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09화 (1,104/1,132)

< -- 1109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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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을 나온 코리온은 닫힌 문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왼손이 욱신하며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버티어보려 했지만 자꾸 손끝이 떨려왔다. 아니, 손목의 고통보다 자신의 근육과 신경, 핏줄을 하나하나 건드리는 섬뜩한 느낌이, 뒤이어진 괜한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안 느끼고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안되겠다.”

자리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그는 철성의 회랑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카렐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때문에 수술을 하는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속 편하게 쉬거나 자고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수많은 기계와 늙은 혈관 같은 파이프로 온통 둘러싸인 철성의 긴 회랑을 지나 정문을 나섰다.

“후우.”

철성 앞도 맘 편히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곳엔 수십 문의 발리스타 포대가 남쪽을 향해 있고, 수백의 군인들이 곰보처럼 땅을 파 놓고 수많은 장애물을 가시밭처럼 깔아 놓은 소름끼치는 전쟁터일 뿐이었다.

황제가 수술에 들어가 있는 것을 잘 아는 장병들은 무언가 몰두할 것이라도 찾는 듯 더 미친 듯이 삽질을 했고, 밤늦게까지 잡일을 하는 포로들도 더 몰아붙였다. 지난 전투에서 무더기 포로로 잡힌 세닉 가의 포병들은 이 포대의 사정권에 들어올 다음 후보가 자신의 이전 전우가 아니기를 바라며 포대를 조이고 손보았다. 포로를 단속하는 임무를 맡은 세하 비장의 톤 높은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에 살아서 있을 수 있을까?”

코리온의 입에서 혼잣말이 맴돌았다. 이곳의 살벌한 분위기만 봐도 결전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코리온은 지휘소 참호의 난롯가에 쭈그려 앉았다. 차라리 이편이 마음이 편했다.

지난 저녁의 피로와 난로의 훈훈한 공기에 깜박 잠이 들었던 코리온은 주변이 시끌시끌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잠이 든 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가디언 힐러가 밖에서 크바르나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따로 시계는 없지만 참호 파 놓은 모양새를 보니 두세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코리온은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참호 밖으로 기어나갔다.

“무슨 일이냐?”

코리온의 물음에 힐러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산 남쪽에서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형체들이 포착되어서 네피 대장이 나갔습니다.”

비상이 걸린 철성 앞은 병사들이 포로를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지휘관과 사관들이 무기와 볼트를 나눠주며 뛰어다니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코리온도 크바르나들에 밀려 철성 안으로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

정원으로 뛰어나가 병사들에게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던 힐러는 다시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맥 빠진 얼굴로 부하들에게 손을 저었다.

“그만! 경계를 해제한다! 작업 복귀해!”

호들갑을 떨던 장병들은 돌연 경계가 풀리자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일단 긴장을 풀고 원래의 작업위치로 돌아갔다. 코리온도 영문을 모른 채 밖으로 돌아나갔다.

십여 분 후, 4개의 크고 육중한 형체가 나타나더니 지치고 축 처진 다리를 질질 끌며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코리온은 큰 서치라이트를 켜고 그쪽을 비춰보았다. 순간,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페로 대공?”

“염병할, 이 썩을 놈의 고물 트라이크 같으니.”

코리온과 눈이 딱 마주친 페로는 자신의 참담한 꼴을 의식하며 애꿎은 트라이크의 앞바퀴를 뻥 걷어찼다. 못이 박힌 사람 키만 한 육중한 앞바퀴 2개에 뒤쪽에는 바퀴 대신 트랙이 달리고 커다란 내연기관 엔진이 달린 사막용 트라이크는 탐험가용으로 주문제작하는 고가의 수제품이었다. 화물차만한 크기에 쓸데없는 전자기기도 안 달려 나름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모래를 잔뜩 뒤집어쓰고 머리까지 온통 헝클어져 있는 페로의 몰골을 보아 뭔가 중간에 잘못 풀린 듯했다.

가디언들과 노새의 힘을 빌려 4대의 트라이크를 끌고 올라온 네피가 들으란 듯 빈정거렸다.

“제플린 산을 만만하게 보셨다가 신고식 제대로 치렀으니 이젠 실수 안 하실 줄 알겠습니다. 두 시간이 아니고 20시간 삽질만 해도 계속 모래만 뒤집어쓰셨을 겁니다.”

