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56화 (1,051/1,132)

< -- 105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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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 3일째에 접어든 하임달 분견대 기지는 공포와 마지막 희망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전투병 4백과 공병 1백까지 무려 5백의 적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날이 바로 어제였다. 그렇다면 포위한 적이 총공격을 해올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지난번 보냈던 로켓이 하임달 5번에 무사히 도착했을 날이 또 사흘 전이었다. 황실군 북부 파견군이 연락을 받자마자 예비용 구조 셔틀을 보냈다면 오늘이나 내일부터는 비컨 없이도 희미하나마 통신이 가능할 타이밍이었다.

“저놈 생기긴 무슨 내시처럼 생겨갖고 되게 독하네.”

베흔은 첫날 포로로 잡은 쿠마르가 갇혀 있는 지하 창고를 슬쩍 들여다보고는 이를 갈았다. 베흔이라는 임자를 제대로 만나 며칠째 고문을 당한 이 변종 헤네티는 피로 떡이 되어 얼굴이 수박 만하게 퉁퉁 부어있었다. 그자는 땅 속을 항아리처럼 움푹 파 놓은 깊고 어두운 구멍 밑에서 3일째 저렇게 버티는 중이었다.

“이 짓도 오래 안 해서 기술이 죽었나봐.”

베흔은 피투성이가 되어 부러져 있는 몇 개의 각목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저놈은 그 꼴이 될 때까지 지금껏 ‘난 말단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며 쓸 만한 말은 한 마디도 토해내지 않고 베흔의 속만 팍팍 태우고 있었다.

그가, 아니 정확히는 황제가 제일 궁금해 하는 건 교단 핵심이 있는 크테시폰 궁의 위치였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 한 컵을 벌컥 들이킨 베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3일이나 얻어맞고, 물과 음식을 못 먹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놈은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을 두들겨 패기만 해 봤자 얻는 것이 별로 없을 듯했다.

전 같았다면 저 말도 안 통하는 놈에게 괜히 신경만 쓰느니 죽여버렸겠지만 명색이 헤네티인 저놈을 죽여 봤자 어차피 다시 살아나 적진에서 다시 얼굴을 드러낼 게 빤하다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저놈은 계속 죽여달라고 했지만 목 뒤의 자폭장치를 의사들을 시켜 신경에서 떼어냈으니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각목을 내던지고 창고 한쪽의 작은 컨테이너 작업실로 향했다. 한때 프레소가 이곳 장비를 손보는 데 썼다는 이 작업실 컨테이너는 말 그대로 갖은 잡동사니 기계들의 집합소였다. 이곳 기지에서 쓰이는 장비들은 물론이고 간단한 화학실험실도 있고 한쪽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만든 듯한 기계류들도 보였다.

그때, 웬 부릉부릉하는 소리가 나더니 자이납이 앞뒤로 바퀴 두 개 달린 내연기관 기계를 밀고 들어왔다.

“이거 정말 재밌는데요. 프레소……아니 네포프 그 양반 정말 천재였나 봐요.”

“누구처럼 무릎 다 까진다.”

베흔이 뒤따라 들어오는 우베와 라스에게까지 싸잡아 쏘아붙였다. 바퀴 세 개짜리 트라이크는 시라즈 여단에서부터 탔던 것이라 익숙했지만 바퀴 두 개짜리 이놈은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우베부터 라스의 ―창피해서 말은 못 하지만 몰래 탔던 베흔까지도― 무릎에 생채기를 남겨놓은 범인이었다.

저 괴수 같은 기계에서 처음 중심을 잡고 제대로 달린 건 저 왈가닥 반쪽 가디언 아가씨였다. 그러더니 제대로 맛이 들려 할 일 없을 때 노상 저것을 타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포위당한 상태만 아니라면 기지 일대를 다 바퀴자국으로 수놓을 기세였다.

