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17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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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드와 6명의 크바르나들은 ‘바에자의 시체’가 든 무거운 대리석 관을 짊어지고 카히나 성을 이루는 세 바위산 중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바위의 꼭대기로 저녁의 어둠을 뚫고 조심조심 올랐다. 높이만도 750척(225m)에 달하는 이 원통 모양 바위 꼭대기로 오르려면 옆면으로 숱한 앵커를 박아 만든 아찔한 철제 계단을 한참이나 빙빙 돌아가며 올라야 했다. 대리석 관의 내용물도 내용물이지만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무게도 어른 대여섯 명보다도 무겁다보니 어둠 속을 내딛는 걸음걸음이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성소를 깨끗이 비워놨어요.”
먼저 올려 보냈던 울피가 후다닥 달려 내려와 아샤드에게 알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구스에 직접 관련된 것이라면 반드시 신전의 성소에 안치하도록 되어 있으니 현신의 시체라면 당연히 이 꼭대기에 있는 크바르나의 신전에 모셔야만 했다.
“수고했습니다, 부인.”
아샤드는 제일 앞에서 관을 지고 가는 병사와 자리를 교대하고 직접 바에자의 관을 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샤드 일행은 그렇게 한참을 걸려서야 바위 꼭대기 좁은 공터에 있는 작은 신전에 도착했다. 이곳은 카히나 성 내에서도 오직 크바르나나 성직자들만이 올라올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휴우.”
신전까지 올라온 아샤드는 까마득히 아래의 황무지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관을 진 크바르나들은 신전 제일 안쪽의 횃불 아래 단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아샤드는 신전 내부의 횃불을 지키는 두 명의 크바르나 위병들을 손짓하며 지시했다.
“귀한 분께서 안에 계시다. 꼼짝 말고 철통같이 지키도록. 모실 신전을 찾을 때까지 일시 여기에 둘 것이다.”
“알겠습니다.”
평소처럼 중무장한 두 명의 크바르나들은 폴암을 단단히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병들에게 신전을 맡긴 아샤드 경은 일단 신전을 나섰다. 신전 바로 옆에는 카히나 성의 공중을 항상 차단하고 있는 거대한 공중 에너지장벽 포스트와 장애파 발생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카히나 성을 에워싼 3개의 바위 꼭대기에는 각각 3개의 포스트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중 나머지 둘은 성을 오르는 통로 주변을, 성 자체를 막는 가장 큰 포스트는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전술적으로 워낙 중요한 만큼, 위병 둘이 신전 내부의 2명과 함께 정상 주변을 항상 감시하고 있었다.
정상 주변을 대충 둘러본 아샤드는 아찔한 정상 모퉁이의 바위에 다가갔다. 멀리 자신이 다스리는 숲, 오아시스들의 마을들에서 나오는 엷은 불빛이 황무지의 군데군데 섬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어디서 봐도 야경은 아름다웠다.
“……평화롭군.”
말은 이렇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고, 애당초 평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 아니 크바르나 모두의 꿈은 화려한 로브를 입고 신도들 앞에 당당히 선 대신관을 지키며 그의 신성을 다시 느껴보는 것이지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그저 그런 하급제후 신분으로 볼품없는 성을 지키며 골방노인네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부대원들 모두가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은 자신들의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기쁜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교단의 신도는 꾸준히 늘고 있었다. 얄궂게도 교단의 신도 수가 늘어난 결정적인 계기는 8년 전 출혈열 사태였다. 단 2년 새 수천만의 사람들이 치료약도 없이 죽어가던 공포어린 현장에 그간 갖은 기득권을 누려 온 유학자들은 소수의 원리주의자나 개혁파 지원봉사자들 외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의 유학자와 제후들이 재산을 싸들고 앞 다투어 오지로 도망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상황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남아 예방법을 알리고 환자들을 격리하고 간호한 주역은 황실과 교단 신도, 성직자, 교단 의학교 출신의 의사들이었다.
