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9 회: 파트 15. 고향으로 가는 길 -- >
.
.
.
그때, 내무대신 압둘 모투바 경이 페로와 장태자 카이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눈짓을 받은 페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으슥한 곳으로 그를 따라갔다. 모투바 대신이 누가 들을까 조심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며칠 후면 개척일 축제가 있는 날입니다. 큰 축제니 지난번 말씀하신 모임을 이번 참에 갖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 각하.”
“지금 한 자리가 구멍이 났잖나?”
신경질을 내는 페로에게 모투바 대신이 내민 건 미모의 젊은 타르서스 여인 사진이었다.
“아이샤 길자이입니다. 45살이고 타르서스 아카데미를 졸업해 교사로 있다고 합니다. 동북부 호족세력 부족장인 바드 길자이의 열……몇 번째 딸이랍니다.”
페로의 표정이 그제야 진지해졌다. 반역자 볼토 트라우제의 딸이 태자빈 후보에서 탈락하면서 그도 카이의 짝을 정하는 데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카이의 짝을 잡는 문제는 페로와 황제 사이에 단골 투닥거리였다. 카렐은 어차피 황권이 막강해지면 결혼을 통한 권력다지기 따위는 필요도 없을 테니 태자비와 태자빈은 나중에 철이 들어 스스로 고르게 하겠다며 나름 열심히 발품을 팔고 다닌 페로를 맥 빠지게 했다.
애당초 결혼 따위는 관심도 없이 자랐던 황제와 달리 뼛속까지 상급귀족인 페로는 장태자의 힘을 키워줄 수 있는 강력한 가문과 어릴 때 일찌감치 사돈을 맺는 게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령에서 2명, 동부와 서부에서 각각 한 명씩 안배해 4명의 처자들을 일방적으로 선별해 놓고 카렐에게 검토라도 해 보라며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황제보다 상대방 가문이 더 문제였다. 카이가 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을 때는 처자의 가문 쪽에서 질색을 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하려 했었다. 그렇지만 카이의 약이 만들어지고 그가 최소한 당장 죽을 일은 없어지면서 그들 모두가 태도를 돌변해 이젠 ‘하루라도 빨리’ 황제를 설득해 약혼을 하자며 페로를 조르고 있는 판국이었다.
“뒷조사는 했겠지? 정치성향이나 남자관계나…….”
“지금 진행 중이지만 특별한 것 없습니다. 워낙 그쪽 호족들이 보수적이라 딸들에겐 높은 수준의 교육이나 정치활동은 시키지 않으니까요. 집과 학교와 직장밖에 모르는 순종적인 여자 같습니다.”
페로는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어두운 피부색에 까만 눈, 길고 새까만 머리칼을 한 유순한 인상의 미녀였다.
“알았다, 그럼 그때 자리를 마련해 봐. 미리 알려주면 펄쩍 뛸 테니 그때 닥쳐서 말해주면 되겠지.”
페로는 황제 자리에 앉아있는 소년을 힐끔 쳐다보았다. 황제와 똑같은 검은 비단포에 금빛 머플러, 금제 서클렛을 한 저 소년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간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병을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난 소년은 또래처럼 웃음 많고 밝은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비록 그가 원하던 ‘카렐을 꼭 닮은 아이’가 되는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보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긴 해도 어쨌든 그에겐 세상 누구보다, 아니 황제를 빼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하임달 9번 행성에 온 베흔 일행은 며칠째 하늘만 원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 폭풍이 점점 심해져 이젠 기지 밖으로 외출은 고사하고 본토와의 통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황제와의 연락까지 끊기면서 베흔 일행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해야 할지 당황했지만 정작 분견대 병사들은 본토와 연락이 끊긴 정도는 워낙 일상이어서 그런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베흔 일행은 9월 11일, 하임달의 결전이 있던 날 이곳에서 본 괴상한 광경을 본토에 전하려 했지만 알릴 수도, 대응 방안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베흔과 자이납은 칼만 닦거나 잠만 잤고, 코나는 사에나에게 줄 옷가지를 뜨거나. 아니면 분견대 취사병들에게 요리 강습을 하는 게 일이 되었다. 그나마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화염병 만들기에 몰입한 우베나, 본토에서 가져온 타리프의 일지 사본과 그들의 언어집을 펼쳐놓고 서툴게 이곳 말을 공부하고 있는 라스 정도였다.
