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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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철성에서 서쪽 동굴까지는 지도상으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철성에서 동굴까지는 고작 40스타디아(6㎞) 남짓 거리에 평지 혹은 내리막이지만 보통의 병사들에게 도보로 쉬운 길은 아니었다. 해발 40스타디아(6,000m)가 넘는 고산지역에서 자기 몸집만한 큰 짐까지 짊어졌으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것이 당연했다.
카렐과 5명의 병사들, 니사와 살람, 세네피스까지 포함한 9명의 일행은 차량을 철성에 놓아둔 채 도보로 모래폭풍을 가로질러 서쪽 능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8명이 도보로 걷고 있었다.
“꼭 붙어계시면 덜 추울 겁니다.”
카렐은 펄럭이는 망토자락 안쪽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지 않게 옷자락을 꼭꼭 여미며 등에 업힌 세네피스를 돌아보았다. 식량과 장비가 든 묵직한 짐을 가슴에 달고, 등에는 세네피스까지 업었으니 혼자서 거의 2, 3사람 체중을 지고 나아가는 셈이었다.
“황상께서 이렇게 함께 계시니 추울 리가 있습니까.”
세네피스가 카렐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살람의 예측 그대로, 오늘의 모래폭풍은 정말로 심상치가 않았다. 체구가 작은 니사는 바람에 밀려 몇 번이나 주저앉았고, 갑자기 맹렬한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이곳에 익숙한 병사들도 전진을 멈추고 자리에 웅크려 잠시 폭풍이 지나길 기다려야 했다.
철성이 있는 고원 끝까지 어렵사리 온 일행은 지난번 차가 올라왔던 가파른 돌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리막은 나은 편이지만 이미 다리가 풀린 니사는 연신 자리에 주저앉았다. 5명의 분견대 병사들도 모두 몸이 온전한 건 아니었다. 카렐의 지시에 따라 산토스와 2명의 병사들은 이전 기지에서 탈출할 때 부상을 입은 부상병들이었고, 건강한 병사는 2명뿐이었다.
만신창이의 탐사단을 데리고 바위를 어렵게 디뎌가며 1시간여를 내려온 후. 산토스가 손으로 목적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병사들의 반응은 안도의 한숨이 아닌 장탄식이었다. 짙은 모래폭풍 너머, 절벽 중간에 돌과 진흙을 섞어 쌓은 인공적인 벽이 보였다.
“저 벽 안쪽이 동굴입니다.”
맹렬한 바람에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산토스가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러야 했다. 그가 가리킨 동굴은 그나마 길 비슷하게 되어 있는 곳에서도 한참 벗어난 가파른 바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코끼리만한 바위부터 주먹만 한 돌멩이까지 비탈을 따라 온통 흩어져 있는 모양새가 딱 봐도 한숨이 먼저 나올 모양새였다.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200년쯤 전부터 한 100년간 지진이 계속 일어나 산사태로 이리 되었습니다. 타리프의 일지가 쓰여진 때와는 지형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저희처럼 여기 계속 있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동굴을 찾기도 힘들 겁니다.”
산토스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렐은 도리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냐, 차라리 다행이지. 교단 놈들도 저 위치를 못 찾을 테니까. 그런데 저 벽은 너무 티가 나니까 부수고 다시 쌓는 게 낫겠다.”
카렐이 큰 바위 하나를 붙들고 씩씩하게 앞장서서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바위와 돌덩이가 구르고, 큰 돌이 미끄러지며 위험천만한 광경을 연출했지만 카렐은 아랑곳없이 위만 쳐다보며 바위를 기어올랐다.
동굴까지의 비탈은 밑에서 보았을 때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막상 올라가려니 보통 거리가 아니었다. 니사와 살람은 녹초가 되어 한참을 뒤처졌고 카렐은 목을 다쳐 제일 힘들어하는 산토스의 짐을 한 팔에 대신 들어주고 그를 앞에서 끌어주었다.
“코메트들은 차도 없이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올라왔을까요? 아휴, 좀 천천히 가세요.”
