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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033화 (1,028/1,132)

< -- 1033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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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허수아비를 공격했다는 데 당황한 일선 지휘관과 사관들이 악을 쓰고 소리쳤다.

“이런 씨발! 당장 후방에 알려! 속았어! 속았다고!”

격분한 사관과 병사들이 기둥을 걷어차고 밀어 쓰러뜨리며 분노를 폭발했다. 바닥엔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수많은 보병들의 발자국이 보였고 그 위엔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쿠데타군인 6군단은 정찰대에게 살짝 모습만 보여준 후 이 허깨비들과 진압군을 교란할 소수의 투창병만 남긴 채 일찌감치 물러나버린 것이 분명했다.

선봉대가 속임수를 깨달은 후에도 미처 연락을 받을 수가 없는 후미의 제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계속해서 이 ‘허깨비 부대’에 돌격을 퍼부었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령관 헤즈와 후미의 부대들까지 모두 속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 멍청한 돌격을 중단시킨 건 선봉대의 전령이 대대의 빙하차로 달려가 상황을 전하고, 다시 그곳 대대장이 할룩스로 각 대대와 상부에 전하고, 또다시 그곳의 전령이 휘하 장병들에게 다리가 빠지게 달려가 알린 20여분 후였다.

“뭐야, 그럼? 우리 똥개훈련 시킨 거야?”

헤즈보다 먼저 목소리를 높인 건 다혈질의 세미온이었다. 하지만 같은 순간, 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 헤즈 쪽이었다. 그는 보급부대가 있을 후방 쪽을 무심결에 휙 돌아보았다.

“그놈들 무슨 속셈으로…….”

1군의 후미를 뒤따라가는 보급부대를 호위하고 있는 건 예르마크의 아들 에우테르 대군이었다. 헤즈가 이끄는 5만의 공격부대가 전방의 세데스를 공격하러 속도를 붙여 앞서가면서 그가 이끄는 세닉 가 보병대 5천은 보급부대와 함께 20스타디아(3km) 정도 뒤에 떨어져 따라가는 중이었다. 선봉대가 ‘적’과 교전을 준비하고 있는 이 시간, 아직 산맥 옆을 못 벗어난 그들은 왼쪽에 빙산을 끼고 바람을 피해 나아가고 있었다.

추위에 약한 세닉 가 보병들 중 상당수가 심한 동상을 입어 바깥에 머물 수가 없다보니 실제 보급대를 호위하고 있는 병력은 4천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상태가 좋은 병사들도 일단은 교대로 차량에 태워 몸을 녹이게 하고 있지만 병사들은 플라칼 가나 델루지 가 장병들보다 훨씬 힘들어하고 있었다.

“낮부터 보였던 경보병대가 안 보이는 게 영 찜찜해. 분명 어디선가 튀어나올 거다.”

에우테르가 제대장들에게 주의를 주며 스캐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차라리 어제처럼 적이 눈에 보였다면 맘이 편했겠지만 돌연 안 보이는 것이 더 그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장군님! 장군님! 이쪽에 무언가 잡힙니다!”

보급대의 동쪽 평원 쪽을 지키는 대대장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들어온 건 전방에서 헤즈의 보병대가 막 돌격을 시작하던 그 무렵이었다.

“‘무엇’이라고 애매하게 둘러대지 말고 정확히 말해!”

에우테르가 화를 버럭 냈다. 잠시 확인하는 듯 머뭇대던 대대장이 답변을 보내왔다.

“동쪽 평야지대에서 약 10스타디아(1.5km) 거리에 빠르게 접근해오는 무리가 있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스캐너상 약 2천 가까이 됩니다!”

‘빠르게 접근해오는 2천의 무리’라는 말에 에우테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후보는 단 하나뿐이었다.

“맙소사, 경보병들이다!”

세미온의 악몽이 머리에 떠오른 에우테르는 즉시 보병대 대대장들을 불러냈다.

“동쪽이다! 동쪽에 적 경보병으로 추정되는 병력이 빠르게 접근중이니 대오를 정렬해라!”

