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4 회: 파트 14. 우리의 생명 vs 그들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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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냐드가 연합의회에서 친 군부파 의원들을 몰살시킨 오르마즈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사실은 그의 다음 부임지가 타르서스라는 사실에서 증명되었다. 타르서스는 오르마즈가 민병대 입대 초기 한 번 달아났던 강경파의 군벌 굴부딘 헤크마의 근거지였고 외지인들에게 유달리 적대적인 곳이었다.
게다가 강경파가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곳에 온건파가 주류인 특무대 소속 병력이 굳이 가 있을 이유도 없었다. 헤크마 파벌은 이미 20년 전부터 수도 마란다란을 사실상 점령한 상태이고, 코메트 토벌군과 헤네티 부대는 끊임없이 마잔다란 탈환을 시도했지만 주민들의 비협조로 실패만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적떼나 다름없는 부패한 헤크마 파벌이야말로 타르서스인들의 삶을 갉아먹는 원흉이었고, 타르서스 내부에서도 헤크마를 반대하는 파벌들이 거리마다 하나씩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신들끼리는 죽이네 살리네 물어뜯던 무리들도 막상 외세가 끼어들면 갑자기 투사로 돌변해 자신들을 괴롭히는 군벌의 구세주가 되어주곤 했다.
“타르서스인 이네들은 백년 이백년 후에도 분명 이 모양으로 살 거야.”
20년이 넘는 장기간의 분쟁으로 폐허가 된 미로 같은 거리를 말을 타고 지나며 오르마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막의 뙤약볕은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었고, 오랜 가뭄으로 누런 먼지만 풀풀 날리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헤크마 군벌과 코메트 사이에 한 달에도 몇 번씩의 공격과 방어전, 숱한 포격이 오가는 시내는 완전히 성한 건물을 찾기 어려웠다. 골목 양쪽의 흙벽돌집에는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일 구멍 한두 개쯤 없는 집이 없었고 아예 벽 한쪽이 왕창 날아간 집안에서 멀쩡히 살고 있는 가족도 보였다.
잔해로 엉망이 되어버린 길은 두 다리, 혹은 말과 노새가 아니고서는 통과하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걸을 때마다 먼지가 이는 좁은 골목에서 흙장난을 하는 중이고, 어른들은 별 할 일도 없이 구석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외지인들에게 괜히 사나운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베흔과 함께 오르마즈의 뒤를 따르던 이트닌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 꼴로 사는데 언젠간 불만이 폭발하겠죠.”
“불만을 돌릴 외세만 있다면 아마 천년도 더 이 꼴로 살걸? 마누라 바람난 것도 외지인 탓을 하는 게 몸에 익어버렸거든.”
다리에 접어든 오르마즈가 위를 올려보았다. 마잔다란 시내의 오아시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에는 며칠 전 길을 잃고 실수로 이 정신없는 시내에 접어들었다가 주민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한 코메트 군납회사 직원들의 불탄 시체 4구가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들이었을 저들은 옷과 양말, 속옷까지 모두 약탈당한 채 알몸으로 사막의 뙤약볕 아래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이곳에 배치되고 처음 시내 중심가로 나온 와헷은 험악한 풍경에 놀란 듯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도 오르마즈를 따라 타르서스에 오고 4년 내내 사막과 먼지 낀 동굴에서 똥국과 가죽 같은 빵만 씹고 살며 조금은 여윈 모습이었다.
오늘의 외출은 군벌 헤크마의 공식 초청이지만 오르가 ‘와헷 얘한테도 맛난 것 좀 먹여줘야겠다.’며 호위를 빙자해 특별히 데리고 나온 길이었다. 이젠 20세가 넘어 상병 계급장과 정식 전투병 딱지를 받은 이 건장한 청년은 묵직한 폴암과 석궁, 방패를 짊어지고 길안내를 맡은 이곳 원주민과 함께 오르마즈 일행보다 몇 발짝 앞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군벌들은 민초들을 더 못살게 만들어야 외부를 향한 불만도 커지고 자기들 입지가 더 튼튼해지지. 군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민들이 거지꼴을 못 벗어나게 할 거야.”
