이곳 하임달까지 와 주어 제일 반가운 건 ‘형식상 우군 사령관’인 네페티였다. 그는 이번 원정에 서부를 참여시키는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사오시안트 전투 막판 네페티의 돌발행동에 제대로 데었던 릴라크가 보안국장 사에나까지 보내어 단속을 맡겼지만 그는 이번엔 ‘절대’ 엉뚱한 짓 따위는 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옛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릴라크 대신 베아트릭스가 와 주어 내심 다행이라고 여기던 차였다.

그런데 그렇게 안도하고 있던 네페티는 이번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자네 어딜 가는 건가!”

네페티는 흰 배너를 달고 적진에 가려는 베아트릭스를 가까스로 따라잡았다. 그는 명목상 지휘관인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느닷없이 적진으로 가려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직접 말을 달려 뒤를 쫓아온 네페티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며 주변 사람들을 물렀다.

“종장님……아니, 카나르 플라칼과 잠깐 이야기만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저자는 반역도의 수괴란 말일세!!!”

“제가 책임을 진 전투에서 무고한 가문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비록 물리쳐야 할 적이지만 처자식 여럿을 한 번에 잃었으니 당시 일을 해명이라도 하고 돌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해명이라니! 듣자하니 종가에서 멋대로 달아나다가 셔틀이 추락했다며! 그게 왜 자네 책임이야!”

답답해진 네페티는 다시 앞으로 나가려는 베아트릭스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도 이번만은 완강했다.

“딸아이의 코앞이었고, 딸아이가 발리스타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애꿎은 제 딸아이가 가문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종가를 차지한 악당이라는 짐을 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암살한 것도 아니고 전투 중이었잖아! 그게 왜 엘룬 책임이야!”

네페티가 다시 베아트릭스의 팔을 붙들었다. 네페티의 속이 확 타올랐지만 플라칼 가라는 이름에 항상 족쇄를 잡혀 살아 온 베아트릭스의 속내를 아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아트릭스의 딸 엘룬이 가문을 장악한다 해도 분명 이번 일이 두고두고 꼬리표로 달려있을 건 분명했다.

베아트릭스가 네페티의 손을 떨쳐내며 억지로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반역도이지만 자존심도 강하고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분명 반대편에서 우리 편 북부보병대가 무너지면 그때 돌격할 맘을 먹고 있을 테니 지금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베아트릭스는 네페티의 만류에도 결국 말을 몰아 다시 적진으로 나아갔다. 네페티로서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릴라크 경이 옛날에 날 보고 얼마나 속이 터졌을지 이제야 알겠네.”

고개를 저으며 막 돌아선 네페티는 갑자기 들어온 할룩스 메시지를 힐끔 보았다. 철성에서 동맹군의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이 전문에는 황제의 수술이 끝났다는 문장이 제일 먼저 적혀있었다.

“폐하?”

네페티는 무심결에 투구 위를 짚었다. 눈물이 났지만 눈에 낀 스코프 때문에 닦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올라가고픈 마음에 제플린 산 정상을 올려보았지만 지금의 그에겐 너무 멀었다. 네페티는 감격을 억누르며 함께 들어온 다른 전문을 읽었다.

“후음.”

헤즈의 소식에 눈가에 살짝 힘이 들어간 네페티는 방금 떠난 베아트릭스를 돌아보았다. 각군 사령관들에게만 전해진 문장이니 아직 베아트릭스에겐 전달되지 않았을 터였다. 베아트릭스는 전장의 에티켓대로 가디언이나 다른 무장을 거느리지 않고 부장과 근위기병 50여 기만 거느린 채 적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국장 자네도 나와 같은 걸 받았나?”

네페티는 망토로 정체를 감추고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는 사에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번에 자네가 책임져야 할 건 내가 아닌 것 같네만?”

마찬가지로 할룩스를 보고 있던 사에나도 베아트릭스가 가는 곳을 노려보았다.

“제가 끼어드는 건 접견의 에티켓에서 어긋난다는 건 아시겠죠?”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다니?”

“그저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상대가 먼저 룰을 깬다면 우리가 굳이 지킬 필요가 없지.”

“저자가 날뛸 걸 알면서도 황빈을 미끼로 쓰셨다는 걸 황상께서 아시면 크게 진노하실 텐데요.”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걸 자네도 알 텐데?”

네페티가 투구를 쓴 얼굴 위에 슬쩍 베일을 내리며 음산하게 대답했다. 사에나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악마처럼 웃었다.

“이미 한 배를 탄 것 같군요.”

사에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가문 종장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멀어져가는 베아트릭스의 뒤를 적당한 거리에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둘을 보내놓은 네페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본진으로 돌아가며 낙타병을 이끌고 있는 하지즈 장군과 베아트릭스를 대신해 황실 기병대를 지휘하는 달리를 불러냈다.

