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2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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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의 상견례장에서 알리야 부인과 꼴사나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던 페로는 주변 측근들의 눈치에 부인과 슬쩍 떨어져서 섰지만 그저 좀 더 으슥한 곳을 찾으려는 잠시 휴식에 불과했다. 그는 부인의 손가락을 슬쩍 잡고는 여기저기 어두운 곳들을 마치 냄새 맡는 개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부인이 페로와 살짝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황상께서 며칠째 안 보이시네요. 코리온 그자하고 대제학도 안 보이던데…….”
주변의 눈치를 재빨리 살핀 페로가 알리야 부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수술을 하러 간 것 같소.”
‘수술’이라는 말에 알리야 부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그제야 페로가 내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지를 눈치챘다.
“지난번 동부에서 찾은 그 오팔 조각으로요?”
“그랬겠죠. 황궁의 의사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주치의에 수술 장비까지 다 챙겨서 북부 어딘가로 갔다는 것 같습니다. 내게도 안 알린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쯤 이미 수술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도무지 연락이 없긴 하지만.”
알리야 부인의 눈이 확 커졌다.
“지금도 연락이 안 되나요?”
“수술하는 동안 연락 끊길 걸로 알고 미리 말 해놓고 갔으니 상관없어요. 수술 성공하면 알아서 연락하겠죠.”
페로는 남의 일 취급하듯 무심한 척 술잔을 들이켰지만 알리야는 그의 눈가에 흐르는 긴장과 초조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페로는 여전히 ‘누님들’ 사이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카이 쪽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이젠 저 아이도 있고…….”
페로가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알리야 부인도 페로가 요즘 어딘지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개척일 이후, 그는 가문 유전자 연구소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던 카렐과 그 후손에 대한 치료법 연구를 중단시켰고, 이틀 전엔 황제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좋아라며 본가에 놀러온 황후 아메스와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도 했었다. 그는 싸움의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전해 듣기로는 그가 아메스에게 ‘황태후’ 운운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것 같았다.
페로가 알리야 부인을 베란다로 슬쩍 잡아끌고는 다시 품에 안았다.
“내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말입니다.”
페로가 알리야 부인을 위해 찾아낸 곳은 수에니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해안선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절벽 위 베란다였다. 여자라면 누구나 가슴이 설렐 곳으로 알리야 부인을 데려간 페로는 그의 한 손을 잡아당겨서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 하나를 슬며시 끼워주었다. 희귀한 자주빛 사파이어가 박힌 섬세한 세공의 백금반지를 본 부인의 얼굴이 발그스레 달아올랐다.
반지를 끼워 준 페로가 낮게 속삭였다.
“다음 황제 문제가 결정되기 전에……우리 관계부터 분명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리야 부인의 시선이 반지와 페로의 진지한 눈가에 번갈아 멎었다. 이 한 마디에서 그는 페로가 왜 이틀째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지를 읽어냈다. 페로는 장태자 카이는 얼굴마담으로만 내보이고 뒤로는 스스로가 황제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제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장태자의 상견례를 황제 없는 틈을 빌려 이렇게 기습적으로 여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우리 관계가 어떤데요?”
알리야 부인이 살짝 튕겨보았다. 페로는 제국 거의 모든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몇 번의 정략혼 논의 외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가슴과 손으로’ 반지를 끼워 준 일은 없는 남자였다. 태어나 첫 청혼이라는 것을 하는 남자의 사뭇 진지한 표정 앞에서, 알리야 부인은 보일 듯 말 듯 웃기만 할 뿐 값싸게 바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우드 부인하고 나람 부인은요? 요즘은 결혼 경험 없는 젊은 여자를 찾고 계시다며요? 듣자하니 레곤 대공주 딸인 상지대군 쪽을 알아보고 계신다고요?”
페로의 얼굴이 난처함에 붉어졌다. 살짝 헛기침을 한 페로가 연회장 안쪽을 다시 들여다보고는 이번엔 부인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포고령 규정은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그대를 첫 자리에 둘 수 없다는 게 저 역시 안타깝습니다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족들도 달래야 하고요.”
