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15화 (1,109/1,132)

< -- 1115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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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산의 흡기구와 이어진 지하 송풍로 안에는 자이납이 10여 명의 크바르나들을 데리고 혹시 모를 적의 출입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아트위야와 야투를 붙잡았고, 플라칼 가 정찰대 6명을 전멸시켰으니 적이 이곳으로 언제 다시 배후공격을 시도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대대적인 회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혼자 이 컴컴한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는 천방지축 아가씨의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왜 하필 날 이런 데 처박아놓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자이납이 연신 툴툴거렸다. 지난 협곡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그를 나름 배려한 것이라지만 깜깜한 동굴에 웅크린 그는 좀이 쑤셔 몇 시간째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떠들지 않고는 10분도 못 버티는 그로서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꺼내는 것이 어둠보다 더 갑갑했다.

옆에 앉은 크바르나 분대장이 손가락이 안 보일 만큼 빠르게 수화를 건넸다.

- 밤새 한 번도 안 나타났는데 놈들이 여기로 오긴 하는 걸까요? -

자이납과 마찬가지로 몸이 달아오른 크바르나들도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철성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는 중이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X들로서는 이렇게 자신들만 배제되어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 군바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럼 어쩌게? -

자이납이 옛날 카렐에게서 받은 칼과 마우저를 품에 안고 입을 삐죽거렸다. 속이 팍팍 타기는 하지만 이곳도 분명 중요한 장소니 괜히 툴툴거려봤자 자기 속만 탈뿐이었다. 크바르나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 설마 1번 터빈이 갑자기 돌지는 않겠죠? -

- 학장님이 황금탑 밖에서 1번 터빈을 돌리는 임시 스위치를 만들긴 하셨는데 사제의 키를 꺼냈으니 쓸 일이 없을 거야. 황금탑만 안 열면 팥죽이 될 일은 없댔으니까 뭐 믿어야지. -

자이납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순간, 품에 안은 감지장치가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지레 놀란 자이납은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누군가 밖에서 또다시 잠입하려 한다는 의미였다.

- 흩어져. 너희 둘 나가서 확인하고. -

자이납이 재빨리 크바르나들에게 손짓을 했다. 2명이 확인을 나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정말로 적병들의 기척이 X의 감각기에 느껴졌다. 뒤이어 먼저 보낸 정찰병들에게서 무전이 들어왔다.

- 가디언을 포함한 플라칼 가의 대규모 정예병. 숫자는 확인 불가하나 대장군급 이상이 지휘하고 있음. 참고사항 : 대단히 뚱뚱함. -

‘엄마야.’

자이납이 기겁을 했다.

- 대장군이 들어왔다면 대체 몇 명이 이리로 온다는 거냐?  가만, 뚱뚱한 대장군이 다 있냐? -

자이납의 물음에 크바르나들의 표정이 더 창백해졌다. 뚱뚱한 대장군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딱 하나였다. 그리고 그자가 들어왔다면 그저 정찰이 아니고 대대적인 배후공격을 시도한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가디언까지 들어왔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자이납은 일단 유선 통신장비로 철성에 있는 지휘부에 바삐 전문을 보냈다. 크바르나 분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 철성에 지금 한참 회전이 벌어졌을 텐데 여기까지 신경을 못 써주면 어쩌죠? -

- 별 수 있냐? 그럼 우리끼리 막다가 뒈지는 거지 뭐. 염병. -

그때, 정찰을 내보낸 2명에게서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 적의 숫자가 현재 1백에서 계속 늘고 있음. -

- 위험하니 일단 물러나와. -

답변을 보내면서도 자이납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는 고립된 부대 처지에 사수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분대장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2명의 정찰병이 돌아올 때까지도 철성 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 대답이 없는데요? -

자이납은 하는 수 없이 전투준비를 명했다. 자이납의 손짓을 받은 크바르나들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챙겼다. 이젠 이곳으로 1백 명이 오건, 1천 명이 오건 이들만으로 차단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에이, 씨, 난 왜 꼭 마지막 전투에서 때깔 안 나는 자리만 맡아.’

또다시 신세한탄을 하려던 자이납은 지금껏 조용하던 유선 통신기가 깜박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엉?”

그는 재빨리 통신기로 달려가 전문 내용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철성에서 보낸 메시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카메라 설치하고 철성으로 퇴각해라. 황제.]

“으잉?”

자이납이 놀란 건 퇴각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에 있는 ‘황제’라는 단어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그 양반이야?”