발이 묶여있는 건 옆 숙소에 있는 20명의 민간 유골 발굴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베흔 일행이 도착하기 이틀 전부터 이미 발이 묶여 발굴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카드놀이나 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북부 카파키 가에서 보낸 발굴단을 맡고 있는 건 서부 출신 ‘살람’이라는 젊은 해부학자였다. 북부는 특유의 개방적인 성향 덕분에 다른 지역 출신들도 자주 공직에 등용하곤 했지만 그 여자의 이력은 정말로 특이했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코리온 문하생으로 원리주의 유학자였다가 이후 트라카 교단 신학교와 의학교를 졸업해 지금은 북부 쿠트라스에서 성직자로 있다는 말에 일행들이 일제히 실소를 터뜨렸었다.
어쨌든 살람과 발굴단 직원들 말에 따르면 베흔 일행이 도착하기 2, 3일쯤 전부터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번 같은 심각한 먼지폭풍은 그들도 처음 본다는 듯했다. 이젠 시계가 없이는 밤낮도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교대를 위해 돌아가야 할 2조와 셔틀도 이륙을 포기한 채 그대로 기지 안에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평소 4, 50명 남짓 머물던 분견대 기지는 민간인 군인 합쳐 이젠 거의 100명 가까이가 북적거리는 중이었다.
셔틀 조종을 할 줄 아는 베흔은 ‘이륙은 착륙보다 쉽지 않나?’라며 당연한 의문을 표했지만 어쨌든 그리도 솜씨 좋던 조종사가 자기 능력으로도 못 나간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일행이 할 수 있는 건 산토스 상등병의 안내를 받아 고작 기지 주변 몇 발짝을 돌아다니는 정도였다.
일행의 목적이 검은 철성과 황금탑을 찾는 것이다 보니 내내 ‘산으로 올라가자’며 졸랐지만 산토스 상등병은 1스타디아 앞도 안 보이는 이런 날씨에 어떻게 올라가냐며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결국 6일째 되는 날, 베흔과 자이납은 결국 또다시 한밤중에 기지 담을 넘었다. 둘은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고글에 마스크, 탐사 장비가 든 가방까지 짊어지고 산자락 측면을 따라 무작정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건 분견대장 세하가 넘겨준 미심쩍은 지도뿐이지만 저들이 제 손으로 산을 안내해 주기를 바라다가는 황제가 잔딕에 숨이 넘어갈 때까지 끝이 나지 않을듯했다.
지도에 따르면 기지 뒤편, 북쪽의 산은 하임달의 전투가 있었던 이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병풍 같은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 행성에는 해수면이라는 것이 없으니 고도를 산출하기도 애매하지만 한때 대양저였을 행성 저지대를 기준으로 하면 55스타디아(8,250m)가 넘고, 분견대 기지를 기준으로 봐도 30스타디아(4,500m) 가까이를 올라가야 하는 어마어마한 고봉이었다. 하지만 짙은 모래폭풍 때문에 이젠 산의 형상은 보이지도 않았다.
기지를 나온 둘은 동쪽으로 갈지, 서쪽으로 갈지를 설왕설래했다. 라스가 해석해 준 타리프의 일지대로라면 검은 철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둘이었다. 서쪽으로는 고향행성 마지막 생존자들이 몰살당한 동굴을 지나 접근하는, 약간 돌아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검은 철성으로 직통하는 지름길인 ‘인공수로’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산토스 말이 수로가 있던 산 동쪽은 검은 재와 화산재에 홀랑 덮여 접근도 힘든데다가 수백 년 전 지면은 이미 한참 땅속에 있다고 하니 바람에 맞아 풍화된 서쪽의 동굴이 있는 곳을 통해 검은 철성에 접근하는 법이 그나마 확실해 보였다.
문제는 일단 나오니 고생의 연속이었다. 바람이 워낙 강해 둘의 망토가 아무리 여며도 요란하게 펄럭거려 걷기가 더 힘들었다.
“근데 우리 돌아올 수 있을까요?”
자이납이 벌벌 떨며 물었지만 베흔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이쯤이면 등반대를 조직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우리 둘이서 어디로 뭘 찾으러 간다고 그러세요?”
고도를 보고 겁을 먹은 자이납이 옆에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떠들어댔다. 듣다 못한 베흔이 결국 입을 열었다.
“누가 꼭대기까지 올라간대? 옛날 타리프의 일지를 보니까 분지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 있다고 하잖아? 산자락을 타고 쭉 가다보면 그게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가 보자는 거지.”
“그래도 이 날씨에 거길 어느 세월에…….”
