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1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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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칼날같이 깊고 좁은 골짜기를 지나는 바람이 순간적으로 몇 배는 강해진다는 것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세미온은 온통 주변을 뒤덮은 하얀 장막 속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일단 전진해!”
세미온이 운전병의 등짝을 탁 쳤다. 운전병은 앞도 전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일단 스캐너에 의지해 무조건 가속을 밟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무언가 덜컹 하며 빙하차의 궤도 밑을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궤도 밑이 빠졌습니다!”
얼굴이 새파래진 운전병이 용을 쓰며 궤도차를 좌우로 흔들어 가까스로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빙하차는 다시 얼마간 전진했지만 이번엔 한쪽 궤도가 얼음덩이에 걸렸는지 한쪽이 불쑥 솟아오른 덕분에 하마터면 차가 옆으로 뒤집어질 뻔했다. 뒤쪽 캐빈에 탄 병사들의 비명이 그대로 전해졌다.
“정지! 정지!”
더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어진 세미온은 다시 자경대장을 불러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때, 이번엔 자경대장이 탔던 선두차량의 소대장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돌아왔다.
“저희 차가 전복되었습니다! 자경대장 녀석은 차를 뺀다고 둘러보는 것 같더니 사라져버렸습니다! 블리자드 때문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세미온이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얼른 할룩스를 잡고 후미의 부대를 불러냈다. 스캐너로 보니 무거운 식량 수송차들이 오르막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한참 뒤처져 있었다.
“이봐! 식량 수송차들은 왜 이리 둔해!”
“앞에서 안 움직이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당장 나가서 운전수 있는지 확인해!”
세미온의 호통에 방한복을 허둥지둥 챙겨 입은 병사들이 뿌연 눈보라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곡물 수송차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 한둘 정도는 날릴만한 어마어마한 위력의 강풍 때문에 그들은 멈춰있는 차 뒤쪽에서 몸을 바닥에 바싹 붙이고 엉금엉금 기듯이 다가가야 했다.
“염병, 얼어 죽겠네.”
수송차의 트랙터 문을 확 열어젖힌 병사들은 기겁을 했다. 운전석은 텅 비어있었다. 당황한 병사들은 얼른 다른 차로 달려가 확인했지만 그것 역시 버려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조종간까지 박살을 내어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놓은 후였다.
“뭐? 다 도망갔다고? 정말로 함정에 빠진 거야?”
“우리 부대의 병력수송차가 앞의 10대와 후미 20대의 두 토막으로 잘렸습니다.”
후미 부대의 보고를 받은 세미온은 순간 패닉에 빠져버렸다. 아직 실전경험이라고는 전무한 그의 머리에 그동안 배운 갖은 상황들이 어지럽게 뒤엉키며 그의 판단을 재촉했다.
“이대로는 전진도 후퇴도 어렵습니다. 본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낫겠습니다.”
대대장이 온통 하얀 블리자드가 뒤덮어버린 바깥을 내다보며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한 번 혼이 난 세미온으로서는 이번엔 현지인에게 속기까지 했으니 아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이었다.
“15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리라고!”
세미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첫 실전을 이렇게 망치는 건 악몽에 가까웠다.
“팔다리 멀쩡한 2천 병력을 데리고 지원요청이라니? 당장 병력수송차에서 삽 들고 내리라고 해. 후미의 병력수송차 끌던 트랙터로 곡물 수송차에 연결해서 끌면 돼.”
“이 추운 날씨에 걸어서 길을 내고 행군하라고요?”
장교들이 살인적인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을 내다보며 기겁을 했다.
“새벽이라 평소보다도 훨씬 더 춥습니다. 지금 병사들을 내보냈다간…….”
“한심한 놈들, 그 정도 정신력도 없이 플라칼 가 군인이냐!”
마땅히 설득한 거리가 막혀버린 세미온은 일단 제일 만만한 정신력 타령으로 장병들을 밖으로 몰아붙였다. 장교와 사관들은 그의 명령이 황당했지만 일단 병사들을 밖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나가! 트랙터에서 병력수송차 떼어내고 곡물 트랙터 연결해! 빨리! 빨리!”