에우테르의 명을 받은 5천의 세닉 가 보병들은 동상으로 피해 있던 자들 중 상태가 나은 병사들까지 모두 쏟아져 나와 일제히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추위에 얼어붙어 제정신이 아니긴 해도 ‘적군’이라는 말을 들은 그들은 평소에 철저히 훈련받은 그대로 줄을 맞춰 빠르게 이동해 보급대의 동쪽에 두터운 방벽을 쌓았다. 뒤에 남은 보급대는 속도를 절반으로 낮춰 동쪽을 감싼 세닉 가 보병대와 함께 움직였다. 이들의 숫자도 5천이지만 어차피 대부분이 빙하차를 모는 운전병이거나 취사, 장비 등을 담당하는 비전투병이다보니 제대로 무장을 한 건 아니었다.

빙하차를 몰고 동쪽으로 달려간 에우테르는 그곳에서 직접 동쪽을 살폈다. 대대장의 말대로, 동쪽 빙하평원에 넓게 산개해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생명반응이 보였다. 적군이라면 그들의 갑주 특유의 고유주파수 같은 것으로 바로 구분이 되었겠지만 어차피 쿠데타군도 같은 남부제후군이다 보니 피아가 자동으로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압군에겐 골치 아픈 문제였다.

“현재 거리 5스타디아!”

선봉에 있는 대대장의 큰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에우테르는 빙하차에 달린 확성기와 사이렌으로 보병들에게 적과의 거리를 알렸다.

“현재 2스타디아!”

에우테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짙은 블리자드 너머로 하얀 평원을 덮고 빠르게 달려오는 희미한 형상이 보였다. 비슷한 시간, 전방의 헤즈와 보병들이 만나고 있을 허깨비 보병은 분명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에우테르가 고개를 저었다. 산악경보병이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밀집한 중장보병에 정면 돌격하는 건 정말 바보 중의 바보짓이었다.

“상대는 경보병이다! 집결해서 힘으로 몰아치면 된다! 대오를 흩트리지 말고 돌격해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돌격명을 받은 세닉 가 보병들이 일제히 와아 소리를 지르며 빙판 위를 맹렬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도 5천 가까운 보병이 전혀 대오가 흔들리지 않고 속도를 맞춰 돌격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남부보병대만의 특기였다. 빙판을 가로질러온 흰 위장복 차림의 적군이 점점 가까워졌다.

“와아아!”

방패를 앞세운 세닉 가 보병들은 1차로 어깨 위로 든 투창을 적을 향해 힘껏 던졌다. 짙은 눈보라 너머로 그들의 찢어지는 비명과 눈밭 위로 벌렁 자빠지는 수십의 적군이 보이자 세닉 가 보병들은 추위까지도 순간 확 잊을 만큼 기세가 올라갔다. 투창을 던진 그들은 일제히 허리에서 칼을 빼들고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쏘지 말아요! 쏘지 말라고요!”

‘적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선두 열 병사들의 귀에 블리자드 사이로 들리는 처절한 절규가 들어왔다.

“같은 편이라고요!”

병사들 중 몇이 멈칫거렸지만 블리자드로 눈앞이 사실상 멀어버린 대부분은 적의 절규 따위는 무시하고 눈 속에서 무작정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어엇.”

부딪칠 때, 혹은 칼에 맞았을 때의 무언가 낯선 느낌에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들 앞에는 투창에 맞아, 혹은 칼에 베여 피를 뚝뚝 흘리는 흰 망토 차림의 부상자 혹은 시체 수십이 널브러져 있었다. 흰 망토를 뒤집어쓴 2천 명이 가까운 비무장의 사람들이 세닉 가 보병들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애원했다.

“플라칼 가 보병 29연대입니다! 공격하지 마세요!”

“엉?”

놀란 세닉 가 일선 장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플라칼 가 29연대라면 지난번 세미온이 식량 수송을 호위하기 위해 데려갔다가 전멸당하고 대다수가 쿠데타군에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었다. 쿠데타군은 일부러 포로들을 빙하 위에 풀어 자신들을 유인한 것이었다.