그때, 갑자기 바깥이 시끌시끌해지는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창고 밖을 향했다. 적이 쳐들어온 줄로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그들은 큼직한 통신장비를 기지 바깥까지 들고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세하 비장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격앙된 세하 비장이 베흔 일행에게 마치 못 믿을 내용을 말하듯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지원 셔틀이 왔답니다!”

코리온은 조종실에서 내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불릿을 막 고치고 시험비행도 몇 번 못 한 상태에서 서둘러 출발한 것이라 돌발상황이 걱정이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캐빈에 있는 불청객 때문이기도 했다. 함께 태울 수밖에 없는 것을 그도 일단 이해는 했지만 그렇다고 같이 있는 것도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분견대 녀석들이 황태후를 만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 합니다.”

조수석에 있던 사에나가 뾰로통해진 코리온에게 입을 열었다. 하임달 5번 행성에서 합류한 그는 캐빈에 빈 자리가 없어 부조종사석에 앉아야 했다.

“또 빨라지셨습니다.”

사에나의 참견에 코리온이 얼른 속도를 늦추었다. 사에나는 조종간을 쥔 코리온의 손을 지켜보며 그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는 코리온이 카렐, 혹은 세네피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양 극단이겠지만.

“자꾸 속도를 바꾸시면 들킬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코리온이 짜증스레 대답했다. 일행의 불릿은 비교적 최근에 ―옛 충돌의 파편인지 뭔지는 몰라도― 고향 행성의 가족이 된 작은 위성 뒤편에 수십 분 째 달라붙어 있었다. 지난번 로켓을 통해 하임달 9번 주변을 교단 수송선이 내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코리온은 수송선과 저들의 감시 비컨이 잡아낼 수 없는 좁은 음영(陰影) 지역에 정체를 숨긴 채 수송선이 분견대 기지가 있는 북국 상공에서 최대한 멀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기체가 작아서 잡기 쉽지 않을 테고 저들도 약점이 있다.”

코리온이 스캐너를 계속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적 수송선은 기지가 있는 상공에서 주기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중이었다. 연료를 아끼느라 엔진을 끄고 궤도를 선회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며칠 걸려가며 오느라 지금도 연료가 거의 떨어진 상태겠지.”

사에나는 이번에 새로 단 통신장치를 다시 지켜보았다. 최대한 감도를 높였지만 분견대 기지가 있는 곳의 대기권 자체가 엉망진창인데다가 셔틀 자체도 음영구역에 있다 보니 되다말다 하고 있어서 그쪽에 준비사항을 전달하는 데만 10분이 넘게 걸려야 했다.

“기후가 최악이라는데 착륙할 수 있겠소?”

캐빈에서 분주히 내릴 준비를 갖추고 있던 카렐이 조종석에 머리를 빠끔히 들이밀며 물었다.

“못 하면 추락이라도 시킵니다. 걸어서 가십시오.”

코리온의 대담한, 아니 황당한 대답에 카렐과 사에나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물어본 게 잘못이지.”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캐빈으로 돌아갔다. 캐빈 풍경을 돌아본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 불릿은 과적도 이만저만 과적이 아니었다. 조종사 둘을 빼면 승객 6명을 태우도록 설계된 기체에 사람 2명분 무게의 카렐이 한 자리를 차지했고, 거기에 식량과 무기, 검은 철성까지의 끊긴 다리를 다시 연결할 부교 자재까지 실었으니 사실상 2, 3배는 더 실은 셈이었다.

보다 못한 코리온이 의자와 냉장고, 선반, 칸막이도 모조리 떼어내고 당장 나는 데 지장이 없는 것들은 모조리 뜯어 내던졌다. 덕분에 승객들은 안락한 의자 대신 캐빈 벽의 벨트에 몸을 묶고 난민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불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카렐이 저린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 세네피스에게 다가가 억지로 웃어보였다. 불릿 자체가 워낙 경량 기종이라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각자는 2개, 3개씩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코리온은 혼자서 모든 엔지니어 역할을 떠맡아야 했고, 사에나는 통신과 정보에 관련된 모든 일을 혼자 떠맡기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세네피스와 니사를 빼면 가디언들 역시 카렐이 직접 추리고 추린 ―한 명만 빼면― 지용을 겸비한 특등급 가디언들이었다. 황제를 지킬 경호대장 카토, 똘똘이 가디언 힐러는 이런 조건에 딱 맞았지만 생뚱맞은 덩치 하나가 그들 중간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이 상황에서도 코를 골고 있었다.

