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72화 (1,067/1,132)

< -- 1072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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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하임달 9번 행성으로 떠난 후, 하임달 5번에 남아있던 케스난은 비엔의 남부연합군을 하임달 9번으로 이동시키는 일에 자신의 수송선 12척을 기꺼이 내 주었다. 그는 수송선과 함께 보낸 세작을 통해 남부연합군의 이동 상황을 보고받아 그대로 황실에 보내주었다. 보고에 따르면, 남부연합군은 이제 이틀 후면 직통 워프루트를 완성해 하임달 9번 행성에 착륙할 참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커지면서, 그는 자신에 대한 감시의 눈길도 점점 삼엄해짐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가 우리 부탁대로 네포프 칼리를 찾아내오지는 못했지만.”

케스난은 이전처럼 얼굴에 자루가 씌워진 채 크테시폰에 다시 끌려와 있었다. 이곳 특유의 냄새도, 하다못해 발끝에 닿는 느낌도 아주 익숙했다. 며칠 전, 황제령을 탈출했다는 크테시폰이 이젠 하임달 5번에서 9번 행성에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신관 이디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쨌든 네포프 칼리 그자를 찾기는 했다. 그동안 고생한 건 고맙다고 해야겠지.”

케스난은 네코 마구스를 시켜 자신의 정보를 훔쳐가 네포프를 찾아내 놓고서도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저 여자에게 화가 확 치밀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어쨌든 ‘공식적으론’ 저들은 자신의 수하를 죽이고 정보를 빼앗아간 불한당들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주 민감하고 중요한 임무를 하나 주려 한다.”

이디나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케스난은 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 건지 아직 혼돈스러웠지만 ‘민감하고 중요한 임무’라는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이디나가 말을 이었다.

“알지 모르겠지만, 내 궁전은 이동이 가능한 함선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 큰 거사를 앞두고 중요한 기관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워프루트 비행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강력한 엔진을 지닌 초대형 수송선 하나가 필요하게 되었지.”

케스난은 이들이 황제령 수에니에서 도망칠 때 크테시폰에 큰 손상을 입었음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머리만 조아렸다. 어떤 임무인지를 직감한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려왔다.

“소인 장사꾼이니 돈만 충분히 주신다면 무슨 임무는 못 하겠나이까?”

“10만 급이 넘는 수송선을 구할 수 있느냐?”

케스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신관이 광산 매니저 출신이니 10만 급이 넘는 수송선이 제국에 단 한 척뿐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바로 북부 카파키 가가 가지고 있는 수송선 [일란 호]였다. 그렇다면 이디나가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케스난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내 크테시폰은 어마어마하게 크지. 블록을 다 합치면 말할 것도 없고.”

아니나 다를까, 이디나가 자신의 앞을 가린 베일을 치우게 하고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왔다. 케스난은 바싹 다가온 이디나의 체취까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워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수송선이 필요할 것 같다. 할 수 있느냐?”

이디나의 물음에 케스난은 잠시 망설였다. 카파키 가 소유의 수송선이라면 아마도 황제의 이번 ‘두 번째 하임달 결전’에도 핵심 전력으로 동원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수송선을 동원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수송선으로 땜질하는 한이 있어도 크테시폰을 좌지우지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며칠 후입니까?”

“이틀 주겠다. 이곳 시간으로 모레 저녁 8시에 출발한다.”

케스난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 시간이면 남부연합군이 비엔에서 출발하는 거의 비슷한 시각이고, 황제의 군대가 움직일 때였다.

“일란 호처럼 큰 함선은 대체선원을 투입하기 어렵습니다. 일란 호 정도면 선원은 50명 가까이 될 겁니다. 현 승무원이 운항한다는 조건으로 협상해 보겠나이다. 오늘 저녁까지 시간을 주십시오.”

“그 정도는 기다리지.”

이디나에게서 대답이 생각 외로 빨리 나오자 케스난은 좀 더 큰 걸 요구하기로 했다.

“고장이 난 함선을 결합해 운행하려면 대강의 구조와 총 중량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크테시폰의 도면 정도는 넘겨주시겠지요?”

말을 해 놓고도 케스난은 속으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투자’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큰 정보 중 하나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던 이디나가 머리 위에서 낮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요하다면.”