타르서스에 대한 오르마즈의 야박한 평가에 이트닌이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강경파 신병 시절 그가 워낙 흉악한 꼴을 많이 본 것을 알다보니 그러려니 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가 보기에도 오르마즈의 평가가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지난 4년간 오르마즈가 이끄는 150명의 [특무대 기동대]가 딱히 눈에 띄는 전과를 낸 건 없었다. 그저 명령에 따라 사막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코메트 수용소를 공격하고, 보급로를 기습하고, 창고를 약탈했고, 두 달 전에는 이교도가 있다는 핑계로 마을을 공격해 200여명을 학살한 무장집단과 교전을 벌여 50여명을 죽이고 사실상 와해시켰다.
그런 와중에도 4년간 전사자가 고작 5명, 그것도 갓 들어와 적응을 못 한 신병들이라는 건 누가 들어도 놀라운 전과였지만 민병대 수뇌부에선 ‘타르서스 내부에서 활동하는 온건파 정예 병력이 있다는 건 기밀에 붙인다.’는 이유로 기동대의 전과는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어도 민병대원들 사이에서는 [오름에서, 연합의회장에서 코메트의 치를 떨게 한 지휘관이 지금은 타르서스에서 신출귀몰하며 적을 괴롭히고 있다.]는, 과장이 꽤나 보태어진 소문이 공공연히 돌고 있었다.
사실 오르마즈의 부대는 지난 4년간 코메트를 최대한 피해 다니는 데만 도가 텄고, 대규모 정규군 부대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교전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광신도들과의 전투를 끝낸 후, 헤크마의 마잔다란 방어전을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이곳 외곽으로 이동한 기동대는 처음으로 코메트 토벌군 정규부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것도 지난번 연합의회 회의장에서 놓쳤던 바에자의 코메트 1사단이 이곳 마잔다란에 배치되었다는 정보에 오르마즈도 내심 바싹 긴장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바에자와 ‘화끈한 전투’에 돌입한 건 아니었다. 아니, 전투는 고사하고 지난 두 달간 내내 짜증의 연속이었다. 헤크마는 20년째 도시 중심가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나갈 맘도 없었고, 도시 외곽 일부를 군데군데 점령한 코메트 토벌군도 소부대로 여기저기 툭툭 건드려가며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원주민들도 온전히 헤크마, 혹은 민병대 편은 아니었다. 마잔다란 시내 거리마다, 골목마다 토호들이 다 달랐고, 신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토호들은 오늘내일의 편이 달랐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일반 주민들도 눈앞에선 차를 대접하고 돌아서면 등에 칼끝을 겨누기 일쑤였다.
이런 짜증나는 상황은 민병대에게도, 토벌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어느 쪽이든 편이 명확하다면 방향이라도 정했겠지만 양쪽 모두에게 그들은 친목하자니 믿을 수가 없고, 공격하자니 끈질기고 사나웠다. 민병대와 코메트 모두가 ‘타르서스라는 말만 들어도 징글징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구제불능인 놈들은 백날 가도 구제불능이야. 그래서 자연계엔 [도태]라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있지.”
오르마즈는 폐허가 된 수많은 집들 너머로 보이는 언덕 위의 화려한 저택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의 목적지였다.
“이런 놈들을 다루는 방법이 뭔지 아나? 그냥 냅두는 거야. 지금은 우리가 적이 되어주고 있으니 이놈들이 뭉쳐 있지만 우리만 사라지면 보나마나 지들끼리 또 치고받고 신나게 싸우다가 스스로 도태될걸.”