개척일 행사에 구경을 와 있던 네피는 카렐이 또 어딘가 간다는 소식에 다짜고짜 찾아와 무작정 몸으로―정확히는 엉덩이부터―밀고 들어와서는 페로가 함께 가라며 붙여 준 페다이를 완력으로 쫓아내버렸다.

결국 반쯤 얼이 빠진 페다이는 힘 싸움에서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륙 광경을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불편하시면 제 다리 위에…….”

앉아있던 세네피스를 막 안아 일으켜주려던 카렐은 갑작스런 가속에 그대로 손을 놓치고는 데굴데굴 굴러 셔틀 꽁무니에 꽝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다른 승객들도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벨트를 꽉 붙들었다.

조종사 코리온의 늦어도 한참 늦은 경고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출발합니다. 꽉 잡고 계십시오.”

캐빈 꽁무니에 동댕이쳐진 카렐이 멍이 든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질투하려면 말로 할 것이지.”

황제의 농담을 들은 니사의 짧은 웃음은 엄청난 가속도에 몸이 바싹 움츠러들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위성의 음영구역을 빠져나온 불릿은 무서운 속도로 하임달9번 행성의 대기권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카렐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조종석으로 가보니 상공 주변을 선회하던 수송선이 반대편 음영대로 막 넘어가는 중이었다.

코리온은 이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누런 대기권에 가까워졌다. 반대편 수송선도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했는지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수송선 쪽이 목적지인 북극에는 훨씬 가까운 상태이고, 불릿은 행성의 반대편에서 막 접근하려는 참이었다.

“학장 저 밑의 지형은 파악하고 접어드는 거요?”

“모릅니다. 파악이 안 됩니다.”

코리온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말로는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스로틀을 더 높이고 있었다.

“으익.”

카렐은 조종석과 부조종석 손잡이를 꽉 붙들고는 그냥 맡겨두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포장치를 갖춘 적 수송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코리온은 다가오는 적 수송선의 정면으로 아랑곳없이 그대로 전진해 나아갔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요?”

“나포장치 작동엔 10분 이상 걸립니다. 지금 우리를 포착한지 7분 되었습니다.”

코리온은 자꾸 참견하는 카렐을 못 본 척 스로틀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캐빈에서 니사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려오며 불릿 밑으로는 하임달 9번의 샛누런 대기가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는 것이 보였다. 계기판에는 적 수송선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어차피 양쪽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 밖이었다.

눈 깜짝할 새, 심지어 카렐조차도 거의 인식하지 못할 순식간에 마주오던 교단의 수송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흐익!”

그 대담하던 사에나까지 무심결에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정면 돌격에 이쪽보다 더 놀란 건 상대방인 듯했다. 자살공격인 줄로 생각했는지, 놀란 상대방 수송선이 서둘러 방향을 바꾸며 엔진출력을 최대한 강하게 끌어올렸다. 덩치가 커서 일단 붙은 속도는 빨라도 한 번 급하게 바꾼 궤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계산해보니 쫓기며 접근하는 것보다 이편이 더 빠릅니다.”

놀란 적 수송선이 궤도를 이탈한 사이, 코리온이 모는 불릿은 갑자기 수직으로 꺾이며 지면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꺄악!”

캐빈에서 들려오는 니사의 비명이 더 커졌고. 선반이 없다보니 제대로 매 놓지 않은 자잘한 물건들이 구르고 부딪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된 듯했다. 기수가 땅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으니 승객들은 벽에 매달린 꼴이었다. 카렐도 조종석과 부조종석을 팔로 붙들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느라 쩔쩔 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정도 배짱도 없는 자들이라니.”

