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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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한참 고비랍니다. 서너 시간 후면 이 시꺼먼 것도 가라앉아서 비행도 가능해지고 통신도 다시 열릴 거랍니다.”
간식 쟁반을 들고 온 쿠마르는 새까만 페인트를 칠한 것 같은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씰룩거리고 있는 대신관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칼데아 놈들 지난 며칠 죽어라 송풍로를 뚫었는데 정작 철성에서 공기를 뿜어내서 공 들인 송풍로를 말짱 사용 못 하게 됐네요. 물론 그 대가로 공기가 맑아져서 셔틀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으니 손해는 아닌 셈이지만요.”
“글쎄, 진짜 손해가 아닐지는 두고 봐야지. 나쁜 일은 꼭 이런 때 벌어지니까.”
이디나가 힘없이 돌아서서는 쿠마르가 내민 따뜻한 양젖을 삼켰다.
“황실군이 도착할 참이라면 지금이 딱 폭풍전야인 셈이네. 현신들은 다들 어디에 있느냐?”
“가르시바 현신은 병참 문제로 서류작업 중이시고요, 하페즈 현신은 칼데아군 경보병대의 병영 시찰 중입니다. 바에자 현신도 근위대 병영에 계시고요. 아, 아트위야 현신은 동쪽 산에서 철성의 흡기구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야투 신관과 그쪽에 잠시 나가셨습니다.”
“외출했다고? 이런 날씨에?”
이디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커먼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통신도 안 되는데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이런 날씨에 나가?”
“야투 신관이 서둘러 나가길래 붙들고 물었더니 플라칼 가 놈들이 그리로 해서 철성을 선수 치려는 것 같다고 걱정하고 있더군요. 놈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직접 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헤네티들을 많이 데리고 가셨으니 염려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만, 네코 현신은?”
“지금쯤 하렘에 계실 겁니다.”
“허, 남들은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데 혼자 시간이 남아도나. 부전자전이네.”
이디나는 바람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네코의 아버지 타크티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쿠마르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바유 교단 9신관이 대리모로 나섰답니다. 확실히 잘생기고 볼 일이라니까요. 아직 못 들으셨나요?”
“후계자를 가졌다고? 지금 이런 때……. 흠, 흠.”
목소리를 높이려던 이디나는 자신의 뱃속 아기 생각에 얼른 말꼬리를 흐렸다.
“확인해보고 사실이면 내 이름으로 선물이라도 보내주도록 해.”
쿠마르는 대신관의 불룩한 배를 슬쩍 보았다. 평소 피도 눈물도 없는 듯 보이는 대신관이지만 뱃속의 딸에 대해서만은 눈물겨울 만큼 헌신적이었다. 마구스에게 모성애나 부성애는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 감정이지만 이디나는 그런 터부를 놀리듯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과시하곤 했다. 그는 틈만 나면 뱃속의 아기와 혼잣말을 주고받았고, 짜증날 만큼 입맛 까다롭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아기에게 좋다는 것이면 무조건 입에 넣었다. 그는 지금도 쿠마르가 가져온 사과를 보기에도 맛나게 먹고 있었다.
“전엔 사과는 입에도 안 대시더니요?”
“아기가 먹고 싶다고 해.”
쿠마르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던 것을 꾹 참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 사카가 굳은 표정으로 성큼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급한 용무입니다.”
이디나가 사과를 삼키고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흥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저 무뚝뚝한 남자에게서 ‘급한 용무’라는 말을 듣는 건 퍽이나 드문 일이었다. 이디나는 사카의 스타일에 맞게 사무적으로 되물었다.
“그냥 말만 해도 된다.”
“아트위야 현신과 아프라스 야투 신관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냉담한 척 하려 했던 이디나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다시 물었다.
“헤네티들과 동쪽 산에 나갔다 하지 않았더냐? 헤네티들은 뭘 하고?”
