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63화 (1,058/1,132)

< -- 106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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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자이 가문의 유람선이로군요. 돈 하나는 많은 가문이니까요.”

절반 타르서스인인 에스더가 배에 새겨진 문장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만, 저게 안개꽃 아닌가?”

딸 마하와 함께 상갑판에 내려선 네페티는 난간과 주변을 온통 장식하고 있는 무성한 튤립과 안개꽃에 깜짝 놀랐다. 안개꽃은 전통적으로 약혼식, 혹은 첩의 결혼식을 장식할 때 쓰이는 꽃이었다. 제위 전쟁이 끝난 후, 황제와 에스더의 결혼식도 무성한 안개꽃으로 장식한 타르서스 별궁에서 열렸다보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리야 부인과 결혼하는 게 맞는 거야?”

네페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그냥 결혼식이라고만 했지 구체적으로는 알려주지 않은 것도 같네요. 왜 안개꽃이죠? 설마 알리야 부인이 첩이 될 리는 없잖아요. 누가 첩과 결혼하나요?”

함께 온 솔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대공인 페로라면 몰라도 다른 누군가가 고작 첩과의 결혼식에 황실 비빈과 황자들을 초청장도 없이 불러들였다면 실례도 어마어마한 실례였다.

비빈들의 이상한 의문은 이 유람선에 차례대로 도착하고 있는 수많은 타르서스 호족들의 모습에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저네들은 또 왜 왔지? 대공이 타르서스와 무슨 연고가 있다고?”

네페티는 타르서스 호족들 상황에 밝은 에스더에게 슬쩍 물었지만 그라고 알 리가 없었다.

타르서스 곳곳에서 도착한 호족들은 누군가는 상급귀족가 종장 뺨치게 화려했고, 누군가는 시골 촌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외모였지만 완고하고 성깔이 잔뜩 묻어나는 인상이라는 것 하나만은 대체로 비슷했다. 30여년 전 코리온의 손에 호족들이 몰살당한 이후, 황실을 믿지 않고 황실 행사에도 웬만해선 참여를 하지 않게 된 그들이지만 이번에는 딱히 경계하는 기미는 없었다. 이 배는 같은 타르서스 호족인 길자이 가문의 배이고, 승무원들도 모두 그쪽 사람들이었다.

따져보면 도리어 황실 일행이 호족들의 입안에 들어온 셈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킵이 어리둥절해진 비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설명을 해 주었다.

“28개 호족 가문의 종장과 유력 인사들입니다. 에스더 귀인 마마의 외가인 라슈트라 가는 귀인께서 참석하신다는 말에 빠졌고 마르코스 가는 페로 대공과 함께 올 예정입니다.”

네페티가 에스더를 돌아보았다. 타르서스 남부의 호족인 에스더의 외가 라슈트라 가와 수도 마잔다란에서 새로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마르코스 가―죽은 우베의 형제들이 세운―는 타르서스에서 몇 안 되는 친 황실 성향의 가문이었다.

“그런데 대공 결혼식에 왜 저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이리 무더기로 온 거냐?”

“대공께서 결혼식 초청 명목으로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하려 저들도 함께 부르신 걸로 압니다.”

“그나저나 대공 결혼식이 맞긴 맞는 거냐?”

네페티의 당연한 물음에 킵이 아주 조심조심 속삭였다.

“물론 대공께서 알리야 부인과 결혼하실 예정이십니다만……정실혼은 아닙니다.”

킵의 이상한 대답에 솔과 에스더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네페티만은 그 속내를 바로 읽어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알리야 부인이 정실이 아니면……대체 누굴 정실로 삼겠다는 것이냐?”

네페티가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다. 알리야를 첩으로 삼겠다는 건 페로가 황제가 될 맘을 품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마하! 마하 어디 있느냐!”

엄마의 날카로운 고함에 유람선 구경 삼매경에 빠져 있던 마하가 엄마에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황비의 갑작스런 분노에 당황한 솔과 에스더가 서로 마주보았다. 네페티가 그들에게도 노기 띤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마리안에게도 오라고 하세요!”

당황한 솔이 헐레벌떡 달려가 구석의 신기한 꽃 화분을 끌어안고 있는 마리안을 질질 끌고 돌아왔다.

“어디 대공이라는 작자가 감히 황상께서 멀쩡히 계신데…….”

