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80화 (1,075/1,132)

< -- 1080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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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르는 이번엔 보병대를 이끄는 조페와 시로, 아메샤 스펜타 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경을 불렀다.

“7군단의 피해가 제일 큰 것 같다. 수송선이 워낙 멀리에 떨어져서 아직 절반밖에 못 도착했어. 시로가 5군단과 먼저 도착한 7군단으로 서쪽을 맡아라. 뒤에 도착하는 7군단은 제일 무난한 동쪽 강 주변을 지키게 해. 조페 자넨 10군단을 이끌고 북쪽의 정원 방향을 막아라. 아메샤 스펜타는 남쪽을 맡고.”

시로가 눈을 쫑긋거리며 웃었다. 그가 맡게 된 서쪽은 지평선까지 뻗은 농경지가 있는 평야지대였다. 델루지 종가 주변에서 그나마 가장 오픈된 지역으로 사실상 방어의 성패가 걸린 급소였다.

병력배치를 끝낸 제네르는 수송선에서 황급히 뛰어내렸다. 그가 탔던 사령선도 엔진 2개가 박살이 난 채 델루지 종가 앞마당의 근사한 잔디밭과 정원을 짓뭉개고 비스듬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령선에 탄 5천의 보병들이 각자의 군장을 짊어지고, 2천의 기병들은 놀란 말들을 달래며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뒤쪽에선 소화기를 든 선원들이 불을 끄느라 아우성이었다. 그 와중에 공병들은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 쓸 자재와 중장비를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근사한 정원의 꽃밭은 서둘러 발리스타를 방열하는 포병대에 밟혀 잡초밭이 되었다.

제네르는 종자가 끌고 온 아타르에 훌쩍 뛰어올라 델루지 본채 쪽으로 달려갔다. 정원과 저택이 워낙에 크다보니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끌까지 가는 데 사람의 달음박질로는 운동선수나 가능한 수준이고, 차를 이용하거나 말로 달리지 않으면 애당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델루지 종가 정문 앞에 도착한 제네르는 선봉대인 113대대 가디언들의 경례를 받으며 안에 후다닥 뛰어들었다. 이전 제롬과 사귈 때 몇 번 오간 일이 있긴 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에게도 많이 낯설었다. 그는 중앙에 난 계단을 타고 주변이 잘 보이는 옥상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그렇게 옥상에 막 오른 제네르를 맞아 준 건 세데스의 거친 욕지거리였다.

“야, 이 씨발놈들아! 누굴 공격해? 주인도 못 알아보는 미친개 같으니라고!!!”

113대대와 함께 이곳에 처음 상륙했던 세데스가 흙투성이의 더러워진 몰골로 종가 경비병 포로들 20여 명을 마구 걷어차며 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제네르의 시선에 그제야 자세를 세우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제네르는 세데스의 꼴사나운 행각을 못 본 척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델루지 본채는 한동안 우리 사령부로 쓰겠소. 그대는 우리 전투병이 주변을 지키는 동안 공병대 5천으로 주변 요새화 공사를 맡아주시오. 가능하겠소?”

제네르는 상급제후라는 상대의 신분을 생각해 명령 대신 부탁하는 투로 물었다. 이곳 지리와 기존 방어시스템을 가장 잘 아는 만큼, 공병대를 맡기기는 그가 제격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안 주면 화내려고 했소. 야, 이 새끼들 누가 고개 들랬어!!!”

세데스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 경비부대 사관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세게 걷어찼다. 사관이 넘어지며 나머지 병사들까지 도미노처럼 우르르 넘어졌다.

“잘됐다, 이 개새끼들 발목 묶어서 참호공사 삽질이나 시켜야겠네. 씨발.”

“적당히만 하쇼, 댁 가문 포로들인데.”

이 포로들이 본채 무기고에서 세데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격을 퍼부었던 무리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제네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곳 종장이면서도 쫓겨나야 했던 그의 처지를 생각해 더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라자루스 가 여자들이라니…….”

옥상에 선 제네르는 종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가 이곳까지 올라온 건 주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남쪽과 북쪽에서는 추락한 3척의 수송선에 탔던 2만 남짓의 장병들이 슈로 기사단과 선발대 보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종가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길고 긴 꼬리가 불타고 있는 수송선까지 늘어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꼬리 뒤쪽’에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칼데아 군 중장기병들이 마치 기생충처럼 매달려 뒤처진 황실군 장병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하고 있었다. 이 위에서 보아도 수백,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황실군 장병들이 숲 속의 길목 길목에 시체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보병들의 외곽을 바싹 에워싸고 양손검을 휘둘러대는 황실군 가디언 사관들 때문에 감히 단독으로 덤벼드는 간 큰 중장기병은 없었다.