사카는 대답 대신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트라에타오나 헤네티를 이디나의 앞에 확 꿇어앉혔다. 헤네티가 대신관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플라칼 가 정찰대와 함께 흡기구를 확인하던 중에 황실군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놈들을 저지하러 나간 사이에 남아있던 동료들을 살해하고 저희 현신님을 잡아간 것 같습니다. 헤네티로서 책임을 못했으니 죽여주시옵소서.”
“주변은 다 확인했고?”
“지금 저희 헤네티들이 총동원되어 그 일대를 뒤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철성이 있는 북쪽으로 간 흔적이 있어 뒤쫓고 있습니다.”
헤네티는 바닥에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분노한 얼굴로 헤네티를 내려다보던 이디나는 쿠마르에게 대뜸 물었다.
“바에자 현신이 지금 어디 있다고 했지?”
“근위대 병영에 계실 겁니다.”
“확인했느냐?”
쿠마르의 눈이 확 커졌다. 대신관의 정확한 의도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무언가 속내에 감추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알아보겠습니다.”
막 뛰어나가려는 쿠마르를 이디나가 급히 막았다.
“아니, 물어보지 말고 알아봐라. 아까 회의에 안 들어왔을 때는 어디 있었는지, 지금까지 어디어디 있었는지.”
“알겠습니다.”
이디나는 이번엔 사카를 돌아보았다.
“코런덤을 보내어 트라에타오나 교단을 도와주도록 해라. 그 둘이……납치된 게 아닐 가능성도 고려해라.”
대신관의 눈빛을 힐끔 올려본 사카는 그의 의도를 바로 눈치챘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을 뿐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겠습니다.”
아트위야를 데리고 도망치던 야투는 이 소름끼치는 흡기구에서 빠져나갈 맨홀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지만 댐퍼를 4개나 지나오는 동안 그 흔한 맨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맨홀 하나 없을 리가 없는데.”
야투는 시선을 거의 천장에 고정한 채 아트위야가 탄 합판을 힘껏 잡아당겨 댐퍼를 빠져나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야투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실 지금까지 온 것도 그의 나이와 체력에서는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5번째 댐퍼를 앞에 두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이곳에 오래 머문 덕에 급성 고산증이 오지는 않았지만 떨어지는 체력과 산소부족 자체를 견딜 수는 없었다. 떨어지며 부러진 오른팔은 퉁퉁 붓기 시작했고, 왼팔도 관절에서 빠질 것 같았다. 팔이라도 성하다면 배낭에 있는 것으로 응급처치라도 생각해 보겠지만 한 손으로는 아트위야를 돕는 건 고사하고 당장 부러진 자기 팔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름만 의사일 뿐, 이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 쉬어가겠습니다.”
굴의 벽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을 발견한 야투는 아트위야를 끌고 그 틈새로 기어들어가 몸을 감췄다. 아트위야의 상태는 더 나빠져 있었다. 추위와 저산소에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고, 그나마 감각이 있던 손도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야투는 자신의 장갑을 벗어 그에게 끼워주고 방풍망토와 위장포 안에 몸을 꽁꽁 감추었다.
‘이대로 늘어지면 안 되는데.’
움직임을 멈춘 야투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쉬지 말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다. 이렇게 주저앉아 못 일어나고 있는 시간만큼 둘은 저승문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정작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 엇.”
꾸벅 잠이 들 뻔했던 야투는 자신이 떠나 온 수직굴 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확히 어림은 못 하지만 여러 사람의 발소리였다. 플라칼 가 정찰대가 쫓아오는 것이거나, 헤네티가 구하러 오는 것일 테지만 이미 한 번 똑같은 도박에서 배신을 당했던 야투로서는 일단 나쁜 쪽을 상상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플라칼 가 놈들이 다시 쫓아오나 봅니다.”
일어나서 계속 도망갈까 했던 야투는 지금 이 상태로는 저들을 떨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이 없었다.
“조용히 계십시오.”
아트위야를 틈새 구석 깊숙이에 밀어 넣은 야투는 위장포로 머리꼭대기까지 둘둘 말고 작은 눈구멍만 남겼다. 반사되는 빛과 전자파, 안에서 빠져나가는 바이탈사인까지 차단하는 교단의 위장포는 적절한 곳에서 잘만 사용하면 스캐너는 물론이고 X의 감지능력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다행히 그들이 숨은 굴의 입구 부분은 워낙 좁아서 별 생각 없이 지나간다면 그냥 놓칠 가능성도 충분했다.