상명하복에 익숙한 2천의 호송대 장병들은 하는 수 없이 병력수송차에 실려 있던 군장을 꾸역꾸역 챙겨 살인적인 블리자드와 강풍이 몰아치는 골짜기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체구가 작거나 힘이 없는 몇몇 병사들은 위에서 내리꽂히는 끔찍한 찬바람에 밀려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평소 입던 중갑옷 위에 침낭으로 만든 방한복까지 덧입으면서 곰처럼 둔해진 병사들은 야전삽 하나씩을 들고 식량수송차가 틀어막아버린 좁은 길 옆에 갓길을 내기 시작했다.
“뭐가 이리 추워.”
이런 강풍과 추위를 생전 처음 경험해 본 장병들은 곱은 손을 비비고, 얼어붙은 발로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어가며 열을 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산병으로 숨 쉬기는 힘들고, 장갑과 신발의 발열장치, 심지어 보병들의 몸에 지닌 스캐너나 할룩스까지도 설계 온도를 벗어나는 극저온에서 먹통이 되었다. 거기에 갑옷의 관절부위는 얼어붙고 뻑뻑해져 움직임을 더 힘들게 했다.
결국 수십 명의 병사들이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차로 옮겨진 후에야 식량차량을 자신들의 병력수송차를 몰던 트랙터에 가까스로 이을 수 있었다.
“다시 전진해. 1개 중대가 앞장서서 적군이 없는지 확인하고.”
세미온이 블리자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칼날 같은 골짜기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30여대의 행렬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1개 중대 3백여 명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다시 골짜기 정상을 향해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뚫느라 생고생을 한 나머지 보병들도 추위를 피해 따뜻한 차에 우르르 매달렷다.
“저기 능선만 넘어가면 돼.”
세미온이 지도를 확인하며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병력수송차에 식량 차량까지 줄줄이 매단 후미의 트랙터 쪽에서 바로 불평이 들어왔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이렇게 과적한 상태로는 올라가기 힘듭니다.”
“10스타디아만 더 가면 능선이야. 거기부턴 내리막이야.”
세미온은 얼음칼날 같은 바깥 공기는 숨도 쉬기 싫었지만 하는 수 없이 창 밖으로 몸을 쑥 내밀고 후미를 살폈다. 병력수송차에 식량까지 함께 매단 후미의 트랙터 20대가 막 작업을 끝낸 보병들이 하나 둘 뛰어오르면서 비실비실 처지고 있었다.
세미온은 재차 명령을 내렸다.
“보병들은 각자 군장 지고 걸어서 따라와!”
지금까지 작업만 끝나면 따뜻한 차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로 알았던 병사들에겐 날벼락이었다. 1시간 가까운 새벽 작업으로 손발이 완전히 굳어버린 보병들은 다시 차에서 쫓겨나 둔해진 몸으로 뒤뚱뒤뚱 차의 꽁무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방한복 안쪽에서 바싹 얼어버린 중갑옷의 관절에서 뻑뻑거리는 소리까지 났다.
“너희들 때문에 처지잖아!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
세미온이 트랙터를 못 쫓아오는 보병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거센 블리자드 때문에 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고,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플라칼 가 병사들은 다리가 굳어 걷지도 못하는 동료들을 챙겨가며 말 그대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정신력만으로는 쓰러지는 병사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트랙터가 서서 환자를 태우고 출발하느라 속도는 계속 느려졌다.
처음엔 차량 30대가 바싹 붙어서 밀도 있게 나아가던 행렬은 보병 2천이 좁은 크레바스 옆을 따라 4열로 걷기 시작하면서 점점 길어져서 나중엔 앞뒤로 몇 명을 빼고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지경이 되었다.
그때, 세미온은 앞쪽을 2열로 나아가던 3백의 보병들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자 스캐너부터 확인했다. 눈보라 때문에 멀리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에이, 씨, 진짜, 한심한 새끼들.”