네피의 놀림에 페로가 입을 씰룩거렸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페로가 남쪽 비탈로 저 트라이크를 몰고 올라오려다가 중간에 모래에 빠져 허우적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쪽 비탈은 썰매를 타면 어찌저찌 내려갈 수는 있지만 올라오는 건 바퀴건 두 다리건, 땅을 디디는 일체의 수단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기계에는 도통한 폭주족 사에나가 이 귀한 트라이크를 여기저기 만지며 그의 부아를 확 긁어놓았다.

“기계는 제대로 고르셨는데……조종이 서투르셨던 모양입니다. 저라면 충분히 올라올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 멍텅구리 기계가 수치만큼 출력을 못 냈던 거야!”

자존심이 상한 페로가 다시 트라이크를 걷어차며 생떼를 썼지만 뻔뻔한 보안국장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이걸 타고 다시 산을 안전하게 내려가면 100골드 내시겠습니까?”

“이 쓰레기에 쪼잔하게 100골드라니, 그 10배는 돼야지.”

붉으락푸르락해진 페로의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새 위에 올라탄 자이납이 시동을 걸고 눈치 없이 엔진을 신나게 부릉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우와아, 그럼 이 쓰레기 저 주세요!”

“필요하면 갖던지.”

페로는 한바탕 고생을 시킨 트라이크에서 관심을 끊어버리고는 마치 제 집인 양 철성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계단을 후다닥 오른 그는 문 앞을 딱 막고 선 코리온과 마주섰다.

“황상께선 어찌되셨소?”

“두세 시간만 일찍 오지 그러셨소.”

코리온이 안쪽을 힐끔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창백해진 페로도 덩달아 안쪽을 함께 쳐다보았다.

“이미 내 손을……아니, 우리 손을 떠나셨소이다.”

모래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카렐이 수술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한 페로가 두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런 페로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코리온이 휙 돌아서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문틈으로 쪽지 정도는 전할 수 있을 테니 가서 왔다고 알리시오. 들어가실 때만 해도 미약하게 의식이 있으셨으니 혹시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페로는 코리온을 따라 낯선 철성에 처음 걸음을 들여놓았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공간에 압도되었지만 자존심에 놀란 티는 내지 않았다. 대신 괜한 짜증을 내며 이 넓은 야수를 목소리로 압도하려 했다.

“하여간, 뭐 이런 다 낡아빠진 공장에 쓸데없이 목숨을 걸고 난리야!”

페로의 목소리가 넓디넓은 철제 공간 안을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물론 그래 봤자 자존심만 센 남자의 의미 없는 과시에 지나지 않았다.

코리온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페로의 이런 기세를 그대로 눌러버렸다.

“환자들이 많으니 쓸데없이 목소리 높이지 마시죠.”

카렐의 수술을 진행하고 있는 황금탑 옆의 방에 도착한 페로는 굳게 잠겨 있는 수술실 철문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져온 수첩을 펼쳐들고 펜을 꺼내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안에 있는 카렐에게 힘을 줄 갖은 듣기 좋은 말들이 다 맴돌았다. 종이에 닿은 펜 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정작 그의 손에서 나온 문장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 나 왔어. -

코리온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페로는 몇 자 되지도 않는 종이를 무슨 기밀이라도 되는 양 꽁꽁 접어 수술이 진행되는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문을 툭툭 치자 안에서 누군가가 편지를 거둬 가져갔다.

두 남자는 문 앞에 나란히 서서 답장을 기다렸다. 코리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할 말이 고작 그뿐이요?”

“남이야 뭐라 하건.”

코리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팔짱을 끼었다. 이번에도 그의 왼쪽 손목이 욱신거리며 쑤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렐의 수술이 행해지고 있는 방 앞에 페로만 놓아둔 채 자리를 뜨느니 차라리 아픈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는 황금탑에 털썩 기대앉아 아예 자리를 잡아버렸다.

잠시 후, 안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쪽지 하나가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페로가 후다닥 달려가 쪽지를 빼들었다.