코리온이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불릿을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기체가 무섭게 진동을 하는 통에 뒤쪽의 캐빈은 이미 전쟁터가 다 된 듯했다. 그런데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황제령에서처럼 눈앞이 트이고 날씨가 좋아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어두워지고 흑갈색 잿빛 대기는 더 탁해졌다.

“스캐너에 지형 데이터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에나의 목소리는 톤이 거의 없었지만 정상적인 정신상태의 사람이 말했다면 비명이 나왔어야 할 때였다. 스캐너가 꺼졌다는 건 계기에만 의존해 불릿을 조종하고 있는 코리온이 장님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사이, 정면 돌진해오는 미친 불릿을 피하느라 궤도를 이탈해 잠시 갈지자를 그리던 수송선이 뒤늦게 꽁무니에 달라붙고 있었다.

“장님이긴 적도 마찬가지겠지.”

이 자리에서 가장 태평한 코리온은 스캐너 대신 지난 로켓에서 세하 비장과 베흔이 보낸 이곳의 착륙궤도 지도를 꺼냈다. 지도엔 기지가 있는 곳의 좌표와 검은 철성이 있는 곳의 좌표 같은 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젠 원시적인 지도와 코리온의 ‘감’으로 그 둘 중 하나에 접근해야 했다.

“대기가 상당히 불안정한데 고도가 낮아지면 기체가 작고 프레임이 약한 우리가 도리어 불리한 거 아닙니까? 저 밑에선 어차피 불릿도 속도를 제대로 낼 수도 없을 텐데요.”

나름 스피드광인 사에나의 물음에 코리온과 카렐 모두 긍정 대신 그냥 침묵만 지켰다.

멀리 짙은 재 너머로 타원형의 고원 분지가 마치 고리처럼 모습을 살짝 드러냈다.

“검은 철성에 직접 착륙하면 좋겠는데!”

카렐이 여전히 조종석 팔걸이에 매달린 채 지도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바쁘게 비교했다. 스캐너가 오락가락하니 순전히 시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했지만 그러기는 시계가 너무 불량했다. 불릿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히면서 분지의 풍경이 점점 가까워졌다.

“분견대와 통신이 됩니다.”

옆에 있던 사에나가 이 상황에서도 평지에 있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너편에서도 ‘연결 성공입니다’라는 고함에 뒤이어 베흔의 고함이 들려왔다.

“도착하신 겁니까?”

카렐을 처음 맞아 준 베흔의 목소리도 곧 누군가의 비교적 침착하고 낮선 목소리로 바뀌었다.

“교대 셔틀 조종사입니다. 기지 동쪽에서 수평 방향에서 접근하십시오. 소형 셔틀이라면 다른 방향은 위험합니다. 24시간 내내 윈드시어가 있으니 접근 각도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검은 철성으로 바로 착륙할 방법은 없나?”

“그곳은 시계가 불량하고 풍속이 너무 강해 수송선조차도 착륙 불가합니다. 여기 좌표는 7855-1156입니다.”

“염병할.”

카렐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코리온은 그쪽에서 지시한 좌표대로 거친 흙먼지바람을 뚫고 공중에 큰 나선을 그리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불릿은 속도는 빠르지만 기체 자체가 가볍고 작다보니 작은 난기류에도 무섭게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요란을 떨었다. 그때마다 캐빈의 비명이 더 커졌지만 그는 마치 ‘한번 당해봐라’라며 일부러 심술이라도 부리는 듯 아랑곳하지도 않고 계속 스로틀을 올렸다. 사실 그것 말고는 안정을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왼쪽으로!”

