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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053화 (1,048/1,132)

< -- 1053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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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연락을 받은 세하 대장과 코나는 복구 현장에서 가까스로 돌아온 복구팀을 기지 바깥의 저지대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30명의 복구팀에서 3명이 중상을 입었고, 대여섯 명은 가벼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단은 한 명도 잃지 않고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을 천운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하와 함께 나온 발굴단 의사들이 서둘러 부상자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위치가 들통 난 건 아니죠?”

세하가 숨을 고르며 부상병을 내려놓는 베흔에게 달려와 다급히 물었다. 부상병을 둘이나 짊어지고 달려오느라 녹초가 된 베흔이 짜증을 버럭 냈다.

“길을 무너뜨려서 떨구었다니까 사람을 못 믿냐?”

코나가 분위기를 또 험악하게 이끄는 베흔을 얼른 막아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탑에 병사들도 좀 올리고, 발리스타도 확인하고 해. 흔적을 밟아 따라올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코나의 지시에 세하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옛 원한이 겹겹이 쌓인 베흔과는 달리 코나는 한때 오르마즈가 직접 뒷손을 써서 구해주었던 사람이고, 이들과는 나름 통하는 면도 많았다. 덕분에 분견대원들과 툭하면 으르렁대며 부대 운영에는 나 몰라라 하는 베흔과는 달리 코나의 지시는 세하나 마르텔로도 두말 없이 복종했다. 어쨌든 코나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친위군의 장군이니 베흔을 빼면 이 기지에서 제일 상급자였다.

“그나저나 프레소 사관은 어딨습니까?”

세하의 물음에 베흔이 뒤쪽을 가리키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산토스하고 인부 둘하고 후미에서 철조망 점검하고 따라오는 중일걸.”

프레소가 후미에 처져 있다는 말에 표정이 확 굳어버린 세하가 병사 둘에게 뒤따르라고 손짓하고는 서둘러 내려가려 했다.

베흔이 표정을 돌변하며 그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이젠 말해 봐라.”

세하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베흔은 아랑곳없이 따져 물었다.

“프레소라는 놈 정체가 대체 뭐냐? 그놈이 진짜……네포프 칼리냐?”

베흔의 물음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세하가 신경질 섞인 투로 되물었다.

“왜요? 누군지 알면 협박해서 황태후께 뭐라도 뜯어내려고요?”

버럭 화가 치민 베흔이 다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놈이 진짜…….”

“시간 없으니 빨리 놓기나 해요!”

세하가 베흔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성큼성큼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뭐 저런 놈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흔은 마중 나온 병사들과 의사들, 함께 도망친 복구팀원들을 추슬러 가파른 언덕 위 기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휴, 내가 저 양반 때문에 못 살아.”

둘의 싸움을 난처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자이납은 코나의 소매를 잡아끌고 스리슬쩍 세하를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공병들을 책임지는 프레소는 혹시 모를 적의 추격을 대비해 언덕 아래 철조망 쳐 놓은 곳을 확인하고 오겠다며 병사 2명과 함께 뒤처져 있었다.

“여기서 저 양반한테 뭐 맡겼다가는 당최 되는 게 없겠네요.”

자이납의 불평에 코나도 수긍하는 듯 별 대답 없이 옆을 걸었다.

그렇게 내려가던 자이납의 귀에 짙은 모래폭풍 너머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분명 철조망에 걸어놓은 깡통 떨어지는 소리였다. 움찔한 자이납이 세하와 코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세하가 억지로 웃어보였다.

“실수로 떨어뜨린 거겠죠.”

세하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멀리 모래폭풍 너머에서 웬 시뻘건 불빛이 번쩍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염병할!”

놀란 일행은 일제히 불빛이 보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철조망 쪽에서 멀리서 헐레벌떡 올라오고 있는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제일 먼저 도착한 인부가 대장 세하의 품에 와락 안기며 바들바들 떨었다. 옷과 망토는 온통 완전히 타버렸고 다리와 팔 한쪽이 속살이 다 드러날 만큼 검붉게 타들어가 악취를 풍겼다. 인부는 불꽃에 고글이 깨져 눈도 뜨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쫓아와요! 놈들이……놈들이…… 기습을, 아, 아악! 손대지 말아요!”

갑옷도 없이 화염방사기의 불꽃을 뒤집어쓴 인부는 말리려는 세하의 품 안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프레소 그 양반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자이납은 좀 더 뒤처져 달려오고 있는 세 개의 그림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온몸에 불꽃을 뒤집어쓰고 몸이 굳어버린 인부를 산토스와 함께 양쪽에서 부축한 채 헐떡거리며 달려오고 있는 프레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철조망을 점검하다가 기습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빨리! 빨리 이쪽으로 와요!”