- 눈동자를 움직이십니다. 심장박동도 빨라졌고요. -

얼굴이 해사해진 페로는 쪽지를 보물처럼 접어 품에 꽁꽁 넣고는 코리온과 마찬가지로 황금탑에 털썩 기대앉아 철문만 쳐다보았다. 적당히 떨어져 앉은 둘은 잠깐잠깐 눈싸움을 하며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남자 모두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반 할 것이 없었다.

“예고도 없이 오신 게 솔직히 달갑지는 않지만 일단 왔으면 여기선 누구라도 밥값을 해야 합니다. 총리랍시고 위세 떨고 있을 생각은 마시고요.”

코리온이 시비조로 말했다. 페로는 온통 기름때가 묻은 그의 옷과 신발, 허리춤에 찬 공구 주머니를 슬쩍 흘겨보았다.

“내 공돌이 소질은 없으나 가디언들 데리고 싸우는 정도는 못 하겠소?”

‘공돌이’라는 말에 이번엔 코리온이 눈을 흘겼다.

“가디언 지휘관들은 이미 많습니다. 제가 황상 밑에서 포병대 강화사업을 도왔었고, 세닉 가 포로들을 포병으로 활용하려니 얼떨결에 포병대를 맡았으나 일선 장병 지휘경험은 일천하니 절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포병대를 함께 지휘하자는 말에 페로가 의외라는 눈길로 코리온의 얼굴을 슬쩍 올려보았다. 페로도 전투를 치르며 포병대를 부려 본 일은 있지만 직접 지휘해 본 일은 없었다.

“포 같은 거 쏠 줄은 모르는데.”

“그런 건 저나 병사들이 각하보다 더 잘 합니다. 제 옆에서 각하 특기대로 욕만 실컷 하면서 장병들 정신 차리게만 하시면 됩니다.”

페로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지만 정작 코리온은 딱히 악의로 한 말은 아닌 듯했다.

“까짓 거.”

페로가 다시 잘난 체했다. 이 샌님과 함께 부대를 지휘한다는 게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포병대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굳이 마다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다시 수술실 문을 응시했다.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수술실 문을 쳐다보던 코리온은 페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수십 일을 지내면서 평소의 아름다운 외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에 비하면 이제 막 도착한 페로는 모래와 씨름하느라 때문에 약간 더러워진 것을 빼면 말쑥한 멋쟁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흠.”

코리온은 질끈 묶었던 긴 머리를 풀고 썩썩 빗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이 샌님이 뭘 하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페로는 투드득 하는 소리에 슬쩍 눈을 흘겼다. 코리온이 황금탑에 얼굴을 비추며 그간 텁수룩해진 수염을 손칼로 깎고 있었다.

‘이놈이?’

페로도 질세라 모래가 앉은 머리를 탈탈 털어내고는 보란 듯 가방에서 거울과 물수건을 꺼내 얼굴을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그새 수염을 다 깎은 코리온이 따끔거리는 턱을 만지며 물었다.

“로션 좀 있소?”

“누가 전장에 그런 걸 갖고 다니나.”

페로는 얼굴을 닦은 손수건을 가방에 툭 던져넣어 안에 있는 로션 통을 깊숙이 감추었다. 둘은 다시 수술실 문을 쳐다보며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황실군의 상륙 자체는 하임달의 칼데아군에게 그리 놀라운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어차피 황실군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건 교단의 귀띔으로 알고 있었고, 문제는 상륙할 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느냐였다. 하지만 황실군은 검은 재의 낙진과 모래폭풍이 ‘약간 사라진’ 타이밍을 노리고 상륙을 시도했고, 맘먹고 날린 자폭셔틀은 검은 재와 짙은 모래폭풍에 교란되어 밥값도 하지 못했다. 셔틀은 절반 이상이 띄우기가 무섭게 추락해 도리어 방공부대 주변에만 엉뚱한 피해를 입혔다.

다행히 몇 개의 셔틀이 적의 상륙수송선에 명중해 피해를 입혔지만 한 척도 추락시키지는 못했다. 칼데아군으로서는 실망스런 결과였지만 애당초 큰 기대를 하고 쏘아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결국 승부를 가를 전투는 지상에서 벌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황실군의 상륙보다 지휘부를 더 충격에 빠뜨린 건 바로 자신들의 수도인 비엔에서의 큰 전투에서 수비군이 패했다는 것이었다.