“이 정도면 큰 피해는 아닌 것 같소만.”

세데스의 참견에도 제네르의 굳은 표정은 바로 풀어지지 않았다. 13만의 비엔 공략군 중 전투 한 번 못 치러보고 이곳에 뼈를 묻은 자들이 족히 4, 5천은 되어보였고 부상자까지 합치면 그 2, 3배는 될 터였다. 그때, 눈이 밝은 세데스가 남쪽 숲 경계, 207 수송선이 추락해 숲이 불타며 속살이 드러난 곳을 가리켰다.

“남부 보병대 본대 같소. 슬슬 반격을 시작할 모양인데.”

제네르가 얼른 망원경을 꺼내 눈에 가져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군을 가지고도 반격은 생각 외로 늦었군. 난 몇 분은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제네르의 의문에 옆의 세데스가 으스대며 답했다.

“그야 여길 뺏은 덕분 아니겠소. 지휘부라는 놈들이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동안에는 놈들은 사실상 뇌사상태였으니.”

아직 젊고 철이 덜 든 세데스의 잘난 체에 제네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 굳이 대놓고 면박은 주지 않았다. 수뇌부인 테나스와 하디, 슈라가 이곳 종가에서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동안 주변 야전부대가 알아서 움직여줬다면 좋겠지만 남부제후군은 견고한 만큼 관료적이고 경직되어 있기로 유명했다. 그들은 테나스 일행이 서류를 끌어안고 지하 통로를 허우적거리며 도망치고 있을 때도 [반격 명령]이 내려지기만 기다리며 할룩스만 쳐다보고 있었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길 먼저 쳤지.”

세데스의 계속된 자랑에 제네르가 살짝 짜증으로 감정을 대신 드러냈다.

“아직 안 내려가셨소? 빨리 공병대하고 나가서 참호나 포병대 방열공사를 도와야 할 것 아닙니까?”

제네르의 핀잔에 살짝 빈정이 상한 세데스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야, 저 포로 새끼들 끌고 따라와!!!”

시끄러운 세데스를 쫓아보낸 제네르는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포병대는 방열 끝나는대로 즉시 응사를 시작해라.”

제네르의 명령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앞마당에 막 자리를 잡은 아메샤 스펜타 군단의 발리스타였다. 그곳에서 쾅 소리와 함께 거대한 불꽃이 솟구쳐 추락한 수송선 주변을 막 지나던 칼데아군 보병대의 머리 위를 덮쳤다.

어어 하는 새 종가를 빼앗긴 칼데아군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포격에도 아랑곳없이 사방을 포위하고 계속 종가 주변으로 조여들었다. 그들은 포격 파편과 화염에 휩싸여 발버둥치는 수십의 동료들을 뒤에 남겨둔 채 황실군이 차지하고 있는 종가로 계속 전진했다.

“서쪽하고 후원 쪽의 포병대 놈들은 뭐 해!”

제네르가 이번엔 서쪽의 넓은 밀밭과 뒤뜰 쪽을 돌아보았다. 빽빽한 숲을 U자로 파낸 듯 길게 꾸며진 델루지 가의 후원은 중앙에 긴 인공연못을 끼고 주변에 잔디밭과 조각 화원이 곱게 꾸며진, 화려함의 극을 달리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수만의 황실군과 연기를 뿜는 수송선들, 포병대와 사역병들로 뒤덮인 혼란통이었다.

“발사!”

제네르의 호통을 들은 뒷마당의 10군단 포병대, 서쪽 밀밭을 보고 있는 5군단 포병대도 질세라 적을 향해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그곳 역시 칼데아군은 꿋꿋하게 전진을 계속하며 다가왔다. 이전 남부제후군의 견고한 보병대 전통은 칼데아군에 와서도 여전했다. 남쪽과 북쪽은 워낙 숲이라 기병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적 기병대는 어디 있는 거냐!!”

제네르는 시로를 보내놓은 종가 서쪽, 평야갸 있는 밀밭을 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수많은 칼데아군의 중장기병대는 평야인 서쪽의 지평선을 까맣게 덮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낮이었다면 아마도 햇빛에 반사되는 어마어마한 갑옷의 은빛 반사광이 장관을 이루었을 테지만 지금은 스코프 너머 꿈틀대며 다가오는 긴 먹구름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정사각형의 대오를 이룬 보병대의 거대한 무리도 보였다.