그들에게 허둥지둥 달려가던 자이납은 달려오는 프레소의 뒤에서 땅을 뒤덮고 바싹 쫓아오고 있는 ‘길고 검은 줄’에 소스라치게 놀라 멈칫거렸다.

“엄마야, 저놈들은 다 뭐야! 어떻게 쫓아온 거지?”

자이납의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프레소와 산토스, 인부의 뒤를 쫓아오는 적은 언뜻 어림해도 50명은 넘어보였다. 프레소 일행을 지켜주고 있는 건 산토스가 등에 지고 있는 묵직한 강화방패뿐이었다.

“으엑!”

순간, 자이납은 귀 옆을 쌔액 스치는 무언가에 기겁을 하고 놀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몇 발의 볼트, 마우저가 그의 머리 위, 옆을 휙휙 날아갔다.

“저놈들 미쳤나!”

고개를 쳐든 자이납은 프레소와 함께 인부를 끌고 오던 산토스가 방패 위를 스쳐 날아든 볼트에 목 아래를 명중당해 벌렁 쓰러지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프레소가 달려들어 산토스의 방패를 대신 쥐고 쓰러진 산토스와 인부에게 쏟아지는 사격을 혼자서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그 혼자는 둘을 다 끌고 올 수가 없고, 적은 너무 많았다.

“맙소사, 빨리 좀 와요!”

자이납은 조금 뒤쳐져 쫓아오고 있는 코나와 세하에게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고작 100척(30m) 남짓 너머에선 프레소와 산토스, 죽어가는 인부가 몰려드는 적과 사격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다급해진 자이납은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 나갔다. 이번엔 그를 향해 수십 발의 볼트와 마우저가 날아들었다. 강화섬유를 덧댄 그의 방패가 완전히 누더기가 되며 그가 다시 뒤로 벌렁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이납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순간, 고작 몇 발짝 앞에서는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프레소를 향해 대여섯 명의 적병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자이납은 눈앞에서 우베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끔찍한 날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는 함께 오지 않은 베흔을 미치도록 원망했다.

“우씨!!!”

이성을 잃은 자이납은 한 손에 마우저를, 한 손에 누더기가 된 방패를 쥐고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그가 쏜 마우저에 적병 한 명의 머리가 박살이 나며 모래바람 속에 흩어졌다. 한 명이 자이납을 막으려 앞으로 나섰지만 그가 휘두른 방패에 얼굴을 얻어맞고 뒤로 붕 날아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사이, 적병 둘이 버둥거리는 프레소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 바닥에 쓰러뜨리고 있었다.

“안 돼!”

자이납이 칼을 빼들며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의 앞에선 적병 또 한 명이 쓰러져 있는 산토스의 목을 찔러 확인사살하려 하고 있었다. 자이납이 칼을 휘둘러 그자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몰려오는 적병 쪽에서 날아든 마우저가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의 방패를 산산조각내며 뚫고 들어왔다.

“우악!”

마우저 유탄에 가슴을 명중당한 자이납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져 쭉 뻗었다. 다행히 갑주 덕분에 관통은 못 했지만 숨이 막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적병들은 발버둥치는 프레소를 바닥에 질질 끌고 적진 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런, 이런.”

자이납이 무기력함에 버둥거렸다. 그는 우베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행운’에 배신을 당했음을 절감하며 마구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도착한 코나와 세하가 그의 앞에 방패를 세웠지만 적에게 끌려가고 있는 프레소의 비명은 짙은 모래폭풍과 몰려오는 적병들의 실루엣 사이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수백의 적병들에게 총 공격을 당한 분견대 기지는 비상 상황을 알리는 찢어지는 사이렌 소리로 한바탕 뒤집어졌다. 중상을 입은 산토스와 두 인부들, 울부짖는 자이납을 데리고 기지로 돌아온 세하 대장은 프레소가 적의 포로가 되었음을 병사들에게 알리며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그 상황에서도 70여 분견대원들의 움직임은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던 것처럼 일사불란했다. 그들은 칼과 창, 개조한 방패, 석궁을 메고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재빨리 기지 바깥으로 나와 각자 맡은 참호와 벙커에 몸을 숨긴 후였다.

“황제 그 양반이 함께 왔으면 좀 좋아.”