페로의 솔직한 고백에 알리야 부인이 눈을 흘겼지만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과부인 알리야 부인은 황후감으로는 분명 자격이 없었다.
“왜요? 황제의 딸들은 탐나지 않으시고요? 마리안인가 그 꼬마를 그리 예뻐하신다면서요? 마하라는 아이는 벌써 어미 못지않게 천하절색이라죠?”
알리야 부인은 살짝 앙탈을 부리는 척 페로가 절반쯤 끼워주다 만 반지를 뺐다 끼웠다 하며 페로를 흘겨보았다.
“허허, 그런 젖내 나는 것들까지 벌써 질투하시는 건가요?”
페로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알리야는 살짝 발돋움을 하고 페로의 턱 끝에 입술을 맞췄다.
“지금 황제가 네페티에게 해 주는 만큼은 해 주실 거죠?”
“남편이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신세는 아니니 훨씬 행복할걸요.”
페로가 능글맞게 웃으며 부인의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답례의 진한 키스를 해 주었다.
둘의 낭만적이고 짜릿한 프로포즈의 순간은 눈치 없는 킵이 창가에서 낸 헛기침 소리에 확 깨져버렸다. 노골적으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던 페로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베란다에서 안으로 들어섰다.
페로가 뭐라 묻기도 전에, 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놈을 찾았습니다. 보안국에서 알려준 내용이 맞습니다.”
페로는 잘했다 아니다 언급조차 생략한 채 이 가디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추격을 붙였으니 곧 숨은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생각해 보니 해상궁전도 꽤 운치가 있고 좋겠소.”
이디나는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가 내다보이는 선상 테라스에 서서 달콤한 요구르트를 입에 흘려 넣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적도 수에니의 따스한 햇볕과 온화한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달수로는 3달, 실제 성장은 4달 가까이 된 태아를 품은 그는 이제 누가 봐도 임산부의 모습이었다. 입덧을 벗어난 그는 전처럼 예민하지도 않았고, 먹는 것도 훨씬 잘 먹었다. 한쪽의 테이블 위엔 뱃속의 딸아이를 찍은 사진이 몇 장이나 놓여있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의 아케메니안 궁 자리를 어쩌고 싶지는 않지만.”
이디나는 테라스 경계로 나아가 바닷바람을 얼굴 가득 받았다.
수에니의 조선소 앞바다에 정박한 거대한 바지선 위, ‘해상플랜트처럼’ 보이는 시설에는 [시험운항 중]이라는 딱지가 붙어 사람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차단하고 있었다. 수에니는 제국에 둘밖에 안 되는 대형 수상선박 조선소가 있는 곳이다 보니 원래 별의별 모양의 배가 다 들락거리곤 했다. 대형 바지선 위에 크테시폰 궁의 기본 블록, 해상플랜트 외부의 작업대를 대충 결합시켜놓은 이 희한한 모양의 배도 나름 하이테크의 냄새를 풍기는 것도 같았다.
배는 육지와 적당히 떨어진 시험운항 구역에서 바닷물로 자연 해자를 쌓고 사실상 난공불락의 모양새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이 배의 주변에도 코런덤과 그들이 탄 작은 보트들이 어선과 작업선을 위장해 완벽한 방어선을 짜고 있었다.
“상처는 좀 괜찮아지셨소?”
이디나는 한쪽에서 귤을 까먹고 있는 바에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워프루트 장치를 부수기 위해 떠났던 황궁에서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돌아온 그도 이곳에서 요양을 하며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요즘 바에자 현신이 이상하게 말수가 줄어드신 것 같소?”
이디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독설과 수다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바에자였지만 몇 번의 실패를 겪고 기가 죽은 탓인지 전만큼 말빨을 세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도 바에자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대가 조용하니 영 어색합니다. 어머니가 행방불명되었다더니, 혹시 그것 때문이요?”