야투의 귀에 그들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수직굴 쪽에서 한 무리가 쫓아온다고만 생각했던 그는 어느 순간 혼란에 빠졌다. 잘 들어보니 반대편인 철성 방향에서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고, 양쪽 모두에서 다 울리는 것도 같았다. 동굴 안에서 소리가 웅웅거리고 메아리를 쳐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가까워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제발, 제발.’
야투는 조금 전 자신이 지나 온 댐퍼를 누군가 끼익 밀고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야투는 숨까지 멈추고 그들을 뚫어지게 살폈다. 예상대로, 댐퍼를 지나온 건 조금 전 그를 공격했던 플라칼 가 정찰대장과 그의 부하 5명이었다.
“이거 진짜 금인가봅니다.”
정찰대원 하나가 댐퍼의 번쩍거리는 금빛을 보며 눈을 번들거렸다. 그 병사뿐만이 아니고 다른 병사들도 표적이라는 제사보다 금덩이 댐퍼라는 젯밥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순금은 너무 무르니까 합금이겠지.”
“절반만 섞었어도 이거 한 장이면 우리 몇 년 봉급은 되겠는데? 후와, 이게 몇 장이야?”
병사 하나가 댐퍼의 비늘 모양 금속판을 떼어내려고 힘껏 잡아당기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닥치고 따라가기나 해.”
정찰대장이 넘어진 부하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막 일어선 그들은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동굴 양옆으로 흩어졌다. 야투는 혹시 자신이 들킨 건 아닌지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아니고 엉뚱한 쪽을 가리키며 손짓을 하는 듯했다.
‘누굴 보고 저러는 거야?’
야투는 숨을 멎은 채 바깥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간 그의 귀에도 익숙한 마우저 소리가 철크덕 울리더니 정찰대 병사 한 명이 어깨가 뚝 잘리며 비명을 지르고 나뒹굴었다. 뒤이어 병사 또 한 명이 반대편 굴에서 날아온 도끼에 목을 얻어맞고 털썩 주저앉았다.
“황실 놈들이야! 가디언! 가디언이야!”
굴에서 생각지도 못한 저승사자를 만난 정찰대들은 허겁지겁 온 길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도망치려는 그들의 앞을 ‘금덩이’ 댐퍼가 막고 있었다. 병사 한 명은 당겨야 열리는 댐퍼를 급한 나머지 마구 밀어붙이려다가 또다시 뒤에서 날아온 석궁을 목 뒤에 맞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멍청아! 당겨서 열어!”
굴 틈새에 숨어 엄호를 하던 병사도 급히 달아나려다가 번개같은 달음박질로 달려온 껑충한 여자에게 허리를 맞고 쓰러졌고, 그 사이 댐퍼 밑을 기어 반쯤 빠져나갔던 정찰대장은 도끼를 메고 달려온 덩치에게 발목을 덥석 붙들려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왔다.
“또 있어?”
네피가 엎어진 정찰대장의 등을 꽉 밟은 채 자이납에게 물었다. 자이납은 댐퍼 날개 하나를 얼고 슬쩍 바깥을 확인했다.
“이놈들이 다인 것 같은데요? 뭔가 확인하러 들어온 건가 봐요.”
네피는 발밑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정찰대장의 멱살을 붙들고 번쩍 들어올렸다.
“너희 여긴 뭐 꿀단지라도 있는 줄로 알고 왔냐?”
이 우락부락한 가디언의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한 정찰대장은 입도 열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저, 저흰 그냥 어떤 굴인가 정찰하러…….”
“쳇, 어쨌든 굴이 들키긴 했나봐. 분명 또 들어올 테니 누가 상주해야겠는데.”
“터빈이라도 켰다가는 갈은 고기가 될 텐데 이런 데를 누가 있고 싶어 해요?”
자이납이 시체들을 툭툭 걷어차 한곳으로 모으며 툴툴거렸다.
