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1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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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포프의 시체를 안고 검은 철성으로 돌아온 카렐은 황금탑 앞에서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세네피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다리에 석궁을 맞아 절룩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경악을 하며 얼른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다행히 니사가 응급처치는 했지만 그의 다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황제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던 세네피스는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웬 남자 시체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 죽은 후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게……누굽니까?”
낯선 얼굴에 당황한 세네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카렐이 망토를 벗어 그의 가슴 위에 덮어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의 감방에 다녀갔던 그 사람입니다.”
당황한 세네피스가 네포프의 얼굴을 그제야 유심히 살폈다. 거의 완벽하게 된 성형수술 덕분에 그에게 남은 옛 흔적은 고운 갈색 머리와 잘생긴 이목구비뿐이었다.
“절 살리고 죽었습니다. ……절 살리고요.”
카렐은 눕혀놓은 네포프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사제의 키는……요?”
세네피스가 마치 죄인처럼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렐은 대답 대신 세네피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네피스에겐 네포프도, 다른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저 황제를 살릴 수 있는 사제의 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카렐의 침묵과 시선이 무얼 뜻하는지를 결국 깨달은 세네피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 정말로……정말로…….”
세네피스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카렐은 세네피스가 이 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지금 보안국 요원들이 콜 수용소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가며 찾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나올 겁니다.”
카렐은 안 그래도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네피스를 몰아붙이는 대신 네포프의 시체를 다시 양 팔에 안아들고 철성의 정문 쪽으로 절룩절룩 걸었다. 함께 돌아온 가디언들과 분견대원들도 침울한 표정으로 황제의 뒤를 따랐다.
“철성 안보다는 추운 바깥에 빨리 가매장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최대한 온전한 모습으로 그 양반 곁에 돌려보내 줘야죠.”
일행은 이미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진 철성 바깥으로 나섰다. 철성으로 올라오는 언덕 곳곳엔 지난 십여 일간 새로 판 참호가 군데군데 입을 벌리고 있고, 철조망과 철선들, 기지에서 뜯어온 각종 감지기들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가 낫겠다.”
병사들은 설사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누군가 발을 디딜 일이 없을 외진 화단을 찍어 파기 시작했다.
꽁꽁 언 땅을 힘겹게 깨고 구덩이 파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렐은 세네피스가 울먹이며 언덕 아래로 혼자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힐끔 돌아보았다.
“모셔올까요?”
세네피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당황한 사에나가 물었지만 카렐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에겐 대낮처럼 잘 보인다. 그냥 머리 식히시게 놔둬.”
그는 세네피스가 감옥에서의 악몽을 어떡해서든 잊으려 지난 34년간 무진 애를 써 왔다는 것을, 이제와 그때 일을 자꾸 들쳐내는 것이 그에겐 정말로 끔찍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밤도 카렐은 세네피스가 잠들 때까지 침대 옆에 머물며 그의 손을 어루만져주고 있어야 했다. 지금도 세네피스의 울음소리가 자신의 몸의 통증보다 더 쓰리게 그의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카렐은 네포프와 오랜 기간 함께한 분견대 병사들이 그를 감싼 자루를 땅 밑에 묻고 흙을 덮는 모습을 다시 지켜보았다. 구덩이 안을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카렐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몸서리를 치며 멈칫멈칫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왜들 그래?”
카렐의 물음에 제일 먼저 대답한 건 귀를 막고 있던 네피였다.
“뭐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그래?”
“이상한 소리? 어디서?”
“어디긴 어디야, 누구의 그 돼지 멱 따는 목구멍이지.”
네피의 악의 없는 핀잔에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소리를 냈다고?”
그러고 생각해 보니 자신이 무심결에 콧노래 비슷한 소리를 냈던 것도 같았다.
“내 목소리 고약한 거 이제 알았냐?”
“진짜 이상한 소리였다니까!”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네피가 얼른 말끝에 ‘요’를 붙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라스가 눈치를 보며 아주 조심조심 물었다.
“저어, 혹시 진혼곡 부르신 거……아닌가요?”
라스의 물음에 카렐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카히나가 죽기 직전 불렀다는 노래를 떠올린 그는 죽기 직전, 네포프가 부탁했던 ‘오르마즈가 마지막에 불러 준 노래’가 혹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카렐은 묻히고 있는 네포프를 보며 시험 삼아 작은 소리로 다시 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딱히 배운 일도, 연습한 일도 없었다. 그저 가끔 혼자 있을 때 장난으로, 그리고 언젠가는 딸 마하를 재워주기 위해 부르기도 했던 바로 그 허밍이었다. 하지만 워낙 듣기에 고약한 목소리 때문에 마하의 침실에서 말고는 남들 앞에서 불러 본 일이 없었고 지금은 기분 탓인지 그때와는 음조도 다르게 났다.