세미온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스캐너로 보이는 선봉 3백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길 중간에서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진 채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몇몇은 산만하게 이러저리 움직이는 듯했고 몇몇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발끈한 세미온은 다시 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앞서가는 중대장을 불러냈다. 보병들의 할룩스가 저온으로 먹통이 되었다보니 그는 확성기에 대고 찢어져라 고함을 질러야 했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흰 제식훈련도 안 받았냐!”
세미온의 호통에 대한 답변은 제대장의 목소리가 아니고 웬 소름끼치는 볼트 한 발이었다.
“아쿠!”
얼굴에 볼트가 스친 세미온은 차창 옆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그대로 트랙터 운전석 옆에 나동그라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투구부터 얼른 눌러쓰고 다시 창밖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게 뭐야?”
하얀 방한복을 차려입고 눈까지 고글로 완전히 가린 수백의 병사들이 능선 위에서 얼음 위를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두꺼운 방한복과 장시간의 추위로 몸이 완전히 굳어져버린 보병들을 폴암으로 순식간에 때려눕히며 세미온의 트랙터 주변을 에워쌌다. 반란군의 산악 경보병들이었다.
“으익!”
세미온은 밖에서 문을 열어젖히려는 적병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는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1천이나 되는 산악 경보병들이 이미 몇 분 전부터 위쪽의 선봉대를 박살내고 있었지만 보병들의 통신까지 먹통이 되면서 뒤쪽으로 길게 늘어진 부대 후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아직 모른 채 꾸역꾸역 계속 올라오는 중이었다.
당황한 세미온은 차를 모는 운전병에게 찢어져라 소리쳤다.
“당장 빠져나가! 깔아뭉개든 뭘 하든 빨리!”
“아, 앞에 아군이 쓰러져 있는데요?”
“닥치고 빨리!”
운전병이 쓰러진 전우들 위로 차마 전진을 못 하자 그는 병사를 거칠게 밀어내고 직접 손으로 스로틀을 밀어 올렸다. 트랙터가 쿠르릉 소리를 내며 몰려드는 반란군 경보병들 사이를 뚫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경보병들은 둔한 트랙터를 재빨리 피했지만 길을 따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수십의 플라칼 가 병사들이 문제였다. 일어나지 못한 병사들은 눈앞으로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궤도에 놀라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고, 몇몇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했다.
“저 씨발년이!”
경보병대 사이에 있던 거한 하나가 플라칼 가 보병이 떨어뜨린 칼자루를 집어 트랙터의 궤도 사이에 푹 찔러 넣었다. 칼이 쨍그렁 소리를 내고 부러지며 함께 어긋나버린 궤도가 귀를 찢는 굉음과 탄내를 내기 시작했다.
“뭐 해! 이 병신들아!”
경보병여단장 히론 중랑장은 헛도는 궤도 바로 앞에서 파랗게 얼어버린 플라칼 가 보병 둘을 질질 끌고나와 옆에 내동댕이쳤다. 세미온의 트랙터 옆을 스쳐간 반란군 경보병들은 좁은 길을 따라 몸이 굳은 채로 줄줄이 행군하던 중장보병들을 사정없이 휩쓸며 계속 내려갔다. 고된 작업과 추위에 몸이 굳고 무기력해진 보병들은 폴암을 휘두르며 빠르게 전진해오는 반란군 보병대에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그대로 빙판 위에 줄줄이 뻗어버렸다.
그 사이, 세미온이 탄 트랙터는 빙판 위에 정지한 채 꼼짝없이 반란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꼴이었다.
“문 열어! 열어 이년아!”
히론이 트랙터의 문짝 고리를 도끼로 쾅 소리가 나게 후려쳐 부수려 했다. 안에서 파랗게 질린 세미온은 운전병을 옆으로 밀치고 무작정 엔진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한쪽 궤도가 끊어진 트랙터는 앞으로 전진하는 대신 제자리에서 옆으로 헛돌아 길 한쪽의 얼음덩이 위를 느닷없이 기어올랐다. 세미온이 방향을 잡아보려 조종간을 비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트랙터의 한쪽만 높아지면서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우뚱해졌다.