의사와 자원봉사자들은 황제를 지원하는 민간조직을 만들었고, 황제가 치료약을 찾아내 가져왔을 때도 ―아무도 접근조차 하려 하지 않던― 격리수용소의 죽어가는 환자들 사이에 뛰어들어 약을 배포한 것도 그들이었다. 서부와 황제령의 제약조합 소속 신도들은 사재를 털어 소독약과 치료약을 생산해 황실에 바쳤고, 북부의 자영업조합과 남부의 식품업조합에서는 병원과 격리 수용소에 식자재를 염가로 제공해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
제국의 시민들이 제후들과 유학자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출혈열이 잦아들기 무렵, 가매장되었던 망자들의 시체를 꺼내어 치르던 정식 장례식과 시체와 유산 분배 문제를 다루던 법정에서였다. 그들은 확산이 중단된 후에야 슬그머니 나타나 장례 양식과 제례 규범을 보급한다며 돌아다녔고, 죽어가는 부모나 배우자를 끝까지 지킨 효자와 열녀들을 찾아내 상을 주고, 선행을 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유족들에게 기금을 준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너희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거냐?’라는 사람들의 얼어붙은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평민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그들을 최후까지 지킨 교단의 신전에 가족의 장례를 맡겼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지표였다.
황제가 출혈열 퇴치를 도운 교단에 대한 치하의 의미에서 이전까지 강력한 규제에 묶여 있던 신전의 증축과 공개 예배를 허가했을 때 코리온과 몇몇 원리주의 유학자들을 빼면 거의 반대를 하지 못했던 것도 시민들의 분노에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처지 때문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제국민들의 의식이 충분히 깨기 전 함부로 다양성을 강요하는 건 혼란만 일으킨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평화롭게 융화하려면 적어도 100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며 한 발, 한 발씩, 주변의 방해와 거부감을 물리치며 아주 침착하게 대신관, 아니 황제이며 대신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종 이곳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던 황제는 능숙한 바람어로 크바르나, 성직자들과 교리와 경전에 관한 진지한 토론을 나누곤 했다. 그곳에서 황제는 성직자들을 능가하는 지식과 논리로 그들을 완전히 압도했고, 예배에도 참석해 그 절차를 미리 머리에 담고 돌아갔다.
한편 시라즈의 비밀 별궁에는 그동안 전사했던, 혹은 앞으로 전사하게 될 지도 모르는 크바르나들의 유전자를 모두 확보해 ‘자신들이 모두 죽으면 부대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크바르나들의 공포까지도 없애주었다.
덕분에 부대가 조금씩 줄어가는 것에 두려워하던 크바르나들도 4백년만에 처음으로 어린 후배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고, 얼마 전부터는 20대의 젊은 크바르나를 현역 신병으로 맞이하는 감격적인 순간도 가질 수 있었다.
황제는 언젠가 크바르나와 지금의 시라즈 여단을 통합해 ‘대신관으로서의 황제’를 수호하는 부대를 만들겠다고까지 약속해 크바르나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게 했다.
죽음이 길을 막지만 않는다면 황제는 분명 32대 대신관 ‘오르마즈 카렐 빈트 다하카르’가 되어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줄 듯했다. 크바르나들의 의욕은 하늘을 찔렀고, 4백 년을 이곳에 머문 그들에게 100년, 아니 그 이상이라 해도 문제가 아니었다. 초대 대신관 아프라시아에 못지않은 현신이 될 그가 고작 잔딕 따위로 죽음을 맞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대충 마음을 가다듬은 아샤드는 다시 내려가는 계단에 몸을 실었다. 왠지, 이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더 맘에 들지 않았다.
사이르 일행이 와 있다는 말에 밖에도 맘 놓고 못 나가고 종일 먼지구덩이 문서에 머리만 처박고 있던 베흔은 간단한 간식과 함께 돌아온 울피를 힐끔 돌아보았다.
‘부럽네.’
베흔은 같은 X이면서도 당당히 가족을 꾸리며 사는 자들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4백 년째 그림자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아샤드와 울피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마자리크와 결혼해 지지고 볶아가며 잘 살고 있는 네피나 제네르의 남편이 된 시로도 부러웠다. 물론 황제의 특사로 내려진 그들의 결혼 허가에는 ‘불임수술을 하고 2세를 만들지 않겠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으니 결혼은 못했어도 자식농사만은 누구보다 성공한 자신도 딱히 밀릴 건 없는 듯도 했었다.
하지만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를 받는 아샤드의 삶을 보니 그도 빨리 이 생활을 털고 아리아노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베흔 자신도 못 당하는 그 유별난 성깔의 아리아노가 울피처럼 헌신적인 부인이 되어 줄 리는 절대 없겠지만.
똑같은 문서 찾기에 지긋지긋해하던 황실 사람들도 향긋한 차와 떡을 보고는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베흔은 울피가 내민 떡과 차를 받아 입에 넣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사이르 경이 왔습니까?”
“네, 깜짝 놀랄 선물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선물이라뇨?”
울피가 주변을 얼른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바에자 현신의 시신을 가져왔어요.”
“우읍.”
놀란 베흔은 하마터면 씹고 있던 떡이 목에 걸릴 뻔했다.