“폐하?”

마누엘은 자신이 이 남자를 위로할 형편인지 오락가락했지만 어쨌든 평소 잘 안 쓰던 존칭까지 붙여 카나르를 불러보았다. 첩 3명과 서자 5명이 플라칼 종가의 전투 도중 죽은 상황에서 그에게 제정신이기를 바라는 건 무리 같았다. 헤즈의 어린 딸 2명까지 죽었다는 이야기는 꺼낼 상황도 아니었다.

“날 놔둬 주시오. 전장은 알아서 하던지 하고.”

카나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을 찾아온 제후들에게 손을 마구 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누엘은 눈앞에 상륙하는 황실군을 당장 쓸어버리라며 울부짖던 그를 가까스로 말려야 했었다.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카나르는 이제 죽은 아내들과 자식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혼자 축 처져있었다.

“휴우.”

마누엘은 위로차 함께 찾아간 무장들에게 나가자며 눈짓을 했다.

“내 코가 석잔데 저 인간 위로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카나르의 막사를 나서며 마누엘이 이를 빠득 갈았다. 카나르도, 헤즈도 제정신이 아니고, 철성에서 참패를 당한 참모장 이렌느는 이틀째 병실 신세니 이젠 잠시만이라도 중장보병대장인 자신과 딸 클리멘트가 연합군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마누엘은 사령관실 앞에서 무장들을 모아놓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딸을 보며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믿음직한 장녀는 칼데아군 지휘부에서 그나마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 자, 알아들었지! 당장 나가서 저 황실군 놈들 자리를 못 잡게 최대한 들볶아! 막사 작업을 지체시켜서 잠이라도 못 자게 들볶으란 말이다! 숫자 많은 게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지!”

클리멘트는 황실군의 갑작스런 상륙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무장들의 앞에서 단호한 모습으로 손뼉을 짝짝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포병대는 되는 대로 쏴! 못 맞춰도 좋으니까 무조건 최대한 멀리 쏴대서 불이라도 붙이고 놈들 놀라게라도 해! 기병대는 말 바꿔 타면서 계속 기습했다가 치고 빠지고! 빨리! 여기서 궁둥이 붙이고 한숨 쉰다고 저놈들이 알아서 나가 주지는 않으니까!”

클리멘트는 막사가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을 지르며 전장으로 나가는 무장들의 등을 주먹으로 한 번씩 탁탁 쳐 주었다.

“네가 있어 내가 살 맛이 난다.”

마누엘은 혼자서 기운이 펄펄 넘치는 딸을 보며 억지로 웃었다. 클리멘트가 손을 툭툭 털며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걱정 마세요, 비엔이 다 넘어간 것도 아니고 여기서만 이기면 그대로 전세는 뒤집어지는 거예요. 사령선으로 가요, 지금 내보낸 놈들 밥값 하나 구경 좀 하게.”

마누엘은 딸과 지휘부 참모진을 데리고 사령선 함교에 꾸며진 지휘소로 향했다.

“하디 녀석은 아직 못 찾았다고 하냐?”

“슈발츠발트 탈출자 중에는 없답니다. 적에게 사로잡혔던지 사망했다면 적군에서 통지라도 해 주었을 텐데 연락이 없습니다.”

“하긴, 제네르 그놈 적이어도 예의 하나는 제대로 찾는 놈이니까.”

마누엘은 답답한지 손톱을 깨물며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비록 가문 내에서는 서로 견제하는 사이기는 했지만 후방의 본토를 제대로 통제하려면 행정수완이 좋은 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디라도 살았으면 수습이 좀 쉬울 텐데 행방불명이니 큰일이네요. 여기가 외부와 일반통신이 안 되는 게 차라리 다행이에요. 비엔이 그 꼴이 난 건 아직 지휘부밖에 모르니까요.”

“내 말대로 입단속 잘 하고 있지? 비엔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놈들은 무조건 잡아다 모가지보다 혓바닥을 먼저 잘라 줄 테다.”

마누엘이 딸은 물론이고 지휘부 참모들까지 무서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여기선 최대한 빨리 끝내야 돼. 전군을 총 동원해서 단판의 대회전이라도 벌이는 게 낫겠어. 후방인 비엔이 그리 되었으니 여기서 서둘러서 최대한 빨리 전세를 뒤집어엎어야 해.”

