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2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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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가 애꿎은 그물망에 대고 포탄을 낭비하는 동안, 서쪽의 동굴에서는 이렌느가 보낸 십여 명의 헤네티와 원래 그곳에 있던 2백여 명의 세닉 가 보병들이 이 동굴에 숨어 제후의 아들을 죽인 괘씸한 황실군을 향해 ‘대학살’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화염방사기 준비 끝났습니다.”
큼직한 화염방사기 통을 진 헤네티 두 명이 시뻘건 불꽃을 바위에 한 번 쏘아보고는 흐뭇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소름끼치는 불꽃을 지켜보는 세닉 가 보병들은 자신에 찼다기보다는 불만과 죄책감에 어떨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꼭 이래야 하는 거야?”
전투를 준비하는 세닉 가 보병들이 동굴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살아 돌아온 3명의 병사들을 통해 동굴 안에 8명의 동료들이 부상을 입은 채 잡혀있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소름끼치는 불꽃은 적을 죽일지 몰라도 동시에 그들의 전우들까지 잿더미로 만들게 될 게 뻔했다.
“밖에서 시간 끌면 어차피 항복할 텐데.”
그들은 한쪽에서 들려오는 사관의 거친 고함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헤네티들과 함께 동굴에 진입해 화공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은 분대에서 서너 명의 병사들이 참여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있었다. 전시의 전장에서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이지만 그들은 그마저도 각오한 듯했다.
“끌고 가 영창에 쳐 넣어.”
제대장이 헌병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의 큰 목소리도 정말로 병사들에게 화가 나서인 것 같지는 같았다. 제대장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거듭 한숨만 내쉬며 머리를 싸쥐었다.
“준비 끝났나?”
2명의 화염방사기병과 마우저를 든 헤네티들을 앞세운 공격부대 50여 명이 무장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두 번이나 당한 만큼, 이번엔 이들의 준비도 철저했다. 모두는 이마에 랜턴을 달았고, 야간전투에 쓰는 큼직한 서치라이트도 동원되어 혹 적을 만나면 빛으로 눈을 멀게 만들 준비도 갖추었다. 그들은 라이트로 화염방사기 앞을 훤히 밝히며 동굴에 접어들었다. 병사들은 2중으로 보강한 방패로 앞을 가렸고 불꽃 때문에 산소부족이 생길 때를 대비해 예비 산소탱크까지 지녔다. 덕분에 무게가 많이 나가 둔해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동굴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중요치는 않았다.
“들어간다.”
육중한 방패로 앞을 가리고 마우저를 쥔 헤네티들은 화염방사기병을 2선에 두고 조심조심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이전에 들어온 동료들처럼 그들도 갈래길을 만났다. 이번엔 병력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쪽에 20여 명의 수비병만 둔 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살아 돌아온 3명의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적은 대부분 왼쪽에 모여 있는 듯했다.
“이 새끼들 숨어있기만 해 봐.”
첫 모퉁이를 만난 헤네티들은 2명의 화염방사기병을 동원해 막힌 곳에 대고 일단 무서운 화염부터 쏟아 부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소리도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동굴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나아가기는 너무 위험이 컸다. 하지만 화염방사기의 소름끼치는 굉음이 귓전을 때리자 뒤따라오는 세닉 가 병사들은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됐어.”
뜨거운 열기가 빠지자 헤네티 지휘관이 전진을 명했다. 뒤따르는 병사들은 혹시라도 앞에 동료의 시체가 놓여있는 건 아닌지 벌벌 떨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첫 코너에선 그들이 두려워하는 동료의 시체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음 코너에서도 똑같은 방법을 썼고,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탄 시체야!”
세 번째 코너를 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찢어지는 고함이 동굴을 울렸다. 순간 놀란 병사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헤네티 한 명이 병사들을 헤치고 서둘러 달려가 시체를 확인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자그만 시체는 사람의 형태인 것이 타죽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방금 죽은 시체는 아니었다.
“아냐, 이건 아주 옛날에 죽은 거야, 이 멍청이들아!”
헤네티가 호통을 치며 병사들을 몰아붙였지만 이미 감정이 격앙된 대부분의 병사들은 시체를 자세히 살필 맘도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심리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지만 앞서가는 헤네티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적군은 어딨지?”