카렐이 조종간을 잡은 코리온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영문을 모른 채 왼쪽으로 살짝 방향을 바꾼 코리온은 채 1, 2초도 지나지 않아 조금 전까지는 먼지 때문에 거의 볼 수 없던 고봉 정상의 유령 같은 암릉이 옆을 휙 스치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불릿은 막 분지로 접어드는 산맥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카렐이 방향을 틀지 않았더라면 정면으로 들이받았을 위치였다.

“여기부터 검은 재가 느껴지는군요. 산의 고도가 어마어마하니 조심하시오.”

카렐이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코리온에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눈앞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젠 잘 보입니다.”

카렐과 시야를 공유하는 코리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가 거의 사생결단을 하듯 속도를 내며 몰았던 곳은 실은 수많은 고봉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소름끼치는 산지였다. 누런 먼지로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되지 않던 그의 눈앞에서 푸른 물결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몰아치는 바람이 마치 누군가의 붓놀림처럼 수많은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고, 험준한 산맥의 실루엣과 지면의 굴곡이 파랗게 반짝이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코리온의 입에서는 웬만해서는 나오기 힘든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지난 호드르 산에서도 산 주변이 검은 재를 뒤집어쓴 광경은 보았지만 지금 풍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까마득한 지평선 부근까지 온통 채운 소름끼치는 푸른 빛은 그저 풍경으로만 보면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바로 이곳이 160년 전, 하임달의 결전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문득 옆을 돌아보니 이 ‘파란 빛’은 오직 이 웅대한 분지 일대에서만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타리프의 일지엔 이곳 전체가 검은 재로 오염되었다고 되어있지 않았습니까?”

“200년 가까이 누군가 그 재를 치운 모양이지.”

카렐의 굳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던 코리온은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널찍한 분지와 그 분지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득한 고봉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짙은 청색의 거대한 구름을 꼭대기에 이고 있는 웅장한 산이 보였다. 왜 이곳 조종사가 ‘착륙 불가’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산 꼭대기의 구름 속 어딘가가 검은 철성인가 보오.”

지도를 보니 분견대 기지는 ‘파란 구름’을 이고 있는 산자락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더 당혹스러운 건 산과 분지 주변을 뒤덮고 있는 어마어마한 난기류였다. 문제의 산꼭대기의 파란 구름이 마치 솜사탕 퍼지듯 꼬리를 길게 내려 분지 안을 파르스름하게 뒤덮고 있었다.

“사방이 윈드시어입니다.”

“그보다 뒤에 적 프리깃이 따라붙습니다.”

사에나가 되다 말다 깜박거리는 스캐너를 살피며 말했다. 큰 기체 덕분에 훨씬 안정적으로 모래폭풍을 뚫고 온 적 수송선이 어느새 간격을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고도를 더 낮춥니다.”

불릿은 수송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산과 언덕 사이에 바싹 붙어 날기 시작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흔들리는 불릿이 더 크게 흔들리자 뒤쪽에서 ‘셔틀 괜찮냐’는 니사의 호들갑 섞인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카렐의 도움으로 푸른 시야를 확보한 코리온은 더 겁이 없어졌다. 그는 바닥의 흙과 돌덩이에 굉음을 내고 긴 먼지의 궤적을 남기며 눈앞의 언덕을 향해 접근해갔다. 그의 눈에 낀 광학스코프 너머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오른 분견대 기지와 심지어 그곳을 포위한 8백 가까운 적군의 기지까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코리온이 감정 없이 밋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친구들에게 환영식을 받아야겠군요.”

“저거 뭐야!”

숙영지에 갑자기 울린 비상 사이렌에 놀란 네코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가 들은 보고는 ‘불릿으로 추정되는’ 것이 이곳 대기권에 난입했다는 것이었고, 그는 짙은 흙먼지에 혼비백산에 제대로 조종도 안 되는 불릿을 대형 수송선이 멋지게 낚아챘다는 보고를 기다리며 막사 안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동쪽을 보십시오!”