“피해! 넘어간다!”
놀란 히론 중랑장이 허둥지둥 트랙터에서 뛰어내리며 병사들, 그리고 포로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주변의 플라칼 가 병사들과 반란군 모두가 폭주하는 트랙터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쿵 소리를 내고 옆으로 전복해버린 트랙터는 다시 한 바퀴를 굴러 길 옆의 크레바스로 내리꽂혔다. 차창 밖으로 시커멓게 입을 벌린 까마득한 크레바스가 나타나자 놀란 세미온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운전석에서 나뒹군 세미온은 실내를 몇 바퀴 데굴데굴 굴러 한쪽 구석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그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다시 크레바스를 후려치면서 그는 공중으로 한 번 붕 솟구쳤다가 다시 조수석에 내리꽂혔다.
“아아악.”
조수석 밑에 팔이 끼어버린 세미온이 낮은 신음을 냈다. 트랙터 안에는 운전병과 다른 장교 두세 명도 한데 뒤엉켜 거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바닥 쪽으로는 갈라진 차창 너머로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가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탄 트랙터는 갈라진 크레바스 사이에 코를 바닥으로 향한 채로 끼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말라고!”
세미온이 악을 썼다. 금이 간 차창이 깨지거나 빠져나갔다가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루루 밑으로 쏟아져 내릴 판이었다. 크레바스 위에서는 기습을 당한 호송대 보병들이 줄줄이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이 안의 세미온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팔 하나를 가까스로 뻗어 할룩스를 잡았다. 그리고 111번 홀의 본대에 늦어도 한참 늦은 구조 연락을 띄웠다.
공격이 있고 무려 11시간 후, 북쪽의 111번 홀에서 예르마크가 이끄는 2천의 원군이 도착한 저녁 무렵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였다. 오전에 몰아치던 끔찍한 북풍은 다행히 잦아들었지만 살을 에는 찬바람과 블리자드는 여전했다. 골짜기를 오르는 길은 흰 눈에 뒤덮여 있는 몇 구의 시체들을 빼면 사실상 텅 비어있었다. 호송대가 타고 온 병력수송차도, 식량을 실은 빙하차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혹한 속에서 생존자는 물론 없었지만 희한한 건 시체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동료들의 모습에 플라칼 가 장병들은 혹시라도 나머지 병력이 다른 곳에 고립된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사방을 열심히 뒤지며 돌아다녔다.
“장군님, 장군님!”
인근 홀과 골짜기 주변을 빙 돌아서 온 아들 에우테르가 아버지 예르마크에게 헐레벌떡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여기 주변 홀의 촌로들에게 알아봤더니 블리자드 철엔 해가 뜨는 아침 6시에서 9시 사이엔 저 골짜기로 끔찍한 골짜기바람이 몰아쳐서 절대 접근을 안 한다고 합니다. 지난저녁에 여길 지나가는 차량 행렬을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군대였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미련하게 이런 데는 기어들어와!”
에우테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여긴 우리 포위망 바깥인데 어떻게 놈들이 여기까지 나와 있었던 거죠?”
“뭐긴, 우리가 이 길로 식량을 나를 걸 알고 포위당하기 전에 미리 유격대를 심어놓았던 거지.”
예르마크가 퉁명스레 대꾸하며 긴 산맥과 골짜기를 빙 둘러보았다. 식량난에 처한 진압군이 블리자드 속에서 육로로 식량을 나르려면 적도를 동서 방향으로 길게 가르고 있는 이 빙하산맥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여길 막는 게 식자재를 오염시킨 다음 단계인 게지.”
“그럼 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 계획해 놓았던 거라고요?”