일이 잘 풀려가는 듯 싶자 바닥에 엎드린 케스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의 쾌재는 길지 않았다.

“그럼 나도 조건이 있다.”

이디나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케스난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이 닿자 케스난이 지레 움찔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공포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허리를 굽혀 케스난의 귀에 입가를 댄 이디나가 낮게 속삭였다.

“네 아들 이름이 발렌틴이랬지?”

순간 케스난의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그는 대신관의 얼굴을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을 잊고 그를 힐끔 돌아보고 말았다. 가늘고 작은 눈꼬리, 움푹한 뺨에 미인과는 거리가 먼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케스난은 그의 풍성한 로브 아래, 허리띠에서 이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챘다. 이디나가 그에게 살짝 앞니를 드러냈다.

“너와 네 어린 아들이 나와 함께 가야 한다.”

“제……아들까지 말입니까?”

“설마 내가, 아니, 나와 내 소중한 딸이 다른 자들에게 목숨을 맡기고 속 편하게 가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같은 엄마로서의’ 눈길로 이디나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케스난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원하신다면.”

검은 철성 옥상에 선 카렐은 몇 십분 째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전신을 통해 전해진 남부제후군의 출정식 소식에 일행들 모두가 잔뜩 긴장한 분위기에서 황제의 입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로서도 부담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35만의 대군과 2만이 넘는 교단의 최정예부대가 이곳에 들이닥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이 이곳까지 나와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춥습니다. 왜 올라오셨습니까?”

카렐은 여전히 망원경에 눈을 댄 채 톤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옥상에 막 올라온 세네피스는 뒤에도 눈이 달린 듯 바로 묻는 황제에게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부 놈들이 곧 출정식을 한다죠?”

“몇 시간 후면 나라가 둘로 쪼개지겠죠.”

카렐이 마치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세네피스는 그런 황제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치 바람막이처럼 든든한 그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섰다. 신기하게도 이곳과 황제령과는 해가 뜨고 지는 하루 길이까지 황제령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시차에 관해 따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 내로 남부제후군이 들이닥치겠군요. 비엔 공략군도 작전 준비 시작했겠죠?”

“제네르 경이 잘 할 겁니다.”

카렐은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며 온통 어둠에 잠긴 제플린 산을 내려다보았다. 송풍로를 뚫기 위해 광분하던 교단의 공병들은 지난번 공격으로 굴착장비를 거의 잃고 산사태까지 맞으면서 사실상 공사를 중단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가늘고 약한 입자들이 산사태로 한 번 헐거워지면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산사면 전체가 우르르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하지만 송풍로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황제와는 달리, 세네피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지난밤 앓으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 말고도 십여 명이 더 들었습니다.”

카렐은 별 대답이 없었다. 점점 약해지는 그의 몸은 그의 강인한 의지까지 조금씩 깎아먹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남부의 출정을 앞두고 황제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말라 박사가 불안에 떨며 밤새 잠도 못 잤습니다. 장기의 상태만 봐선 오르마즈 경의 마지막 날과 거의 비슷한 상태시라고요.”

“전 그 양반보다 강합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덕분에 지금까지 수십 년을 버티셨죠.”

카렐은 세네피스의 두 손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슬며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카렐이 선수를 쳤다.

“어머니 몸 안에서 사제의 키를 뺀다 해도 아직 제 잔딕을 빼는 수술법은 구체적으로…….”

“주페가 모는 불릿이 여기로 오고 있다죠?”

말문이 막힌 카렐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나흘 전, 페로에게서 전달받은 그 내용은 세네피스의 귀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며 아랫사람들에게 이미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페로가 교단에서 빼앗은 아트위야의 초록색 불릿을 단 9일 만에 수리한 주페는 페로의 가디언들과 몇 가지 중요한 보급품을 싣고 교단 프리깃을 피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이미 출발한 400명의 시라즈 여단은 남부보다 하루나 이틀쯤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다.

“내일 오후쯤 오겠죠.”

“이전에 타바리스가 죄수들을 상대로 설치와 제거를 했던 수술기록을 구했다고 들었습니다.”