카렐이 검은 재가 난무하는 이곳에서는 누구보다 잘 보리라는 것을 떠올린 베흔이 가망도 없는 헛소리로 또다시 분위기를 흐려놓았다. 발끈한 세하가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우베와 라스가 이곳에 오며 가져온 집채만한 금속 탐지기를 수레에 싣고 끙끙대며 참호에 모습을 나타났다.

“여기선 스캐너보다 이게 더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우베가 기계를 작동시켰다. 원래는 일행이 이곳에서 검은 철성을 찾으려 가져온 지상용 고성능 금속탐지기이지만 이젠 필요도 없게 되었고, 이곳에서라도 쓸모가 생긴다면 다행스런 일이었다.

“위장포로 가렸어도 칼이든 마우저든 신발굽이든 드러났을 테니까…….”

우베는 육중한 깃발 같은 센서를 땅에 푹 꽂아 넣고는 후다닥 뛰어 들어와 기계를 켜고 조심스럽게 주파수를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영역을 줄일수록 감도가 높아지니까…….”

우베의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반경 1스타디아 정도의 영역이 그려지며 주변에 빙 둘러쳐 놓은 철조망과 부비트랩이 먼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파수를 조금 더 바꾸었다.

“이런, 염병할.”

베흔의 입에서 욕이 먼저 나왔다. 기지 주변을 새카맣게 에워싼 수백 개의 노란 점들이 깜박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00개가 넘는 점, 아니 적병들에 기지는 이미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수고 많았다.”

“감사합니다, 현신이시여.”

교단 병력의 총 지휘관인 네코의 격려에 사카가 더러워진 고글을 털며 다시 끼며 고개를 숙였다. 자칫 놓칠 뻔했던 저들을 따라잡은 건 부하들과 떨어진 그가 거의 2시간에 걸쳐 혼자 30여명의 복구팀 뒤를 몰래 밟은 덕분이었다. 한 달 가까이 모래폭풍 속을 뒤지며 생고생을 하며 찾았던 후에 가까스로 찾아낸 것이니 사실 칭찬을 듣기도 조금은 민망한 상황이었다.

“하긴, 저깟 기지 찾은 것보다 이놈 찾은 게 더 값이 나가겠지만 말이야.”

네코는 손발이 묶여 자신의 발밑에 팽개쳐진 채 벌벌 떨고 있는 프레소를 내려다보며 킬킬대고 웃었다. 네코도 평소 같았다면 흩날리는 바람에 아름다운 금발과 곱고 잘생긴 얼굴을 사방팔방 과시하고 다녔을 미남자이지만 마스크에 고글을 써야 하는 이곳에선 그저 ‘다 똑같이 생긴’ 교단 군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네코가 프레소의 얼굴을 툭툭 걷어차며 물었다.

“오랜만이다, 감히 우릴 엿 먹이고 도망가서 얼마나 오래 도망을 다닐 수 있으리라 믿었지?”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그저 황실군 기술사관에 불과합니다.”

네코는 고개를 젓는 프레소의 턱을 덥석 붙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눈가를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순간 파랗게 질린 프레소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 미친 듯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다시 대답해 봐라, 네가 정말로 기술사관 프레소냐?”

네코의 물음에 프레소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경기가 난 듯 몸을 비틀었다.

“어차피 네 피하고 DNA까지 확보하고 있어. 아, 네 피는 황제 놈 놀려먹는 데 써먹었군. 성형수술은 그럴싸하게 했다만 손가락 한 번 찍으면 1분도 안 걸려 나와.”

네코의 날카로운 고함이 쩌렁 울렸지만 프레소는 계속 울고만 있었다. 네코의 눈짓을 받은 헤네티 사관이 그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프레소는 네코에게 잡힌 턱을 마구 비틀며 환각을 보는 듯 눈이 뒤집어진 채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안 돼요, 가면 안 됩니다.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날 용서해 줘요. 제발.”

“허.”

네코가 정신이 반쯤 나간 프레소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쥔 손을 놓았다. 프레소의 피를 뽑은 사관이 만족스럽게 결과를 내보였다. 결과를 본 네코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번졌다.

“이놈 맞습니다.”

“헛고생은 아니었네.”

네코의 발밑에 쓰러진 프레소, 아니 네포프 칼리는 여전히 바닥에서 혼자 계속 울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여보, 미안해요, 날 두고 죽지 말아요. 제발…….”

“일단 이놈 몸 안에 키 숨기지 않았는지 끌고 가서 구석구석 수색해.”