“혹시 다른 쪽 굴에 있는 것 아닙니까?”
제법 긴 네 번째 직선 코스를 지나 온 헤네티 대장은 이번에도 꺾이는 지점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건너편을 살폈다. 포로들이 내는 소리나 적의 웅성대는 소리 따위는 없었다.
“쏴.”
이번에도 두 명의 헤네티들이 앞서나가 어두컴컴한 굴에 대고 끔찍한 지옥불을 뿜어냈다. 화염이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날카로운 소리가 마치 악마의 울부짖음처럼 굴을 타고 울렸다.
그때, 이번엔 화염방사기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웬 찢어지는 굉음이 갑자기 지진처럼 굴을 울렸다.
“뭐지?”
화염방사기병은 방금 안에 대고 쏜 불꽃이 갑자기 몇 배는 커지며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광경에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그들이 불꽃 사이에서 본 건 동굴 끝에 쳐 있는 블록벽과 그 앞에 수북하게 쌓인 군용 인화물질 통들이었다. 그 통들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오렌지빛 광채가 화염방사기병과 그 뒤의 헤네티들을 덮쳤고 굽은 굴을 타고 방향을 틀어 그 뒤에 있던 남부보병들까지 눈 깜짝할 새 삼켜버렸다.
“우아앗!”
거대한 불꽃은 먼 옛날 학살자들의 후예를 첫 번째로 삼킨 후에도 계속 굴을 거슬러 올라 입구까지 뿜어나갔다. 입구 부근에서 오른쪽 굴을 지키고 있던 20여 명은 왼쪽 굴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들 역시 바로 불꽃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마지막 힘을 불사른 불꽃은 굴 입구를 뚫고나가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산 중턱에 거대한 불꽃의 탑을 그린 후 마지막 수명을 다했다. 굴 바깥을 경계하던 세닉 가 장병들도 불꽃에 놀라 사방으로 혼비백산 흩어져야 했다.
“방금 그게 뭐였냐?”
굴 입구 부근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고 주저앉은 제대장은 검댕이 앉은 고글을 손으로 닦아내며 멍한 얼굴로 일어섰다. 굴 안에서는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장병들도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행히 바깥에 있던 장병들은 방염기능이 있는 중갑주를 입고 있어 그슬리고 검댕을 쓴 것을 빼면 큰 피해는 아직 없는 듯했다. 문제는 동굴 안이었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동굴 안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악!”
갑주가 시커멓게 그슬린 20여 명의 보병들이 반쯤 이성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굴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갑주의 방염기능도 굴 안의 맹렬한 불꽃에선 동료들이 불을 꺼 줄 때까지 잠시 시간을 끌어주는 정도 외에는 하지 못했다.
“소화기! 소화기 어디 있어!”
놀란 장병들이 몇 안 되는 소화기를 가져와 그들에게 뿌렸지만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은 그들은 녹아내린 갑주를 붙들고 당장 죽는다며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괜찮아! 불 꺼졌어! 진정해!”
놀란 동료들이 그들을 끌어안아주었지만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 건 단순히 불이 아니었다. 굴 안쪽에서 정체모를 굉음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분명 방금 폭발한 화염과는 달랐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경험이 있는 사관이나 장교들은 ‘기병 소리 같네?’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경험이 없는 장병들은 지진이냐며 부산을 떨었다.
“나머지는?”
굴에서 살아 나온 게 고작 20명 남짓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제대장이 멍한 표정으로 굴 안을 돌아보았다. 굴 안의 맹렬한 굉음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맙소사! 대오! 대오!!!”
이 순간 제대장이 외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병사들은 허우적거리며 몰려들어 방패와 몸으로 벽을 쌓고 동굴 앞을 막아섰다. 동굴 안의 굉음은 어느새 그들의 심장까지 울릴 만큼 크게 땅을 흔들고 있었다.
“방패 들어!”
150여 장병들이 악 소리를 지으며 동굴 앞에서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굉음의 정체를 모르다보니 그들의 표정에는 잔뜩 공포가 서려있었다. 병사들이 안쪽에 서치라이트를 비추었다.