“일리안의 성직자들을 동원해 찾고 있으니 뭐라도 알려오겠죠.”
바에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저긴 잘 되어가나?”
이디나는 테라스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망원경에 눈을 댔다.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오늘 장태자와 페로 총리 일행이 상견례를 하고 있을 바드 길자이의 사교 클럽이 보였다.
“쿠마르입니다.”
때마침 13살 남짓 소년 외모의 쿠마르가 접대용 다과와 와인이 있는 접시를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디나는 전보다도 더 왜소해진 그의 몸을 위아래로 죽 둘러보며 킥킥거렸다.
“아침엔 꼴이 형편없다니 많이 나아졌구나. 네가 하도 몸을 많이 해 먹은 탓이니 그러려니 해라.”
‘소년’ 쿠마르는 시무룩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지만 대신관을 원망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이디나는 하임달에서 베흔의 가혹한 고문에도 의연하게 버티고 돌아온 그를 깨어나자마자 치하까지 해 주었었다. 문제는 이디나의 말대로 올해 ‘워낙 몸을 많이 해 먹었다보니’ 성인까지 키운 몸이 남아있지를 않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덜 자란 13살 소년의 몸으로 얼떨결에 대신관의 ‘시동 비서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위대한 현신의 은혜에 감복하고 있사옵니다.”
변성기가 덜 지난 쿠마르의 걸걸한 목소리에 이디나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덕분에 이 멋진 바다 구경도 하고 어디냐.”
이디나가 능청맞게 웃으며 다시 돌아섰다.
당초 마잔다란 외곽의 황량한 사막 쓰레기장에 있던 크테시폰 궁을 서둘러 이곳으로 옮긴 것도 하임달에서 쿠마르가 베흔에 사로잡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적에게 생포된 쿠마르가 크테시폰의 위치를 흘릴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디나는 서둘러 크테시폰 궁을 수에니로 옮겼었다.
그렇지만 실상 그 정보를 흘린 건 쿠마르가 아니고 ―이 자리의 이디나나 바에자 둘 다 아직 인식도 못 하고 있지만, ― 바로 옆에 있는 바에자가 황궁 지하에 놓고 온 ‘또 다른 바에자’였다. 그러니 결과만 보면 쿠마르가 사로잡힌 것이 엉뚱하게 교단 전체를 황제의 손아귀에서 한 번 구해 준 셈이었다.
이디나는 여전히 귤만 까먹고 있는 바에자의 잔에 쿠마르가 가져온 고급 와인을 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는 시원한 망고주스를 담았다.
“힘 내시오, 그러고 있으니 바에자 현신답지 않소. 그대 덕분에 황제가 삼각루트에 손을 못 대게 되지 않았소?”
이디나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도, 바에자도, 황제가 카타콤베 지하의 삼각루트 통제소를 복구해 여전히 하임달로 길을 뚫고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하임달에서도 황제령으로의 길을 뚫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아트위야 현신께서 오셨습니다.”
바깥에서 연락을 받은 쿠마르가 다시 이디나에게 알렸다.
“다녀오셨소? 아트위야 현신.”
이디나가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무언가에 잔뜩 시무룩해진 아트위야는 힘없이 들어와 앉아서는 바에자 앞에 있던 와인을 덥석 집어 벌컥 들이켰다. 이디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상견례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아뇨, 아주 자알~ 되어갑니다.”
“페로 자이센 총리를 보고 오셨군요.”
바에자가 모처럼 킬킬거리며 정곡을 찔렀다. 이디나가 잔에 새 포도주를 채워주며 거들었다.
“뭘 그리 신경쓰시오? 거사를 마치고 나면 그 사내는 그대에게 줄 테니. 하렘에 가둬놓고 부리던지, 이오타 놈처럼 죽여서 장식품으로 쓰던지 맘대로 하시구려.”
아트위야는 페로 이야기 자체가 부담스러운지 얼른 주제를 돌렸다.