네페티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의 분노의 이유를 알아낸 솔과 에스더가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네페티가 함께 온 시녀장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우리 셔틀 어디 있느냐! 당장 궁으로 돌아가겠다!”

길길이 날뛰고 있는 네페티에게 황후 아메스가 두 아들과 함께 천연덕스럽게 다가왔다.

“아니,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나 있으십니까?”

“황실 비빈인 우리가 고작 대공이 첩을 맞는 자리에 와 있어야 합니까?”

네페티가 분노에 찬 얼굴로 황후에게 따져들었다.

“아버지 결혼식이요? 아, 그것 말고도 또 있습니다만. 잠시 후 7시에 아버지의 혼례식이 있고, 9시엔 장태자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인걸요.”

황후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충격을 받은 건 네페티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페로의 결혼식인줄로만 알고 와 있던 카이도 충격을 받아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제 약혼이라니…….”

아메스는 막 따져들려는 아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짓하고는 맞은편의 네페티에게 계속 따져들었다.

“황실 비빈과 황자들이 맏이인 장태자의 약혼식에 와 있는 게 뭐가 불만이라고 이 좋은 자리에서 고상한 분답지 않게 난동을 피우시는 겁니까?”

“미쳤군요, 황상께 허락도 없이 장태자의 약혼이라니, 지금 장난하십니까?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십니까?”

“물론 잘 알지요.”

아메스가 얄밉게 웃음까지 지으며 음료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황상께서 계속 약혼을 반대하시니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황상의 허락 없는 약혼이 무효라는 건 아실텐데요?”

“그건 황상께서 돌아와 ‘무효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얘기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네페티가 딸의 손을 덥석 잡고 돌아섰다.

“시녀장! 우리 셔틀 어딨느냐! 빨리 셔틀 대지 못해!”

그때, 여기저기 연락해 본 시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둘러댔다.

“죄송합니다, 셔틀에 고장이 난 것 같습니다. 아까 착륙장에 내릴 때 지상요원의 실수로 랜딩기어가 손상되어 고치는 중이랍니다.”

“뭐? 실수?”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닫고 격분한 네페티가 다시 아메스를 휙 돌아보았다. 지상의 연회장이라면 그냥 나가기라도 하겠지만 사방에 바닷물인 선상에서 셔틀과 배가 아니면 떠날 방법도 없었다.

“그럼 다른 셔틀이라도 오라고 해! 당장 여기서 떠나겠다!”

이번에도 아메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이런, 셔틀 착륙장은 연회장으로 쓰려고 이미 테이블을 깔고 있습니다. 손님이 한둘이셔야죠. 적어도 저녁 10시까지는 못 나가십니다.”

“그럼 배라도 불러! 당장! 나갈 길 없으며 헤엄쳐서라도 나갈 테니까!”

평소 누구보다 점잖고 온화하던 황비가 미친 듯 악을 쓰는 모습에 내빈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그 모습에 표정이 살짝 굳어버린 아메스가 주변에 있는 페로 가디언들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킵, 비빈분들께서 잠시 오해가 있으신 듯하니 아래층 바에 잠깐 모셔라.”

황후의 눈짓을 받은 가디언들이 세 비빈과 마하, 마리안의 주변을 확 에워쌌다. 당황한 카이와 주페가 어머니에게서 거리를 두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어머니, 이건 아닙니다. 이건 절차에도, 도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건…….”

“다룬, 주페도 함께 데려가라. 형의 약혼에 동생이 감히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양이 좋지 않구나.”

이번엔 건장한 다룬이 주페를 황후의 곁에서 떼어내 네페티 일행 사이에 밀어 넣었다. 엄마 곁에 혼자 남은 카이만 점점 더 난처해지고 있었다.

“어머니, 제발, 이건 아닙니다. 뭔가 잘못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들의 간청에도 아메스는 들은 척 만 척 두 가디언들에게 빨리 내려가라 손짓했다.

“어서 내려가시죠.”

킵과 다룬 두 사나운 가디언들에게 둘러싸인 비빈과 황자들은 씩씩거리며 하는 수 없이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배편에 단체로 도착한 타르서스의 호족들이 껄껄대며 계속 상갑판에 올라 연회장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 거대한 선상 연회장은 페로의 결혼식이 아니고 마치 타르서스 호족들의 집회 같은 모양새가 되어갔다. 아들 카이와 둘이 남은 아메스는 브리지 쪽에 손짓을 보냈다.