카렐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에 주페가 가져오는 것 중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물건은 잔딕의 수술기록이었다. 모래폭풍이 가시기 전까지는 주페가 이곳에 직접 착륙할 수가 없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기존의 통신장비로 내용을 스캔해서 받아볼 수 있게 될 터였다.

본토에선 주페가 그걸 하루라도 빨리 들고 오기 위해 9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작업을 했다지만 정작 카렐은 그걸 지금 받아야 하는 건지 마음이 불편했다. 안 그래도 척추에 박힌 사제의 키를 당장이라도 꺼내겠다는 세네피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카렐에겐 수술 자료를 여기까지 보내겠다는 페로가 영 반갑지를 않았다.

그는 황궁에 돌아가면 그때 좋은 시설과 의료진을 데리고 안전하게 빼겠다며 세네피스를 설득하는 중이지만 하루하루 상태가 악화되어가는 황제를 옆에서 지켜보는 세네피스는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빼겠다며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 카렐은 ‘그 이상’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보안국장에게서 들으셨습니까?”

카렐의 가슴을 짚고 있던 세네피스의 두 손은 그가 살짝 화가 난 것을 바로 읽어냈다. 세네피스가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몸을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주려 했다.

“보안국장 통해서 안 건 아닙니다. 그 친구 오해하지 마시고요.”

세네피스가 둘러댔지만 카렐에게도 대충 상황은 짐작이 되었다. 수술법까지 찾았다면 ―안전만 빼면―수술을 위한 다른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이니 세네피스가 당장 빼라며 목소리를 높일 일만 남아있었다. 게다가 황제 자신만 빼면 아랫사람들 모두가 ‘모험을 감수하는 게 낫다’며 황제를 설득하려는 분위기였다. 사에나 혹은 니사나 코리온 중 하나가 일부러 세네피스에게 수술법 발견 사실을 흘려 카렐을 더 압박하려는 게 분명했다.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하려 맘먹고 뒤로 휙 돌아섰다. 하지만 세네피스가 그보다 더 빨랐다.

“전 그저 황상께서…….”

세네피스는 그가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와락 안으며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선제공격에 말문이 막혀버린 카렐은 멍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세네피스는 꺼칠해진 그의 턱에 촉촉한 입술을 댄 채 카렐을 뚫어지게 올려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카렐의 가슴을 짚고 있었다.

“굳이 말 안 해도 아시죠?”

세네피스의 가는 속삭임에 카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이곳에서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이 되겠죠?”

“아마도요.”

카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면 제발 오늘 뺄 수 있게 해 주세요.”

세네피스는 카렐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옷 안쪽 척추를 만지게 했다.

“정신없어지기 전에 이 흉물을 빼내고 오늘밤엔 홀가분하게 황상 품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잠깐이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한다면 그렇겠죠. 실패하면…….”

세네피스는 말꼬리를 흐리는 카렐의 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카렐은 그의 손을 치워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 결정은 변함없습니다. 삼각루트만 완성되면 됩니다. 거기만 완성되고 여길 지킬 동안만 버티면 사제의 키를 안전하게 빼낼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은 버틸 수 있습니다.”

세네피스는 카렐의 말이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도 황제의 몸은 이제 매일 매일이 달리 보일 정도로 여위어가고 있었다. 바로 지난밤, 세네피스는 카렐이 혼자서 몰래 우는 것을 느끼기도 했었다.

“정말로요?”

세네피스는 카렐의 어깨를 짚고 살며시 발돋움을 해 카렐의 입술을 다시 더듬었다.

둘만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곳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옥상 문이 홱 열리더니 지친 표정의 살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여기 계시다기에……, 흐읍.”

둘이 딱 붙어있는 모습을 본 살람은 얼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교단 성직자인 그는 놀라기는 고사하고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이 ‘전통’을 받들고 있다는 데 감동한 성직자의 기쁨과는 별개로, 짜릿한 시간을 훼방당한 세네피스는 일순간 폭발 직전이 되었다.

카렐이 세네피스를 진정시키며 얼른 앞을 막아섰다.

“괜찮다. 무슨 일이냐?”

“송구하옵니다. 소인 그간 카히나의 시신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사오나 아직 찾지 못하여…….”

“알고 있다.”