“일이 잘못될지 모르니 언제든 나올 준비 하고 있어라.”

베아트릭스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전장 한쪽의 평지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멀지 않은 등 뒤에선 동맹군의 서부 보병대와 칼데아군 남부보병대의 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 기병들은 그 주변을 둘러싼 채 아직은 본격적인 교전을 벌이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였다.

베아트릭스 맞은편에서는 칼데아군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가 수놓아진 거대한 깃발이 흰 배너를 달고 베아트릭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깃발이라 멀리서도 눈에 확 띌 만큼 번들거렸다. 내심 카나르가 자신의 청을 거부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베아트릭스는 그가 순순히 대화를 하겠다고 나오고 있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그는 긴장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최대한 당당한 태도로 카나르에게 다가갔다. 비록 가문의 일개 종원이지만 명색이 황빈으로서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거리가 적당히 가까워지자 양쪽에선 십여 명의 측근만 데리고 서로에게 다가갔다. 둘은 예법에 따라 투구를 벗고 얼굴을 내보였다.

“뻔뻔스런 년.”

예상대로, 카나르의 눈빛은 눈앞의 베아트릭스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안장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때려죽인 더러운 철퇴가 걸려 있었다. 베아트릭스도 상대가 적의 수괴라는 건 알지만 플라칼 가라는 족쇄에 어느새 자신이 위축된 것을 느꼈다.

“네가 감히 무고한 가문 민간인 수십을 학살하고…….”

“학살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포위가 끝나 탈출이 불가능한데도 종가 옥상에서 갑자기 셔틀이 이륙해 저희 쪽으로 날아들길래 자폭을 시도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네가 쏘라고 명령한 건 사실 아니냐! 아이까지 둘이나 죽었다!”

흥분한 카나르의 목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도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지지 않고 카나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결과에 대해서 인도적으로는 유감입니다. 하지만 어느 무장이라도 그 상황에선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시신은 최대한 예의로 거두어 놓았습니다.”

“닥치지 못해!”

카나르가 씩씩거렸다. 그는 욕이라도 실컷 퍼부어주러 나온 것이지 애당초 해명을 들으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네가 전장에서 편하게 죽을 줄 아냐? 천만에, 조만간 네년 앞에서 네 딸년의 고기를 내 사냥개들에게 먹여 줄 테니 각오해라. 넌 산 채로 기름통에 빠져죽을 각오나 하고 있어라.”

카나르가 목젖이 보일 만큼 고함을 질러댔다.

절반 단념한 표정의 베아트릭스는 그의 발악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카나르 본인도 실컷 악담은 퍼부었지만 마음이 편해지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자신의 꼴이 점점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분을 참지 못한 카나르는 자기도 모르게 안장 옆의 철퇴를 덥석 붙들었다. 움찔한 베아트릭스 역시 반사적으로 창에 손을 가져갔다.

“폐하.”

눈치 빠른 부장 하나가 재빨리 다가와 이성을 잃은 황제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나르가 마지못해 철퇴에서 손을 떼었다. 그는 사납고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지만 나름의 지킬 선은 지키는 냉정한 군인 정치가였다. 그는 베아트릭스를 향해 침을 퉤 뱉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흐음?”

카나르는 그제야 허리춤에서 할룩스가 이미 몇 분 째 깜박거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베아트릭스를 향해 욕설을 뱉어내는 그 동안에도 열심히 황제를 찾고 있던 듯했다. 카나르는 성을 죽이며 마지못해 할룩스를 켰다. 뒤이어 나타난 건 아들 헤즈의 부관이었다. 흙투성이에 갑옷도 온통 흠집투성이인 모습이 카나르를 당황하게 했다.

“뭐냐? 그놈은 어디 가고?”

카나르의 거친 추궁에 당황한 부관이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장태자께서 흡기구로 빨려들어가시어…….”

부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상황을 상상한 카나르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는 굳어버린 턱으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시체를 보여 봐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죽은 걸 보여 보라고!”

“죽여주십시오, 저희로서는 시신을 도저히…….”

부관은 바닥에 엎드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카나르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그를 받쳐주었던 최소한의 자존심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심지어 제후로서의 최소한의 판단력마저 와르르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지난 며칠 새, 그는 자신만의 ‘제국’을 손에 쥐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씨!”

이성이 무너진 카나르는 안장의 철퇴를 번쩍 빼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베아트릭스를 죽이려는 자신을 저지했던 부장의 머리를 다짜고짜 후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주군에게 급습을 당한 무장은 머리가 깨진 채 말 밑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다 저년 때문이야!”