기쁨 반, 놀라움 반에 자이납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놀란 크바르나들의 시선도 일제히 통신기로 쏟아졌다. 자이납은 얼떨떨한 얼굴로 분대장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 이거나 설치하고 돌아가자, 그 양반이 벌써 명령을 내리고 계신 게 맞나 확인해야지. -

자이납은 구석에 쟁여놓았던 배낭을 불끈 짊어지고 일어서려다가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명색이 절반 가디언이라는 이 덩치 좋은 아가씨가 작은 배낭 하나에 휘청거리는 모습에 크바르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이납은 외려 버럭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우씨, 구경났냐? 빨리 돌아가지 않고 뭐 해.”

흡기구로 들어온 건 플라칼 종장 일가, 아니 이젠 황가가 된 카나르 일가를 지키는 경호부대 500명이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분지에서 대회전을 이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지휘관이 엉뚱하게 자리를 빠져나와 이곳에 와 있었다. 먼저 이곳에 왔던 정찰대와는 달리 이들은 굴착장비에 분석 장비, 심지어 수레와 삽까지 모두 갖추고 제대로 내려온 참이었다. 이들은 흡기구의 수직굴을 내려와 검은 재 사이로 통로를 냈고, 이젠 이 굴을 통해 철성의 등 뒤로 접근할 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여기까지 내려온 건 실상 ‘군사적인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맙소사, 진짜 황금이라고?”

여우 모피를 두른 헤즈가 동굴을 막고 있는 댐퍼에서 먼지를 긁어냈다. 그가 데려온 엔지니어는 댐퍼에서 떼어낸 금속판 조각을 옷자락으로 잘 닦아 그에게 내밀었다.

“7할의 금이 섞였습니다. 수백 년이나 부식되지 않은 게 그 덕분인가 봅니다.”

“가만, 이 댐퍼 하나에 금이 얼마나 들었다는 거야?”

헤즈는 차 한 대가 족히 지나갈만한 동굴의 중간을 막고 있는 댐퍼를 올려보았다. 엔지니어는 댐퍼에 쓰인 조각의 두께와 무게를 대충 어림하고는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금속 부분만 어림하면……못 되어도 3백 관(1,125㎏)은 넘게 들지 않나 싶습니다.”

헤즈는 뚱뚱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머리로 재빨리 그 가치를 계산해 보았다.

“맙소사. 이런 게 이 동굴을 따라 줄줄이 있다고?”

헤즈도 부유한 남부 최고제후가문 후계자로 웬만한 돈 가치에는 둔감했지만 이건 수준이 달랐다. 굳이 철성이나 황금탑까지 가지 않아도 이 굴에 있는 댐퍼만 뜯어내도 가문의 몇 년 예산을 넘어갈 정도였다.

“이 안에서 행방불명된 정찰대 놈들도 혹시…….”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죠. 댐퍼 날개 한두 장만 떼어내도 신세 고칠 수 있을 테니까요. 장태자 전하.”

헤즈를 따라온 경호장교가 성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로 댐퍼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의 날개를 누군가 군데군데 떼어낸 흔적이 있었다. 아트위야와 야투를 찾아내라며 이곳에 들어왔던 정찰대 6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당황했던 헤즈는 대충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를 따라온 충성스런 경호부대 장병들조차 눈앞의 금덩이에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분지에서 중장보병대를 지휘하고 있어야 할 ‘장태자’ 헤즈가 아버지의 긴급한 명령을 받아 이곳까지 직접 달려온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분지는 괜찮을까요?”

부관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헤즈에겐 이미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내 보병대는 서부 보병대를 묶어놓은 역할일 뿐이야. 아버지께서 맡겠다고 하셨으니 알아서 잘 하시겠지.”

헤즈가 퉁명스레 대답하며 댐퍼의 묵직한 날개를 퉁퉁 쳐 보았다. 연합군 좌군은 백전노장인 아버지 카나르가 죽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앞장서고 있고, 모처럼 전투 지휘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아있던 가르시바에게 보병대 지휘를 맡겼으니 그가 자리를 비웠다고 딱히 큰 탈이 날 일은 없어보였다.

황금탑으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보고받은 카나르가 ‘황금 앞에서는 믿을 수 없는’ 아랫것들 대신 아들과 5백의 경호부대를 이곳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가 이 정도면 황금탑은…….”

헤즈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보다 더 빠른 계산이 흘렀다. 바에자가 말한 어마어마한 황금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헤즈는 바깥과 연결된 유선 통신장비를 켜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연락장교를 불러냈다.

“지금 철성 앞의 전황이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당장 알려라.”