“아우, 뭐야, 이거,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귀를 막고 몸서리를 치며 카렐의 주변에서 일제히 흩어졌다. 카렐이 시험 삼아 목소리의 톤을 높이자 병사들 중 몇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이거였구나…….”
카렐이 노래를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책이나 악보를 본 일도 없는, 그냥 목 안 조금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만의 약간 특이한 허밍 발성일 뿐이었다.
“뜬금없이 이걸 왜 불러달라고 했을까?”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포프가 죽기 직전 사제의 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난데없이 이 노래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아 이 노래와 사제의 키가 무언가 관계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히나도 허벅지의 상처 안에 사제의 키를 품은 채 이 노래를 부르고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황상, 황상!”
거의 철성의 담 부근까지 나가있던 세네피스가 흙먼지 너머에서 혼비백산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자 놀란 카렐이 얼른 노래를 멈추고 뛰어가 그를 맞아주었다. 네포프의 시체를 묻고 있던 사람들까지 헐레벌떡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고 그를 따라 뛰어갔다. 세네피스가 저렇게까지 겁을 먹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파랗게 질린 세네피스가 허둥지둥 달려와 카렐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무언가 굉장히 무섭고, 몸도 아프고…….”
“예에? 거기까지 들렸다고요?”
순간 난처해진 카렐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제가 부른 겁니다. 제가 돌아오시라고 쫓아간 것보다 훨씬 약빨이 잘 듣는데요?”
“예?”
세네피스가 그제야 안도하며 카렐의 등을 한 번 찰싹 때렸다.
“허어, 천하의 황태후께서 웬일로 저리 약한 모습이래?”
네포프의 죽음을 제일 먼저 떨쳐낸 수다쟁이 네피가 옆에 있는 카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쿡쿡거렸다. 사실 그는 오르마즈와도, 네포프와도 애당초 아는 사이가 아니고, 저 남자의 죽음은 그저 흔한 군인 한 명의 전사일 뿐이었다.
“오늘밤도 황상께서 지켜드려야 할 이유가 또 생겼네.”
사에나가 카렐의 품을 여전히 떠나지 않는 세네피스를 보며 혼자 빈정거렸다. 네포프의 죽음으로 축 처졌던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온 이후 처음 보는 세네피스의 이렇게 겁먹은 모습에 모처럼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세네피스는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황태후로서의 품위와 당당한 모습을 잃어 본 일이 없었다.
“수고했으니 다들 해산하고 들어가 자자. 세하 자네는 야간 경계 철저히 하고. 날이 많이 춥구나.”
네포프의 매장을 끝낸 카렐은 다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철성으로 돌아섰다.
“예. 맡겨주십시오.”
카렐은 여전히 침울해있는 세네피스를 데리고 철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성 문 안으로 들어서니 살을 에는 추위도 한결 나아졌다. 터빈의 주 동력원인 지열 덕분에 철성 내부는 혹한의 바깥기온에 비하면 천국 같았다. 거기에 물도 있고, 지열로 온수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전 산 밑의 기지에 있을 때에 비해 춥고 시계가 더 나빠진 빼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카렐은 황금탑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바로 이 안에 아들 주페를 구할 귀중한 1번 잔딕, 그리고 이 분지, 멀게 보면 이 행성 전체를 구원할 1번 터빈을 돌릴 장치가 있을 테지만 사제의 키가 없는 지금은 열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의 손목에 박힌 잔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카렐 옆에서 또다시 죄인이 된 세네피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아차 싶어진 카렐은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황금탑에서 돌아섰다. 세네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렐은 어쩌면 그가 지금 자신보다 더 괴로울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주무실 때까지 있어드릴게요. 제가 열흘 넘게 연이어 재워드린 때가 또 있었나요? 뭐, 황궁만큼 좋은 데가 아니어서 문제지.”
카렐은 세네피스의 어깨를 꼭 안고 3층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카렐의 웃음에 세네피스도 억지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이곳에서 세네피스는 카렐이 황제에 오른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그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만 같다면 침대도 없는 동굴이나 오두막이어도 좋습니다.”
숙소가 있는 3층 회랑에 오른 세네피스가 어깨에 있는 카렐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카렐은 그의 이마에 입을 한 번 맞춰주고는 세네피스의 숙소 문을 열었다. 철성 내에서 외풍도 제일 적게 들고 따뜻한 곳을 찾아 제일 상태가 좋은 침대와 침구를 놓아 준 방이었다.
“황상께선요?”
세네피스는 카렐의 다친 다리를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먼지로 꼴이 말이 아니니 좀 씻고 자야죠.”
