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55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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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에 접어드는 황도 시내에 불이 하나 둘 켜지면서 황도의 시내는 어느 날보다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큰 경축일 행사를 앞두고 있는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133층 집무실에서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카렐은 갑자기 소리를 내는 할룩스를 흘끔 보았다. 그곳에선 ‘최종 시험비행 완료되었습니다. 연료 충전이 4시간 후 끝날 예정입니다.’라는 메시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발신자인 아들 주페의 이름에 픽 웃었다. 코리온은 수리하는 내내 이 신기한 비행체에 호기심을 느낀 천재아들을 붙들고 이것저것 꼼꼼하게 직접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 코리온이 하임달에 관한 자료를 모으느라 바빴던 마지막 며칠은 사실상 주페가 수리를 전담하다시피 했었다.
덕분에 이젠 조종법까지 배워 시험비행에서는 코리온과 주페가 번갈아 조종간을 잡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무면허 비행’에, 그것도 미성년자라며 펄쩍 뛰었지만 다행히 주페는 공중 묘기로 사람들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폭비족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둘의 나이가 뒤바뀐 게 아니냐’며 수군거릴 만큼 부드럽고 점잖게 기체를 몰아 사람들의 턱을 떨어뜨려 놓았다.
“이제 떠날 때가 다 됐나.”
카렐은 하임달의 분견대에서 [비상 로켓]을 통해 보낸 베흔의 편지를 새삼 다시 열어보았다. 통신이 두절된 지금, 이곳에서 그곳 사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지만 발신 날짜로 보아 이미 며칠 전 내용이었다. 그곳엔 검은 철성으로 올라가는 다리가 끊겼다는 내용과 그곳에 와 있는 5백여 명의 교단 병력, 분견대원들의 전력, 어딘지 미심쩍은 프레소라는 인물에 관해 내용까지 꼼꼼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 프레소라는 놈 정체가 뭘까.”
카렐은 여전한 의문을 안은 채 파일을 덮었다. 언젠가 케스난의 뒷조사에서도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카렐은 바로 그자가 하임달 분견대원이었다는 소식에 나름 무언가 심증을 얻긴 했지만 일단은 심증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카렐은 할룩스를 켜고 하임달 5번 행성에 가 있는 보안국장 사에나를 불러냈다. 그는 황제의 부름에 여느 때처럼 바로 바닥에 꿇어앉아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어느 때 봐도 손을 벨 듯 단정하던 그의 코트가 약간 구겨져 있었고, 항상 날카롭던 얼굴도 어딘지 꺼칠해 보였다. 그 이유는 말하나마나였다.
“불릿이 다 고쳐졌다고 하니 그대의 팔찌를 한 번 더 써야 할 것 같다. 하임달로 갈 때가 됐다.”
사에나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본 카렐이 짓궂게 한 마디 덧붙였다.
“거길 가면 자네 차림도 훨씬 단정해지겠지?”
웬만해서는 무안해하는 법이 없던 사에나가 코나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당황하고 있는 그를 위해 카렐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쿠트라스 조선소의 군용 수송선 개조는 어떻게 되어 가나? 검은 철성을 지키려면 그네들이 필요할 텐데.”
“2척을 동시에 했더니 진척이 늦어 일단 한 척만이라도 최대한 빨리 마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철야작업 중이지만 아직 열흘은 걸릴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시라즈 여단은 남부와 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습니다.”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친위군의 시라즈 여단 1천의 전사들은 황제가 교단과의 일전을 준비하며 지난 30년간 키워 온 새로운 X 전사들이었다. 당초 삼각루트가 완성되기 이전 이들을 투입해 검은 철성을 선점할 참이었지만 그들을 싣고 갈 수송선 개조가 늦어지고 있는 게 탈이었다.
“3000급이지만 개조 후엔 많이 태워야 800명 남짓이라고 합니다. 보급품과 장비 포함하면 다시 그 절반으로 줄어들 겁니다.”
카렐은 내심 낙담했지만 일단은 다른 수를 내 보기로 했다.
