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5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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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장인 저자가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놈들도 급하긴 급하구나.”
이렌느를 놓친 카렐이 그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빈정거렸다.
“저 새끼들 정말로 죄다 병든 닭이면 다리 설치나 할 수 있을까?”
네피가 사탕수수를 질겅거리며 물었다. 카렐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머릿수가 저리 많은데 다섯 놈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움직이면 설치할 수 있을걸.”
걱정이 많은 황제 앞에서 항상 낙천적인 자이납이 마우저를 흔들며 낄낄거렸다.
“전 놈들이 와이어를 쏘는 족족이 여기서 끊어버리면 되죠?”
“와이어를 끊든 불을 지르든 별의별 수를 다 내서 놈들이 협곡 건너는 걸 최대한 늦춰 봐. 하지만 다리가 일단 완성되면 괜히 목숨 걸고 근접 교전까지 벌이지는 마라. 놈들이 믿는 건 물량공세밖에 없으니 어차피 언젠가는 길을 내 줘야 할 거다. 발리스타 빼앗기지 말고.”
“그럴 거면 뭐 하러 이렇게 참호를 깊게 파게 해요?”
자이납은 협곡 동쪽을 이루는 삼각형 모양의 손바닥만한 땅에 참호를 파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이곳은 이 까마득한 협곡 동쪽에서 유일하게 다리를 걸 수 있을 만큼 폭이 좁게 돌출된 곳이다 보니 다리를 걸기 위해선 적도 반드시 이곳을 공략해야만 했다. 지난 며칠간 자이납이 분대를 이끌고 머물며 파놓은 몇 개의 얕은 참호가 있었지만 이곳을 둘러보러 온 황제가 ‘이 따위 것도 참호라고 파 놨냐?’고 불같이 호통을 친 덕분에 비상이 걸린 병사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더 깊게 참호를 파느라 또다시 막노동을 하는 중이었다.
“그냥 적당히 얕게 파서 빨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게 낫죠.”
방금 전 혼이 났던 자이납이 슬쩍 카렐의 눈치를 보려다가 여지없이 꿀밤을 맞았다.
“이놈아, 저놈들 물량공세라는 게 머릿수 많은 것만 있는 것 같냐? 다른 수단으로 물량공세도 있을지 모른다는 걸 몰라? 잔말 말고 참호 더 파고 가림막도 덮어.”
황제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이납은 일단 이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나저나 오늘 유난히 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보약이라도 드셨어요?”
자이납이 황제를 올려보며 실실 웃었다. 몇 시간 전 네피에게서와 똑같은 말을 또 들은 카렐은 새삼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보는 사람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몸이 뭔가 달라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글쎄, 아까 먹은 양고기에 라말라 박사가 몰래 비방이라도 탔나보지.”
카렐도 씨익 웃어보였다.
“저 노새들만 없으면 철성까지 거뜬히 뛰어서도 가겠는걸.”
카렐은 이 든든한 천방지축의 손에 개량 망원경을 쥐어주고는 이곳까지 보급품을 지고 온 노새 다섯 마리를 이끌고 언덕 위 철성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분견대에서 부렸던 이 노새들은 걸음이 느리긴 해도 고산에서도 잘 적응을 했고, 30관(112㎏)이 넘는 짐을 지고 험한 곳도 꾸역꾸역 움직일 수 있는지라 이곳에서는 웬만한 차량보다도 유용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고장 날 일이 없다는 것도 무엇보다 든든한 조건이었다.
자이납이 멀어지는 황제의 뒤에 대고 큰소리를 쳤다.
“절 믿으세요, 제가 언제는 실망시켰나요?”
“그래, 니가 언제는 큰소리 안 쳤냐.”
카렐은 손을 흔들며 뿌연 흙먼지 너머 산 위로 멀어져갔다. 최소한 수천, 아마도 수만이 될 이곳 공격군의 길을 최대한 지체시킬 임무가 협곡 동쪽, 삼각형 모양의 손바닥만한 땅덩이를 지키는 가디언 두 명과 십여 명의 병사들 어깨에 걸려있었다.
철성에 돌아온 카렐에게는 또 다른 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에나는 카렐에게 비밀 전문 하나를 건넸다.