광기에 사로잡힌 카나르는 막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돌아가려는 베아트릭스를 향해 갑작스레 돌격하기 시작했다. 앞뒤사정 모르는 근위병들도 일단 황제를 에워싸고 함께 돌진했다. 느닷없이 등 뒤로 다가오는 말굽 소리에 베아트릭스 일행도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황빈 마마!”

별 생각 없이 등을 보였던 베아트릭스는 본진으로 되돌아가는 듯 보였던 카나르가 갑자기 미친 듯 돌진해오는 모습에 경악을 했다. 명색이 황제라는 자의 격에 전혀 맞지 않는, 무례하고 예법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아앗!”

베아트릭스도 반사적으로 자리드를 뽑아 몸을 돌리고 뒤로 힘껏 날렸다. 하지만 그가 날린 자리드는 황제를 결사적으로 호위하는 칼데아 근위병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자리드에 부서진 방패를 껴안고 낙마하는 근위병 뒤로, 눈빛까지 흐려진 카나르가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접근전으로는 베아트릭스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다 네년 때문이야!”

양측 근위병들끼리 맞붙은 사이, 카나르는 베아트릭스의 근위병들 틈새를 휙 지나와 코앞까지 다가왔다. 베아트릭스는 자리드를 포기하고 창을 쥐려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카나르는 막 창을 집으려는 베아트릭스의 팔을 철퇴로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일격에 팔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베아트릭스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기울었다. 원래부터 강한 무장이었지만, 분노와 광기까지 뒤섞인 이 남자의 힘은 상대할 수가 없었다. 중심을 잃은 베아트릭스가 뒷머리를 드러내자 카나르가 철퇴를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우압!”

카나르와 베아트릭스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카나르의 철퇴에 얻어맞은 베아트릭스의 투구가 쩍 갈라지며 충격을 받은 그가 말 옆으로 굴러 떨어졌고, 카나르 역시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안장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는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전혀 모른 채 철퇴를 다시 쳐들려 했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허전했다.

“우아악!”

중간이 뚝 잘린 카나르의 오른쪽 팔뚝이 살점에 걸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이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지 못했다. 여전히 광기에 휩싸인 그는 팔이 잘린 고통도 모른 채 토막만큼 남은 팔을 휘둘러대며 괴성을 질렀지만 근위병들이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또다시 무언가가 옆을 휙 스쳐 날아갔다.

그 사이, 한 발 뒤에서 지켜보던 양쪽 근위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몰려들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황실 기병대가 꿈틀대며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황제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칼데아군 기병대도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함성을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근위병들이 여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는 카나르를 옆에서 붙들고 싸움터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카나르는 근위병들에게 끌려 후방으로 옮겨지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공격해! 저 새끼들을 당장 박살내 버려!”

후방 멀리에서 마우저로 카나르를 저격한 사에나는 얼른 무기를 안장 밑에 감추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기왕 막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김에 한 방에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베아트릭스와 주변의 근위병들 때문에 제대로 조준을 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추태로 교전의 룰은 물론이고 황제의 위신까지 구겨놓은 카나르는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괴성을 질러대며 후방으로 실려 가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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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르가 인간적으로 좀 불쌍하긴 합니다. ^^;;

혈맥 완결 출판본 예약기간이 http://www.vein.pe.kr/에서 어제로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약기간 이벤트만 끝났지 아직 주문은 가능하시고요, 다음주 인쇄에 들어가 다다음주 초에 배송예정입니다. (다음주 금요일이 공교롭게 석가탄신일이라;;; 다음주에 다 끝내기는 힘들어졌네요.)

그리고 지난번 공지한 제 신작 [콜로니-사르코시스트 No.12]가 온라인서점 예스24와 연재계약을 맺었고요. (이후 연재처를 포털 등으로 확대할 예정입니다) 조아라 프리미엄이나 북큐브와 비슷하게 운영되는 듯합니다.

콜로니 첫 연재를 하게 되면 이곳에서 공지 겸 혈맥 축하연재(?)를 한 편 하겠습니다. 첫날은 무료라고 들었는데 제가 저녁 늦게 연재하는지라 부지런하지 않으시면...^^;; 그쪽 사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다음주 수요일이나 금요일쯤 1회를 연재하지 않을까 싶네요.

출판사를 안 낀 독립작가라는 특이한 케이스(?)라 제가 작가로 계속 활동할 수 있을지는 순전히 독자님들 성원에 걸려있네요. 절필 선언하지 않도록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아라에도 연재 예정이지만 이쪽은 일단 혈맥 출판본 연재가 마무리되는대로 연재방법과 시기를 정해 공지하겠습니다. 콜로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맛뵈기는 팬카페 작가게시판과 출판본 주문게시판의 공지로 일부 올려놓았으니 참고하시고요.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인터파크, T스토어, 올레eBook,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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