“멋진 석양을 보고 싶구나. 손님들도 대충 모였으니 먼 바다로 좀 나가자. 망망대해에서 멋진 행사를 치르자꾸나.”

페로의 결혼식을 준비 중인 유람선은 서쪽의 석양을 등지고 수에니에서 점점 멀어져 먼 바다로 나아갔다.

배가 움직이는 동안, 상갑판을 내려다보는 특등 객실에선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페로가 몸 단장중인 신부 알리야를 지켜보며 입가 가득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야는 전혀 예상조차 못 한 채로 얼떨결에 맞은 혼례식이지만 페로는 신부복부터 연회장 단장까지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있었다.

“제 결혼식보다는 카이의 약혼식이 메인 행사인 것 같군요.”

알리야는 연회장에 버글거리는 타르서스 호족들을 내려다보며 살짝 앙탈을 부렸다. 페로가 피식 웃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실은 오늘 온 가문들을 대상으로 마잔다란과 수에니의 시장 지분을 결정하겠다고 했거든요.”

“결혼식에만 집중하시죠. 여기서 웬 정치 타령입니까?”

알리야가 슬쩍 눈을 흘겼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꼭 그럴 수만은 없는 걸 용서해주시오.”

페로가 알리야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부대신 볼토가 자살하고 그의 재산은 황실에 몰수당했지만 그의 가문이 갖고 있던 마잔다란과 수에니 시장 상인들에게서 자릿세와 보호 명목으로 뜯어내는 지분은 호족들간의 합의로 결정되는 ‘비공식적인 재산’이다보니 황실이 몰수할 수도 없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있었다. 타르서스 호족들은 한편으로 죽은 볼토를 영웅시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의 지분을 놓고 벌써 뒷골목에서 깡패들을 동원해 서로를 습격하고, 암살하고, 상인들을 협박하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페로가 카이의 약혼식을 핑계로 그들을 불러들인 것도 표면적으로는 그런 이유였다. 우습지만 타르서스의 호족들이 제일 증오하는 대상도 바로 같은 타르서스 호족들이었다.

때마침 킵이 한쪽에서 벽을 똑똑 두드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알리야와 함께 있는 페로에게 살며시 다가와 귀엣말을 전했다.

“네페티 황비 일행이 방금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어떤 배?”

페로가 슬쩍 눈을 흘겼다. 킵이 스리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우리 배지요. 자기들이 수배했다고 믿겠지만.”

“뭍에는 언제 도착하나?”

“지금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2시간은 걸릴 겁니다. 우리 편도 함께 태웠습니다.”

“수고했다.”

페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타르서스 호족들이 모여 있는 상갑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마잔다란과 수에니의 이권을 보고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호족들이 탐욕에 찬 눈을 부릅뜨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잔다란 시장과 수에니 시장의 지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될 터였다.

“내 지난번 알린 대로, 오늘은 분쟁이 있는 시장의 운영권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결정하고 나서 내 결혼식을 열려 합니다.

페로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호족들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그는 이번 초청과 함께 [특정 호족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호족들이 공평하게 만족할 수 있는 타협안을 내놓을 참이다.]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내용을 함께 발송했었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자신에게 올 몫에 나름의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게 당연했다.

페로는 이번엔 카이에게 딸을 바치기로 한 길자이 가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참, 그 전에……오늘 제 혼례식이 끝난 후에 장태자 카이의 약혼식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리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길자이 가문의 바드 종장이 장태자의 장인이 되시겠군요.”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내용에 몇몇 종장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의심으로 점점 변해갔다. 이 배의 주인이 길자이 가문이고, 그가 황실, 총리와 사돈간이 될 예정이라면 [공평한 분배]라는 페로의 말은 그저 뻔한 공치사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셈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공격적으로 세를 키우며 부를 독식해 온 길자이 가문과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다른 호족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바드 종장에게 슬쩍 눈웃음을 보인 페로는 미리 가져온 종이를 펼쳐들었다.

“자아, 그럼 총리인 제가 가져온 초안을 읽어보죠. 마잔다란의 시장에서 트라우제 가의 지분은 4할이고, 수에니에선 3할 4푼이었는데 오늘 참석한 28개 가문이 황실에 내고 있는 세금을 기준으로 공평히 나눠 갖는 게 가장 적당할 것 같군 그래.”