한참 뒤처진 니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묻자 카렐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네들은 자네들처럼 많은 짐을 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행이 동굴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날이 저물어 하늘이 깜깜해지고 있었다. 카렐은 바위와 진흙을 개어 막아놓은 곳을 주먹으로 탁탁 쳐 보았다. 누군가 무척이나 급하게 막아놓고 갔는지, 무른 진흙으로 결착한 부분은 모래바람에 닳고 닳아 마구 부스러지고 사실상 바위만 위태롭게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괜히 걱정했는데. 굴착기 따위는 필요 없겠어.”
카렐은 뒤따라온 병사들에게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미리 가져온 큼직한 해머로 중간께의 바위를 힘껏 후려쳤다. 카렐의 괴력에 바위 하나가 뭉개지면서 그 위의 바위까지 한 번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망치질 단 한 번에 사람이 기어들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아직 기운 좋으십니다.”
세네피스를 바람에서 몸으로 감싸고 있던 산토스가 카렐에게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카렐은 해머를 몇 번 더 휘둘러 그 어색한 모양새의 진흙벽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진흙벽이 무너지고 드러난 동굴 입구는 키 작은 니사도 허리를 숙여야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낮았다. 카렐이 건강한 병사 둘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희 둘은 여기 입구에서 통신 대기하면서 무너진 돌 그럴싸하게 쌓고 있어. 혹시 남부 놈들이 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게 잘 꾸며 놔. 혹시 철성에서 급한 연락 들어오면 이걸로 알리고. 어차피 할룩스는 무용지물일 테니까.”
카렐은 이 안에서 쓰기 위해 가져온 유선 통신장비를 가리켰다. 보일 듯 말 듯 실처럼 가는 와이어로 연결된 선 꾸러미가 큼직한 송화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영상장치 2개 모두 켜라. 역사의 기록이니 놓치지 말고 모두 촬영해라. 가자.”
앞에서 랜턴을 켜든 카렐은 세네피스와 니사, 살람과, 나머지 병사들을 데리고 동굴 안에 들어섰다. 좁고 낮은 입구와는 달리 안쪽은 굉장히 넓었다. 웬만한 홀만 한 크기의 공간이 어두컴컴한 안쪽으로 일행들을 이끌었다. 산토스는 야광의 접착제 처리가 된 가는 통신 와이어를 풀어 바닥에 꾹꾹 눌러 붙이며 후미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처음 맞아주는 얼굴 치고는 그리 보기에 좋진 않네.”
카렐은 제일 먼저 보인 쇳덩이를 발로 툭 걷어찼다. 허벅지만한 녹슨 탱크 3개가 줄줄이 붙어있는 모양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니사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이게 뭔데요?”
“화염방사기.”
카렐은 손으로 툭툭 쳐도 부서질 만큼 고철덩이가 되어 있는 그 흉물을 툭 걷어차 옆으로 치워버렸다.
“교단이 가져갔던 쇠붙이는 고작 550년 만에 이 꼴이 되었는데 철성이 그 오랜 세월을 멀쩡히 버티고 있는 게 정말 대단하군.”
카렐은 뒤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덥석 쥔 니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잘 아는 니사는 이미 삭아버린 화염방사기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카렐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사람을 눈 뜨고는 못 보았을 세네피스도 이번만은 적당히 못 본 척 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이 흉물을 산 사람에게 썼을까요?”
카렐은 벌벌 떨며 묻는 니사의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사방이 막힌 이런 동굴에서, 그것도 노약자와 부상자, 아이뿐인 민간인을 대상으로 화염방사기를 들고 왔다는 건 완전히 미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짓이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굴 너머에서 당시의 비명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 같았다.
“몇 안 되는 귀환 생존자들이 환각제를 미네랄제로 속여서 먹였다고 사령관 테번을 고발했던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델루지 가에서 뒤로 손을 써서 논란이 커지는 걸 막았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게 사실이었는지도 모르지.”
“이번에 온 코런덤들도 화염방사기를 갖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하급 성직자인 살람의 말에 니사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카렐이 그의 겨드랑이를 잡아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누가 진짜 뜨거운 불맛을 보게 될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걸세.”