“듣자하니 황제가 또 궁에서 안 보인다고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랍니까?”
“글쎄요, 그자가 수술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추정도 있는데……, 어쩌면 이번에 하임달에 왔다는 지원군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르겠고……아직은 모르겠소.”
소년이 되어 돌아온 쿠마르를 힐끔 돌아본 아트위야가 다시 물었다.
“네코 마구스에게선 연락이 없고요? 네포프 칼리 그자가 사제의 키에 관해 불었답니까?”
“글쎄요, 그놈 몸에서도 안 나왔고, 심문해 봐도 ‘세네피스’라는 말만 내내 반복하고 있답니다. 네코 그 친구 능력에 분명 제대로 입을 열게 만든 것일 텐데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소.”
“세네피스에게 줬다는 의미일까요?”
“글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세네피스 그년이 가졌다면 설마 황제를 위해 안 썼겠소? 그 성격에 없는 키라도 만들어낼 사람이지.”
이디나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때, 내내 조용하던 바에자가 입을 열었다.
“콜 수용소에 들렀을 때 그곳에 두고 나온 건 아닐까요? 네포프 그자가 160년 전에도 우리 손에 안 넘기고 버텼던 게 아마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 텐데. 100년이 넘게 갇혀있는 동안 세네피스 그년이 잃어버렸을 수도 있죠.”
이디나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미 우리 세작을 지난밤에 콜 수용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지금은 타르서스 경비군 해안부대로 쓰이고 있더군요. 거기 놈들 군기 엉망인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 않소?”
바에자와 아트위야는 대신관의 순발력에 순간 전율했다. 저 젊은 대신관은 수백 년 관록의 이 선배 마구스들을 항상 앞서가고 있었다. 아트위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거기서도 안 나왔고요?”
“수십 년 폐쇄되어서 손 댄 흔적도 없었는데 빗자루로 쓸었어도 먼지뿐이랍디다. 금속탐지기도 써 보고 돌도 까내 봤지만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왔소, 괜히 뇌물만 날렸지.”
마구스들도 하나같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십 년을 그것 하나만 쫓았던 아트위야가 버럭 짜증을 냈다.
“적도 안 가졌고, 우리도 없고, 거기도 없으면 뭐가 어찌 된 거지?”
그때, 쿠마르가 대신관에게 말없이 다가가 할룩스를 내밀었다. 발신자를 본 이디나는 뒤에서 술만 들이키고 있는 아트위야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저 신경쓰지 마시고요.”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아트위야가 입술에 잔을 댄 채 의연한 척했다. 이디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할룩스를 켰다. 그리고 그 안에선 까만 머리의 아름다운 서부 여인이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트위야는 이번에도 괜히 경치를 보는 척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리야는 인사를 생략한 채 간단하게 용건만 전했다.
“총리가 5일 후에 장태자의 약혼식을 올릴 참이라고 합니다. 제게도 그때 함께 결혼식을 올리자고 합니다.”
이 한 마디에 배의 테라스 위가 일순간 침묵에 잠겼다. 놀란 이디나가 귀를 한 번 후비고 다시 물었다.
“가만, 지금 뭐라고 그랬나?”
“총리가 그날 유람선을 빌려 수에니 앞바다에서 장태자의 약혼식과 자신의 결혼식을 함께 올리겠답니다.”
“허.”
이디나가 혀를 차며 뒤에 있는 다른 마구스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아니, 장태자의 약혼을 어떻게 황제도 없이 할 수 있는 거요? 황실 종친회 승인도 안 거쳤을 텐데?”
“황제는 궐석이고 지금 종친회장을 아메스 황후가 맡고 있는 상황이라 밀어붙이려는 모양입니다. 비빈들과 다른 황자들도 그때 모두 데려올 참이랍니다.”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창백해진 이디나가 다시 알리야에게 따져물었다.
“총리가 황제에 관해선 말이 없고?”