카렐이 힘없이 대답했다. 오염된 곡물을 먹고 공생 바이러스가 죽어 수명개조가 깨진 제국민들의 숫자가 이미 백만을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 제국민들에게 새로 이식할 [45호 바이러스]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바이러스를 찾아낼 길은 이곳의 생존자 유해,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 처리되어 묻힌’ 카히나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만 타리프가 앞마당에 묻었다는 그의 유해는 도착한지 열흘이 넘어가고 참호를 파느라 철성 앞마당을 모조리 다 파헤쳐놓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외람되오나……적이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차선책으로 산 서쪽에 있는 동굴이라도 한 번 답사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카렐의 시선이 산의 서쪽 비탈 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8부 능선의 바위절벽 아래엔 코메트가 마지막 생존자 수백을 불태워 죽인 동굴이 있었다. 원래 처음부터 갔었어야 하지만 이전에 온 오르마즈가 거대한 돌로 틀어막아놓은 상황에서 그것들을 다시 치우고 입구를 뚫는 데까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할 여유가 없었다.

살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생 바이러스는 아마도 R 사제들이나 그 보인자에게만 공생했던 것 같은데 일지에서 보셨겠지만 사제들은 이곳에서 카히나와 함께 다 죽었습니다. 당시에 분노한 코메트들이 시체까지 모조리 태워버렸고요.”

“동굴에서 죽은 이들 중에 R을 가진 보인자가 몇이라도 있었기를 바라야지. 그나저나 동굴의 시신은 보존처리도 되지 않았을 텐데 RNA를 찾아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바이러스의 RNA는 DNA보다 불안정하지 않던가?”

“물론 온전한 RNA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시신이나 뼈까지 물리적으로 훼손할 동물이나 미생물이 거의 없으니 RNA를 조각으로라도 발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대퇴골이나 골반 같은 큰 뼈가 그나마 유리하겠죠. 많은 조각을 발견해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시도해 보려 합니다.”

“그 동굴이라면 결국 내가 가야 한다는 뜻이군.”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세네피스가 풀어헤쳐놓은 가슴의 옷자락과 망토를 다시 여미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당장 다녀와야겠다.”

살람이 평소보다 훨씬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폭풍도 평소보다 훨씬 강하고 조짐이 좀 안 좋습니다만……. 이맘때 종종 강한 폭풍이 한나절 가까이 불곤 합니다. 잘못하면 바깥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일 수도 있습니다.”

“묶여도 지금 묶이는 게 나아. 남부가 도착한 후보다는.”

카렐은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옥상에서 다시 내려갔다.

카렐을 따라 시무룩한 얼굴로 등짝만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가던 세네피스는 통제실에서 막 나오는 코리온과 딱 마주쳤다. 동굴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카렐을 힐끔 쳐다보았던 세네피스는 갑자기 코리온에게 슬쩍 다가섰다. 이전엔 서로 눈을 맞추지도,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던 코리온은 갑자기 불쑥 다가오는 황태후의 모습에 지레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코리온과 마주선 세네피스는 카렐이 계단을 내려가 니사와 살람의 간이 의무실이 있는 2층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재차 확인하고는 코리온에게 거의 가슴이 닿을 듯 바싹 다가섰다.

“내 부탁 있소, 학장.”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세네피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니사 라말라 박사나 저 의사는 아무리 윽박질러도 내 말보다는 황제의 말을 들을 것 같습니다.”

세네피스의 의도를 눈치챈 코리온도 덩달아 카렐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제게 부탁하시는 이유는요?”

세네피스는 차마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지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하니까.”

코리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곧 사제의 키가 자리하고 있을 세네피스의 허리께로 살짝 움직였다.

“제발 부탁이요. 저들을 빼면 수술칼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대제학님의 소원대로 몰래 그걸 꺼내드리다가 제가 못된 맘을 먹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함부로 절 믿으십니까?”

세네피스가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가를 코리온에게 바싹 가져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부러 그런 짓을 할 정도의 악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오, 학장.”

세네피스는 코리온의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허리 뒤에 가져갔다.