언덕의 저택이 가까워지자 폐허뿐이던 풍경이 싹 달라졌다. 듬성듬성 서 있는 대추야자나무들 가운데 땅바닥에 바싹 달라붙은 초소들이 나무 그늘 밑에 숨겨져 있고 두세 명 정도씩의 병사들이 험악한 눈길로 오르마즈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추야자와 초소를 경계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넘어온 듯했다. 폐허 같은 집들은 싹 사라졌고 훤한 도로 바닥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깔은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는 10척(3m) 정도 높이의 단단한 돌담이 둘러쳐진 웅장한 저택이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돌담의 폭만도 어림잡아 300척(90m)은 넘어보였다.
“후와우, 저건 뭐 집이 아니고 성(城)이네요.”
이트닌이 휘파람을 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돌담 위로는 총안이 뚫린 가슴 높이의 흉벽이 둘러쳐져 있고 소형 발리스타가 대가리를 비죽 내밀고 있는 망루도 100척(30m)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육중한 불도저를 동원해 새 경비탑을 위한 기초를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저택의 문에 가까워지자 문 옆의 망루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경비병의 떨떠름한 표정까지 고스란히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길안내를 맡은 원주민이 사투리가 잔뜩 섞인 말로 무어라 고함을 지르자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놈 지금 우리 욕한 것 아니죠?”
내내 조용하던 베흔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타르서스의 폐쇄성 덕분에 ―최소한 이때까지― 이곳 사투리는 공용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알아듣기 힘들었고, 이곳에서 4년을 머문 부대원들 대부분도 인사말이나 간단한 대화나 흉내 내는 정도였다.
오르마즈가 피익 웃으며 앞장섰다.
“모르는 게 나아.”
일부러 티는 안 내고 있지만, 오르마즈는 이곳 방언을 절반 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부대 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아라무트 출신이라던 어머니 아지드에게서 습관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던 말들이 생각해 보니 타르서스 방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X는 안됩니다.”
북쪽 문 너머에서 빳빳이 다린 헤크마 파벌 군복 차림의 한 사내가 불쑥 나와서 문을 막아섰다. 사실 오르마즈도 민병대에서 2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헤크마 파벌에서 제대로 멋낸 군복을 챙겨 입은 사람을 본 건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남자의 가슴에는 [정보국장 소령 헤즈비]라는 그럴싸한 명찰까지 붙어있었다. 언젠가 듣기로 헤크마의 맏아들이었다.
말에서 내려선 오르마즈는 뒤따라오는 베흔을 힐끔 돌아보았다. 강경파 군벌이나 지역 사령관들이 사령부 온건파 소속인 X들의 출입을 경계하는 건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잘못 들였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판이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문 밖에 남게 된 베흔은 오르가 타고 온 말고삐를 잡으며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섰다.
“여기서 기다리죠.”
헤즈비 소령이 그제야 오르마즈를 안으로 들이며 불평부터 늘어놓았다.
“그분들과 아버지께서 기다리시오. 왜 이리 늦으셨소?”
“난 당신들이 일부러 빙빙 돌아오라고 시킨 줄로 알았는데?”
오르마즈가 짜증스레 대꾸하며 남자를 따라 걸었다. 나름 멋 내어 차려입은 정복도 오는 동안 길에서 뒤집어쓴 먼지로 뽀얗게 변해 있었다. 제일 먼저 문 안에 들어간 와헷이 주변을 얼른 두리번거리고는 오르를 향해 돌아섰다. ‘문제없다’는 신호였다. 같은 민병대 소속이라 해도, 현지 군벌인 이상 절대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이 타르서스에서의 생존규칙이었다.
“이건 뭐 딴 세상이네요.”
이트닌이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문 안에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화사한 정원과 화려한 조각상, 분수대가 바깥의 황량한 거리와는 정반대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자를 따라 빽빽한 야자수와 대추야자나무, 열대의 정원을 가로지르자 이런 사막 도시, 그것도 언덕 위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제법 큰 인공연못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못 중간에는 대리석 정자가 세워진 작은 섬이 있고, 나무로 만든 작고 운치 있는 구름다리 3개가 외부와 그곳을 잇고 있었다.