“적 기병 2만 남짓이고 그 앞에 보병 5만 정도 보입니다. 보병대는 페스트에서 온 좀비군단 같습니다.”

“좀비 놈들이 벌써 도착했다고?”

가디언 참모의 보고에 제네르가 정색을 했다. 슈발츠발트의 숲에 예비대로 두었다고 알고 있었던 속칭 좀비부대, 페스트 군단을 그새 이곳에 불러온 모양이었다. 옛 근위대를 복제한 우수한 신체조건에, ‘제대로 못 싸우고 죽으면 다음번 몸이 없다.’는 절박감을 세뇌 받은 저들은 이번에도 보나마나 죽자 사자 달려들 놈들이었다. 저들은 제네르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존재들이었다.

“남북의 숲을 포기하고 서쪽을 주공(主攻)으로 결정했나.”

억지로 태연한 척 하는 제네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쪽으로 보낸 시로의 병력은 2만이 되지 않고, 그나마 막 내려 정비조차 되지 않았으니 터무니없는 열세였다. 이곳에서 도망친 테나스가 그새 페스트 군단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탈환을 시도하는 게 분명했다. 내심 저들이 숲으로 몰려와 난전을 벌여주기를 바랐던 제네르로서는 눈앞이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보병대의 가디언들을 의식해서 앞줄에 좀비 보병을 두고 뒤에 기병을 둔 게야. 가디언에게까지 죽자 사자 덤빌 놈들은 좀비들뿐이니까.”

제네르는 눈에 망원경을 대고 시로가 지키고 있는 서쪽 밀밭의 방어선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을 맡은 7군단과 5군단은 밀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긴 농수로에 몸을 감추고 석궁을 장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농수로는 얕고, 5만의 앞뒤 안 가리는 좀비 보병과 그 뒤로 따라오는 2만의 중장기병을 막기는 턱도 없이 약해보였다.

“우리 기병은 아직 멀었냐!”

제네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데려온 2만의 기병은 추락한 수송선에서 돌아오는 보병들을 엄호하고 있는 중이라 바로 동원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여전히 정비가 덜 된 델루지 종가 일대가 들어왔다. 특히나 상륙 도중 큰 손상을 입고 여전히 연기를 모락모락 내뿜고 있는 거대한 수송선들은 골칫거리였다. 병력과 물자를 서둘러 토해놓은 수송선들은 종가 앞 뒤뜰에 여기저기 흩어진 채 진화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몇 척은 도저히 불이 잡히지 않아 승무원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선체가 커서 바로 무슨 일이 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저것들이 그 자리에서 폭발이라도 했다가는 13만의 황실 비엔 공략군이 숙영지로 사용할 델루지 종가 일대가 초토화될 판이었다. 불타는 수송선들과, 몰려오는 적을 번갈아 쳐다본 제네르가 손가락으로 선단을 가리켰다.

“가망 없는 3척은 소화 작업 포기해라.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다시 띄워.”

“예에? 이미 3척을 잃었는데 또 3척을 포기하면…….”

놀란 참모들의 시선은 제네르의 손끝이 향하고 있는 서쪽의 밀밭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차피 퇴각 따위는 없다. 저놈들 머리 위에 떨어뜨려라.”

참모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황실군의 가장 값나가고 큰 재산인 수송선을 한두 척도 아니고, 무려 3척이나, 오다가 떨어진 것까지 생각하면 선단 수송선의 4분의 1이 넘는 6척을 날리는 셈이었다.

“당장!”

제네르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옥상을 울렸다.

“남북 방향의 휴양소와 파견군 사령부도 요새에 가만히 붙어있지 말고 선제공격해라! 놈들이 물러나게 만들어! 오늘밤만 넘기면 절반은 성공이란 말이다!”

상장군의 명령을 받은 수송선의 승무원과 사역병들이 소화기를 내던지고 불타고 있는 선내에서 중요한 자료와 남은 물자들을 서둘러 들어냈다. 이곳에 상륙한 13만의 황실군은 이제 돌아갈 수단마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엔진과 선체 곳곳에 불이 붙어 소화가 어려워진 수송선 3척은 지상에 남은 간부요원들의 원격비행에 따라 마지막 아주 짧은 비행을 시작했다.