“걱정 마, 그런 일도 없고, 너 같은 폐소공포증 환자한테 있으라고도 안 할 테니까.”
네피가 붙잡은 정찰대장의 손을 끈으로 꽁꽁 묶어 옆에 동댕이쳤다. 그는 함께 온 20명의 크바르나에게 수직굴 입구 쪽을 가리켰다.
“너흰 인계선 새로 설치하고 이번엔 부비트랩까지 달아. 터빈 켜기 전이라도 들어왔다간 확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리게.”
네피는 자이납과 함께 포로를 끌고 다시 철성 쪽으로 돌아섰고, 부비트랩 장비를 짊어진 크바르나들은 수직굴 쪽으로 멀어졌다.
“닥치고 조용히 따라와.”
네피와 자이납은 포로로 붙잡은 정찰대장을 강아지처럼 질질 끌고 철성으로 향했다. 지대도 높아 산소가 희박한 곳에서 이 갑갑한 동굴을 타고 수십 스타디아를 달려오는 것도 지치고 짜증나는 일이었고, 이제 돌아가는 길도 앞으로 한참이었다.
네피는 별 생각 없이 시계를 보았다.
“가만, 우리가 언제 출발했지?”
“한 40분 됐을 걸요?”
자이납이 포로를 끌고 건들거리고 앞장서며 냉큼 대답했다. 네피가 포로의 다리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놈들이 첫 인계선 끊은 게 그럼 40분이 넘었다는 말이잖아? 팔다리 멀쩡한 정찰병 5명이 그 시간 동안 고작 그 거리밖에 못 왔다고?”
“어? 그런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자이납이 뒤따라오는 정찰대장을 째려보았다.
“야, 너, 뭘 감추고 있냐?”
“휴우.”
딱 중간에서 양쪽의 싸움을 모두 지켜본 야투는 그들이 사라지고 굴이 다시 암흑에 잠기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이겠다며 뒤쫓던 정찰대를 저들이 모두 잡아주었으니 할 수만 있다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주고픈 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저들을 어떻게 따돌리느냐였다. 그는 가디언들이 양쪽으로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금슬금 기어나갈 참이었다.
5분 남짓 흐른 후, 그는 아트위야가 실려 있는 합판을 조심조심 끌고 구멍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가 있는 동굴 섹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피와 자이납은 철성으로 돌아간 듯했고, 크바르나들은 수직굴 쪽에서 부비트랩을 설치하러 바쁜 듯했다.
“트라에타오나 신께서 도우십니다.”
야투가 힘을 잃어가는 아트위야에게 속삭이고는 5번째 댐퍼를 밀고 들어갔다. 그 너머도 역시나 어둡고 조용했다. 야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댐퍼를 지나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번에도 맨홀을 찾느라 앞보다 위를 보는 때가 더 많았다. 어지러울 만큼 위만 쳐다보며 걷던 야투는 굳은 목도 풀어줄 겸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흐익!”
야투는 그대로 바싹 얼어버렸다. 그의 코앞에서 웬 시커먼 거구가 턱 밑에서 랜턴을 얼굴로 올려 비추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선 야투는 그새 등 뒤를 막은 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여자 얼굴에 놀라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 노인네 심장마비라도 걸린 거 아냐?”
네피가 얼른 랜턴을 치우고는 쓰러진 야투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우리 장난이 좀 심했나?”
자이납은 야투가 끌고 오던 합판 위에 꽁꽁 덮어놓은 방풍망토를 슬쩍 걷어보았다.
“엄마야, 이건 또 뭐야.”
이번에 놀라 주저앉은 건 야투가 아니고 자이납이었다. 푸른색과 금색 2가지 색깔로 번득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왜 이래? 귀신인가 봐요.”
“염병, 너 때문에 내가 더 놀랐다.”
지레 놀라 도끼를 빼들었던 네피가 얼른 무기를 치우고 아트위야의 목옆을 짚었다. 가디언이 현신의 얼굴에 손을 대는 모습에 경악한 야투가 고함을 지르며 그의 손을 확 밀어냈다.