“통신 중계 비컨 설치는 아직도 안 되고 있나?”
황제의 물음에 대담한 사에나가 그답지 않게 움찔했다.
“파견군에서 예비셔틀을 보내어 9개를 설치했지만 그 중 7개가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거의 숨바꼭질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는 백 날 설치해도 통신을 재개통하긴 어렵습니다.”
“놈들이 부수건 말건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정으로 계속 비컨을 설치해.”
사에나가 눈동자를 살짝 크게 치켜떴다. 그가 아는 황제는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에나와의 연결을 끊은 후, 카렐은 방금 열어보았던 파일을 다시 펼쳤다. 베흔의 편지 뒤에는 하임달 5번 행성에 가 있는 케스난이 보낸 쪽지가 꽂혀있었다. 그곳엔 ‘이틀 후면 사설 비컨 설치가 끝날 것 같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이 남아있었다.
“사에나 그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카렐이 픽 웃었다. 정규군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비컨을 재설치하는 동안, 뒤에선 케스난이 고용한 사설 탐험꾼들이 하임달 9번과의 통신을 거의 복구해가고 있었다. 이런 중계기는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암호문에 가까운 짧은 문장만 전송하도록 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곳과 통신을 재개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도착할 즈음이면 쓸 수 있겠군.”
카렐은 그 밑의 편지를 열었다. 이번엔 집자마자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만으로도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못 말려.”
카렐이 쓴웃음과 함께 봉투를 열었다. 그곳엔 가는 펜으로 있는 멋, 없는 멋 다 내어가며 쓴 요란스런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쓸데없는 내용이 절반이라 문장은 굉장히 길지만 말하려는 내용은 간단했다.
“그냥 남부 일이 잘 되어간다고 하면 될 걸.”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국 태후 실리페 베로]라고 쓰인 편지를 방금 전 케스난의 것과 함께 촛불에 태워버렸다. 그는 며칠 전, 고향 남부의 공기를 한동안 맡아보고 오겠다며 시녀와 시종들까지 무르고 사가의 하인들 몇과 개인 경호원만 거느리고 남부로 휭 하니 떠나버린 후였다. 선제의 붕어 때도 내빼기로 살아남았던 그가 황제의 흉사를 대비해 이번에도 일찌감치 도망친 것일지 모른다는 뒷소문은 황실 내에도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카렐은 이런 소문에 가타부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한량인 실리페가 자신 없이는 지금처럼 살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한때 북부 몰락의 주역을 담당했던 그 똑똑한 남부 미녀에게 지금껏 베풀어 준 값을 돌려받을 때였다. 그는 지난 몇 달간 쏠쏠한 미끼 정보를 남부에 줄줄 흘려가며 친분을 쌓고 자신의 임무를 아주 잘 수행하고 있었다.
남부 제후들이 순식간에 25만이라는 병력을 증원한 것도 하임달의 가치를 마구 뻥튀기하고 다닌 실리페의 작품이었다. 남부제후들은 이후 하임달에서 차지할 영토 지분인 소위 [하임달 지분]을 놓고 경쟁적으로 병력을 늘리는 중이었다.
누군가 들으면 황제가 미쳤다며 기절초풍하겠지만, 카렐은 그동안 견고함에 속을 썩었던 남부보병대를 이번엔 최대한 많이 ‘규모에서’ 불려놓은 후 하임달에 끌어들일 참이었다.
카렐은 다시 책상을 향해 돌아섰다. 평소 단정하던 책상 위와 바닥엔 오늘 저녁엔 자신의 키보다도 높이 쌓인 서류더미가 3개나 있었다.
“잘들 하겠지.”
카렐은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잘 쓰던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책상머리의 종을 흔들었다. 밖에서 오늘의 큰 행사를 위한 의관을 들고 준비하고 있던 십여 명의 시녀와 시종들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시겠습니까?”
시녀장의 물음에 카렐은 대답 대신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려보였다.