“대체 뭐야!”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날 태세를 잡았다. 동굴 안에서는 검은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동굴을 꽉 채우며 달려오고 있는 그 시커먼 형체는 조금씩 커지더니 어느 순간, 어마어마한 거한의 모습으로 동굴 밖에 튀어나왔다.
“흐익!”
양손검, 도끼를 들고 괴성을 지르며 내달려오는 그들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기가 죽은 세닉 가 보병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7척(210cm) 가까운 그 괴물들은 알아듣기조차 힘든 괴성을 내지르며 고작 150명 남짓의 세닉 가 보병대 대오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막아! 막…….”
제대장의 고함조차 이 순간은 별 의미가 없었다. 거한들에게 짓밟힌 보병들이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 해본 채 그들의 발밑에 뒹굴었고, 얻어맞고, 차이고, 짓이겨지며 사방에 흩어졌다. 싸움이라 할 만한 모양새조차 연출되지 못했다. 일방적인 집단폭행이었다. 이들이 대체 누군지, 어디서 온 놈들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놈들은 다 뭐야!!!”
제대장은 동굴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검은 군복의 거한들에 경악하며 고함을 질렀지만 그 역시 달려나오는 거한에게 턱을 얻어맞고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고작해야 몇 명 남짓의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작은 동굴에서는 중무장한 수백의 거한들이 끝도 없이 몰려나와 작은 언덕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우리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거야?”
쓰러진 칼데아군 보병들은 감히 일어나 저항할 생각도 못 한 채 입을 쩍 벌리고 그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디언 팔찌도 없지만 그들의 번개같은 움직임, 어른 두세 명을 그대로 집어 내던지는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보아 X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후미에서 나온 아샤드 경이 주변을 가리키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크바르나 1,2소대는 협곡으로 내려가 다리를 끊고!!! 나머지는 검은 철성을 공격하고 있는 반역도들을 쓸어버려라!!!”
동굴 앞을 눈 깜짝할 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이 최정예군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졌다. 크바르나 60여 명은 칼데아군이 방금 다리를 놓은 협곡으로, 그리고 4백이 넘는 나머지는 분견대와 이렌느의 칼데아군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동쪽의 검은 철성으로 긴 꼬리를 그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검은 철성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하려던 칼데아군 중에서도 산 동쪽을 돌연 비추는 희미한 불빛을 본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짙은 모래폭풍 속에서 그 거대한 불꽃은 대체 정체가 뭔가, 규모가 어떤 건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거……동굴 있는 곳 아닙니까?”
이렌느와 함께 있던 연대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렌느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화염방사기 사고라도 났나?”
이렌느는 유선 송신기로 연결을 지시했다. 하지만 통신병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누굴 보내 봐야 하나?”
이렌느가 근위병들 몇을 막 손짓해 부르려는 순간, 그의 벽돌만한 송화기가 먼저 울렸다. 확인해 보니 방금 연락을 시도했던 서쪽 동굴의 제대장이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사고로 잠시 통신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대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이렌느는 그가 이미 포로로 잡힌 상태라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뭐냐? 방금 뭐가 번쩍하는 것 같더니?”
“병사의 실수로 화염방사기 연료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습되었습니다.”
“멍청한 놈.”
서쪽의 불꽃이 벌 것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이렌느는 통신을 끊어버렸다.
그는 포탄을 다 써버리고 이젠 장식품이 된 포병대를 뒤에 놓아둔 채 보병대를 따라 철성 쪽으로 더 나아갔다. 거대한 강철 생명체 같은 철성의 형상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3천 조금 못 되게 남은 보병대는 이미 철성의 정원까지 접근해 공격명령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실군은 포탄도 다 떨어졌는지 눈앞의 세닉 가 보병들을 빤히 보면서도 발리스타도 못 쏘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로 절반 조금 넘게 남았구나.”
이렌느가 입을 씰룩거렸다. 카나르는 입만 열었다 하면 [철성 코앞까지 절반만 가도 성공이지.]라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역시 짬밥은 못 속이나봐.”