울부짖는 네포프를 뒤로 끌고 가라며 손짓한 네코는 일단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놈 몸에서 안 나오면 저 위에 있으려나?”

네코가 곧 전투가 벌어질 언덕 위를 올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전쟁의 화신인 바유 교단의 후계자 관례대로, 네코는 이전 코메트 시절에도 수십 번의 전투에 참전했었고, 제국 건국 후에도 신분을 속이고 이런저런 제후군을 오가며 장군까지 오른 일이 있는 백전노장이었다. 사카를 비롯한 헤네티들이 바싹 긴장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북쪽과 서쪽에 각각 20명씩 배치했고 남쪽에 80명, 동쪽에 80명을 배치했습니다.”

네코가 데려온 바유 교단의 헤네티 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하임달에 데려온 병력은 자신의 헤네티 350명에 대신관이 보내 준 사카의 코런덤 50명, 공병대 100명이었다. 그는 이번엔 전투병의 절반인 200명을 데려온 상태였다. 네코는 대충 공격의 득실을 계산해 보았다.

“한 50명쯤 잃을 각오하면 될까.”

“명령을 주시면 당장 공격하겠습니다.”

사카의 제안에 네코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지금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을 텐데 굳이 정면공격할 필요는 없다.”

뼛속까지 군인인 사카는 그의 제안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감히 현신의 의견에 대놓고 반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는 전쟁의 화신인 바유의 현신이었다. 네코는 모래바람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기지 실루엣을 응시했다. 동쪽으로 난 좁고 가파른 경사로 하나를 빼면 사방이 사실상 절벽에 가까워서 딱 봐도 만만한 지형이 아니었다.

“지금은 알보병 뿐인데 이네들과 싸워가며 힘을 낭비할 필요 없지.”

네코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머리에서 깡통소리 나던 아버지 타크티와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들 분견대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관이 그를 여기로 보내며 준 임무는 남부가 진주하기 전에 검은 철성과 황금탑을 선점하라는 것이지 분견대는 그저 방해만 하지 않는 한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저놈들도 고립되었지만 우리도 고립된 처지기는 마찬가지야. 병력과 자원도 한정되어 있는데 가능한 안 싸우는 게 낫다.”

네코는 뒤쪽에 서성거리고 있는 두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네코의 시선을 받은 그들은 괜히 움찔거리며 여기저기 딴청을 피우는 척했지만 결국 바유 헤네티들에게 붙들려 네코의 앞에 끌려왔다.

“아프라스 야투 박사, 쿠마르.”

현신의 부름이 둘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네코가 마르고 껑충하니 큰 남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일부가 남아있는 이곳에 오시니 기분이 어떠신가?”

옛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네코의 말장난에 고글 속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눈가가 살짝 찌그러졌지만 곧 표정을 관리하며 가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한쪽 팔이 남아있는 황금탑에 제일 먼저 들여보내 주신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그러려면 ‘수로’부터 뚫어야 해.”

네코가 눈가를 씰룩거렸다. 과거 코메트 토벌대가 검은 철성에 올라갈 때 사용했다는 거대한 옹벽 수로는 분지에서 검은 철성과 황금탑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수로가 산의 동쪽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바람을 타고 날아와 쌓인 어마어마한 흙과 모래에 150여년 전의 연쇄 화산 폭발로 화산재까지 쌓여 완전히 땅 밑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그는 공병대를 포함한 150명 가까운 병력과 장비 대부분을 투입해 산의 동쪽에서 화산재에 파묻힌 수로를 다시 뚫는 중이었다. 하지만 인력과 소규모 굴착장비만으로는 남부의 루트가 뚫리기 전에 검은 철성까지 길을 내기가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틀 후 도착할 2진에는 훨씬 큰 장비와 100여명의 공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네코는 이번엔 왜소한 남자, 쿠마르를 손가락으로 가까이 불러들였다.

“넌 잠깐 적진에 사자로 다녀와야겠다.”

네코가 언덕 위를 가리키자 쿠마르가 기겁을 했다.

“예에?”

“가서 무기만 버리면 부대원 전체를 무사히 내보내주겠다고 해. 베흔인가 그놈까지 포함해서.”

“저어.”

쿠마르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도 헤네티이긴 하지만 사카처럼 마구스의 말이라고 아무 군말 없이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때 황궁에 있었던 만큼, 베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놈은 그저 겁을 준다고 바로 항복할 자가 절대 아닙니다. 충성스럽거나 용감해서가 아니고……일부러 우릴 도발한다거나 해서 최대한 몸값을 높인 후에 챙길 거 다 챙기고 빠져나갈 놈입니다.”