“목표는 앞쪽에 오는 적 좀비 보병들의 머리 위다. 뒤따라오는 기병들에게도 장애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수송선은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는 승무원과 장병들의 안타까운 시선 속에서 밀밭 평원이 있는 서쪽 하늘로 어렵게 어렵게 날아갔다. 예상대로 적 진영에서 자기와이어와 장애파,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자폭셔틀 수십 대가 날아올라 수송선에게 달려들었지만 이젠 피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계속 보내! 중간에 떨어지면 선장 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제네르가 악을 썼다. 사방에서 자폭셔틀을 얻어맞은 수송선은 온통 불길에 휩싸인 채로 밀밭을 넘어가 꽉 짜인 대오를 이루고 다가오던 페스트 군단에게 다가갔다. 아직 불완전한 황실군 방어선으로 의기양양하게 다가가던 페스트 군단의 좀비 보병들은 머리 위를 뒤덮는 3개의 시커먼 그림자에 놀라 일순간 얼어붙었다. 비록 시한부의 몸뚱이를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뭐야! 피해! 피해!”

놀란 좀비보병들이 일단 대오를 깨고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비록 불이 붙고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수송선의 속도를 그들의 걸음으로 따돌릴 수는 없었다. 자폭셔틀에 거듭 얻어맞아 곰보가 되고 사방에 불이 붙은 수송선은 놀라 흩어지는 좀비 보병들이 전진하던 지면 위를 비스듬하게 스치며 내리꽂였다.

“006, 좀비부대 북쪽 대오에 추락한다!!!”

일순간 평화롭고 너른 밀밭에 우주에서도 족히 보임직한 거대한 화염의 선이 그려지며 귀를 찢는 굉음과 화염, 어마어마한 파편이 주변을 온통 뒤덮었다. 굉음과 빛에 양쪽 군대 모두가 눈과 뒤를 가리며 바닥에 엎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102 추락!”

두 번째 내리꽂힌 수송선은 좀비부대 대오의 남쪽을 후려치며 조금 전보다 더 큰 화염을 공중에 날렸다. 무려 3척의 수송선이 차례대로 밀밭에 내리꽂히면서 그 넓던 밀밭이 어느 한 군데 온전한 곳이 없을 만큼 긴 화염의 지평선 밑에 잠겨버렸다.

“어떻게 된 거냐! 결과 보고해!”

제네르가 서쪽 밀밭을 지키는 시로에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5만이나 되던 좀비부대원들은 붉은 화염 속에 파묻혀 다 죽었는지, 그 와중에 산 놈이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 뒤를 따라오던 2만의 남부기병대가 엄청난 화염과 수송선 파편에 진로가 막히면서 전진을 멈췄다는 것뿐이었다.

수송선이 추락하고 얼마 가지 않아 밀밭의 방어선의 황실군 가디언들은 지독한 탄내에 섞여오는 사람의 살 탄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불꽃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그냥 전진하라는 악에 받친 고함이 또다시 전해져왔다.

“성공이다!”

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기를 번쩍 쳐들었다. 밀밭 방어선을 지키던 가디언과 장병들, 참호를 파고 있던 사역병들까지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포효가 성급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게 뭐죠?”

시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가디언 사관들이 당혹스런 얼굴로 불길 너머를 가리켰다. 배경을 이루는 어마어마한 불길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검은 점들이 꾸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저것들 뭐야?”

시민장병들은 물론이고 웬만해서는 놀라는 법이 없는 가디언들까지도 경악을 했다. 불 속을 뚫고 꾸물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건 분명 사람들이었다. 그늘은 불 속에 타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동료들을 놓아둔 채로 주저앉지도, 놀라 도망치지도 않고 밀밭의 방어선으로 계속 접근해오고 있었다. 수송선 추락의 와중에 절반 가까이 죽거나 아예 못 움직일 만큼 중상을 입은 듯했지만 나머지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빨리 죽여 달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누가 좀비 아니랄까봐!”

가디언들이 욕을 내뱉었다. 상당수는 갑주만 그슬렸거나 몸 일부만 파편에 부상을 입었을 뿐 거의 멀쩡했고, 일부는 온몸이 불에 타 엉망이 되었고, 몇몇은 아예 팔다리가 잘리거나 당장 쓰러져 목숨을 잃기 직전의 몰골이었다. 그나마 성한 자들은 방패를 들고 대오 비슷하게 몰려있지만 나머지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자들은 사방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죽여야 합니까?

당황한 시로가 사령관 제네르에게 물었다.

“죽인 만큼 건강한 몸으로 또 되살아나올 겁니다.”