“이 문서가 들어올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카렐은 문서를 펼쳐보았다.
- 일란 호에 크테시폰을 싣고 방금 착륙했습니다. 마구스들도 모두 함께입니다. -
사에나가 내민 건 일란 호에 이디나와 함께 타고 있을 케스난의 연락이었다. 먼 거리로 지금까지는 연락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젠 비밀전문까지 보낼 만큼 가까이 있다는 의미였다.
- 말씀하신대로 하드랜딩을 했습니다. 착륙 도중 일란 호와 크테시폰 모두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크테시폰은 지난 사고에 이어 주 동력계통이 절반이나 손상되었습니다. 보안시스템도 일부 마비된 것 같으니 수리 전에 서둘러주십시오. -
“그래, 이걸 보냈다는 게 다행이지.”
카렐이 전문을 만지작거렸다. 크테시폰 내부엔 분명 삼엄한 통신 보안장치가 되어있을 테니 그가 안에서 할룩스나 빤한 통신기기로 연락을 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이곳의 검은 모래폭풍도 통신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었다. 그렇다보니 지금 그와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은 근거리에서 암호화된 단문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암호전문이 전부였다.
“일란 호를 내준 값을 받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사에나가 중얼거렸다. 카파키 가 소유의 초대형 화물선 일란 호는 하임달 공략군의 핵심 수송선으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장이 난 크테시폰을 하임달까지 수송하기 위해 속는 척 케스난의 운송회사에 임대를 해 주었다. 덕분에 당장 이틀 후면 하임달 공략군을 이끌고 와야 할 릴라크가 민간 수송선 징발에 애를 먹고 있지만 그 대가로 크테시폰의 도면을 입수하고, 그 안에 타고 있는 교단 핵심부 동향을 전달받기로 했으니 잃은 것이 클지, 얻는 것이 클지는 대 보아야 알 일이었다.
전문 아래쪽에는 이번에 함께 온 교단 병력의 대강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사카가 지휘하는 코런덤 3천과 바에자가 지휘하는 이전 근위대 2만이 이디나를 비롯한 마구스들과 함께 온 모양이었다. 병력 수 뒤에는 X3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여분 육체를 2벌씩 가져왔다는 뜻인가.”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부의 얼치기 병력이 아니고 교단의 최정예병력이 무려 2번이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건 카렐에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전문 뒷부분에는 케스난을 따라간 보안국 기술요원이 보낸 문장이 있었다.
- 헤네티와 근위대, 좀비부대의 기억을 저장하는 재생실과 헤네티 보관고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재생실만 파괴하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규모가 커 일란 호에 가져온 인화물질로는 부족합니다. 부피가 작은 고농도 인화물을 추가로 보내주십시오. -
카렐은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 케스난이 여분 육체를 없애려 너무 위험한 시도를 한 것이 아닐지 걱정이 퍼뜩 들었다. 지금 케스난이 가진 병력이라고는 일란 호의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운 황실의 특수요원 15명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곳에 접근 가능한 사람이 케스난뿐이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바에자가 크바르나와 함께 오고 있지?”
“예. 내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크테시폰은 바에자 마구스에게 맡겨야겠다. 아무래도 거기에 관해선 그 친구가 우리보다야 많이 알겠지. 거기 수송선에 인화물질도 있을 테니까.”
“그자를 얼마나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미가 내 손에 있어.”
카렐이 악마처럼 웃었다. 바에자를 구출한 직후, 일리안의 에시마 신전에서 데려온 바에자의 엄마, 정확히는 대리모는 황궁의 영빈관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지만 사실상 딸을 잡아두기 위한 인질이었다.
“내일 크바르나 군단이 들어오는 대로 작전 시작한다. 크테시폰을 재로 만들어놓고 시작하면 뒤가 든든하겠지. 내일부터 진짜배기겠구나.”
카렐은 검은 먼지가 가득 앉은 망토를 툭툭 털고는 황금탑 옆에 만들어진 간이 의무실로 향했다. 말이 의무실이지 분견대에서 가져온 간이 수술대와 발전기, 이런저런 약이 가득 든 상자와 이전 발굴단에서 쓰던 간이 유전자 분석 장비가 전부였다. 카렐이 세네피스의 척추를 절대 열 수 없다고 펄쩍 뛰었던 것도 이런 한심한 진료실 상태 때문이었다.