그들은 황제의 몸에 향유를 바르고 곧 있을 행사를 위해 검은 튜닉을 입혀주고 땅에 죽 끌릴 만큼 긴 망토와 머플러, 케이프를 어깨에 걸어주었다. 여기에 금제 어깨띠와 갖은 악세사리로 말 그대로 눈부시게 단장을 끝낸 황제는 키 차이 때문에 시녀가 제대로 얹지 못한 서클렛과 조우관을 직접 똑바로 고쳐 썼다.
“나가면서 비서관들 들어오라고 해라.”
시녀들에 뒤이어 줄줄이 들어온 비서관들은 책상에 쌓인 수백 건의 서류들에 경악을 했다. 황제는 큰 결정이 아니고서는 웬만하면 아랫사람들에게 일임시켰고, 자신이 직접 손을 대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다보니 황제에게 올라온 서류들도 대부분 그냥 캐비넷에 처박히거나, 내각의 실무자들에게 내려가 버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처박혀 있던 서류들 모두가 황제의 책상 위에 있었다.
“책상 위의 건 총리실로 보내고 왼쪽에 있는 건 이부로, 오른쪽의 것은 황후에게 보내라.”
비서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황제의 서명과 메모까지 꼬박꼬박 되어 있는 서류들을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2시간동안 집무실에서 아무 말도 없어 비서관들을 긴장하게 했던 황제는 그새 이 많은 서류들을 다 처리해 놓은 후였다. 비서관들은 황제가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비서관들까지 내보낸 후, 정말로 휑해진 집무실에 다시 혼자 남은 카렐은 창가에 바싹 다가가 섰다. 오늘은 쿠트라스에 첫 이주민이 발을 디딘 것을 축하하는 [개척일]이 있는 날이다 보니 아케메니아 시내 곳곳엔 휘황한 불빛과 함께 축포와 곧 있을 대규모 열병행사 준비로 한바탕 들었다 놓았다가 하는 분위기였다.
황궁 앞 광장 주변은 매년 개척일마다 황실이 10만 명의 황도 시민들에게 베푸는 저녁 파티에 참석하려는 시민들로 이미 인산인해였다. 아직 황제령은 제후지역의 기근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기근 소식을 여기저기서 접해서인지 며칠 전 공짜로 배포한 이 파티 참석권을 놓고 사람들이 곳곳에서 아귀다툼과 패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
카렐은 말없이 시내 전체를 둘러보았다. 지난 30년간 황도의 풍경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제국의 중심이면서도 정작 거주자는 많지 않아 어딘지 황량한 도시사막 같던 황도는 인구가 몇 배로 늘고 도로망이 발달하면서 이젠 황도 성벽 내에 다 포용하기 어려울 만큼 북적거리는 진짜 사람 사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황제령뿐만이 아니고 제국 전체의 인구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늘어 있었다. 7, 8년 전의 출혈열로 인구 증가가 한 번 휘청하지 않았더라면 제국 인구가 10억이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때 황실을 흐뭇하게 했던 그 인구증가가 이젠 극심한 식량난으로 역풍이 되어 돌아왔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고비만 넘어서면 돼.”
카렐이 그새 많이 여윈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기근과 수명개조 파괴, 검은 재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출혈열의 악몽을 떨치고 막 승승장구 발전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복잡해 보여도 결국은 한 가지 문제지.”
카렐의 머릿속에 굶주리고 있는 제국민들과 그 틈새를 타고 암시장을 도는 오염된 곡물들, 수명개조를 되살릴 55호 바이러스, 아픈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목에 있는 잔딕이 떠올랐다.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한 곳에 귀결되는 문제였다.
“이익.”
갑작스런 통증에 카렐은 창에 기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발작에 이어 낯선 손목의 통증은 이제 점점 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까지 온 건가?’
니사는 ‘최후의 시나리오’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려 하지 않았지만 카렐은 이미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죽음과 삶 사이를 이웃처럼 오간 그는 주변 사람들이 황제의 운명을 놓고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는 와중에도 점점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말년의 오르마즈가 ‘평온해 보였었다’는 니사의 말이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가야지.”