헤네티의 고함에 네코가 영문도 모른 채 동쪽을 돌아보았다. 뭔지 몰라도 동쪽 지평선 부근에 시커먼 먼지가―이미 하늘을 덮은 먼지폭풍에 더해―양쪽으로 V자를 그리며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웅 하는 낮은 저주파 음이 땅바닥을 통해 전해져오고 있지만 아직은 뭐가 어찌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V자 먼지의 중간에서 뭔가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을 아주 짧게 보았다. 정말로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 뒤에 그가 본 건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현신님! 피하십시오!”

옆 막사에서 나온 코런덤 헤네티가 네코에게 몸을 달려들어 바닥에 바싹 눕혔다. 일순간 토네이도에 가까운 광풍이 기지를 뒤집어엎었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나동그라지는 병사들과 작업자들, 산산조각이 나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가설 막사의 벽과 지붕, 창문, 포장이 찢겨 회오리치며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는 군용 비상식과 부서진 건량들, 구멍 난 깡통, 심지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과 삽자루까지 사방을 날아다니며 포위군 기지를 일거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에이! 씨발! 저걸 누가 놓쳤어!”

말리는 헤네티를 뿌리치고 억지로 고개를 들었던 네코의 이마를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 조각이 사정없이 후려쳤다.

“우압!”

불릿은 포위군 위를 손에 잡힐 듯 낮은 고도에서 스치고 날아가 한 바탕 뒤집어놓고는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해 돌아오기 시작했다. 먼지 속에서 코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들과는 달리 저 불릿은 이 짙은 먼지 속에서도 마치 대낮처럼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듯했다. 이쪽을 향해 다시 기수를 돌린 불릿이 엄청나게 가속을 붙였다.

“이런, 귀 막아!”

이미 풍비박산이 나 버린 포위군의 기지 위를 불릿의 무시무시한 소닉 붐이 꽝 소리를 내며 또 한 번 후려치고 지나갔다. 이들의 수송선은 이제야 고고도에서 접근해오기 시작했지만 이번엔 분견대 기지에서 쏘아 올리는 장애파가 작동하면서 급히 접근을 멈추고 기수를 돌려야 했다.

“이게 다 뭐야.”

귀가 멍멍해진 네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곳을 한바탕 헤집은 불릿은 언덕 위의 분견대 기지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저놈 속도 늦추잖아! 우리 장애파 발생기 어딨어! 이 굼벵이들아!”

네코가 뒤늦게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장애파 발생기는 제대로 속도가 붙은 불릿에는 무용지물이지만 저렇게 속도를 낮춘 상태에서는 추락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저, 저기 저어…….”

하지만 악을 쓰는 네코에게 공병대 사관 한 명이 멍한 얼굴로 기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들이 가져온 장애파 발생기 2대가 렌즈에 금이 쩍 간 채 흙더미 사이에 파묻혀 뒹굴고 있었다.

“염병할!”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 주변을 돌아보며 네코가 분통을 터뜨렸다. 파편에 맞아 쓰러져 못 움직이는 병사들도 부지기였고,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보급품들이 사방팔방 부서지고 흩어져 말 그대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가슴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도록 한 건 그저 기지가 이 꼴이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로서는 차마 창피해서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바로 저 불릿은 몇 달 전, 그가 쓸데없는 욕심으로 이디나를 모함하려다가 도리어 카렐에게 빼앗겼던, 바로 자신의 불릿이었다.

멀리, 불릿이 언덕 위의 분견대 기지에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550년 전 살아서, 혹은 그저 DNA로 이곳을 떠났던 마지막 사제 카히나와 그를 따랐던 용사들 후예의 화려한 귀향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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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시작부터 살짝 좀 쎄게 나가봅니다. ㅎㅎㅎ

맥을 끊지 않으려다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다음회가 약간 줄어도 속상해하지 마시고요;;;;

(내일 볼일이 있어 하루 일찍 올립니다;; 다음 연재는 6일쯤 후에 올릴 것 같습니다. ^^;;)

초장인데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미워요~~~( ̄∇ ̄)ブ~~★

노블레스, 프리미엄도 도장 좀 찍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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