카렐은 세네피스의 망토를 직접 벗겨주고는 그가 침대에 눕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항상 그가 앉았던 나무 박스를 침대 옆에 가져다놓고는 침대맡에 앉아 세네피스의 손을 꼭 잡았다.
“제발 편하게 주무세요. 힘들어하시면 저도 그만큼 힘듭니다.”
세네피스는 억지로 웃는 척 하고는 눈을 감았다. 카렐도 그의 손에 이마를 기댄 채 엎드려 함께 눈을 감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세네피스는 그저 눈만 감고 있을 뿐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런 그를 느끼고 있는 카렐도 마찬가지였다. 괴로워하는 세네피스의 모습을 본 카렐의 뇌리에 이전 마하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억지로 잠을 들려 애쓰고 있는 세네피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장난처럼 속삭였다.
“아까 그 무서운 소리 다시 들어 보실래요? 이 소리는 주무시기 좋을 겁니다.”
세네피스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카렐은 세네피스의 귀에 입술을 대고 얼마 전 아픈 마하에게 들려주었던 허밍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 카렐의 품에서 노랫소리를 들은 마하는 아픔까지 까맣게 잊고 기분도 좋아지며 나른하게 바로 잠이 들었었다.
“그, 그만이요…….”
세네피스가 카렐의 품 안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파르르 떨었다. 마하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카렐도 어리둥절해졌다. 이전의 세네피스라면 애정이 담긴 자신의 속삭임에 이런 고통스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 그만 하시라니까요.”
카렐은 세네피스의 얼굴이 어느새 파랗게 변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얼른 허밍을 멈추고 그를 붙든 팔을 놓았다. 세네피스가 신음을 내며 돌연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 악.”
“어머니?”
세네피스 본인보다 더 놀란 카렐이 몸을 비트는 세네피스를 얼른 품에 안았다. 같은 순간, 카렐도 등의 찢어지는 고통에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세네피스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의사! 의사 어디 없냐!”
카렐의 고함이 철성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코리온이 제일 먼저 헐레벌떡 달려와 문을 열었다가 허리를 앞으로 굽히며 움찔거렸다.
“현신님께선 다가가지 마세요!”
뒤이어 응급함을 든 니사가 뛰어와 얼른 코리온의 앞을 막아서고는 허겁지겁 카렐과 세네피스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카렐은 고개를 저으며 곧 눈을 떴다.
“어머니! 어머니!”
카렐은 자신의 장난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네피스를 가슴으로 받친 채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십니까!”
카렐은 자신이 엄청난 고통을 느꼈던 세네피스의 허리 아래 척추를 얼른 손으로 짚어보았다.
“아악.”
세네피스가 카렐의 가슴에서 다시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픔이 줄어들었는지 낮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괜찮으세요?”
세네피스가 그제야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원인은 봐야겠습니다.”
니사가 다가와 세네피스의 옷자락을 들치고 등을 드러냈다. 순간 그의 등줄기를 따라 새겨진 희미한 바람어 문신에 니사가 화들짝 놀랐다. 카렐이 니사에게 티내지 말라며 재빨리 눈짓을 주었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알아. 누가 새겼는지도 알고.”
카렐은 세네피스의 손을 꼭 안으며 속삭였다. 니사가 문신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이 고귀한 공주와 그의 열쇠를 지켜 주소서.”
니사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그분의 필치로군요.”
“그래서 뭘 어쩌라고!”
엎드려 있던 세네피스가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옷자락을 확 내렸다. 니사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저어, 외람된 질문인지 몰라도 혹시 여기서 ‘열쇠’가 사제의 키를 뜻한다고는…….”
“내가 받은 일 없다니까!!!”
세네피스가 다시 화를 버럭 내는 것을 카렐이 급히 끌어안았다. 사람들의 의혹의 눈길이 계속 자신에게 쏠리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세네피스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다.
“이걸 새기던 날도 내게 뭔가 줄 게 있다고만 하셨고 그걸로 끝이었어! 그게 그분을 살아서 본 마지막 날이었다고!”
카렐은 울음을 터뜨린 세네피스의 등을 얼른 토닥여주었다.
“예, 압니다. 걱정 마세요, 다른 데서 찾고 있다니까요.”
카렐은 세네피스를 안은 채 니사에게 그의 등을 보라고 눈짓했다. 니사는 민감해진 세네피스가 보지 못하도록 종이에 얼른 글씨를 적어 내보였다.
[외람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카히나도 생전에 몸 안에 키를 숨긴 일이 있습니다. 혹시나 그분께서…….]
카렐은 그의 질문이 채 끝나기 전, 말 대신 종이에 필답을 해 주었다.
[이미 이전 병원기록을 조사했네. 몸 안에 금속이 있었다면 자기장 진단에 잡혔겠지만 없었어.]