구시렁거리던 자이납은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았다. 거의 같은 순간, 베흔도 탐침장비를 위장해 등에 지고 있던 플람베르주를 뽑아들며 휙 돌아섰다. 하지만 이 둘이 지나온 곳엔 시커먼 먼지폭풍으로 흐려진 공기 외엔 보이는 게 없었다.
[뒤에 뭐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자이납이 재빨리 수화로 묻자 베흔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이납에게 앞서가라고 손짓했다. 둘은 못 느낀 척 다시 걸음을 재촉했지만 온 신경은 뒤쪽으로 가 있었다.
가는 도중 베흔이 먼지로 목이 칼칼한 척 헛기침을 두 번 했다. 뒤에 뭔가가 분명 있다는 신호였다. 뒤쪽에 주의를 집중하려던 자이납은 갑자기 뒤따라 헛기침을 세 번 했다. 이번엔 오른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염병할.”
누군지 몰라도 적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베흔이 자이납과 바싹 붙어 섰다. 누군가가 뒤를 지키고 있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다. 계속 길을 가는 척 하던 둘은 집채 만 한 크기의 바윗덩이가 비탈 중간에 떡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눈치 빠른 자이납이 재빨리 돌 뒤로 몸을 숨기고 주변 반응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베흔은 이번엔 머리 위,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또다시 무언가를 느꼈다.
“바위 위 조심해!!!”
베흔의 고함에 놀란 자이납이 허둥지둥 바위 밑에서 빠져나갔지만 그보다는 적의 공격이 더 빨랐다. 바위 위에 매복 중이던 누군가가 쏜 마우저가 자이납의 고글 한쪽을 산산조각 부수고 날아가 땅바닥에 펑 소리를 내고 꽂혀 사방으로 흙과 재를 날렸다.
“엄마야!”
그 순간, 베흔이 던진 도끼 역시 공중을 휙 돌며 날아가 바위 위의 정체불명 매복자를 덮쳤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 육중한 형체가 털썩 쓰러지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짙은 모래폭풍 때문에 정확히 누군지, 심지어 복장과 무장이 어떤지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고글이 깨지면서 시야가 흐려진 자이납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도망을 치려했지만 방향감각을 잃고 도리어 바위 밑으로 기어가려 했다.
“그쪽이 아냐! 반대쪽으로 가!”
베흔이 자이납 쪽으로 뛰어가려던 순간, 이번엔 그의 발밑에서 또 한 발의 마우저가 튀어올랐다. 짙은 모래폭풍은 베흔과 자이납뿐만이 아니고 저들의 시야나 조준까지도 망가뜨리고 있는 듯했다. 베흔은 방금 마우저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조준도 없이 냅다 도끼부터 던지고 일단 뛰기 시작했다.
“어디요? 이쪽이요? 에이, 왜 이리 안 보여!”
베흔의 말을 들은 자이납도 망가진 고글을 손으로 가리고 다시 반대편으로 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방이 모래먼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이들의 귀에 어딘가 익숙한 고함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이쪽! 이쪽으로 와요!”
베흔은 앞을 못 보고 바닥을 기고 있는 자이납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몇 발짝 달려가자 정면에 3개의 사람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적인지 아닌지 아직 혼돈스러웠지만 일단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데 기대어 무작정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베흔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눈앞에 또다시 바윗덩이인지, 아니면 건물인지가 보였다.
“발 밑 조심하고요!”
웬 큼직한 손이 베흔을 바닥의 구덩이로 확 잡아끌었다. 뒤이어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쉿.”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든 베흔은 자신에게 입을 가려보이는 분견대장 세하 비장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변을 얼른 둘러보니 일행은 웬 지하 벙커 안에 숨어있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보니 위장포를 걸친 기술사관 프레소와 산토스 상등병도 벙커에서 밖을 내다보는 총안 틈새로 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베흔은 메타볼릭을 최대한 감추고 다른 틈새 쪽으로 슬며시 눈을 내밀었다.
그때, 누군가의 발뒤꿈치가 총안 밖 위쪽에서 내려와 바로 코앞을 쿵 하고 딛는 모습에 베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의 발뒤축에서 날린 흙먼지가 벙커 안까지 푹석 날아들었을 정도였다. 급하게 뛰어들어오느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 벙커의 지붕은 평범한 지면처럼 잘 위장되어 있는 듯했다. 총안 밖에서 군화 두 개가 계속 서성대고 있었다. 아직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자가 동료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두 놈 어디로 갔지?”
분명한 남부 억양에 베흔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부 놈들이 벌써 왔나?’