“맙소사! 보급대는!”

세닉 가 보병들이 애먼 우군 포로들을 때려잡느라 온통 동쪽으로 몰려간 새, 진압군의 보급대는 후방에 사실상 무방비상태로 놓여있었다. 에우테르가 남겨두고 간 1천의 예비대도 동상으로 움직이기 어려워진 보병들을 모아놓은 사실상 잡병들이라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헤즈가 있는 전방과 동쪽의 에우테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전혀 모르는 그들은 전방과 측면에서 보병대가 알아서 적을 잘 잡아주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느릿하게 블리자드 속을 전진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몇 분 후, 보급대장은 스캐너에 보이는 멀지 않은 왼쪽의 빙산 위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번쩍 하며 나타나는 모습에 기겁을 했다.

“가만, 저기 뭐지?”

보급대장은 빙하차를 세우고 망원경으로 블리자드 너머 빙산 중턱을 살폈다. 휘몰아치는 블리자드가 잠시 잠잠해진 짧은 시간, 그는 가파른 빙하의 사면을 타고 수많은 흰 점들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사태?”

보급대장은 눈앞에서 상황을 보면서도 몇 초 동안 그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정체를 먼저 알아낸 건 바로 옆에 있는 부관이었다.

“아니, 눈사태는 아닙니다, 저거 적군 아닙니까?”

“어, 어……그, 그럴 리가 있나? 경보병대는 동쪽 평원에 있고 적 중장보병대는 북쪽에 있잖아?”

보급대장은 적군을 눈앞에 보면서도 잠시 그 광경을 믿지 못했다. 바로 그때, 그의 빙하차 할룩스로 보급대 동쪽을 지키러 나간 에우테르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이 들려왔다.

“속았다! 동쪽에 있는 건 우리 포로들이다! 반복한다! 적군이 아니고 우리 포로들이다! 되돌아갈 동안 보급대 정지하고 수비를 강화해!”

눈이 휘둥그레진 보급대장은 산 중턱에서 스키를 타고 빠르게 내려오고 있는 2천의 무리들을 비로소 정확히 분간할 수 있었다.

“염병할! 9시 방향! 빙산 사면에 적 경보병이다! 당장 보급차량을 지켜!”

보급대장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블리자드로 시끄러운 보급대의 백여 대 차량과 트레일러들 사이를 울렸다.

“보병 예비대! 예비대는 당장 밀집 대오를 갖추고…….”

보급대장의 절규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눈 깜짝할 새 산을 타고 내려온 경보병들은 혼비백산해 보급차량에서 막 내려서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들의 목표는 애당초 진압군 군인들이 아니었다. 전투병들을 온통 사방으로 유인해 놓은 후 보급대를 덮친 그들은 빙하차에 매달린 육중한 컨테이너들에 화염병을 던져 눈 깜짝할 새 불을 지르고는 도로 빙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2백여 대의 컨테이너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불꽃과 시커먼 연기가 새하얀 블리자드를 뚫고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불 꺼! 불 끄라고!”

당황한 보급대장은 빙하차에서 뛰어내려 블리자드 속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지금 도망치는 적을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반란군들이 풀어놓은 포로 무리에 깜박 속아 엉뚱한 동쪽 평원으로 병력을 데려갔던 에우테르도 빙하차를 몰고 헐레벌떡 달려와 불타고 있는 보급차 앞에 망연자실하게 꿇어앉았다. 불타고 있는 차 안에는 6만의 1군이 3일 동안 먹을 식량과 당장 오늘밤 묵을 숙영지를 지을 조립식 막사가 들어있었다.

에우테르는 뒤늦게 따라오는 보병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2천 명은 주변을 에워싸고! 나머지 2천 명은 차량의 불을 꺼! 당장!”