카렐은 집무실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제국민들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개척일]은 이마 원년, 정확히는 939년 전, 첫 번째 대멸망에서 도망친 이주민들이 쿠트라스에 첫발을 디딘 날을 축하하는 쿠트라스 력(曆)의 신년 행사였다. 교단 시대만 해도 현재 아케메니아 력(曆)의 신년인 [창조일]과 함께 한 해의 가장 큰 행사였다.
하지만 당시 첫 이주민들의 종교가 이후 [침묵의 자매들]로 발전했다보니 제국을 건국한 유학자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날이기도 했다. 결국 제국 건국 이후엔 쿠트라스가 있는 북부와 사교도 외에는 챙기는 사람이 없는 그저 그런 날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었다.
즉위 이후, 카렐은 종교 때문에 매도당했던 이 날을 국경일의 하나로 부활시켰고, 이젠 서부 정도를 제외하면 제국 전역에서 큰 축제처럼 즐기는 날의 하나로 발전시켰다. 그는 사교도들이 제국과 본격적으로 융화를 시작한 출혈열 이후 아예 규모를 더 키워 황궁 광장에서 열병 행사까지 열었다. 오늘도 친위군 가디언 여단 500명, 황실군의 역사 깊은 1군단과 슈로 기사단, 슬레이프니르까지 참석해 총 1만 명 규모의 어마어마한 열병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런 행사마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니 난 확실히 아직 젊은가봐.”
황궁 지하로 내려와 열병을 준비하던 카렐이 씩씩대는 말 시알피를 달래며 웃었다. 황제 못지않게 화려하게 단장한 시알피에 오른 카렐은 광장으로 이어진 개선로를 향한 문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시종들이 안장 아래로 길게 늘어진 황제의 화려한 망토자락 끝이 바람에 따라 적당히 흔들리도록 잘 바로잡아주었다.
“제국민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카토의 고함에 뒤이어 황궁 본관의 남쪽 개선로로 열린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두운 저녁하늘 아래 휘황한 불빛을 뿜으며 십만 여의 인파들로 북적거리는 황궁 광장과 웅장한 건물들의 실루엣이 황도의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개선로 양옆으로는 번쩍이는 중무장을 갖춘 5천의 황실군 1군단과 1천 슈로 기사단, 슬레이프니르가 황제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 뒤로 10만이 넘는 황도 시민들이 황제와 황실을 연호하며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가자.”
시알피가 움직이는 소리에 황제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렐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제의 앞으로는 기병 2백여 기가 선봉을, 5백의 보병들이 각 군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나아가고 있고, 양 옆에는 총리 페로와 병부대신 제네르가 약간 뒤처져서 옹위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말을 탄 4명의 비빈들과 귀인 에스더, 그리고 지금은 저세상에 있는 첫 귀인 이라즈의 유품이 담긴 항아리를 실은 화려한 가마가 그 뒤를 따랐다. 황태후이며 대제학인 세네피스는 이 행사에 반감을 지닌 유학자들의 요청으로 이 행사에만은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비빈들의 뒤로는 5명의 대신들과 각부 관리 2백여 명이, 제일 뒤로는 나머지 기병과 1군단 보병 2천여가 발소리를 탁탁 맞춰가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멀리서 ‘진짜 제국 황제’를 본 장병들과 시민들은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으며 제국의 안녕을 기원했다. 빳빳하게 세운 목깃 때문에 비록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장대한 체구와 당당한 자태, 부리부리한 무지개빛 눈빛을 빛내며 망토를 펄럭이고 나아가는 제국 황제의 모습에 시민들은 마치 자신들이 황실 사람이라도 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소수의 특권층과는 끊임없는 다툼을 벌여야 했지만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세나우스 4세, 카렐 대제는 그들이 원하던 군주였다. 비록 너그러운 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수많은 부패와 혼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이 원했던 건 강력하고도 공정하고 현명한 군주였다.