“황제가 최측근들만 데리고 수술을 위해 떠났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4일이나 지났으니 이미 수술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디나는 알리야의 말에 표정이 굳은 채 잠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불룩한 배를 살며시 짚었을 뿐이었다.
“결과는 아직 모르고?”
“결과를 받긴 했을 것 같은데 총리의 속내를 모르겠습니다.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겉으로 억지로 태연한 척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언가 초조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디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체리알을 입에 물었다.
“황제가 행여 죽었을까봐 그러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디나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도 세닌을 통해 페로의 [장태자 즉위 계획]을 알고는 있었다. 페로와 그 수하들은 황제가 죽은 후, 그 사실을 외부에 숨긴 채 자신의 결혼과 장태자의 약혼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위험천만한 황자들을 모조리 제거할 계획을 품고 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디나의 정보망에도 전제조건인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다. 페로가 [황제가 죽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없는 틈을 타 말 그대로 혼자 턱도 없는 무리수를 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잘하면 경사스런 결혼식을 몰락의 시작점으로 만들어줄 수 있겠군요.”
바에자의 약간은 격한 표현에 아트위야가 맘이 안 드는지 입을 씰룩거렸지만 굳이 부인은 하지 않았다.
“그러려면 놈이 지금 선 곳을 늪으로 만들어줘야겠죠.”
황제가 이미 두 번이나 황궁을 장기간 비웠던 일이 있다 보니 세 번째인 이번엔 사람들도 아예 ‘그런가보다’하는 중이었다. 황제에게서 며칠째 아무 연락이 없는 것도 익숙한 상황이 되었고, 문부를 장악한 페로와 군부를 장악한 제네르의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다.
여느 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제네르와는 달리, 페로는 황제와 장태자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발표를 두 번이나 발표하며 유난을 떨었고, 동부대사 알리야와의 결혼 발표도 언뜻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리야와의 결혼은 이전부터 공공연히 오가던 말이었고, 귀족가 종장의 결혼에 ‘원칙적으로는’ 황제가 있고 없고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국구인 대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황제가 없을 때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것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수에니에서 열린 결혼식은 총리 겸 대공이라는 페로의 이름값에 비하면 그리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지도 않았다. 페로가 황실에서 초청한 건 몇 안 되는 황실 내명부 사람들과 내각에 있는 자신의 심복들, 슈트란 가 종장 다히르 경뿐이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황제에 절대 충성하는 군부 인사들이 거의 초대되지 않았다는 건 더더욱 모양새가 이상했다. 황실군이 수에니에서 대대적인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며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렇게 보면 페로가 이렇게 이상한 날짜에 굳이 결혼을 잡은 의도가 더더욱 이상해지는 모양새였다.
결혼식이 열릴 수에니의 유람선에 도착할 때까지 네페티는 이런 이상한 모양새의 결혼식에 무언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페로는 그에게 딸 마하와 꼭 함께 오라는 말만 했을 뿐, 정식 초대장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 사정은 딸 마리안과 함께 온 황빈 솔이나 귀인 에스더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가족들이 도착한 유람선은 스페이스 수송선처럼 크지는 않지만 5층 건물 높이에 수십 개의 화려한 객실, 따스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상(上)갑판의 연회장까지 완비되어 있는, 화려함으로 승부하는 최고급의 수상 연회장이었다. 주기장이 있던 높은 단 위에는 신랑신부가 혼인 서약을 할 테이블과 서약서가 튤립과 안개꽃으로 온통 장식되어 자리를 하고 있고, 단하에는 연회를 위한 파티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려한 치장과 신기한 꽃에 넋이 팔린 마하와 마리안은 셔틀 문이 열리자마자 훌떡 뛰어내려서는 화려한 유람선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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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달에서 죽었던 불쌍한 쿠마르는 여기서 이렇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원래 페로의 결혼식 날(?)은 구성상 다음 연재분에 붙어야 할 내용이었는데 이번 편 연재분량이 좀 적어보여서 그냥 제멋대로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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