행군 셋째날 저녁이 다가왔을 무렵, 헤즈의 1군은 행군도 중단한 채 빙산 밑자락에서 여전히 떨고 있었다. 블리자드를 막아 줄 임시막사가 절반 이상 타버렸고 모포와 식량, 연료도 마찬가지였다. 의약품은 거의 다 타버려 당장 큰 전투라도 벌어졌다가는 떼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일단 남은 재료들로 대충 숙영지를 만들었지만 병사들이 2, 3층으로 포개어서 자도 다 못 들어갈 판이었다. 식량은 아무리 따져도 두 끼니 먹기도 빠듯했다. 당장 모레 까지 헬홀에 도착해야 할 판에 지휘부의 눈앞이 막막했다. 오늘 가야 할 목적지까지도 도착 못 한 상황에서 대충 빙산 밑자락에 임시 숙영지를 세워야 했다.

“에우테르 장군.”

헤즈가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선 에우테르를 노려보았다. 사령관 헤즈의 막사에도 잘 곳을 잃은 플라칼 가 근위병들이 난민촌처럼 와글와글 웅크리고 모여앉아 있었다. 그나마 담요도 없이 한 장으로 두 명이 돌돌 말은 정도면 양반이었고 세 명, 네 명이 담요 한 장으로 번갈아가며 몸에 감는 정도였다. 보급대를 잃으면서 6만의 대군이 눈 깜짝할 새 군대라기보다는 피난민 같은 몰골이 되었다.

“아버지,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요! 우리 플라칼 가 병사들이…….”

“넌 조용히 있어.”

헤즈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딸 세미온에게 입을 다물라며 으르렁거렸다. 에우테르의 오판으로 보급품을 잃은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세미온을 화나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에우테르의 세닉 가 병사들이 블리자드 속에서 오인 사살한 50여명의 플라칼 가 포로들은 며칠 전 빙하골짜기의 참패 당시 적에게 잡힌 29연대 장병들이었다. 바로 세미온의 눈앞에서 잡혀갔던 그의 병사들이었다.

안 그래도 세미온뿐만이 아니고 플라칼 가 장병들이 에우테르를 노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저녁에도 플라칼 가와 세닉 가 병사들 사이에 몇 번이나 주먹다짐과 싸움이 오가 헌병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었다.

“내 명색이 대군이라 체면은 좀 봐 주려고 했는데 이건 해도 너무하잖나!”

헤즈가 고함을 지르며 에우테르의 얼굴에 불에 타 터진 식량 캔을 냅다 집어던졌다. 이마에 캔을 얻어맞은 에우테르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부동자세를 잡았다. 황실 대군 처지에 사병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그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뺨과 코를 타고 핏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 책임입니다.”

에우테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책임? 지금 6만 대군이 이 꼴이 된 책임 말인가? 아니면 죄 없는 우리 플라칼 가 병사 51명을 죽인 책임?”

“…….”

헤즈가 뒤뚱거리며 나와 에우테르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다리를 채인 에우테르가 바닥에 털썩 꿇어앉았다.

“책임은 아니 다행이네!”

씩씩대던 헤즈가 불에 타 꼴사나워진 상자에서 대뜸 채찍을 꺼내 딸에게 휙 던졌다.

“죽은 병사 수만큼 51대만 때려. 여기서.”

“사, 사령관님. 황실 대군입니다.”

당황한 헤즈의 참모들이 얼른 그를 말리려 했다.

“아무리 큰 실수를 했어도…….”

“시끄러! 황실은 무슨 개뿔, 비실대는 황제 놈 뒈지면 오늘내일 끝장날걸!”

헤즈의 험악한 말투에 장교단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 황실과 알력이 있다는 정도는 다 알지만 아랫사람들이 다 듣는 앞에서 최고제후가의 적장자가 뱉은 말이라고는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막말이었다.

“저 새끼 옷 다 벗겨.”

세미온의 명령에 플라칼 가 헌병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에우테르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명색이 장군에 황실 대군인 그가 아랫사람들 눈앞에서 알몸이 되어 내팽개쳐졌다. 옷을 입고 있어도 괴로울 만큼 추운 막사 안에서 벌거벗겨진 에우테르가 몸을 감싸며 바들바들 떨었다. 헤즈는 채찍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딸 세미온,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아랫사람들과 에우테르를 따라온 세닉 가 무장들의 분노를 지켜보며 속으로 나름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잘 하고 있네.’