특히나 황제가 나타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열성적으로 따라다니는 노예 2세 젊은이들은 멀리서 본 그의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 꿇어앉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제국 상류층이 아직까지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속박을 시도하는 가운데 황제는 그들에겐 구원자이고 유일한 보호자였다.
카렐은 자신을 맞이하는 수많은 장병들의 어마어마한 함성과 황도 시민들의 환호성을 느끼며 은하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는 이전 유평황제가 그랬듯, 대중의 지지라는 것이 ‘이불 속에서의 사랑고백’ 만큼이나 믿을 수 없다고 되뇌곤 했지만 이번만은 저들의 환호성을 보이는 그대로 즐기기로 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살아있는 황제로서 참석하는 마지막 공식 행사일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총리, 상장군.”
카렐의 목소리에 둘이 말머리를 살짝 움직여 그의 양옆에 바싹 붙어 섰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카렐의 어딘지 어색한 말투에 페로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카렐은 여전히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나를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페로가 발끈하며 뭐라 말하려는 것을 카렐이 손을 들어 막았다.
“난 오늘밤 하임달로 떠납니다. 내 없는 동안의 제국을 총리에게 맡기겠소.”
제네르가 내심 불안한 표정으로 페로를 슬쩍 곁눈질했다. 비록 상급귀족이 되었긴 해도 그는 여전히 평민 이하를 중시하는 황제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귀족을 대표하는 페로와는 정적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같은 길은 아니었다.
“총리.”
카렐이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페로가 더 긴장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내 죽은 후에 총리가……아니, 총리의 지지자들이 내 식솔들에게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짐도 대충은 알고 있소.”
카렐은 당황한 페로가 반사적으로 뭐라 변명하려는 것을 다시 손으로 막았다.
“그들이 형제들을 죽이고 오른 병약하고 어린 황제를 무슨 식으로 주무르려 할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제국의 영화는 그날로 끝장일 거요. 설사 내 아이들이 봉변을 피할 수 있다 해도 다시 제국은 황자들을 지지하는 세력끼리의 전쟁터가 되겠지. 결국은 가짜 사교에게 멸망할 테고.”
충격을 받은 제네르와, 당황한 페로의 표정이 짧게 교차했다. 황제는 그 둘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한 마디를 꺼냈다.
“그러니……내 자식들을 다 해치고 억지로 카이를 황제로 앉힐 바엔 차라리 총리가 합법적으로 제위에 오르고 식솔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폐하!”
듣다 못한 제네르가 입을 열었다가 카렐의 매서운 눈총을 접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카렐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페로에게 내밀었다. 무언지를 짐작한 페로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지만 카렐이 재차 그에게 내밀었다.
“짐이 이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총리를 후임 황제로 봉한다는 자필 유언장이요. 수결과 옥새도 들어갔고 위조 식별 코드까지 넣은 완벽한 문서니 이게 있으면 죄 없는 황자들과 내 비빈들을 해치지 않고서도 합법적으로 제위에 오를 수 있을 거요. 상장군이 증인이 되어 주고.”
“제발, 전 받을 수 없습니다.”
페로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지만 카렐은 그의 안장에 서류를 강제로 쑤셔 넣었다.
“돌아가서 꼭 펼쳐보시오.”
황제의 쇼킹한 결정과 붉어진 페로의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네르는 페로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자신을 옆에 두고 황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발표라면 분명 여러 대신들을 앞에 놓고 해야 정상이었다. 그는 황제가 페로에게 준 문서가 실상 ‘너희 속셈을 다 알고 있으니 내가 없을 때 어찌할지 두고 보겠다’는, 페로 수하들에 대한 황제의 경고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황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짐이 참견할 일은 아닌 것을 잘 알지만…….”
카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우드 부인과 결혼하든, 나람 부인과 결혼하든 상관없지만……알리야 부인은 왠지 느낌이 좋지 않소. 이유를 물으면 할 말은 없소. 심증만 있지 확증 따윈 없소. 그러니 알아서 판단하시오.”
이미 창백해져 있던 페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더 사라졌다.