그때, 예르마크에게 크레바스 쪽을 확인하던 사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 밑에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르마크가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빙하차의 트랙터 하나가 위험천만하게 처박혀 있었다. 빙하가 조금만 더 깨졌다가는 깊이도 가늠하기 힘든 크레바스 밑으로 그대로 처박힐 모양새였다. 병사들 몇이 위험을 무릅쓰고 줄을 걸고 내려가 그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장병들 5명을 끄집어내 길 위로 끌어올렸다. 그 중엔 난방도 고장나버린 트랙터 안에서 온몸이 거의 마비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플라칼 가 종손 세미온의 모습도 보였다.
“어떻게 된 건가, 세미온 경?”
예르마크가 이 황당한 광경을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차고 물었다. 하지만 턱이 굳어버린 세미온은 담요에 돌돌 말린 채 아예 입도 열지 못했다. 빙하 사이에 낀 트랙터가 블리자드와 바람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11시간은 고사하고 1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 길 위의 시체들처럼 동태가 되어버렸을 터였다.
“연대 2천…… 저, 전멸……입니다.”
생존자 중 그나마 상태가 가장 온전한 운전병이 길 위의 눈무덤 밑에 군데군데 흩어진 동료를 시체를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부대가 갈라진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던 예르마크 경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전멸이라니? 시체가 이것밖에 없는데?”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끌려가는 소리도 다 들었고요.”
예르마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 상황이 무얼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반란군은 적의 근거지를 포위했다고 믿고 있는 진압군의 배후에서 일찌감치 이 산을 장악한 채 자신들을 비웃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세미온이 가져오던 인근 홀의 지원식량까지 끊기면서 12만이나 되는 진압군의 처지는 더 궁색해졌다. 배앓이로 치료를 받는 장병들은 수천으로 늘었고, 식자재는 계속 곰팡이에 썩어갔다. 헤즈는 신선상태로 들어온 식자재 3분의 2 이상을 버려야 했다.
병사들은 포장된 비상식량만으로 열흘이 넘게 근근이 버텼지만 맹추위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병사들은 계속 약해져만 갔다. 30여년 전 황제령을 침략했을 때는 민간을 약탈할 수나 있었지만 이번엔 기근으로 약탈할 곳조차 없어 헤즈의 애를 바싹바싹 태웠다. 게다가 111번 홀을 모조리 태우고 민간인의 씨를 말렸다보니 징발할 식량도, 노역에 동원할 인력도 없었다.
헤즈는 열흘간 남쪽 산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을 펼쳤지만 괜한 동사자만 수십 남겼을 뿐 아무 수확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진압군이 곤경을 겪는다는 것이 알려지고, 세미온의 참패로 반란군의 사기까지 오르면서 그가 기대했던 반란군의 내부 분열도 쉽사리 벌어지지 않았다. 본가에서 보낸 정보요원들이 헬홀의 반란군 고위자들을 몰래 들쑤시고 다니려 했지만 소리소문 없이 살해되어 빙하 위에서 보란 듯 발견되기도 했고, 어느 날 아침 헬홀의 반란군 사령부 대문 위에 덩그러니 시체가 매달려 있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헤즈는 인내심을 잃었고, 하나뿐인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병사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말라갔고, 병원만 점점 북적거렸다.
“더 이상 끌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역풍을 맞는다.”
헤즈가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불룩했던 뺨과 턱도 그새 많이 홀쭉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꺼칠해진 참모장 클리멘트가 짜증스레 물었다.
“어쩌시게요?”
헤즈는 테이블 위의 모형도에 있던 헬홀의 표시를 툭 쳐서 넘어뜨렸다.
“헬홀을 총공격할 거요.”
헤즈의 이 한 마디에 사령실 무장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일제히 풀 죽은 표정이 되었다. 그들 중 대놓고 반발할 만큼 배짱이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육로로 말씀입니까? 이 추위 속에서요?”
기병사령관 예르마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지금 남은 식량이 다 털어도 6일치 정도요. 지금 기회를 놓치면 우린 홀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쥐새끼 신세가 되고 맙니다.”
“차라리 식량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을 보급이 가능한 적도 이남으로 퇴각시키는 게 낫습니다.”
예르마크가 바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블리자드 지대 내의 진압군을 3만 이내로 감축하고 방어에만 주력하면 블리자드 시즌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습니다.”