헤즈도 단순히 성질이 나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난 제위전쟁 때도 그랬듯, 그는 패전할 때마다 자신의 책임을 대신 질 희생양이 필요했고 이번엔 에우테르 차례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에우테르의 실수와 패전을 핑계로 황실에 의도된 망신을 주려는 것이었다.

“제 입으로 잘못했다고 했으니!”

세미온이 쓰러진 에우테르를 채찍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맞을 건 맞아야지!”

고작 중랑 계급에 제후가 귀족에 불과한 30대 새파란 젊은이가 장군 계급의 황실 대군을 벌거벗겨놓고 공개적으로 때리고 있는, 누가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쓰러진 에우테르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파르르 떨었다. 채찍질의 아픔과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세미온은 엎드린 채 흐느끼고 있는 에우테르의 등이 갈가리 찢겨 피가 줄줄 나도록 계속 후려쳤다. 50대를 다 때렸을 무렵, 그의 정강이와 신발은 온통 에우테르의 피로 범벅이었다.

“퉤.”

세미온이 손바닥과 신발코를 툭툭 털며 피투성이가 된 채찍을 내던지고 아버지 헤즈의 곁으로 물러났다. 매질을 당한 에우테르는 찬 기운이 그대로 올라오는 바닥에 엎드려 쓰러진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를 따라온 세닉 가 참모들이 허둥지둥 그의 몸을 두꺼운 망토로 감싸주었다. 그들 역시도 울분에 파르르 떨고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는 없었다.

“잘 했다.”

헤즈가 딸 세미온의 등을 툭툭 쳐 주었다. 사실 이번 패전은 분명 사령관인 그의 책임이지만 그는 이번에도 평소 특기대로 애먼 희생양을 만들고 자신은 쏙 빠져나갔다. 울분에 찬 세닉 가 무장들이 숨도 제대로 못 되는 에우테르를 업고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뒤의 참모들을 돌아보았다.

“세닉 가 놈들은 낮에 한 것도 없으니 오늘밤 경계근무 세우고 막사도 주지 마. 지들이 다 태워먹고 막사는 무슨 얼어 죽을.”

낮에 보급품을 못 지키고, ‘아군까지 오인 사살하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지른 세닉 가 장병들은 결국 몰아치는 블리자드 속에서 저녁도 굶은 채 잠도 못 자고 숙영지 경계를 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미 지치고 동상으로 몸이 굳은 그들은 하나 둘 쓰러져 숙영지 안으로 옮겨졌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막사는 없었다. 그들은 낮에 타고 남은 막사 잔해로 빙하차 옆을 빙 둘러 대충 움막을 짓고 그 안에 동상이 심한 동료들을 옮겨놓았다.

20여명의 동상 환자들이 모인 움막 한쪽에는 세미온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뚝뚝 흘리며 실려 온 에우테르가 떨고 있었다. 세닉 가의 막사 전체, 심지어 에우테르의 장군 막사까지 플라칼 가가 차지해버려 그가 갈 곳은 밤새 시동도 꺼서 차가운 깡통이 되어버린 빙하차 안 아니면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모여 있는 움막뿐이었다. 사실 빙하차도 연료 부족으로 헬홀까지 다 끌고 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멀쩡한 빙하차 몇 대를 버려야 할 판에 그의 몸을 녹이자고 시동을 켤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곳은 박스와 쓰레기를 태운 작은 모닥불이라도 있어 몸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는 있었다.

“히, 익.”

피를 많이 흘린 에우테르는 부관의 품에 안긴 채 저체온에 바들바들 떨며 계속 신음을 토해냈다. 다른 병사들이 모포와 자신 몫의 발열팩까지 양보했지만 그의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내일까지만 참으세요, 내일 빙하차가 움직이면 그 안에서 몸 녹이시면 됩니다.”

가문 군의관이 발열팩을 몸 곳곳에 넣어주고는 손발을 주물렀다. 하지만 출혈로 인한 저체온증은 보통의 병사들보다 훨씬 심각했다.