낙담한 니사는 한숨을 내쉬며 세네피스가 방금 격심한 통증을 느꼈던 허리 척추 부근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아픈 곳을 말씀하세요.”
니사는 여기저기를 다 짚어보았지만 세네피스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젠 하나도 안 아파.”
세네피스의 대답에 난감해진 니사가 다시 카렐의 눈치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아파하던 사람이 갑자기 멀쩡해졌으니 그것도 황당한 노릇이었다. 화가 난 세네피스가 아프면서도 괜한 몽니를 부리는 건지, 정말로 안 아프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허리를 삐끗하신 건 아니고요?”
니사는 하는 수 없이 휴대용 단층촬영기를 꺼내 그의 척추 부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지금껏 허리 아프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일이 없던 황태후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니 뭔가 이것저것 시늉이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척추는 정상이신 것 같고요……방금 많이 놀라셨나 근육이 많이 경직되었네요. 그리고오……고오……어? 내출혈이 있는데요?”
별 생각 없이 단층촬영기를 위로 천천히 올리던 니사가 멈칫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다시 척추 위를 살짝 누르며 물었다.
“여기 정말 안 아프세요?”
“안 아프다니까.”
“여기 출혈이 있는 곳에 이물질이 보이는데요? 이 이물질이 안에서 움직여서 주변의 신경을 건드렸나봅니다. 척추신경이 나오는 곳하고 동맥 사이에 뭔가 동그란 게…… 이런.”
여전히 세네피스를 안고 있던 카렐은 니사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나?”
황제의 물음에도 니사는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렐이 어깨를 탁 잡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니사가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사제의 키가 금속이 아니라면……어떡하시겠어요?”
등을 보이고 있던 세네피스도, 그를 안고 있던 카렐도, 그 순간 몸이 탁 굳어버렸다. 니사가 보여준 화면에는 척추신경 옆에 둥그런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재료가 무언지는 몰라도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분간이 어려울 만큼 세네피스의 혈관, 신경, 뼈와 거의 한 덩이가 되어 있었다. 카렐이 가짜 사제의 키에서 보았던 크기, 대강의 모양새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카렐의 입에서 당혹스런 신음이 새어나왔다.
“맙소사, 어떻게 여길 들어갔지?”
“이게 사제의 키라고요?
화면을 보고 가장 놀란 건 세네피스 자신이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곧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 그리고 방금 전, 카렐의 허밍에 왜 이게 움직인 것인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제의 키가 자신의 몸 안에 있었다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미안합니다, 황상.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카렐의 목을 와락 껴안은 세네피스가 니사를 돌아보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당장이라도 빼내라. 황상의 수술을 하루빨리 해야지!”
“그런데…….”
니사가 화면을 유심히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신경이나 동맥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수술이 굉장히 커질 겁니다. 중추신경계를 건드리는 수술이라 여기선 불가능합니다. 궁으로 돌아가면 제가 직접 집도해서 빼내겠습니다.”
“아무렴 어때.”
카렐이 세네피스를 일으켜 품에 꼭 안아주었다.
“됐어요, 이걸 구했으니 아직 발병 안 한 주페하고 밀리타도 살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게 문젭니까!! 황상은요!!!”
세네피스가 야속한 카렐의 가슴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렐이 그런 그에게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여길 나갈 때까지는 버틸 겁니다. 걱정 마세요.”
카렐이 큰소리를 쳤지만 그의 말에 자신감은 별로 없었고, 니사도 몰래 한숨을 내쉬며 엉뚱한 곳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그 눈치를 모를 리 없는 세네피스가 이번엔 니사를 사납게 채근했다.
“무리해서라도 빼내라고! 나 아픈 것 따위는 상관없다. 마취 안 해도 견딜 수 있고 어딜 못 쓰게 되어도 상관없어! 당장 이걸 빼낼 수만 있다면…….”
황제와 황태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니사가 카렐의 무서운 눈짓을 의식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프거나 회복이 더딘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조각이 너무 오래 자리를 잡고 있어 이젠 사실상 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걸 억지로 떼어내다가는 신경이나 동맥이 손상되어 최악의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도 높습니다.”
“하지만…….”
세네피스가 씩씩대며 카렐을 올려보았다. 그때까지도 니사에게 무서운 눈짓을 주고 있던 카렐은 아무 일 없는 척 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저 아직 괜찮습니다.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1년은 되돌아간 것 같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니까요! 웃으면서 죽을 테니까 당장 꺼내라고 말 좀 하세요!”
세네피스가 계속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지만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니사를 아예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세네피스를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조금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끝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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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가 네포프에게서 받은 키가 왜 하필 저기에 감춰져 있는지, 카렐의 허밍에 왜 갑자기 그리 아팠는지는 과거편에 있는지라;;; 어쨌든 찾기는(?)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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