참모들은 별 생각 없이 고개들을 끄덕였지만 전략가인 클리멘트의 표정은 어두웠다.

“원래 우리의 강점이 지구력과 동원력이었는데……결국 비엔에서의 패전으로 시간에 쫓기게 되었으니 한 수는 내준 셈이 맞네요.”

전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령실의 함교에 도착한 마누엘은 먼저 와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상의하고 있던 바에자와 하페즈, 네코 세 명의 마구스와 마주쳤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의 편에 서서 싸울 마구스들이지만 교단 시절이 몸에 익은 마누엘은 그들의 존재에 살짝 기가 죽었다. 그는 수하들을 남겨두고 딸과 둘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황제께선 지금 다른 용무를 처리할 형편이 아니십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놈들을 무찔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요?”

바에자가 간단명료하게 물었다.

“낙진과 검은 재가 가시고 나서 바로요. 황상께서도 그걸 원하시고요. 적에게 가디언이 많아 야간전투는 우리에게 불리하니 낮 시간이 낫겠죠.”

“하긴, 빨리 국면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그대들도 힘들겠지요.”

바에자는 탑 북쪽 창에 고정되어 있는 대형 개량 망원경을 눈에 대고 방금 황실군이 상륙한 북쪽을 응시했다. 낮에는 코앞의 랜턴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이젠 막사 입구마다 걸어놓은 등불도 보였고 제법 떨어진 경비탑의 서치라이트도 눈에 들어왔다.

멀리로는 푸른 빛 너머, 제플린 산의 남쪽 사면을 따라 총총히 자리를 차지한 황실군의 수송선 50여 척과 숙영지 공사를 펼치는 모습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칼데아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지만 무려 23만의 대군이라 저들의 숙영지 규모도 어마어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저놈들도 바쁘군요. 낮 시간보다 지금이 훨씬 시계가 나아졌소. 우리 기상학자들 말이 오전 10시 무렵이면 햇빛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그럼 그때를 총 공격시간으로 잡으면 되겠군요.”

마누엘은 평소 작전계획을 짤 때처럼 분지 일대의 지도를 펼쳤지만 바에자는 여전히 망원경에만 눈을 대고 있었다.

“적 수송선이 앉은 자리를 보아하니 적은 중앙에 황실군을 두고 양옆에 제후군을 두려는 것 같소.”

바에자는 지도 위에 적군을 표시하는 깃발을 제플린 산자락을 따라 죽 늘어놓았다.

“서부보다는 북부가 분명 약체일 거요. 내가 이끄는 근위대 3만이 후미에 돌격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칼데아군이 북부군을 몰아붙여 혼란에 빠뜨리면 우회해서 기병대와 함께 무너진 곳을 파고들겠소.

“우리 중장보병대는 몸빵이나 하라고요?”

클리멘트가 툴툴거렸다. 저곳이 사실상 승부처라면 승전의 주역을 바에자가 맡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하페즈가 입을 열었다.

“중장보병대는 움직임이 둔하니 천천히 적을 밀어붙여 주시오. 위대한 현신께서 보내 준 코런덤 2천이 있으니 황실군 보병대에 크게 밀리지 않을 거요.”

“원하시는 대로.”

딸 클리멘트에게 대충 하라고 눈짓한 마누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 발 물러났다. 딸과는 달리 마누엘은 애당초 공훈에 욕심이 큰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하임달 지분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훈을 세운답시고 광분해 봤자 괜히 병력만 더 잃을 게 뻔했다.

막 뒤로 돌아서려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구스들을 돌아보았다.

“아참, 어제부터 아트위야 현신께서 안 보이시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바에자의 표정이 약간 창백해진 것을 빼면 마구스들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하페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안 그래도 나도 못 봐서 걱정하고 있소만?”

하페즈는 자신보다 연륜이 있는 바에자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 역시 모른다며 고개만 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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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막간(?)의 페로 vs 코리온의 보이지 않는 혈전(?) 1라운드입니다. ㅎㅎㅎ

하지만 페로는 초장부터 너무 많은 감점을....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지 말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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