몇 걸음 더 들어가자 양쪽으로 갈라지는 동굴이 나타났다. 타리프의 일지에 있던 대로 여기서 갈라진 2대의 동굴이 제일 안쪽의 홀로 연결되는 모양이었다.
“니사 자넨 별 수 없이 나와 같이 가야겠군. 산토스하고 살람 자네들은 황태후를 모시고 왼쪽 길로 나아가게나. 가다가 보이는 유골들을 기록에 남기고 큰 뼈들을 채취해. 중요한 유품도 있으면 남기지 말고 가져와라. 일지에 따르면 마지막 방에서 나와 만나게 될 거야. 혹시 길을 잃어도 통신선이 길잡이가 될 테니 너무 당황하지 말고.”
세네피스와 갈라진 카렐은 니사와 통신 케이블을 쥔 병사 한 명을 데리고 오른쪽 동굴을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몇 발짝 들어가지 않아 타리프의 일지에 언급된 대로 푸른 빛이 물결치는 모습이 동굴 벽을 따라 그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니사와 병사는 주변 공기가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오싹함에 떨기 시작했다.
“폐하께는 뭐가 보이시나 보죠?”
“응, 아주 아름답네.”
카렐이 허리를 곧게 펴고 동굴을 죽 둘러보았다. 푸른 광채는 이곳에서 있었던 끔찍한 참사를 비웃듯 여전히 아름다웠다. 카렐은 마치 물결처럼 흐르는 광채를 따라 반쯤 넋을 놓고 걸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영상녹화장치에 나오는 화면은 보통 사람의 시야와 마찬가지로 깜깜한 동굴 뒤로 그저 조명 불빛만 비추고 있었다. 동굴은 구불구불했지만 사람 한 명 걷기는 충분했고, 바깥의 맹렬한 바람과 격리된 공기는 점점 따뜻해졌다.
동굴은 계속 안쪽으로 이어졌지만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바람은 입구가 아니고 안쪽 어딘가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렐이 벽을 여기저기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그때도 이랬다면 카히나가 정말 좋은 곳을 골랐었나 봐. 정말 여기 살아도 될 것 같아. ……흐읍.”
쾌적함에 취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카렐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자궁 속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두 팔을 가슴과 얼굴에 모은 바싹 마른 유해가 이 일행을 차가운 현실로, 소름끼치는 과거로 돌려놓았다.
“못 먹어서 이렇게 작은 건 아니겠지?”
카렐은 고작해야 마리안 정도 크기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니사는 미라가 되어 말라붙은 시체의 중간중간 드러나 있는 뼈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많아야 10살에서 12살 내외의 소년 같습니다. ……소사(燒死)한 게 맞습니다.”
카렐은 세상 빛도 오래 보지 못하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의 마지막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표본통을 꺼낸 니사는 죽은 이의 골수가 담겨있었을 골반과 척추 자리에 메스를 대려다 말고 멈칫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이 그의 어깨를 살짝 짚어주었다.
“여기가 조용해지는 대로 내 이들의 유해를 모아 성대히 장례를 치러 줄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계속하게.”
양심의 가책에 차마 메스를 대지 못했던 니사는 마치 의학도 실습생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못해 척추뼈와 골반을 빼냈다.
“바람이 여기로 나가나보다.”
카렐은 죽은 소년이 머물던 듯한 굴의 작은 틈새에 손을 가져갔다. 삭아버린 침상과 소지품 자루가 있는 손바닥만한 공간이 벽 한쪽에 나 있고 바람은 그곳을 통해 동굴 벽 안쪽의 미세한 틈새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어디서 ‘들어오는’ 걸까요?”