이번엔 참모장 클리멘트가 예르마크에게 반박을 하고 나섰다.
“퇴각? 퇴각은 쉬워 보입니까? 걸어서 이동한다면 몰라도 우리가 가진 빙하차를 다 동원해 꾸역꾸역 실어도 한 번에 1, 2만 남짓밖에 못 움직입니다. 지난번 세미온 경이 당했던 그 지름길을 이용해도 왕복에 이틀은 걸립니다. 거기 있는 적군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요.”
“어차피 헬홀을 공격할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적을 공격하는 건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겁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내 직권으로 공격을 결정했으니 쓸데없는 논쟁들은 접으시오.”
예르마크가 얼굴을 찡그리며 헤즈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난밤 헤즈가 아버지 카나르 공에게서 거의 한 시간 동안 갖은 욕설과 호통을 들었다는 말을 그의 측근들에게서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집안싸움은 집안에서만 끝내실 것이지, 여기까지 끌고 와도 됩니까?”
예르마크 경의 독설에 이번엔 헤즈가 눈을 흘겼다.
몇 달 후에 있을 하임달 공략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아버지 카나르 공은 칼릴의 반란 사태를 빨리 진압하고, 여기 동원된 병력을 최대한 빨리 재정비해 북부 하임달 장악에 대비해야 할 처지였다.
손쉬워보였던 이곳의 진압이 생각 외로 지지부진해지면서 초조해진 카나르 공은 ‘약간의 추가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칼릴 사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헤즈를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변두리 지사 정도로 쫓아내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 같았다. 카나르에게는 굳이 헤즈가 아니어도 아버지의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아들딸들이 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12만 중 이미 점령한 홀에 머물 2만을 제외하고 10만을 동원하겠소. 말들은 추위에 약해서 빙하 위로 직접 데려갈 수는 없으니 1천 5백 정도만 빙하차 트레일러에 실어 데려갑니다. 선발대는 내일아침 6시에, 본대는 내일 아침 7시부터 2개 루트로 출발합니다.”
기병은 이번에 데려온 병력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1천5백만 데려간다는 말에 명색이 기병사령관인 예르마크는 자신의 역할이 줄어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혼란스러웠다.
“2개 집단군으로 편성하되, 내가 이끄는 1군은 보병 6만으로 서북쪽 4번 홀을 거쳐 헬홀의 서쪽으로 접근할 거요. 부마께선 클리멘트 경과 함께 보병 4만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2군을 맡아 동북쪽의 39번 홀을 통과해 헬홀의 동쪽으로 접근해 주시오.”
예르마크 경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헤즈가 가는 1군의 루트는 서쪽으로 낮은 빙하산맥을 끼고 가는 길이다보니 북서쪽에서 몰아치는 살인적인 블리자드를 어느 정도 피해서 전진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2군의 진로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에서 블리자드를 정면으로 맞으며 전진해야 하는 길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서 기습도 바로 알아챌 수 있지 않소?”
“말이나 않으면.”
예르마크가 이를 갈며 이 소리를 입안에서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령은 내려졌고, 상명하복과 추진력이 생명인 남부연합군은 이제 그에 따를 일만 남아있었다.
결국 진압군은 반란군을 말려 죽이려던 계획을 접고, 혹한과 눈보라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반란군과 전면전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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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온이 신고식을 아주아주 쿨~하게 치렀습니다. ^^
덕분에 앞으로 더더욱 쿨~~ 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다음회엔 카렐이 잠시 까메오(??) 출연~)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 1부 9, 10권까지 업데이트되어서 1부가 완결되었습니다.
유페이퍼에서는 이미 판매 시작되었고 다른 서점들에는 다음주에 판매 시작될 겁니다. 2부 1~4권은 손볼 곳이 적어서 3, 4월중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잘하면 여름까지 종이책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판매 서점에 인터파크가 추가될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염병할 올레e북에 전자책은 감감무소식... -,.-;;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인터파크 예정)
조아라 노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