‘세금 기준’이라는 말에 호족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세금을 기준으로 한다는 건 언뜻 공평하게 들리지만 수공업품이나 농산물 판매가 주업인 타르서스에서 대부분의 호족들이 내는 세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세율이 높은 보석판매나 사치품 제조를 주업으로 하는 가문이 훨씬 유리한 지분을 갖는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방의 군소 호족가문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공평한 겁니까?”

“어허, 돈 내는 만큼 권리가 있는 게 당연한 거지요. 억울하면 세금 더 내요.”

귀금속 판매가 주업인 바드 종장과 두세 명이 질세라 반박을 하자 상갑판이 시끌시끌해졌다.

“저놈은 괜히 지분 따위를 줘서 일만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도망쳐버리네.”

바드 종장은 자신과 다른 호족들을 싸움 붙여놓고는 슬그머니 한쪽으로 빠져나가는 페로를 가리키며 물라에게 투덜거렸다.

얼떨결에 페로의 ‘혜택’이랍시고 받기는 했지만 애당초 그는 시장 지분엔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이번 음모를 완수하면 타르서스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에니 반도 전체가 그의 수중에 들어올 판국에 고작 몇 푼 시장 자릿세 따위로 구질구질하게 다른 호족들과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페로가 대놓고 특혜를 주었는데 그것을 대놓고 걷어찰 수도 없었다.

“집어 치우시오! 황실과 손잡고 같은 타르서스인들을 배신하다니!”

페로가 빠져나간 후에도 시끌시끌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인정 못 한다고 분개하는 호족들이 대부분이었고 길자이 가문 편을 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드 종장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얼떨결에 다른 호족들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배신입니까? 우린 세금을 내는 만큼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뿐이라고요! 마잔다란 시장도 국고로 지어지고 운영되는 것 아닙니까!!!”

나름 경사스러워야 할 결혼식장이 시작도 하기 전에 싸움터가 되면서 나름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페로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한 듯했다.

배 위는 얼떨결에 ‘일반 호족들’과 ‘길자이 가’ 일파와의 대립 양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이 고립된 배에서 항의하는 의미로 떠날 수도 없는 호족들은 밤늦게까지는 하는 수 없이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그들은 대신 할룩스를 들고 본가에 바쁘게 연락을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며 분주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와중에 곧 있을 페로의 결혼식은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갔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고, 페로가 새신랑의 화려한 단장을 마치고 나왔을 무렵, 연회장은 그가 떠났을 때보다 도리어 더 시끄러웠다. 호족들은 대호족부터 군소호족까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싸워대고 있었고, 몇몇은 본가에 연락을 해 ‘길자이 가문 새끼들한테 본때를 보여줘라’라며 대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그들의 맹공을 받은 바드 길자이 종장과 그의 아들 행세를 맡은 물라는 잔뜩 짜증에 찬 얼굴로 연신 시계만 보며 연회가 끝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에니를 먹을 때 먹어도 구더기 같은 것들은 싹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생각 없이 말을 뱉었던 바드 종장은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페로 가디언 페다이의 모습에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무 일 아닌 척했다.

페로에 뒤이어 단상에 나온 장태자 카이도 이상한 분위기를 직감하고는 굳어진 얼굴로 엄마 아메스를 돌아보았지만 아메스도 굳은 얼굴로 아들의 어깨만 떠밀 뿐 아무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봐도 조건이 영…….”

“장태자께선 그런 문제는 아직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엄마에게 떠밀린 카이는 하는 수 없이 연회장 한쪽의 황족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어차피 황족이라고 해야 그 혼자가 전부였다.

“동생들은요? 비빈들께선 다 어디 가셨습니까?”

“사정상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카이는 그들이 대공의 결혼식을 보이콧하고 떠나버렸음을 눈치챘지만 그로서는 차마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돌봐 준 페로의 결혼식을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 그에게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 1시간 뒤에 있을 자신의 강제 약혼식이었다.

그런데 마하와 마리안은 그렇다 쳐도 마찬가지로 페로의 손자인 동복동생 주페까지 없는 건 무언가 이상했다.

“주페도요?”

“예.”