니사의 물음에 카렐은 어깨만 으쓱했다. 일단 뼈를 찾아낸 일행은 쓰러진 소년에게 짧은 경의를 표하고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 중간 시체는 계속 나타났다. 일부는 백골만 남아있고, 일부는 미라가 되어 형태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지만 대체로 청소년 혹은 청장년의 젊고 건강했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던 곳 주변에 쓰러져 있었다. 시체 주변에는 마치 독방처럼 꾸며진 공간 안에 임시로 만든 침상, 소지품이 남아 이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깨진 항아리, 녹슨 숟가락, 거의 가루가 된 담요, 부서진 침상, 솥과 화로가 보였고 항아리 안에선 탄화된 곡물도 발견되었다.
니사는 불편함을 참아가며 그들에게서 뼈를 채취했고, 카렐은 화마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노트와 책을 찾아내어 가방에 챙겼다.
한 번 갈라진 동굴은 중간중간 독방을 빼면 따로 끊기거나 갈라진 곳 없이 한참을 계속 이어졌다. 니사는 50구 가까운 시신을 찾아내 뼈를 챙겼고, 나중엔 표본이 너무 많아 카렐이 자루를 대신 들어줘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구불구불 좁은 굴이 끝나고 갑자기 넓은 공간이 확 드러났다.
“흐음.”
카렐의 걸음은 잠시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탁 트인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랜턴을 들이댔던 니사는 충격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맙소사, 신이시여.”
니사가 부르르 떨며 가슴에 손을 모았다. 둥그스름한 홀 모양의 공간 안쪽 구석에는 산더미 같은 유골과 유해가 누군가 일부러 빚어놓은 것처럼 한 덩이로 뒤엉켜 있었다.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 몸통과 손발이 보였지만 실이 꼬이듯 뒤엉키고 부서져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체 더미에 비틀거리며 다가간 카렐은 발밑에 걸린 주먹만 한 머리를 집었다. 시체 무더기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두개골은 듬성듬성 갈라져 제대로 맞춰지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갓난아기였구나.”
카렐은 너무도 작고 여린 이 아기의 머리를 조심스레 바닥에 다시 내려놓았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받은 그였지만 이번 시체무더기 앞에선 감정을 자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곳의 시체 무더기는 지금까지 오는 동안 만난 젊고 건강한 시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언뜻 보아도 너무 작은 아기이거나, 혹은 부러진 뼈 사이로 구멍이 숭숭 보일 만큼 늙은이들의 유골이었다. 카렐은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선 채 먼 조상이 남긴 이 소름끼치는 조형물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분명 인간이 아니고 악마의 짓이라고요!”
충격을 받은 니사가 울부짖었다.
“악마 같은 인간의 짓일 뿐이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니사 대신 카렐이 영상장치를 들고 이 소름끼치는 광경을 화면에 담고는 한 덩이로 엉켜 있는 시체들을 손으로 조심조심 떼어냈다. 그때, 이 홀의 맞은편에 나 있는 다른 출구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세네피스와 산토스를 앞세운 또 다른 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동굴로 들어온 그들 역시 산더미 같은 시체더미에 놀라 자리에 멈추었다.
카렐이 머리가 없는 아기의 시체를 두 팔에 조심스레 안아 방금 전의 작은 머리와 함께 두며 물었다.
“그쪽엔 시체가 얼마나 있던가?”
“……53구 찾았습니다.”
멍하니 서 있던 살람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리가 45구 찾았으니까 여기까지 합치면 대충 2백 구 정도 되겠군.”
살람이 카렐을 도와 시체를 떼어내려 했지만 뒤엉킨 채로 불에 탄 시체더미는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부스러질 만큼 약했다.
“별 수 없다. 이대로라도 채취해라.”
주저앉아 울고 있던 니사도 엉금엉금 일어나 시체더미에서 뼈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눈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온 임무까지 잊을 수는 없었다. 일행은 100구에 달하는 소름끼치는 시체들을 최대한 분류해 이 넓은 홀에 줄을 맞춰 늘어놓았다.
“내 조상께서도 어쩌면 이곳에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었을지도 모르지.”
카렐은 말없이 시체들을 정리하고 있는 세네피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충격을 받고 참담한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불탄 시체 앞에 꿇어앉아 있던 세네피스가 눈물 젖은 얼굴로 카렐을 올려보았다.