“누, 누구…….”
유전자 분석 장비 앞에 엎드려 자고 있던 살람이 황제의 걸음소리 잠이 깨어 벌떡 일어났다. 고도가 워낙 높다보니 이곳의 사람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자는 게 일과였다. 살람의 앞에는 지난밤 서쪽 동굴에서 가져온 생존자 유골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어떻게, 잘 되어가나?”
카렐은 ‘새로운 45호 공생 바이러스를 발견했냐?’라는 질문을 차마 대놓고는 못 하고 최대한 돌려 물었다. 카렐의 이런 조심스런 물음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살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예, 다행히 8종류의 변종 공생바이러스 RNA가 검출되었습니다. 그런데…….”
“8종류나? 그런데? 기뻐할 일 아닌가?”
카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살람의 차갑게 굳은 표정에서 그도 어느 정도 결과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바이러스도 이젠 RNA 부스러기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면 정밀 장비로 다시 시도는 해 보겠지만 쉽지 않을 듯합니다.”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름 아는 지식을 동원해 보았다.
“지금 있는 44호 바이러스를 참조해서 RNA파편들을 재조합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서 따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습니다만 기존 공생바이러스는 야푸르 대신관대에 워낙 손을 많이 댄 것이라 이젠 재조합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카히나의 시체를 찾지 못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렐은 눈이 쑥 들어간 이 성직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결국 서쪽 동굴까지 가서 힘겹게 찾아 온 뼈들은 공생 바이러스가 ‘원래는 여러 종류 있었다’는 결과밖에는 주지 못한 꼴이었다.
살람을 위로해 준 카렐은 간이 의무실 옆의 쪽방으로 들어섰다.
“폐하?”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작은 램프 하나를 놓고 열심히 이곳 문서를 뒤적거리고 있던 라스가 옆의 간이침대에서 시체처럼 자고 있는 니사를 깨우려 했지만 카렐이 놔두라며 손을 저었다. 지난밤 서쪽 동굴의 시체구덩이에서 황제도 없이 있느라 무서워 잠을 홀딱 설친 게 분명했다.
“할 만하냐?”
“이런 일을 할 행운을 쥔 언어학도가 몇이나 되겠어요.”
라스는 잠이 부족해 움푹해진 눈을 비비며 억지로 웃었다. 한때 글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의 푸줏간 노예청년이었던 그는 이제 공용어에 바람어, 고향행성 공식 기록에 쓰였던 언어와 개척 시기 쓰이다가 사라진 몇 개 언어까지 서투르나마 구사할 줄 아는, 누구보다 유능한 언어학도가 되어있었다.
“33년 전에 푸줏간 앞에서 폐하를 만난 덕분이죠.”
라스는 옆의 난로에서 끓고 있던 물로 따스한 코코아를 타서 카렐에게 올리고는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카렐은 달콤한 코코아를 입에 흘려 넣으며 지난 며칠간 라스와 니사가 번역해 놓은 글을 읽었다. 워낙 눈코 뜰 새가 없다보니 이젠 번역한 문서를 대충 읽고 넘어갈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수술 기록은 그새 다 번역을 했네?”
카렐이 눈을 흘겼다. 그는 이곳 철성에 관한 자료들을 빨리 번역하라며 심할 만큼 닦달을 했었지만 잔딕 수술에 관한 자료만은 재촉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둘은 정작 그것들을 제일 먼저 손을 댄 모양이었다. 카렐이 니사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러느라 곯아떨어졌구먼.”
카렐은 니사와 라스가 번역해 놓은 [잔딕 제거수술법]에 관한 자료를 대충 보았지만 그는 의사도 아니고, 이런저런 복잡한 신경 이름에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자료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카렐이 픽 웃었다. 잠든 니사를 힐끔 쳐다본 라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라말라 박사님도 이거 보면서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이 자료는 일반인의 뇌를 기준으로 한 건데 폐하의 손목 안쪽엔 시상하부인가 뭔가가 있어서 보통 사람하고는 구조가 완전히 다를 거라고요. 사제의 키가 있어도 수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보였어요.”