헤즈는 교단에 심어놓은 프락치에게서 전황보고가 들어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실 아버지 카나르와 그는 철성 앞에서 벌어지는 황실과 교단의 싸움이 최대한 치열하게 전개되어 양쪽 모두 만신창이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교단이 쉽게 이겨버리면 자칫 그들이 황금탑에 입을 댈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단군이 지면 최상의 시나리오인데.’

헤즈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교단이 친위군에게 큰 피해만 입힌 채로 패하고 몰살당한다면 그와 부대원들은 만신창이의 승리자인 친위군을 뒤에서 툭 쳐 쓰러뜨리고 철성을 차지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양쪽의 전력으로 보아 교단이 패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그는 철성 앞의 전황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전하, 그쪽 프락치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장교가 조심스레 헤즈에게 내용을 전해왔다.

“1차 돌격에서 친위군에 비교적 큰 피해를 입히고 지금 2차 돌격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고원 중간에 1차 교두보까지 구축했다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락치 말로는 두세 번 더 두들기면 함락시킬 것 같답니다.”

“교단군 피해는?”

헤즈의 목소리가 신중했다. 물론 그가 바라는 건 교단군이 건재하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의 바람대로였다.

“교단도 친위군의 포병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3, 4백 이상의 전사와 부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즈는 시계를 보았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이 넘어가 이제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산의 위와 아래에서 양쪽이 죽자 사자 싸울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교단이 이겨도 수가 없는 건 아니지.’

헤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설사 철성에서 교단군이 친위군을 물리친다 해도 그의 부대는 결판이 나기 직전, ‘후방 지원군으로 왔다’는 핑계로 철성을 재빨리 선점할 참이었다. 그 후엔 펄펄 뛰는 교단과 협상 핑계로 최대한 시간을 끌며 그 동안에 이 댐퍼와 황금탑의 황금을 포함해 돈 나가는 중요한 것들을 모조리 뜯어가는 것이 목표였다.

“재밌게 되어가네.”

헤즈가 킬킬거리고 웃으며 경호부대원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가 데려온 5백의 경호부대는 이제 명색이 황실 경호부대인 만큼 보통의 정예병이 아니었고, 제후군에서는 두기 힘든 가디언까지 5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댐퍼를 밀고 안으로 들어가 랜턴을 비춰보니 굴은 까마득히 멀리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2명의 가문 가디언들이 랜턴 없이 앞장서서 들어가 주변을 재빨리 확인하고는 괜찮다고 손짓했다.

“여기만 죽 따라가면 검은 철성이다. 뒤통수를 쳐 줘야지.”

헤즈가 히죽거리며 들어갔다. 굴은 지난 수백 년의 세월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상태였다. 하지만 헤즈를 괴롭히는 건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헉, 헉.”

무거운 체중 때문에 오래 걸을 수가 없는 헤즈는 결국 몇 발짝 가지도 못해 금붙이를 실으려고 가져온 수레에 엉덩이를 붙여버렸다.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가며 그가 앉은 수레를 힘으로 끌 수밖에 없었다. 바퀴 덜커덩거리는 소리에 기도비닉이고 뭐고 엉망이 되었지만 다행히 앞장서가는 가디언에게서는 적의 흔적이 없다는 연락만 계속 들어왔다.

“대체 얼마나 가야 되냐?”

헤즈가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뒤따라오는 부관에게 물었다.

“지도상 직선으로 그어 봐도 철성까지 100스타디아(15㎞)가 넘습니다.”

“허. 가다가 죽겠네.”

헤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명색이 무장이지만 그는 100스타디아는 고사하고 1스타디아 이상도 뛰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계속 들어가도 될까요?”

부관이 랜턴으로 굴 안쪽을 비추며 걱정스레 물었다.

“듣자하니 이게 철성의 무슨 흡기구라던데 행여 기계가 작동되면 우르르 빨려 들어가기라도…….”

헤즈는 별 생각 없이 여기까지 따라온 보통 병사들이 그 말을 듣고 지레 놀라 어깨를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눈치 없는 부관에게 대뜸 눈을 부라렸다.

“이 맹추야, 적군은 이미 돌릴 수 있는 터빈은 다 돌리고 있어. 이걸 돌리는 터빈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어버렸다고.”

“아, 그, 그렇군요.”