“이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태워 죽인 자들에게 바이러스를 건네주는 것을 과연 기뻐할까요?”
“자신들의 후손이 결국 그들을 지배했다는 걸 더 기뻐할 겁니다.”
세네피스의 입가에 비로소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눈물을 멈추고 훨씬 진지하게 시신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행이 100구에 가까운 시신들을 모두 분류했을 무렵,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연결된 송화기가 빛을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채취한 뼈를 분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렐이 짜증스레 물었다. 잠시 후, 지독한 소음에 뒤섞인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여기에 폭풍이 보통이 아닙니다! 도저히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철성에선 별 연락 없나?”
“그쪽도 날도 어둡고 폭풍이 심해서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철성 내로 대피한 모양입니다. 레이더에 보니 분지 일대가 모두 폭풍으로 말이 아닙니다.”
카렐이 일행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건물에 들어앉은 우리보다는 부실한 막사에 사는 적이 더 난리가 났겠군. 돌은 다 쌓았고?”
“사람 드나들 구멍만 남겨놨습니다.”
“수고했다. 굴 입구로 들어와서 쉬고 있어라. 이쪽도 거의 마무리되어간다.”
카렐도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람이 시계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미 밤 시간인데 폭풍까지 불면 돌아가기 힘듭니다. 폐하께서야 잘 보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앞의 돌밭을 내려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밤은 여기서 머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낸 살람은 슬쩍 세네피스의 눈치를 보았다. 조금 전 둘만의 시간을 깨어놓고 한바탕 눈칫밥을 먹었던 그는 이번엔 그가 웃어주지 않을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세네피스는 살람이 내준 ‘선물’을 기꺼이 받았다.
“그게 낫겠습니다. 황상께서도 종일 무리하셨는데 여기서 쉬고 돌아가시는 게 낫겠습니다.”
살람이 얼른 다시 거들었다.
“아까 왼쪽 굴로 들어오다가 봤는데 아늑한 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부근엔 시체도 없고 제법 큰 옛날 침대도 남아있더군요. 정체 모를 자료나 이상한 유물들이 많은 걸 봐서 사제 일족이 머물던 방 같습니다. 두 분께선 거기서 주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흰 여기에 있겠습니다.”
“아, 아니 이 무서운 시체구덩이에…….”
듬직한 황제도 없이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 한다는 말에 겁 많은 니사가 펄쩍 뛰려 했지만 아랫사람인 살람과 산토스의 눈짓에 하는 수 없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래……뭐, 시체가 사람 잡아먹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살람과 죽이 잘 맞는 산토스가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알았다, 내일 아침에 보자.”
카렐은 교단의 마구스 전통대로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세네피스와 가깝게 하려는 교단 성직자 살람의 속내를 읽었지만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네피스의 팔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세네피스가 그런 살람의 뜻까지 아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무런 군말 없이 황제를 따라 시체로 가득한 공간을 나섰다. 카렐은 그가 연신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못 본 척했다.
왼쪽 굴도 카렐이 들어온 오른쪽 굴과 마찬가지로 좁고 구불구불했다. 산토스를 따라 그 어두운 길을 따라 한참을 걷던 카렐이 옆을 문득 돌아보았다.
“물이다. 바람이 여기로 들어오고 있구나. 이 구멍이 바깥 어딘가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 물이요?”
산토스도 카렐을 따라 옆을 돌아보았다. 이 굴을 도는 신선한 공기는 굴 옆으로 갈라져 나가는 작은 바위틈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바위틈 굴엔 발목 정도 깊이의 물이 고여 있었다. 산토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물이 아주 맑습니다. 타리프의 일지엔 여기 물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었지 않습니까? 이런 높은 곳에 물이 고이다니…….”
“어쩌면 550년 전엔 없던 물이 이젠 고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산토스가 놀란 얼굴로 카렐을 휙 돌아보았다. 카렐은 그가 왜 이리 놀라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군데군데 ‘아기 바다’가 생겨나고 있는 중위도에 이어 말라붙은 고위도 고원의 땅 밑에도 그간 내린 부슬비가 조금씩 쌓여 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의미였다.