때마침 황제 일행이 황궁 광장에 도착하면서 환호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황제를 앞뒤로 옹위하던 정규군들이 광장에 마련된 사열장에 일렬로 줄을 맞추기 시작했다. 카렐이 이번엔 제네르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훈련 계획은 잘 잡혀가는가?”
“예, 15일 후, 수베르에서 친위군와 황실군의 대규모 합동 기동훈련 일정을 통보했습니다. 9개 정규군단과 북부, 서부, 동부 파견군, 기병대, 가디언 합쳐 총 20만 대군과 수송선 40척 동원 예정입니다.”
카렐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20만이면 황실군, 친위군 합쳐 30만 조금 넘는 제국 중앙군에서 무려 3분의 2를 동원하는, 기록적으로 거대한 군사훈련이었다.
물론 훈련은 대군을 동원하려는 명목일 뿐이었다. 그는 원래 있는 연례 합동훈련을 1달 가까이 앞당겨 일부러 하임달로 가는 남부 쪽 루트가 완성되는 시기에 맞춰놓았다. 그것도 하임달과 이웃한 지역이니 남부도 뒷골이 서늘해질 수준이었다.
제네르가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남부가 야욕을 접을지는…….”
“짐은 그놈들이 야욕을 접기를 바라지 않는다. 놈들은 루트가 열리자마자 하임달에 대군을 보낼 거다. 아니, 그래야 한다. 황제령으로 선포한 하임달에 상륙하는 건 선전포고를 뜻하니까.”
황제의 호전적인 대답에 당황한 제네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렐이 전방을 주시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응전 차원에서 남부를 바로 칠 수 있다는 의미다.”
카렐의 대답에 더 놀란 건 제네르였다.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제네르에게 카렐이 얄미울 만큼 담담하게 지시를 이었다.
“큰 전투를 치를 수 있을 충분한 군량과 장비를 확보해라. 내 서부에도 지시를 해 놨다. 작전 직전 민간 수송선을 강제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주마.”
“폐하…….”
“놈들의 하임달 상륙 즉시 그대가 황실군 6개 군단과 파견군까지 13만 대군을 이끌고 텅 빈 비엔을 쳐라. 이참에 남부를 아예 끝장낸다.”
제네르가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수백 년간 제국의 그 많은 혼란의 와중에도 남부의 수도인 비엔은 몇 번의 노예폭동을 빼면 단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는, 말 그대로 무풍지대였다. 그곳에 황제의 군대가 진주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황제가 당연히 하임달부터 지키려 할 것이라 생각했던 제네르는 순간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허나……가용 황실군 대부분을 남부로 보내시면 하임달은 대체…….”
제네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60만에 육박하는 남부제후군에서 절반만 하임달에 간다고 해도 남은 병력으로 막기는 불가능했다. 거기에 그들의 편을 든 이스마엘 가와 코런덤, 헤네티 부대와 이전 근위대를 합치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임달은 친위군 1만과 황실군 6만, 북부와 서부제후군 14만으로 내 직접 막겠다.”
카렐이 무지개빛 눈을 반짝이며 멀리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임달의 결전을 마저 마무리해야지.”
‘개척일’의 성대한 행사가 끝난 후, 황제 집무실과 처소가 깨끗이 비어 있었지만 아무도, 심지어 비빈과 아이들도 놀라지 않았다. 총리 페로는 황상께서 제국의 미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고만 밝혔고, 자신은 황제의 정당한 대리인인 카이 장태자를 보좌하며 황실을 수호할 것이라며 엄중히 선언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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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이 떠나는 이번 편을 끝으로 [파트15. 고향으로 가는 길]은 접습니다. 원래는 한두 달쯤 더 연재할 분량이었지만 과거편과 일부 내용이 빠지면서 확 줄었군요.
다음 회부터는 대단원인 [파트16. 신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마 지금까지 나온 혈맥의 영웅들이 총동원된 초호화캐스팅(?)이 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오늘 노블레스에 연재중인 2부에 쿠폰 왕창 주고 가신 분께선~ 복받으실 겁니다. 하하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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