터빈 돌아가는 것보다 이 잔혹한 상관이 더 무서운 부관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지난 제위전쟁에서 승자의 편에 선 덕분에 면죄부를 받았던 이 사내는 그 이후 최고제후가의 적장자가 되면서 더 오만하고 잔혹해졌다. 그는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자들은 상상하기도 고약한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이는 것에 맛이 들린 듯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그는 본토에서 종가를 빼앗긴 근위부대 간부들의 일가 50여명을 원정군에서 추려내 산 채로 토막 내고 삶아 가족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굴이 깊어지면서 공기도 점점 탁해져 일행의 숨이 점점 가빠지고 걸음도 느려졌다. 몸이 비둔한 헤즈는 수레 위에 편안히 앉아서도 머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굴의 제한된 산소로 열댓 명의 네피와 자이납 일행이 지나는 건 별 문제가 없었지만 5백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어오며 문제가 심각해졌다. 병사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공포도 잊은 채 겨우겨우 걸음만 움직였다.

“너희 모두에게 각자의 주먹 크기만큼 순금 덩이를 주마.”

헤즈가 헐떡거리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큰소리를 쳤다. ‘금’이라는 말에 병사들의 걸음이 돌연 빨라졌다.

맏아들 헤즈가 철성의 흡기구를 통해 검은 철성의 등 뒤로 다가가고 있을 그 시각, 카나르 황제는 전선의 서쪽에서 황실 동맹군의 우익과 맞서고 있었다. 그가 맞서는 동맹군 우군의 1선은 서부의 전통 명장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이끄는 서부군이었다.

보병 6만과 낙타병 1만으로 이루어진 서부군은 이전 남부제후군에는 익숙하다 못해 이젠 정이 든 사이였다. 둘은 보수 세력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이념을 명분으로 싸우는 큰 전쟁에서는 대개 한편이었지만, 땅을 놓고 싸우는 자잘한 전쟁에서는 앙숙이 따로 없었다. 카렐 황제의 제위 이전까지만 해도 10년이 멀다하고 자잘한 국경분쟁을 벌여온 터라 전장에서 만난 저들의 모습은 무장들에겐 반가울 지경이었다.

“보병대는 일단은 몸빵만 잘 하고 있으면 됩니다. 약빨이 제대로 들어서 미친 듯 싸우는군요.”

카나르는 함께 있는 땅딸보 여자에게 흐뭇하게 말했다. 명색이 황제로서 자존심은 상하지만, 어차피 여기는 승부처가 아니었다. 그는 기병대 주력군 4만을 이끌고 2선에 서서 보병들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곁에는 부담스런 인물이 둘이나 함께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기껏 맘먹고 나온 자리가 이런 지루한 자리였다니. 어쩐지 공짜로 준다고 했을 때 뭔가 이상하다 했어.”

땅딸보 여자는 계속 구시렁거렸다. 퍽이나 오랜만에 전장의 향기를 맡으러 나온 가르시바 마구스는 평소의 독설가 성미를 못 참고 여기서도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중이었다. 평상시엔 키가 작은 것이 항상 컴플렉스였던 그이지만 유난히 키가 큰 말에 올라 수많은 깃발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머쓱해진 카나르가 연신 하품을 하는 가르시바에게 관심거리 하나를 던져주었다.

“저놈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저러고 있는 걸까요?”

카나르는 적진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병력수송셔틀을 가리켰다. 보통 병력수송선이나 셔틀은 후방에 멀찍이 두는 것이 보통인데도, 이번엔 셔틀이 1선과 2선 사이에 줄줄이 들어앉아 벌써부터 꽁무니를 보이고 있었다.

“글쎄, 필요할 때 우리 후방을 강습하려고 저러니?”

이번에 입을 연 건 카나르와 함께 기병대를 맡은 네코 마구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탄탄한 갑옷을 차려입은 칼데아군의 중장기병들과는 달리, 그는 몸통에만 중갑옷을 걸쳤을 뿐 정작 머리에는 모자 모양 납작한 투구를 쓰고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과 치렁치렁한 금발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카나르가 보다 못해 그의 투구를 보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그런 투구로 뭘 막으려고요?”

“적군의 여자 병사들한테 미남계라도 쓰려나보오?”

말 많은 가르시바가 엉뚱한 소리를 했지만 카나르의 눈에는 어딘지 부실해보이는 투구도, 이 절세미남을 곁눈질하며 실실대고 있는 부장이나 근위병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 네코 현신의 조언이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카나르는 이전 남부제후군 기병대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칼데아 연합군의 대오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둘러보았다. 이전에는 쐐기꼴이나 밀집대오로 전진하던 중장기병들이 지금은 2줄 혹은 3줄의 긴 횡대로 창을 세우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수백, 수천 마리의 송충이들이 땅 위에 한 방향으로 드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전투를 위해 네코가 준비한 칼데아 기병대의 회심의 수였다.