그가 알기로 남부에서 이곳으로 오는 루트가 완공되려면 아직 한 달 이상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뒤이어진 목소리는 또 달랐다.
“글쎄, 바위 위쪽으로 달아났는지도 모르겠다.”
북부 억양의 대답과 함께 총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글과 마스크, 쥐색 방풍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정확히 구분은 되지 않지만 베흔은 저자에게서 X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자의 손에 들린 무기는 모양이 약간 달라졌지만 분명 교단 헤네티들이 쓰는 마우저였다.
‘에어필터를 달았군.’
베흔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단에서도 이곳을 노리고 선발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살인본능이 동한 베흔이 플람베르주를 만지작거렸다. 마우저가 있다 해도 상대가 고작 두 명, 그것도 한 명은 시민이라면 그와 자이납이 나가서 한 번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이번엔 양쪽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기척이 그의 의욕을 확 꺾어버렸다.
“놓친 거냐?”
누군가 이자들의 상급자인 듯했다. 하지만 베흔은 그 목소리에서 이자의 정체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염병할.’
베흔의 손끝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라무트의 암살교단 궁전 앞 구름다리에서 그와 일전을 치렀던 바로 그 헤네티 대장 ‘사카’ 녀석이 분명했다.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건 2명의 또 다른 병사들이었다. 총 5명, 그 중 2명이 코런덤, 3명은 잘 훈련된 시민 정예병이고 4명은 마우저와 장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숫자는 대충 이쪽과 비슷하지만 무장에서 너무 밀렸다.
‘저놈들이 언제 온 거지?’
베흔이 이를 갈았다. 그는 탐사장비를 지고 오느라 아라무트에서 노획한 마우저를 숙소에 놓고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저게 뭐예요?]
자이납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시민병이 등에 지고 있는 웬 육중한 물건을 가리켰다. 그제야 그 한 명의 무장을 확인한 베흔이 순간 기겁을 했다. 모양은 많이 달라졌지만 분명 이전 코메트들이 벙커나 동굴에 숨은 민병대를 잡을 때 쓰던 화염방사기였다.
‘염병할, 저걸 여기서 볼 게 뭐야.’
오르마즈와 유평대제를 빼면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베흔이 거의 패닉에 빠져 슬금슬금 벙커 문 쪽으로 물러났다. 먼 옛날, 방어구가 부실하던 민병대원들에게 저 흉물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짙은 흙먼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휴우.”
십년감수한 베흔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민병대를 떠난 이후로 처음 본 저 괴물에 지레 놀랐다는 편이 정확했다. 숨죽이고 있던 자이납과 세하, 프레소, 산토스도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하 대장을 빤히 쳐다보던 베흔은 무심결에 그의 가슴에 있는 펜을 보았다. 평상시에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끝부분이 울퉁불퉁했다.
“이봐, 당신 혹시…….”
“베흔 대장, 그 고글 안에 지금도 마스크 썼소?”
상대방의 선공에 당황한 베흔이 멈칫했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베흔도 그에 질세라 따져 물었다.
“너 톱날 맞지? 펜 물어뜯는 습관이…….”
“나하고 작전까지 함께 했던 천하의 베흔 대장께서 이제야 안 걸 보니 성형수술이 정말 잘 됐나보오.”
세하 비장, 아니 톱날이 낄낄대고 웃었다. 베흔은 그의 뒤를 지키고 선 산토스도 손으로 가리켰다.
“넌……수도승? 그럼 마르텔로 놈은 설마 망치?”
산토스는 무표정하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한쪽에서 당황한 건 자이납도 마찬가지였다. 베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맞아, 이제야 기억나, 내가 여기 분견대를 해체해서 죄다 쫓아냈던 게 오르마즈 그놈 아들의 부대였고 도망칠 때 행적이 수상쩍다는 보안국 보고가 있었어. 증거가 없어서 잡아넣지는 못하고 그냥 해고만 했었지!”
“허, 말투 보니 아직도 그날 일을 반성 안 하셨나 보쇼?”
이번엔 산토스가 격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세하가 흥분한 그 여자를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돌아갑시다. 여긴 오래 있을만한 곳이 아니니.”
세하는 자이납에게 새 고글을 내밀고는 벙커 문을 열었다. 다시 검은 먼지가 안으로 거세게 확 밀려들어왔다. 베흔이 이번엔 기술사관 프레소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그런데 넌 기억이 없는데? 넌 그때 이름이 뭐였냐?”
베흔의 사나운 물음에 그 남자가 정색을 하며 거칠게 그의 팔을 떨쳐냈다.