카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사가 이 자료만으로 제대로 수술을 할 수 있을지는 그 역시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카렐은 라스가 지금 열심히 번역하고 있던, 지난밤 서쪽 동굴에서 집어 온 사제들의 문서를 집었다. 황제가 번역문을 보는 모습에 라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청년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게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라스가 카렐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얼어붙은 듯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황제와 며칠을 가까이에서 지낸 라스는 이런 표정이 황제가 정말로 크게 놀랐다는 뜻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카렐은 이 철성 앞에서 학살당했을, 아니면 동굴에서 타 죽었을 이름 없는 사제가 남긴 기록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곳엔 지금의 제국민들이 이주가 있던 때, 그러니까 1천 년 남짓 옛날에 있은 첫 번째 대멸망부터 560년 전 두 번째 대멸망까지의 고향행성 역사에 관해 몇 장의 노트에 짤막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끝까지 단숨에 읽은 카렐은 짧은 한 마디로 소회를 남겼다.
“인간이라는 종이 참 질기지?”
“그 와중에도 나쁜 놈들은 꼭 있고요.”
라스의 대답에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트엔 이주민들이 떠난 후, 빈껍데기 고향행성에 남겨진 사람들의 생존 투쟁과 이 철성을 차지한 유전자 회사의 ‘감독관들’, 그들이 판매용 유전자를 만들기 위해 실험동물로 죽어간 인간들의 수십 년간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적응해 버틸 수 있는 우수한 유전자를 개발하기 위해 2천7백 명이 희생되었다고?”
“코메트가 오기 이미 수십 년 전에 있은 일입니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과장이 되었을 수도…….”
“체력이 강한 X 수정란의 제조가격은 5백만, 우수한 지능의 S는 9백만. 모든 요소를 적당히 고루 갖춘 소위 로얄 수정란은 1천5백만. 얼마나 큰 가치의 돈이었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그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만들었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거금이었겠지.”
“그때도 자신의 자손을 지키고 싶었을 갑부들은 또 있었을 테니까요.”
카렐은 ‘구조단’이 도착했을 때 이미 이 판지셰르를 뺀 행성 모두가 지옥이었다는 타리프의 기록을 떠올렸다.
“얄궂게도 그 갑부들은 다 죽었고, 실험용 인간들은 결국 감독관들을 뒤집어엎고 승자가 되었군.”
“하지만 패전 직전 ‘두 번째 대멸망이 왔으니 우릴 구해 달라’고 우주 사방에 구조 연락을 발신해놓고 갔으니…….”
“물귀신이 따로 없었구나.”
카렐은 사제들이 남긴 더러운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잔혹한 살인마 감독관들을 물리친 후, 판지셰르라는 작은 낙원을 개척하며 고향행성 마지막 인류의 대를 힘겹게 이어가던 카히나의 사제 무리는 감독관의 유령이 불러들인 더 무서운 침입자를 만나 끝내 대부분이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래도 그 피가 폐하의 핏줄에 흐르고 있고요.”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트를 놓고 막 일어나던 카렐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갑자기 좀 피곤하구나, 한숨 자야겠다.”
별 생각 없이 라스를 돌아본 카렐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내 혈색 좋다고 얘기하려고?’라며 막 물으려는 찰나, 그의 손에 들린 사제의 노트 위에 붉은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흐읍.”
카렐이 얼른 코를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 걷잡을 수가 없었다. 피는 어느새 코뿐만이 아니고 입과 귀에서까지 흐르고 있었다. 놀란 라스가 휘청거리는 황제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황제는 온통 피가 들어찬 코와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라말라 박사님! 살람 박사님!”
라스가 중심을 잃은 카렐의 체중을 기를 쓰고 버티며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옆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니사와 쪽문 너머에 있던 살람이 영문도 모른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폐하? 폐하! 쓰러지지 마세요!”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진 카렐은 그대로 고목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셋의 힘으로도 무너지는 카렐을 받칠 수가 없었다. 황금탑 주변에 모여 자고 있던 가디언들이 몰려와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일이냐!!!”