“어디서 났나 아주 돈을 처발랐네.”
이트닌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오르마즈가 부하들과 함께 구름다리를 건너려 하자 방금 전의 그 ‘헤즈비 소령’이 앞을 막아섰다.
“위대한 사령관께서 계십니다. 이런 자들을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표정이 굳어진 오르마즈가 다리 건너를 돌아보았다. 구름다리 건너 정자에는 이 저택의 주인이고 민병대 최대―정확히는 민병대가 이름을 빌려준―의 군벌인 굴부딘 헤크마 장군이 에르네스토, 파란기스 부부와 나란히 앉아 오찬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와헷 넌 저쪽 주방에 가서 남는 거라도 챙겨달라고 해서 뭣 좀 먹어. 엔진도 씹어 먹을 나이인데 아침도 못 먹었다며.”
오르마즈는 아까부터 뱃속에서 요란을 떨고 있는 와헷에게 반대편 구름다리 너머, 작은 벤치를 가리켰다. 주방과 이어진 그 길은 바로 헤크마의 등 뒤쪽이었다. 와헷을 헤크마의 뒤쪽에 배치한 오르마즈는 이트닌에게는 에르네스토의 등 쪽을 향하고 있는 구름다리를 슬쩍 눈짓했다.
“하사 자넨 아침 잘 먹었으니 저기서 좀 쉬고 있고.”
눈치 빠른 이트닌은 헤즈비 소령이 뭐라 참견하기 전에 후다닥 달려가 구름다리 건너편의 의자에 털썩 앉아 크게 기지개를 켰다. 헤크마의 부하들이 어어하는 새 오르마즈의 부하들이 양쪽에 모두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헤즈비를 따라 다리를 건너 오찬 장소에 다가갔다.
“어어, 어서 와요, 카파키 소령. 이게 몇 달 만이야?”
원탁에 앉아 헤크마와 귀엣말을 나누고 있던 에르네스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 경례를 하려는 오르마즈를 덥석 안아주었다. 올해로 30대에 접어든 이 크고 잘생긴 청년은 후계자로서의 경력도 두터워지면서 이제 대외 업무에서는 사실상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간 건강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외무부장님.”
파란기스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그의 가슴을 살짝 껴안았다. 연합의회 공격을 마치고 훈장을 받았던 자리 이후, 4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를 안은 팔에 무의식중에 힘을 주었던 오르마즈는 얼른 손의 힘을 뺐다.
이 둘과 최대한 절제된 인사를 나눈 오르마즈는 헤크마와 파란기스 사이에 슬쩍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그와 헤크마 사이에는 다시 조금 전 들어온 헤즈비 소령이 서류가방을 들고 마치 방어벽처럼 털썩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두 자리가 여전히 비어있었다.
오르마즈는 한때 자신의 윗사람이 될 뻔했던 굴부딘 헤크마 장군을 재빨리 살폈다. 마르고 다부진 체구에 매서운 눈동자를 한 이 사내는 장군감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시비나 걸고 다니는 싸움꾼 같은 경박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웬만한 세력은 두 손 두 발 다 든 타르서스의 복잡한 부족 간 이해관계 속에서 갖은 권모술수로 수십 년을 버틴 노련한 정치꾼이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음흉한 눈길과 길고 텁수룩한 턱수염 속에는 무려 4대에 걸쳐 타르서스 최대의 무장조직을 이끌어 온 사나운 유전자도 숨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민병대와 헤크마 장군과의 친목에 관해 좋은 이야기 중이었다네, 소령.”
에르네스토와 헤크마가 동시에 웃어보였지만 누가 봐도 가식이었다. 헤크마는 3만 가까운 병력―그 절반 이상이 제대로 통제도 못 하는 사실상 도적떼이긴 하지만―으로 민병대라는 허술한 연합체 내에서 가장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덕분에 그자는 판지셰르에 멀쩡히 있는 진짜 사령관을 놔두고 걸핏하면 혼자서 민병대 사령관을 자처하며 온건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했다. 에르네스토가 가장 혐오하는 군벌도 바로 이자였다.