아메스는 사무적으로 딱 달라 대답하고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카이가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페로는 뒤숭숭한 분위기를 못 본 척 단 위에 서서 주재 겸 증인이 될 내무장관 압둘 모투바 경에게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명색이 대공의 결혼식이 엉망진창 분위기에서 치러지면서 압둘 경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고상한 척은 다 하지만 실제로는 돈 문제에 유독 약한 저들의 역정을 달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신랑인 제국 총리이며 국구 페로 자이센과 신부인 황제령 주재 동부대사 알리야 아야톨라 입장합니다.”

웅성대는 분위기를 뚫고 페로와 알리야가 연단 양쪽에서 나타나 서로 인사를 올렸다. 이맘때 적도의 기온이 그렇듯, 밤하늘은 화창해 은가루를 뿌린 듯한 은하수가 하늘을 길게 가로질렀고, 총총한 별이 사방에 반짝였다. 바람은 거의 없고 적도의 기온은 밤늦게까지도 온화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적도의 밤이었다.

입장과 함께 인사를 올린 후, 첩실 혼례의 관례대로 알리야가 페로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번 절을 더 올렸다.

“에에, 신성한 윰 포고령의 혼인 관련 조항에 따라 상급귀족 페로 슈트란 자이센과 상급귀족 알리야 아야톨라는 남편과 제1첩으로서…….”

압둘 모투바 내무대신은 미리 적어 온 선언문을 더듬더듬 읽어내려갔다. 정실과의 요란스런 대례식과는 달리 ‘첩의 혼례’ 자체가 흔치 않다보니 그도 이런 식의 주재는 익숙지 않았다.

“첩 알리야는 남편 페로 자이센에게 아내로서의 의무 외에 정처(正妻)에 대한 존경과 남편에 대한 정조의 의무를 다할 것을, 남편 페로 자이센은 가장으로서의 보호와 부양의 의무를 다할 것을 선언하는가?”

“물론입니다.”

알리야가 먼저 대답했고 페로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중앙에 놓인 서약서에 서로의 이름을 적어 넣고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었다. 정실혼이 아닌 만큼, 혼례는 서약 수준으로 간단히 끝났고, 그 와중에도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당당히 ‘페로의 진짜 부인’이 된 알리야의 입가엔 사뭇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신랑신부의 기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예식이 끝나고, 단에서 막 물러나온 페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번에도 킵이었다. 그는 페로에게 바싹 다가서서는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네페티 황비와 황자들 일행이 탄 배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페로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을 뿜었다. 그는 사무적으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위치는?”

킵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작은 소리로 보고를 이었다.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수에니 항에서 300스타디아(45㎞) 정도 떨어진 환초 부근 식인상어 시범서식지입니다.”

“잘했다.”

페로는 한쪽에서 엄마 아메스와 함께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그때, 단하에 있던 바드 길자이 종장과 물라도 어딘가에서 다급한 연락을 받고는 페로에게 뭐라 말을 하려 다가왔다.

“대공 각하, 듣자하니 비빈과 황자분들께서…….”

페로는 즉시 그에게 입을 다물라며 손짓했다.

“무슨 소식인지 아니까 떠들지 말게.”

페로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바드와 물라의 표정이 확 굳었다. 페로는 카이의 네 약혼녀들을 데려 온 다히르 공, 압둘 모투바 대신, 알리 샤디 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드 종장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장태자의 약혼식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이 자리 정리가 끝나는 대로 30분 후에 열겠으니 준비해 주시오.”

물라가 뒤로 돌아서는 척 바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놈이 비빈들과 황자들을 방금 제거한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계획도 때가 됐습니다.”

물라는 언젠가 세닌이 말해주었던, 페로의 [유사시 계획]을 머리에 떠올렸다. 페로가 황제가 정말로 죽었다는 정보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입수하고 선제대응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 정보가 없어 알 수 없지만 페로가 의도적으로 비빈들과 황자들을 제거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이야말로 장태자를 없앨 절호의 기회입니다. 당신 가문의 배니 여기서 해결하십시오. 황궁으로 들어가면 경호가 엄해질 테니 더 어렵습니다.”

바드 종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태자를 제거하라고 딸아이에게 알리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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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는 타르서스 호족들에게 질투의 황금사과를 던져줬습니다. ㅋㅋㅋ

정치 19단 페로는 33년 전의 탱크 원리주의자 코리온과는 사뭇 다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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