그때, 카나르의 곁으로 플라칼 가 기사단장 망토의 키 큰 남자가 성큼 다가와 슬쩍 눈짓을 보냈다. 얼굴만 보아도 카나르의 핏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굵직하고 강인한 인상의 사나이였다. 카나르는 어딘지 불편한 마구스들 곁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헤즈 형님에게서 전문입니다.”

남자가 건넨 전문을 본 카나르의 표정에 미소가 번졌다. 시작부터 나오는 황금 이야기에 비엔의 참사로 망가졌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그도 통로에서부터 이렇게 많은 황금을 찾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었다.

“네 형이 한 건 올렸구나, 바실리.”

카나르가 둘째아들 바실리를 보며 히죽거렸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둘이었다. 헤즈가 곧 찾아낼 어마어마한 황금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바에자가 이끄는 반대편 동쪽의 우군이 언제 북부군을 박살내느냐였다. 그의 기병대는 바에자가 북부군을 박살내고 적의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일제 공격을 퍼부을 양으로 2선에서 힘만 비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건 처음 보는 깃발인걸.”

카나르는 서부군 후방에서 펄럭이고 있는 초록 바탕의 큰 깃발을 가리켰다. 초록색은 전통적으로 플레렌 가와 서부의 상징이었지만 오늘 그 위엔 플레렌 가 문장인 뱀이 아니고 금빛 용이 새겨져 있었다. 바실리가 냉큼 대답했다.

“네페티 황비와 딸 마하를 뜻하는 새 깃발이랍니다.”

“허, 주제에.”

카나르가 대뜸 저주를 내뱉었다.

“헤즈 녀석 이번에 제대로 한 건 올렸으니 네페티 저년 잡아서 첩으로나 줄까봐.”

“그럼 딸년은 당연히 저 주시겠죠? 지난번 보니 어린 게 벌써부터 색기가 줄줄 흐르는 게…….”

“미쳤냐? 그 핏줄을 살려놓으라고?”

아들의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대꾸하려던 카나르의 시선은 네페티의 깃발보다 조금 더 멀리에서 보이는 붉은 깃발에 딱 멈추었다. 동맹군 후방에 대기 중인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 2만의 중앙에는 플라칼 가 상징인 사자를 감싸고 있는 용 문장의 깃발이 보였다. 전투를 준비하던 오늘 새벽까지도 보이지 않던 깃발이었다.

“베아트릭스 그 개 같은 년이 지 뿌리도 모르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난밤 참사 소식 이후 겨우 가다듬어놓은 카나르의 평정심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문장 자체는 지금의 카나르에겐 도발에 가까웠다.

“저 염병할 년 내 손에 제대로 걸렸다.”

“저쪽에선 내보낼 게 없어서 비빈들을 죄다 전투에 내보내는군요.”

참모 하나가 빈정거리자 모두 맞장구를 치며 황제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지만 이미 무너진 카나르의 평정심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베아트릭스의 깃발이 1선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냐? 저년 나하고 싸우자는 거야?”

카나르는 당장이라도 창을 뽑아 쥐고 나갈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맴돌았다. 당황한 부장들이 얼른 황제의 고삐를 붙들고 진정시켰다.

“계획대로 움직이셔야죠, 이러시면 안 됩니다.”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카나르는 일선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더더욱 이성을 잃었다. 그쪽을 망원경으로 지켜본 참모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깃발 밑에 하얀 배너가 달렸습니다. 폐하께 용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어?”

카나르는 기가 막혀 목소리를 높였다. 대장기 밑에 단 흰색의 배너는 상대방 지휘관에게 만남을 청하는 신호였다. 망원경으로 보니 부장들을 거느린 베아트릭스가 보병들이 전투중인 측면을 빙 돌아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저년이 어디 뻔뻔스럽게.”

카나르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랫사람들이 재빨리 나섰다.

“저희가 나가서 접견 거부한다고 알리겠습니다. 어차피 폐하와는 격도 맞지 않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막 튀어나가려는 부장을 카나르가 다시 불렀다. 두 손에 고삐를 쥔 채 입술을 꽉 깨문 카나르가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그래, 뭐라고 지껄이고 싶어 저러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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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납의 저 무거운 가방(?)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요? ( '');;

1. 잘생긴 남자   2. 도시락폭탄   3. 책   4. 기타...?

* 지난 공지에서처럼 현재 http://www.vein.pe.kr/ 게시판에서는 엔딩 출판본 종이책 예약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5월 9일까지이니 예약기간 혜택을 받고픈 분께서는 날짜 꼭 지켜주시고요,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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