카렐이 허리를 굽혀 고향의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맑았다.
“……이 행성의 부활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것 같구나.”
“네포프 말이 큰 비 한 번만 오면 그때부터 연쇄반응으로 이곳이 완전히 변할 것이라 했습니다. 큰 비 딱 한 번만 오면 말입니다.”
산토스는 이곳에 고인 물을 수통에 담아 황제에게 올렸다. 물을 받아든 카렐은 보란 듯 몇 모금을 벌컥 들이키고는 뒤따라오는 세네피스에게도 넘겨주었다.
작은 연못 하나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카렐은 다시 산토스를 따라 걸었다. 세네피스는 약간 뒤처져서 따라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카렐은 조용히 앞장서서 나가기만 했다.
산토스가 안내한 굴은 살람의 말대로 작고 아늑했다. 입구엔 누군가 굴 입구 모양에 맞춰 짠 합성수지제 문이 끼워져 있고 이곳 사람들이 쓰던 문자가 여전히 새겨져 있었다.
[사제의 방 - 외부인 출입 금지]
카렐은 그동안 공부한 이들의 문자로 서툴게 읽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법 큰 침대와 책상이 있고, 책장은 텅 비어있었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합성수지로 만든 가구는 썩지도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다. 카히나와 파란기스 같은 사제들이 미리 태워버리지 않았다면 이곳을 약탈한 코메트들이 모두 거둬간 게 분명했다. 방에는 그들이 쓰던 세숫대야, 깨진 토기와 탄화된 곡물이 가득 든 자루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한쪽엔 녹슬어 쓸 수 없는 지렛대 저울이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이곳에서 식량을 배분했던 듯했다.
카렐은 이곳까지 따라온 산토스를 돌아보았다.
“내일 7시에 깨워 다오. 내일 중으로 남부 반역도들이 도착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소인 그럼 이만.”
눈치를 본 산토스가 재빨리 자리를 비워주었다. 550년 전 그랬듯, 이곳엔 그레이오팔의 사제 혈통 두 명만이 남았다.
“제가 카히나의 사제가 된 기분이군요.”
산토스를 돌려보낸 카렐은 껍데기가 모두 삭아버린 매트리스 위에 철성에서 가져온 깨끗한 군용 침낭을 펼쳐 깔며 억지로 웃었다.
“생전 처음 와 본 곳인데 정말 고향에 온 기분이 드는 게 신기하죠?”
카렐은 여기까지 강행군을 하느라 녹초가 다 된 세네피스의 망토를 풀어주고 침낭을 깐 매트리스 위에 앉혀주었다.
“제 생각에 말입니다.”
카렐은 이 좁고 아늑한 동굴 안을 둘러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야푸르 대신관이 지하 카타콤베와 자신이 만든 공간들에 모두 검은 재를 칠한 게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카렐은 눈이 동그래진 세네피스를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이상하게 이 파란 빛을 볼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정말로 고향에 온 것 같죠. 아마 야푸르 대신관도 연인 세네피스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죽은 후였죠.”
세네피스가 침대 안쪽으로 바싹 들어가 앉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런 세네피스를 향해 한 번 짧게 웃어 보인 카렐은 주머니에서 갑자기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서 숨 쉬고 있죠.”
카렐의 큰 손 안에서 반짝이는 파란 빛에 세네피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가져온 건 몇 달 전, 카렐이 아라무트의 암살교단 궁전에서도 보여주었던 ‘비나’였다. 야푸르가 자신의 연인이며 세네피스의 어머니, 프사이 세네피스에게 선물하려 만든 보물이었다.
세네피스가 카렐을 올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씌워주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시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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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는 뒷부분을 위한 마지막 떡밥(?)을 뿌리는 편이고요, 사정상 약간의 검열(?)이 있었는데도 자르기가 애매해 굉장히 길어졌네요. ^^;;;
다음 회부터는 무대를 옮겨 드디어 양측 원정군 출동하면서,....진짜 신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미워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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