시로의 물음에 제네르도 이번만은 결정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원정에 나서면서 누구보다 잔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리라 내심 마음을 먹고 온 터였지만 애당초 선량한 본성을 계속 저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적 보병들 후미의 남부기병은?”

“파편과 불길 때문에 뒤처졌습니다.”

제네르가 잠시 망설였지만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적에게 죽음보다 못한 최악의 운명을 줘야만 했다.

“팔과 다리만 쏘아 쓰러뜨려라. 쓰러진 자들은 죽이지 말고 놔둬라. 죽지 못하게 해야 못 살아난다.”

제네르의 명령에 시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네르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1선의 좀비 놈들이 죽지 않고 있어야 뒤따라오는 적 기병대가 우리 포격과 사격권 내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밀밭의 낮은 수로를 따라 몸을 숨기고 있는 2만의 5, 7군단 장병들에게 사령관의 지시를 그대로 전했다. 그들은 일부는 성한 몸으로, 혹은 훼손된 몸으로 허우적거리며 ‘죽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거의 2, 3만의 다리를 겨누었다.

“발사!”

황실군은 개량석궁을 앞으로 겨누고 휘청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적의 다리를 행해 위력적인 볼트를 날렸다.

“우읍!”

다리에 볼트를 제대로 맞은 좀비 병사들은 다리가 찢기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몇몇은 방패를 떨어뜨리며 바닥을 굴렀고, 일부는 더 악을 쓰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급소를 쏘지 마라! 다친 놈들은 그 자리에서 놔둬라!”

좀비 병사들은 하나하나 힘을 잃고 쓰러졌고, 일부는 쓰러진 채로도 자신을 빨리 죽여 달라며 사방에 마구 석궁을 쏘아대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느린 자들부터 하나 둘 쓰러졌지만 워낙 숫자가 숫자다보니 그들은 농수로에 세운 황실군의 임시 방어선에 차츰차츰 접근해왔다.

“1열 5군단 접근전 준비!”

시로의 고함에 제일 선봉의 가디언과 고참병들이 방패와 칼을 빼들었다. 이미 대오가 무너진 채 사방에서 산만하게 접근해오던 좀비 병사들도 방어선이 가까워오자 걸음에 속도를 붙여 달려오기 시작했다.

“5군단 돌격!”

돌격나팔 소리와 함께 4천여의 황실군이 악 소리를 지르며 농수로에서 뛰어나갔다. 이들은 조금 전, 군단 동료들이 탄 수송선이 추락하고, 도망치던 병사들이 칼데아군의 추격에 무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장병들이었다. 독기가 오른 그들은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좀비 병사들을 온 힘을 다해 들이받았다.

“죽이지 마라! 한 놈이라도 더 살려둬라!”

선봉에서 뛰어나간 시로는 지휘관인 듯한 자의 팔을 사정없이 꺾어 부러뜨리고는 뒤꿈치를 도끼로 찍어 바닥에 동댕이쳤다. 다른 가디언과 고참병들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달려드는 자들의 손목을 베고 정강이를 방패로 내리찍어 부러뜨렸다. 적을 죽이려 광분하는 전장보다 더한 비명과 광기, 끔찍한 고통이 풍요로운 밀밭 위를 뒤덮었다. 몇몇 성한 좀비 병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가 목이 잘리거나 몸통을 찔리고 주저앉았지만 그런 ‘운 좋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적의 예봉을 1차로 꺾은 시로가 다시 도끼를 앞으로 겨누었다.

“아직 숨 붙은 놈들이 자살하지 못하게 해! 손발만 못 쓰게 부러뜨려! 뒤쫓아 오는 적 기병대가 이놈들을 죽이던지 구하려고 몰려들게 만들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5군단 황실군들은 이미 석궁에 맞아 밀밭 곳곳에 쓰러져 있던 좀비 병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무기를 빼앗고 손목과 발목을 방패로 내리찍어 망가뜨렸다. 그 사이, 추락한 수송선 파편과 불의 장벽에 막혀 잠시 지체되었던 칼데아군 중장기병대가 숲과 빈틈을 돌아 돌격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적 기병이 온다! 퇴각! 퇴각!”

밀밭까지 나와 있던 5군단은 일제히 뒤로 돌아 다시 농수로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네르가 던진 [수송선 자폭]이라는 패의 진짜 효과는 이제부터였다.

“발사!”