“지금은 아무래 봐도 저놈이 몸값을 높일 방법은 없어 보이는데? 한 번이라도 이겨야 몸값이 올라가는 것 아니었나?”

네코가 수비군의 3배가 넘는 부하들을 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숫자도 숫자지만 이쪽엔 X인 코런덤의 헤네티가 50명이나 있으니 가디언이라고는 베흔과 자이납뿐인 상대방과는 애당초 비교가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면 5백 명이 더 올 거라고 해.”

네코의 이런저런 지시를 들은 쿠마르는 옆에서 바유 헤네티가 내민 흰 깃발을 받아들고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전투나 말썽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사자 역할만 했다보니 그가 자신을 낙점한 것이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쿠마르는 흰 깃발을 등에 걸고는 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을 뚫고 터벅터벅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같이 양쪽 모두 고립된 상황에서 먼저 사자를 보내는 것도 생각해 보니 틀린 결정은 아닌 듯했다. 베흔이 잔머리를 쓰려 할 것이 빤하지만 그는 일단 네코의 의사만 전달한 후 여차하면 그대로 돌아 나올 참이었다.

“에이, 씨, 힘들어.”

몇 발짝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상황에서 가파르고 좁은 길을 올라가려니 양옆에서 번갈아 불어오는 강풍에 가뜩이나 작은 몸이 밀려 길 양쪽의 절벽으로 몇 번이나 굴러떨어질 뻔했다. 게다가 시야가 막혀서인지 기분에 가도가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길도 고약하고.”

그의 입에서 계속 불평이 쏟아졌다. 옛날엔 흙길이었는지 몰라도 지면에서 불쑥 솟아오른 모난 오르막길이다 보니 오랜 기간 바람을 맞으면서 흙은 다 날아가고 이젠 온통 돌멩이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거의 20분 가까이 돌길과 싸워가며 어렵사리 길을 올라간 그의 눈앞에 황실군 하임달 분견대 기지의 위병소와 철조망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모래폭풍 속에서 행여 오발을 날릴까 흰 깃발을 크게 흔들며 위병소로 다가갔다. 위병소 안에서 황실군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명과 덩치만 봐도 딱 베흔으로 구분되는 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뭐냐? 항복이냐?”

상대방의 기가 막힌 응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쿠마르가 최대한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전쟁의 화신이신 바유 현신께서 그대들에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무기만 버리면 너희 전원을 이곳에서 내보내 준다고 약속하셨다. 지금 우리에겐 5백의 병력이 있으며 이틀 후면 또 다른 5백이 도착할 예정이니 너희에겐 가망이…….”

“이 새끼들이 감히 어딜…….”

격분한 세하가 막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베흔이 번개처럼 후려친 수도에 쿠마르는 그대로 흰 기를 떨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봐요, 이놈은 사자 아닙니까!”

쿠마르만큼이나 당황한 세하가 베흔을 뭐라 나무라려 했지만 그 덩치는 악당다운 눈빛을 빛내며 웃고만 있었다.

“어럽쇼, 웬 떡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냐? 프레소 그놈도 잡혀갔으니 공평하게 하나씩 가지면 되겠네.”

쓰러진 쿠마르가 버둥거리며 베흔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이놈이 감히 어딜 사자를…….”

“넌 내가 나쁜 놈인지 아직도 몰랐냐?”

베흔이 바닥에 쭉 뻗은 쿠마르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기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마르는 그제야 누군가 했던 말―이자는 결정적인 때 뒤통수를 치기 위해 평소에 약속을 잘 지킨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프레소를 그토록 어렵게 붙잡은 것이 무색하게, 쿠마르는 저항 한 번 못 한 채 그대로 어처구니없이 황실군에 포로가 되어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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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이 카렐 수하에서 제일 나쁜 놈인 건 분명 사실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지 말고요~~~( ̄∇ ̄)ブ~~★

2부 5~8권 전자책은 마무리작업 중인데 다른 일이 생겨 며칠 늦어진 것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모 기관에서 유료 원고 청탁을 받아서 그걸 좀 하느라고요;; 요즘 개인 사정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ㅠ.ㅜ;;

아, 그리고 프리미엄의 1부 출판본이 완결되었고요, 2부 출판본은 노블레스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미엄의 출판본 1부 조회수가 너무....안 되면 2부는 노블레스로 갈 수밖에 없고요. ㅠ.ㅜ;;

노블레스 티켓 가진 분은 발도장 찍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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