그때, 헤크마보다 족히 반 뼘은 큰 미녀 한 명이 빵이 든 바구니를 들고 사뿐사뿐 다가와 원탁의 중간에 내려놓았다.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한, 타르서스 특유의 도발적인 미모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설익은 몸매와 눈매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헤크마가 능글맞게 웃으며 여자의 허벅지 안쪽을 슬쩍 더듬었다.
“어제 결혼한 38번째 아내입니다. 15살이라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도 잘 듣죠. 여자들은 25살만 넘어가면 음흉해져서 부엌데기 빼고는 쓸모가 없답니다. ……마누라로는 이런 어린 게 제격이지요.”
헤크마의 노골적인 도발에 파란기스의 표정이 굳었다. 나이어린 남편 곁에서 민병대를 함께 운영하며 온건파 후원에 앞장서고 있는 ‘나이 많은’ 파란기스를 겨냥한 일격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나서서 반격을 하는 대신 차분히 남편의 반응을 기다렸다.
“10년 후에는요?”
에르네스토가 미녀를 힐끔 올려보며 물었다. 에르네스토의 어딘지 부족한 반격에 헤크마가 채 대답하기 전에 오르마즈가 일격을 날렸다.
“10년 후에 음흉한 부엌데기가 되거든 제게 보내주시죠. 제가 다시 수줍음 많은 10대 소녀로 만들어 되돌려드릴 테니.”
오르마즈는 누가 보기에도 노골적이고 능글능글한 웃음으로 그 나이어린 미녀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헤크마는 오르마즈의 매혹적인 눈웃음에 헤벌레해진 나이어린 아내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 자리에서 쫓아냈다.
“빨리 꺼져.”
미녀는 다리를 허겁지겁 건너 와헷이 정신없이 양고기를 뜯고 있는 벤치 옆을 지나 주방으로 멀어져갔다.
그때, 에르네스토 뒤편 다리를 지키고 있던 이트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란 오르마즈도 무심결에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고 와헷도 신나게 먹고 있던 양고기를 내던지고 얼른 폴암을 움켜잡았다. 에르네스토 부부를 호위하고 온 구름다리 건너편 4명의 경호 위병들도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태연한 건 맞은편의 헤크마였다.
“내 다른 손님을 하나 불렀으니 진정들 하시지요.”
헤크마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트닌이 보고 있는 정원 남쪽의 무성한 수풀 건너편에서 회색의 코메트 정복 차림의 여자 한 명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뭐야, 이거. 뭐 하자는 수작이야?”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에르네스토는 지금까지의 침착함을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아내의 앞을 막아섰다. 헤크마 아들의 안내를 받아 막 다리를 건너온 그 여자 역시 에르네스토의 존재에 뒤늦게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도 동행한 네 명의 경호원들을 다리 너머에 두고 온 참이었다.
“싸우자는 건 아니니 진정들 하시라니까요.”
헤크마가 다시 웃으며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 앉았다. 그리고는 막 도착한 바에자 장군에게 마지막 빈 자리를 가리켰다. 에르네스토와 오르마즈를 마주한 바에자의 표정이 잠시 얼음장처럼 굳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정자에 찬찬히 다가왔다.
‘40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이트닌이 재빨리 주변을 확인하고는 수화를 보냈다. 정원 주변, 건물의 창과 옥상, 구석구석에서 헤크마의 경비병들이 눈을 내놓은 채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일행과 오르마즈는 물론이고 바에자까지도 꼼짝없이 정식 초청을 빙자한 헤크마의 수작에 걸려든 꼴이었다.
“판돈을 최대한 키워놨으니 이제 슬슬 경매를 시작해 볼까나.”