이렌느의 빈정거림 절반 섞인 농담에 무장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철성까지 가는 길에는 황실군의 보잘것없는 포격과 나름 위력적이었던 볼트 사격에 쓰러진 부상자들이 흩어져 있지만 많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보다 몇 배, 아니 10배 이상 많은 장병들이 산소 부족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진해 뻗어있었다. 심지어 이 와중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병사들까지 부지기수였다.
어쨌든, 절반 이상은 적의 코앞에 가 있었다.
“공격할 수 있는 면은 사실상 정면뿐입니다.”
연대장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가 이렌느의 곱지 않은 시선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걸 보고 공격할 곳이 작다고 하면 어느 정도면 만족할 거냐?”
이렌느가 빈정거렸다. 연대장의 말대로, 철성은 건물 뒷부분이 산의 절벽에 파묻혀있는 독특한 구조 때문에 정면을 칠 수밖에 없었다. 앞쪽으로 드러나 있는 정면만도 어마어마했지만 절벽 속에 묻혀있는 부분을 생각하면 빙산의 일각이었다. 건물의 실제 규모는 밖에서 보아서는 짐작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렌느가 기수에게 깃발을 흔들라며 손짓했다.
“돌격! 철성은 이제 우리 것이다!”
돌격령을 받은 병사들은 마지막으로 와아 함성을 지으며 철성의 정문이 있는 계단으로 돌진했다. 정원에서 퇴각했던 황실군은 15척(4.5m) 남짓 토판 위의 흙주머니로 방벽을 쌓고 볼트를 미친 듯이 쏘아댔다. 근거리에서 쏜 볼트는 적의 부실한 방패를 뚫고 팔다리를 토막 내어 바닥에 주저앉혔다. 수십 수백의 칼데아군 병사들이 또다시 중간에 쓰러졌지만 어쨌든 이렌느의 목표는 거의 달성된 듯 보였다.
“계단으로 올라! 1선은 방패 2겹으로 막고 올라가!”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임기응변은 힘을 발휘했다. 상대방 볼트의 위력을 실감한 세닉 가 사관들은 기운 센 병사들을 추려 무거운 방패를 2개씩 들고 앞장서서 올라가도록 지시했다.
“다 왔다! 여기만 오르면 황실군은 끝장이다!!!”
어렵사리 토판 밑에 도착한 병사들은 2개의 방패를 든 덩치들을 앞세우고 악 소리를 지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철성의 정문까지는 채 반 스타디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뒤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이렌느는 무심결에 서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무언가 느낌이 찜찜해진 그는 개량 망원경을 눈에 댔다.
“저놈들은 뭐지?”
이렌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고원 초입에서 헐겁고 넓은 횡대로 돌격해오고 있는 5백여 가까운 실루엣이 눈이 들어왔다. 워낙 멀어 체구나 무장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이 고지대에서도 끄떡 없이 달려오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보아 보통의 보병대가 아닌 건 분명했다.
“저놈들 정체가 뭐냐고?”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그 괴한들은 후미에 뒤처져 있던 칼데아군의 보급 마차와 고장이 나 주저앉아 있던 차량들을 덮쳤다. 그들은 차량의 운전병들을 쫓아냈고, 보급마차를 빼앗았다. 후미의 협곡에서 시작해 길게 이어져있던 세닉 가의 보급선이 완전히 박살난 순간이었다.
“포병대 뭐 하냐!”
막 고함을 질렀던 그는 이미 포탄을 다 써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에겐 탈진해 겨우 자기 다리만 움직이고 있는 보병과 기병뿐이었다.
“가디언부대가 분명합니다! 4백에서 5백 명입니다!”
이렌느와 함께 있던 헤네티 대장이 급히 말을 돌렸다. 생각도 못 했던 가디언의 후방 기습에 이렌느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지금껏 물량공세와 밀어붙이기, 직감으로 승승장구했던 그이지만 이젠 진짜 무장으로서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가이지 군인은 아니었다.
“제후님! 명령을 주십시오!!!”
연대장이 큰 소리로 물었지만 이렌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결정을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들은 기병을 능가하는 빠른 속도로 세닉 가의 후미를 초토화시키고 고원을 휩쓸었다.
“제후님! 후방을 차라리 포기하고 전방을 최대한 몰아붙여서…….”