통제실에서 비명을 들은 코리온이 헐레벌떡 달려와 바닥에 주저앉은 카렐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얼굴부터 가슴 아래까지 온통 피에 젖은 황제를 보며 놀라 고개를 저었다.
“뭐냐? 발작이야?”
“차라리 발작이면 낫게요!”
코리온은 축 늘어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렐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한 건 카렐이 아플 때마다 항상 함께 고통을 느끼던 그에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 폐하! 정신 잃지 마십시오! 이제와 정신 잃으시면 안 됩니다! 젠장! 누가 피 좀 빼내!”
코리온이 고함을 질렀지만 가늘게 뜨고 있는 카렐의 눈동자에서는 점점 빛이 옅어져갔다.
“저기가 ……떡갈나무 언덕이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린 황제는 그 순간 이후, 결국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했다.
“여기도 작은 웅덩이가 하나 있습니다. 고도로는 중간 조금 넘게 올라온 것 같습니다. 여기 중간 캠프를 설치하면 되겠습니다.”
제플린 산의 북벽을 올라간 헨지에게서 4시간 만에 연락이 들어왔다. 그동안 밑의 웅덩이 부근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던 주페 일행은 그가 무사히 중간까지 올랐다는 연락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짚을 곳이래야 물이 흘러서 낸 작은 크랙뿐인 상황에서 혹시라도 크랙이 끊겨 등반이 막히거나,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로프 고정하고 도르래 설치했습니다. 이제 다들 올라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잘했다. 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아서 서둘러야겠는걸.”
다룬이 시계를 확인했다. 가뜩이나 위도가 높은 이곳에서 해가 질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해가 있어 봤자 하늘을 덮은 갈색 폭풍 너머 희미한 빛이 보이는 정도지만 이나마도 없다면 아예 올라가는 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옹주께선 거기서 제발 움직이지 마시고요.”
다룬은 선두로 올라갈 페다이가 멘 바구니 안에서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마리안을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저하는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아샤드 경이 주페를 자신의 몸에 묶으려 했지만 주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에 형제들끼리 황상한테 등반 배운 적 있어요. 로프 잡고 올라가는 정도는 해요. 저 말고 에스더 귀인 도와주세요.”
아샤드 경은 다룬에 이어 서슴없이 줄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이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일단은 그의 X혈통을 믿고 하는 수 없이 에스더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군인들을 능가하는 능숙한 손길로 몸에 하네스와 장비를 감고 있었다. 에스더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샤드 경에게 능청맞게 대꾸했다.
“어머, 나 결혼 전에 광산 개척하는 일 했었다는 거 몰랐어요? 레펠하고 클라이밍은 기본이라고요.”
“바로 얼마 전 회임하신 것으로 아는데…….”
아샤드는 새 황자의 수정란을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스더가 여기에 온 것부터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줄을 타고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2명의 엔지니어들은 X인 아샤드와 다룬이 한 명씩 맡아 등에 업고 줄로 묶었다. 아샤드는 밑에 남아 대기할 셔틀 조종사에게 일렀다.
“올라가서 도르래하고 바스켓 내려줄 테니까 여기 모아놓은 물건들 올려 줘.”
절벽 밑에는 절벽을 올라가는 일행이 먹을 식량과 무기, 담요와 장비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다행히 카렐이 분견대의 보급품 일부를 낡은 셔틀에 실어 놓아둔 덕분에 이들도 보급 걱정 없이 이 절벽의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암벽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부족하나마 셔틀에 실려 있던 분견대 장비 덕분이었다.
일행은 마리안을 진 페다이를 선두로 엔지니어를 업은 다룬까지 줄줄이 로프에 매달려 거의 20스타디아 높이의 수직 절벽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모래폭풍이 계속 사납게 옆을 때렸지만 한때 이곳에서 사제들을 수호했던 강인한 X의 후손들은 이번에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로프 하나에 의존해 잠시도 쉬지 않고 절벽을 올랐다. 몰아치는 강풍은 계속 목숨을 위협했지만 모두가 나쁜 건 아니었다.
“그나마 아래가 안 보여 다행이네.”