“황상께선 지금 서쪽의 동굴에 유골을 찾으러 가실 테고, 몇 시간은 걸릴 거요. 라말라 박사와 살람도 데려갈 테고 의무실은 그대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 자, 황상을 살릴지 말지 결정하시오.”

“황상의 분노는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혼날 대상이 둘이면 그까짓 거 감당 못 하겠소? 학장도 아마…….”

지금껏 항상 원수 같았던 둘이 서로의 눈을 보며 처음으로 엷게 눈웃음을 보였다.

그때, 임시 의무실에 들어갔던 카렐이 굳은 얼굴로 나와 망토와 옷자락을 여미었다. 황제를 따라 동굴에 갈 니사와 살람도 시료와 장비가 가득 든 몸뚱이만한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뒤뚱거리며 의무실을 나섰다. 조그만 체구의 니사에 비하면 체구가 큰 살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카렐은 코리온에게서 황급히 뒤돌아서는 세네피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산토스 상등병! 서쪽 동굴에 간다. 병사 4명만 데려가겠다!”

카렐은 이곳 지리에 익숙한 산토스를 불러들였다. 옛 기지에서 목 뒤에 볼트를 맞아 크게 다쳤던 산토스는 아직 몸이 온전치 못해 힘든 작업 대신 운전이나 잡일을 하는 것으로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머물지도 모르니 필요한 장비와 침구도 챙겨라.”

“알겠습니다! 짐 싸서 되돌아오겠습니다!”

산토스는 황제를 따라 나가는 임무에 잔뜩 신이 나서 뒤돌아섰다. 카렐이 손을 내밀어 그를 다시 불렀다.

“예?”

눈이 휘둥그레진 산토스에게 카렐이 작은 소리로 지시했다.

“2명은 앞가림은 하지만 힘든 작업이 불가능한 부상자들 중에서 골라라. 4명이 5일 이상 버틸 수 있는 물과 식량, 보급품을 따로 지참해라.”

“예에?”

황제의 엉뚱한 명령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산토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어져갔다.

“가디언들은 안 데려가게?”

황금탑에 기대어 쿨쿨 자고 있던 네피가 카렐의 고함에 놀라 배시시 눈을 뜨고 물었다.

“동굴만 잠깐 둘러보고 올 거야. 언제 적이 올지 모르는데 중요한 가디언들을 데려갈 수야 없지. 혹시라도 이상한 조짐 있으면 이걸로 알리는 거 잊지 말고.”

카렐은 이곳에서 비상 연락용으로 개조한 할룩스를 흔들어보였다. 꼭대기 부근은 검은 재의 폭풍이 워낙 강력해 근거리 통신도 먹통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코리온이 며칠에 걸쳐 이곳에서 통하는 주파수 대역을 찾아내어 일행의 군용 할룩스에 몇 가지 코드를 전달할 수 있도록 개조를 해 놓았다.

“10분이면 뛰어올 수 있다니까.”

“그럴 몸 상태가 되긴 하는 거야?”

큰 소리로 물었던 네피는 카렐에게 다가오는 세네피스에 놀라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렐은 자신의 망토자락을 여며주려는 세네피스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동굴에 저와 함께 가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카렐이 ‘함께 가자’면 좋아 펄쩍 뛰었던 세네피스는 카렐의 느닷없는 제안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예, 에? 저까지요?”

“타리프의 일지에 따르면 그 동굴 안은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처럼 검은 재가 발라져서 일반인은 앞을 보기 어렵답니다. 그레이오팔이 들어가야 구석구석 유골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철성에 그레이오팔이 하나라도 남아있어야 혹시 모를 적의 침입에…….”

당황한 세네피스는 어떡해서든 안 나가려 기를 쓰고 변명을 둘러댔지만 카렐도 겉으로는 실실 웃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주변에 인계철선도 다 설치가 끝나서 이젠 웬만한 침입은 다 집어낼 수 있습니다. 동굴에서 두 팀으로 나뉘어서 최대한 빨리 탐색하고 돌아오는 편이 낫습니다.”

세네피스는 자신의 속셈을 카렐이 읽어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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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무트에서도 그랬듯.....오르마즈는 세네피스를 지키지 못할 바엔 차라리 카렐 네가 죽으라는....무서운 유지를 남겨놓았습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으시면 밉심다~~~(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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