“잘못 보셨습니다. 난 50년 전까지 평범한 광산 엔지니어로 있던 사람입니다. 나도 이들의 뜻에 도움이 되고 싶어 그냥 합류했을 뿐입니다.”
베흔의 말문이 막혔다. 죄수부대와 특무대 시절 놈들은 대충 감이 왔지만 이놈은 정말로 기억이 없었다. 뭔가 찜찜하지만 본인이 펄쩍 뛰는 것을 계속 물을 수도 없었다.
베흔은 이번엔 화살을 세하 쪽으로 돌렸다.
“아까 그놈들은 대체 뭐냐? 너흰 왜 여기로 돌아와 있는 거고?”
“그러는 대장은 왜 신분까지 속이고 이 떳떳치도 못한 곳에 오셨소? 옛날 저지른 일이 창피하지도 않으쇼?”
톱날, 아니 세하 비장의 일갈에 고글 속 베흔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베흔은 그를 따라가며 다시 따져물었다.
“아까 그놈들은 언제 들어온 거냐? 여기 통신이 끊긴 건 어떻게 된 거고?”
“대장이 도착하기 나흘 전부터 뭔가 이상했다고요! 여기 오는 항로에 있는 우리 통신 비컨이 부서지기 시작했죠! 부서지기 직전에 굉장히 빠른 물체가 접근중이라고 나왔던 기록이 보여서 처음엔 소행성이 부딪쳐서 박살이 난 걸로 알았죠.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똑같은 신호가 나오고 그 다음번 비컨이 또 부서졌죠. 비컨이 두 개나 망가지면서 통신이 끊겼어요. 대장이 오기 전부터 이미 통신이 안 되고 있는 상태였다고요.”
“뭐야, 그럼 우리가 이미 고립된 곳에 들어왔던 거라고?”
베흔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곧 황상께서 오실 텐데 어쩌라고!”
세하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뭔가 굉장히 빠른 게 우리 통신 비컨을 하나씩 부수면서 다가오고 있는 건 분명했는데 정체를 알 수가 없었죠. 그러더니 결국 이틀 전에 우리 분지 서쪽 산 중턱쯤에 나타나 마지막 비컨까지 부쉈어요. 정찰대를 보냈지만 뭔가 착륙한 흔적만 있고 아무도 없었고요.”
세하가 베흔을 기지 쪽으로 거칠게 잡아끌었다. 베흔은 잡아끄는 그의 손을 빼내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릴 기지에 잡아놓은 거냐?”
“오해 말아요, 대장 일행을 보호하려는 거니까. 지금도 나가고 있다고 마르텔로가 연락을 줘서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던 거고.”
몰래 나온 줄로 알았던 자신들의 행동을 이미 분견대 놈들이 빤히 보고 있었다는 말에 베흔과 자이납이 기겁을 했다. 세하는 이 짙은 먼지폭풍 속에서도 마치 머릿속에 나침반과 지도라도 들은 듯 방향 한 번 잃지 않고 능숙하게 이리저리 바위를 밟아나갔다.
베흔이 그의 뒤를 따르며 계속 물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정체를 못 찾았고, 그럼 사흘째는?”
“최악이었죠.”
세하가 굳은 얼굴로 대답하며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마어마한 수송선이 갑자기 궤도에 나타났죠. 우린 본토에 연락도 못 해보고 박살이 날 판이었어요.”
“오르마즈 그놈이 여기에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베흔이 잔뜩 비꼬아서 물었지만 덕분에 열이 받은 세하 비장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당황한 자이납이 성질 더러운 베흔을 뒤로 확 밀어내고 계속 물었다.
“정말 저 양반 똘똘한 척은 다 하다가 가끔 산통을 깬다니까. 그래서요? 대체 지금 상태가 어떻게 된 거예요?”
세하가 마지 못하는 척 대답했다.
“놈들 수송선이 지금도 대기권 궤도 바깥을 계속 돌고 있어요. 그래서 교대조를 못 내보내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 탄 셔틀이 들어올 때도 나포하려고 뒤에 쫓아 붙어서 아찔한 상황이었죠. 잘못하면 우리 기지 위치가 들통 날 판이었으니까.”
자이납은 그제야 그 순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깨닫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당시 셔틀이 그렇게 요란한 비행을 했던 것도 잡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오후에 볼일이 있어 조금 일찍 올립니다. ^^
황제령에선 페로가 신나게 산통을 깨고....하임달에선 베흔이 산통을 열심히 깨는 중입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밉사와요~~~(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예정)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올레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