에스더의 농담 아닌 농담에 모두가 잠시 웃을 수 있었다. 정말로 얼마 오르지 않아 땅 밑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걸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적응할 여유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며 에스더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고, 가디언들까지도 가벼운 고산병에 조금씩 둔해지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32스타디아(4,800m)네.”
그 와중에도 가장 멀쩡해 보이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주페와 마리안 같은 아이들이었다. 페다이의 등에 업힌 마리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페다이의 입에 직접 설탕물을 대 주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걱정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 혼자 올라가도 되는데. 나 절벽 잘 타요. 황상도 형제 중에 내가 제일 잘 탄댔어요.”
“후훗.”
페다이는 아이의 큰소리에 내심 기가 막혀 그냥 웃기만 했다. 이 바위는 이런 꼬마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이제 다 왔습…….”
“3스타디아나 남았는걸요. 너무 늦기 전에 가야 되는데.”
자신보다 더 정확한 마리안의 말에 페다이의 말문이 탁 막혔다. 아이는 중간 중간 ‘여기 캠 하나 더 박아요’라거나 ‘물에서 음식 냄새가 나네?’라는 말로 어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휴!!!”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해 헨지의 손을 잡은 순간, 페다이의 입에서 이런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가 미처 숨을 고르고 오르기도 전에, 바구니에 타고 있던 마리안이 먼저 그의 어깨를 밟고 후다닥 기어올라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내가 일등.”
“제가 이미 일등입니다.”
헨지가 또 어딘가로 뛰어가려는 이 꼬맹이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었다. 페다이에 뒤이어 주페와 에스더가 올라왔고 엔지니어들을 업은 아샤드 경과 마지막의 다룬이 줄을 붙들고 올랐다. 오늘밤을 버틸 곳은 제플린 산의 북벽을 이루는 거대한 암석이 중간에서 가로로 살짝 어긋나며 만들어진 계단 같은 평지였다. 폭은 넓은 곳도 어른 한 명이 길이로 드러눕지도 못할 5척 남짓(150㎝)에 불과하고, 조금만 잘못 디디면 지금까지 올라온 까마득한 높이를 순식간에 추락으로 되갚을 수 있을 만큼 위험했다.
“학, 학.”
고산증상에도 가디언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기를 쓰고 올라오느라 탈진한 에스더는 올라오기가 무섭게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내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부르르 떨었다. 당황한 아샤드 경이 에스더의 몸에 손을 대려다가 황제의 여자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급히 물러났다. 에스더는 물로 입을 헹궈내고 엉금엉금 기어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아샤드 경, 나 버틸 수 있어요.”
“몸도 성치 않으실 텐데요.”
주페가 걱정스런 얼굴로 배낭에서 응급약을 꺼내 에스더에게 건네주었다. 에스더는 더듬더듬 약을 삼키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황상께선 더 높은 곳에서 이미 한참을 계셨잖아요?”
“예, 거의 다 왔으니 염려 마세요.”
주페가 차가워진 에스더의 손을 주물러주며 억지로 웃었다. 문득 올려본 하늘은 이미 깜깜해지고 있었다. 아샤드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종사에게 보급품을 실을 바구니를 내려 보냈다.
“더 올라가도 적응도 못할 것 같으니 오늘밤은 여기서 푹 쉬고 내일 새벽부터 다시 올라갑니다. 내일은 철성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녹초가 된 일행은 손바닥만한 바위 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여전히 폭풍이 몰아치는 시커먼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들이 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산 반대편에서는 칼데아 군이 철성으로 가는 길을 송풍로에서, 낭떠러지에서 각각 뚫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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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좀 길어졌네요;;;
어쨌든, 드디어....때(???)가 왔습니다. (쿨럭)
카렐이 쓰러진 가운데, 이제 다음회부터는 본격적인 최후의 전투에 들어갑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세요~~~( ̄∇ ̄)ブ~~★
출판본 3부 5,6권이 일반 서점들에도 업데이트가 되었고요, 속썩이던 올레e북도 모두 업뎃되었습니다. 마지막 출판본 7, 8권 작업은 총 분량이 이전 출판보다 1.5배 정도 많아 지체되고 있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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