곳곳에서 고함과 함께 포탄이 날아올랐다. 적이 추락한 수송선에 막혀 전진이 지체되는 동안에 방열을 끝낸 후방의 포병대가 몰려드는 중장기병대의 머리 위에 다시 불벼락을 쏟아 부었다. 불꽃을 내며, 혹은 은밀히 소리도 없이 공중을 가른 포탄이 평소처럼 밀집해서 몰려드는 남부 중장기병대의 머리 위를 덮쳤다.

“흩어져! 흩어져!”

지휘관들의 고함은 별 소용이 없었다. 불타고 있는 수송선의 잔해 때문에 진로가 제한된 중장기병들은 정확히 위치를 노리고 쏟아 붓는 포탄 앞에서 고스란히 제물이 되었다. 이번에 데려온 황실군에서도 황제와 제네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건 사역병단에서 독립해 새로이 편성된 포병대였다.

“퇴각! 퇴각!”

버티다 못한 칼데아군 기병대 진영에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퇴각 나팔이 울려왔다.

“뭐야? 도망가는 거야?”

기병대를 포격 안에 끌어들이려 했던 시로는 그들이 생각보다 빨리 물러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비하면 비교적 큰 피해를 입은 칼데아군 중장기병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서는 부상자들만 챙겨 온 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냐? 적이 왜 물러나는 거냐!”

할룩스 너머에서 제네르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 중장기병대는 고작해야 1, 2백의 손상을 입은 채 서둘러 불의 장벽 너머로 달아나고 있었다. 남북방향의 숲을 통해 공격을 퍼붓던 칼데아군 보병들도 밀밭에서의 실패에 서둘러 방향을 돌려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좀비들은 안락사되지도, 그렇다고 구조되지도 못한 채 밀밭에 내버려져 있었다.

“테나스 이그나토 그년 엄청 신중한 성격이라더니 명불허전인가.”

시로가 입가를 씰룩대는 아내이며 상관에게 일부러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남북 방향의 사령부와 휴양소 파견군들도 부담이 되었을 테고요. 좀비군단을 무너뜨린 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시로가 제네르에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비록 적 기병대를 포병대의 무차별 탄막 포격에 끌어들이려는 것까지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가디언 부대의 기습과 수송선 자폭이라는 제네르의 도박이 가져온 큰 성공이었다.

“어쨌든 상륙에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상장군님의 결단 덕분입니다.”

시로는 제네르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 5, 7군단 장병들 앞에 훌쩍 나서서 양 손을 쳐들고 손뼉을 짝짝 쳤다.

“우리의 승리다!”

불타는 수송선 잔해 너머로 도망치는 적 중장기병대의 뒷모습을 확인한 밀밭의 황실군 2만은 시로의 선창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무기를 쳐들고 환호성을 올렸다. 밀밭의 환호성은 남쪽과 북쪽 숲을 지키는 다른 군단에게까지 조금씩 번져나갔다.

“비엔에 드디어 황실의 깃발을 꽂았다!”

몇몇 성질 급한 무장들, 황제를 열렬히 추종하는 노예 2세들이 검은색 황실 깃발을 높이 흔들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카렐 리쿠 대제 만세!!!”

아직 어둠에 덮인 비엔의 델루지 종가 주변으로 처음 이곳을 장악한 황실군의 우렁찬 함성이 평야와 숲,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를 타고 번져나갔다. 바로 몇 시간 전 황실에서의 독립을 선언한 비엔, 아니 남부의 중심지는 엄청난 물자와 희생까지 아낌없이 쏟아 부은 황실군의 무시무시한 응징에 단 하룻밤 새 고스란히 황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승리가 큰 만큼, 그 대가도 가혹했다. 13만의 비엔 상륙군은 20척 중 6척의 수송선을 잃었고, 7천여의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그날 밤, 밀밭의 황실군들은 밤새 죽여 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좀비 병사들의 마지막 신음과 절규에 내내 시달려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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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내용이 끊기지 않으려다보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하;;

제네르가 이번엔 더 무식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하하;; 세데스는 점점 개그화가 되어가고 있고요....

다음 편에선 하임달의 카렐과 겸둥이 남매(?)가 컴백합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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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어떤 분이 문의를 주셔서 여기에 답변 겸 적습니다. 전자책 판매처 중 올레e북은 3부 전체가 2달째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고 인터파크는 3부 3,4권이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되었습니다. 그 두 곳이 좀 판매가 늦네요;;;

올레이북은 지난번에도 파일 보내고 판매까지 무려 3달이나 걸리더군요. KT일처리하는 거 참;;; 재촉하는 연락을 보냈으니 그쪽에서 구매하시는 분들께선 조금만 가디려 주시면 업데이트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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