이곳까지 힘들게 가져온 물자가 모조리 저들 손에 들어갔고, 이젠 둔한 포병대가 휩쓸릴 차례였다. 포병대는 방열했던 포를 허겁지겁 거둬 물러나려 했지만 몰려드는 적군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포병들은 결국 포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쳐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저곳에 있는 딸을 떠올린 이렌느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맙소사, 니콜!!!”
이미 아들 자끄를 잃은 이렌느는 딸이 있는 곳마저 적군 손에 넘어가는 모습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는 전방을 공격하고 있는 보병대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헤네티들 다 빼서 후방을 막아! 보병대도 공격 중단하고 후방을 막아!!! 포병대를 구하라고!”
철성의 턱밑까지 다다라 있던 3천여 보병대는 거의 승리를 손에 잡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주력군을 빼 포병대를 구하라는 명령에 황당해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공격을 지속할 5백 정도만을 남겨둔 채 서둘러 후방을 막으러 달려가야 했다.
“한 번에 다 돌격해!”
남겨진 5백의 병력을 지휘하는 대대장이 큰 고함을 지르며 맹렬히 달려 나갔다. 미련하지만 이젠 이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튀어나간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마우저 탄이 대대장의 머리를 단 한 방에 박살내어 뒤로 날려버렸다. 뒤이어 달리던 기수까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붕 날아가 떨어졌다. 대대장을 따라 맹렬히 돌격하려던 장병들이 순간 멈칫거렸지만 대장이 죽었다고 바로 흩어질 만큼 부실한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볼트 사격 속에서 마지막 공격을 강행했다.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
바닥에 떨어진 부대와 가문 깃발을 대신 쥐고 막 몸을 일으켰던 선임 제대장의 목까지 세 번째 저격에 고깃덩이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그들의 깃발은 또다시 흙바닥에 맥없이 처박혔다. 잠시 쉬고 있던 황실군의 포격이 뒤에 남겨진 세닉 가 보병들의 머리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포격이다!”
지금까지 황실군의 포대가 대체 어디 있는지 파악을 못 했던 그들은 그제야 황실군이 철성의 중간쯤의 벽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4개의 포대를 설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쇠로 된 거대한 육지 전함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만으로 어쩌라고!”
사관들이 울부짖었다. 주력군이 뒤로 빠지고 남겨진 5백의 병력으로는 쏟아지는 포격과 황실군의 쉼 없는 사격 속에서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머릿수로 몰아붙이려 했지만 처음의 규모라면 모를까 그 10분의 1로 줄어든 지금은 화력으로도, 기량으로도, 쉽지 않았다.
“전진해! 계속 전진해!”
절반이 조금 넘는 병력이 희박한 산소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철성의 기단 바로 밑에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그 순간, 철성 기단 밑의 땅에서 돌연 모래가 거칠게 공중으로 부르르 끓어오르더니 선두의 수십 명이 모래 속에 와르르 빠져들었다.
“으아아악!”
모래 속에 빨려 들어간 장병들의 끔찍한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모래 밑에서 고압의 수증기가 솟구쳐 긴 참호에 채워놓은 고운 모래를 순식간에 액체처럼 끓게 만들었다. 밑에서 뿜는 고압의 공기에 밀도가 낮아진 모래는 위를 디디는 게 무엇이건 땅 밑으로 꿀꺽 삼켜 생매장시켜버렸다.
“정지! 정지!”
세닉 가 장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기단 위에서는 철성에서 뽑아낸 지하 수증기 밸브를 쥔 코리온이 그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놓은 이 죽음의 함정은 그의 출신 가문 장병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공포에 빠뜨렸다.
“여길 어떻게 지나갑니까!!”
몇몇 병사들이 방패로라도 건너가려 그 위에 던졌지만 끓는 모래는 방패마저도 밑으로 삼켜버렸다. 이들이 전진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포격과 볼트는 계속 이들의 숫자를 야금야금 줄여갔다.
“퇴각! 퇴각!”
결국 견디다 못한 다른 선임 제대장이 손을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젠 다른 선택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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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예고드린대로 크리스마스 기념 복수의 불꽃쇼가 곁들여진 아주 화끈한(?) 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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