“옆 플라칼 가에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런 움막에 계시느니 거기 부탁해서 막사의 한 자리만 좀 내 달라고…….”

“됐어, 집어 쳐.”

에우테르가 저체온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이를 갈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이미 부서져버린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상태가…….”

“됐다니까!”

에우테르가 울부짖듯이 고함을 질렀다. 황족으로서, 장군으로서 자존심이 산산조각난 그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놀란 군의관도 차마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에서 모포를 두르고 떨고 있는 병사들에게 에우테르 주변으로 벽을 쌓으라고 슬쩍 눈짓했다. 병사들의 몸으로 벽을 쌓고 일단 찬바람을 한 겹 더 막으면서 에우테르의 떨림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부관의 품에 몸을 묻은 채 억지로 소리가 나지 않게 울고 있었다. 그가 중간중간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버지.’라는 소리를 다들 들었지만 모두들 못 들은 척 했다. 그렇게 끔찍한 셋째 날 밤이 흘러갔다.

다음날, 어제 저녁을 굶었던 병사들은 아침을 준다는 말에 죽 한 그릇이라도 받아먹으려 맘에 그릇 하나씩을 들고 나와 취사 막사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늘 행군하며 쓰러지지 않으려면 부실하든 말든 아침이라도 잘 먹어야 했다.

세닉 가의 동상 환자들이 모여 있는 움막에서도 여전히 몰아치는 블리자드 너머 희미한 아침 빛이 보였다. 환자들뿐인데다가 오늘은 가문 장군까지 이곳에 있다 보니 취사병들은 뜨거운 김이 솟는 죽이 든 짬통을 끌고 오는 수고까지 발휘했다. 짬장이 그슬린 움막 벽을 국자로 탕탕 두들겨 병사들을 깨웠다.

“눈보라는 여전해. 장군님 빼고는 선착순이야.”

짬장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에우테르를 안고 잠들었던 부관과 바닥에 웅크렸던 참모들 셋도 찌뿌듯한 몸을 비틀며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장군님 말고 우리도 좀 빼 주겠나?”

참모가 짬통을 젓고 있는 짬장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에우테르를 안고 잠들었던 부관은 어찌된 일인지 바싹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는 참모가 에우테르의 어깨를 툭툭 쳐서 깨웠다.

“일어나십시오, 장군님, 뭐라도 좀 드시…….”

참모도 순간 말을 멈추었다. 죽을 받으러 자리에서 엉금엉금 기어나가던 병사들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 장군님?”

참모가 에우테르의 몸을 몇 겹이나 감싼 담요를 슬그머니 끌러내렸다. 에우테르는 얼굴과 몸이 온통 상처와 피딱지투성이를 한 채 몇 겹의 담요 속에 태아처럼 웅크려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 대군 마마.”

부관은 품에 안고 있던 에우테르의 창백한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얼음처럼 뻣뻣해진 에우테르의 몸은 웅크린 그대로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이젠 아무런 온기도, 숨결도 없었다. 지난밤 내내 그를 지켰던 세닉 가 장병들은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은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사한 것도, 병으로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플라칼 가에 맞아죽은 셈이었다.

“뭐야! 이게 어찌된 거냐고!”

분노한 병사들 몇이 결국 큰 소리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이게 뭐야!”

차가워진 에우테르의 눈가엔 얼어붙은 핏자국과 눈물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레곤 대공주의 막내아들이고 세닉 가의 장군이었던 에우테르는 결국 황족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웠던 치욕과 140년짜리 생명을 칼릴의 이 차가운 눈보라 속에 함께 날려 보내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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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 박명입니다. 예르마크는 누나 뺨이라도 후려쳐야 할 듯합니다...

다행히 다음 파트 이후로 다른 미남들이 계속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 예쁨받는 미남들은 아닐 것 같지만....)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그나저나 염병할 올레e북은 3월에나 오픈된다네요... -,.-;; ♠

지난번 올린 9, 10권 전자책은 유페이퍼에는 있는데 아직 큰 서점에는 업데이트가 안 올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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