“감히 어딜! 이 천한 손 치우지 못할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야투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째려본 네피는 다시 이 이상한 눈동자의 미녀로 시선을 돌렸다.
“우와, 겁나 미인이긴 하네. 근데…….”
아트위야의 얼굴을 만질 뻔했던 네피는 그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는 마구스 팔찌에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손을 떼었다.
“뭐야, 이 팔찌는?”
철성에서는 또다시 30여분이 흘렀다. 살람은 세네피스에게 피를 줄 10명이 넘는 병사들을 데리고 들어갔다가 나왔고, 최악의 상황을 직감한 아샤드는 진료실 문 옆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아샤드가 흐느끼기 시작한 그때,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니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나타났다.
“빼낸 거냐?”
코리온을 선두로 사람들이 니사의 주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샤드를 뺀 대부분 사람들의 눈은 그의 입보다 쟁반이 들려있는 그의 손에 쏠렸다. 사람들을 한 번 빙 돌아본 니사는 쟁반에 덮어놓았던 흰 천을 걷어 코리온에게 내보였다. 하지만 타리프의 일지에서 언급된 빛나는 광채는 고사하고 검붉고 딱딱한 조직에 감싸여 사제의 키가 맞는지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가 이래? 이게 키 맞아?”
베흔은 키의 상태에 버럭 짜증을 냈고, 아샤드는 그곳에 묻어있는 피와 살점에 경악을 했다. 니사가 마스크를 벗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신경과 뼈에 완전히 융합되어서 조직을 많이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키에 붙은 칼슘과 조직을 떼어내야 합니다.”
니사는 반사적으로 아샤드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말리는 살람을 거칠게 힘으로 밀치고 진료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황태후 폐하?”
아샤드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엔 거의 탈진 상태의 세네피스가 입과 코에 호흡장치를 낀 채 흐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 계시니 됐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아샤드는 뒤쪽에서 생각 없이 중얼거리는 베흔을 향해 대뜸 주먹을 움켜쥐었다. 코리온은 막 주먹을 휘두르려는 아샤드를 안쪽으로 슬쩍 밀어붙이며 병실에 들었다.
“원정군과 함께 병원선이 올 테니 염려 말게.”
코리온은 세네피스의 발을, 다리를, 심지어 배도 만졌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숨도 쉬지 못했고, 가슴 아래로는 아무 감각도 없는 듯했다.
울컥해진 코리온은 세네피스의 눈을 쳐다보았다. 세네피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평소처럼 적개심을 담아 노려보지도 않았다. 오늘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래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는 코리온의 시선에도 지난 수백 년간 뼛속 깊이 사무쳤던 질투와 원한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세네피스의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엔 비꼬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공치사도 아니었다. 기운이 빠진 세네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R을 공유하는 이 둘에겐 서로의 뜻을 이해하는 데 꼭 대화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코리온은 구질구질한 고마움의 말 대신, 그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지독한 수술을 버티어낸 세네피스의 고통이 코리온의 몸에도 찌릿하게 전해져왔다.
“하아.”
고통을 절반 나누어준 세네피스의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며 얕은 안도의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코리온은 지금껏 그가 세네피스에게 했던 중 가장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넸다.
“맘 놓고 쉬시고 뒷일은 이제 제게 맡겨주십시오.”
세네피스는 엷은 눈웃음을 보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니사는 세네피스의 뼈와 살점이 그대로 붙어있는 사제의 키를 코리온에게 내밀었다.
“제가 이쪽 일을 마무리할 동안 이걸 제거해 주십시오. 키가 손상되지 않게요.”
코리온은 세네피스의 뼈와 살점이 엉겨붙어 있는 사제의 키를 말없이 더듬었다. 그 단단한 껍질이 마치 먼 옛날 그레이오팔들의 눈물과 피가 뭉쳐진 것 같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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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와 자이납이 끼면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도 뭔가......
드디어 비싸도 굉장히 비싼(?) 사제의 키가 나타났고요, 야투는 카렐의 수술에 득이 될지 도리어 걸림돌 독이 될지....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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