민병대 후계자 부부와 코메트 최고의 명장, 그리고 코메트와 원수를 진 1급 현상수배범 오르마즈까지 한 자리에 모아놓은 헤크마가 손바닥을 비비며 실실 웃었다.
“경매라니!”
노기에 찬 에르네스토가 씩씩거리며 당장이라도 이 사내의 멱살을 움켜쥘 듯한 태세를 잡았지만 이미 그의 두 아들이 허리춤의 무기를 쥔 채 양쪽에서 아버지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어허,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양쪽 모두에게 마잔다란과 상대방 세력의 수괴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 아닌가요? 내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과 이 자리에서 기꺼이 손잡고 다른 쪽을 넘겨주겠소.”
“뭐, 이 따위 돼지만도 못한 새끼가 다…….”
정의감으로 가득한 에르네스토는 이 악랄한 사내의 속임수에 분노하며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어차피 군벌 따위에게 충성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황당한 상식 밖의 행동은 할 말을 잃게 할 지경이었다.
헤크마가 에르네스토의 욕설을 못 들은 척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자, 판돈을 걸죠. 일단 타르서스를 제게 다 준다는 보장은 양쪽 공통입니다. 지도자께서 제게 정식 사령관 직함과 테나토의 세습 통치권을 약속해 주신다면 앞에 있는 모스 바에자 장군을 민병대에 넘겨드리죠.”
“뭐어?”
에르네스토도, 얼떨결에 ‘판돈’이 되어버린 바에자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헤크마는 과실주를 홀짝거리며 계속 떠들어댔다.
“그리고오……코메트는 가진 게 많으니 요구조건도 좀 큽니다. 솔직히 사단장 한 명보다야 지도자 후계자 부부와 덤으로 얹은 1급 지명수배자가 판돈도 크니까요. 타르서스 외에 ㅤㅋㅞㄹ크와 남극의 세습 지배권까지 넘겨준다면 이 셋을 묶음으로 넘겨드리죠.”
헤크마가 단검 끝으로 에르네스토와 파란기스, 오르마즈를 동그랗게 그려 가리켰다.
“자, 대신관께 연락을 하시건, 어머니에게 살려달라고 비시건 상관없으니 빨리 생각하시고 제게 대답 주시기 바랍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던 오르마즈는 다시 바에자를 돌아보았다. 연합의회 공격에서 원수로 만났던 숙적이지만 어딘지 자신과 비슷한 성장 배경 때문인지 희한하게 이자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 너희 민병대 꼴이 왜 그 모양인지 알겠다. -
머릿속을 울리는 빈정거리는 말투는 분명 바에자였다. 오르마즈는 또다시 머릿속을 울리는 이 소리에 지난번 쿠트라스 대신전 지하에서의 경험이 그저 환청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차마 부정은 못 하겠군.”
오르마즈가 ‘혼자 떠드는’ 소리에 헤크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르마즈가 저 비열한 사내를 노려보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우리 기왕이면 옵션 하나 더해서 판을 키우는 건 어떨까?”
헤크마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로 알고 어리둥절해졌지만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오르마즈의 의도를 이해한 바에자가 킬킬거리고 웃으며 원탁에서 바나나를 집어 까먹기 시작했다.
- 오호, 좋은 생각이야.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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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새로운 파트가 시작됩니다. 출판본으로 치면 여기부터 3부 7권이군요.
잠시 머리 식히시라고 풋풋한 오르마즈와 역시 풋풋한 바에자가 발랄하게 함께(?) 등장합니다. (물론 하는 짓은 전혀 안 풋풋합니다. ㅋㅋㅋ)
오르마즈의 젊은 날 이야기는 이번 파트로 끝납니다. 다음 파트부터는 사제의 키와 고향행성의 모든 비밀이 엮여 있는 오르마즈의 말년(...ㅠ.ㅜ;;)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ブ~~★
♠ 전자책은 1부의 9, 10권을 1월중에 올려서 1부를 완결지을 예정입니다. 2부의 1,2권도 함께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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