“뭐라고요? 바에자 그자가 죽었다고요?”
성직자 앞에서 생각 없이 거친 표현을 썼던 베흔은 얼른 미안한 표정으로 상황을 땜질했다. 울피도 그의 무례를 적당히 용서하는 선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 페스트의 반란을 진압할 때 페로 자이센 총리의 공격에 너무 크게 다치셨나 봐요. 제가 눈으로 확인했는데 정말 그분 시신 맞아요.”
베흔은 남은 떡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알기로 바에자가 페스트에서 입은 부상은 갈비뼈 아래를 페로의 창에 찔린 것이었고, 그 정도라면 당시는 살아 있었다 해도 퇴각 도중 충분히 죽을 수 있는 상처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페스트에서도 발전소 폭발로 죽은 줄 알았다가 멀쩡히 나타나 황실을 당황하게 했던 그자가 또다시 허무하게 죽었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바에자 마구스의 시체 분명 맞아요? 상처는 확인했습니까?”
“남편이 그분의 신체적인 특징까지 다 아는걸요. 그리고 감히 그분의 옷을 어떻게 벗깁니까?”
버럭 화를 내는 울피 앞에서 베흔도 쉽사리 계속 따져들 수가 없었다. 그는 남은 떡을 재빨리 입에 집어넣고 눈치를 보며 자료실을 나섰다. 딱히 미심쩍은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한 번 속은 전력 때문인지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테라스에 나선 베흔은 자신의 보안 할룩스로 급히 시라즈의 별궁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난 페스트 반란 사건의 시신 분석을 담당하고 있는 연구원을 불러냈다.
“이봐,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아유,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실험실 옆의 간이침대에서 막 자다 일어나서 머리에 새집이 생긴 연구원은 쌍꺼풀이 진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베흔에게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페스트 반란 때 폭발하면서 무너진 발전소 건물 있잖아? 얼마 전에 황상께서 거기서 바에자 마구스의 시체를 찾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었나?”
“아아, 그거요? 상태가 안 좋아서 아직 분석이 다 안 끝났는데.”
“상관없으니까 빨리 파일 열어 봐!”
베흔의 호통에 잠이 확 깬 연구원은 정신이 절반쯤 나간 얼굴로 엉거주춤 실험실로 나가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폭발하면서 건물 바깥에서 죽은 시체는 무지하게 많은데 황상께선 건물 안에서 깔려죽은 시체들을 최우선으로 확인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결과가 어떻냐고!”
마음만 급한 베흔이 마구 신경질을 부리자 연구원의 말도 조금씩 빨라졌다.
“그러니까아……그 지열발전소가 한동안 반란군 수중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발전소 바깥의 반란군 시체들은 그네들이 이미 다 처리한 것 같고요, 터빈실 안에 있던 시체 대부분은 잔해 밑에 깔려 장비 없이는 수습을 못 했을 거예요. 저희가 팠을 때 나온 건 총 11구였죠. 모두 근위대 8군단 가디언 아니면 시민병들이었어요.”
“그럼 바에자 그놈은 거기서 안 죽은 거야?”
베흔의 목소리가 실망감에 작아졌지만 연구원의 대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이, 왜 이렇게 급하세요. 그런데 처음 도착했을 때 자료를 보니까 터빈실 잔해 중간에 웬 구덩이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인력으로 뭔가 파간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구덩이 밑에서 놈들이 떨어뜨린 찌꺼기를 다시 뒤졌죠.”
“답답하게 진짜!”
베흔의 신경질이 끝까지 간 모습에 당황한 연구원이 얼른 시험관에 들은 조각 하나를 내보였다.
“그것 중에 진주 색깔로 코팅된 갑옷 조각이 몇 개 나왔어요. 불에 탔지만 꽤 고급 코팅을 했는지 벗겨내니까 색깔이 살아있더라고요. 바에자 마구스가 이런 색깔의 튀는 갑옷을 입는다면서요?”
베흔의 표정이 비로소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페스트의 반란으로 황실 사람들이 호드르 산 위의 발전소에서 마지막 사투를 벌였을 때, 사에나는 ‘진줏빛 마녀’ 바에자의 얼굴을 걷어차 실신시키고는 터빈실에서 달아났다고 말했었다. 사에나는 기절한 바에자가 절대 그곳에서 살아 나갔을 리 없다고 장담했지만 나중에 살아있는 바에자가 멀쩡히 다시 나타나면서 괜히 그만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렸었다.
하지만 베흔은 여전히 신중했다.
“투구일 수도 있어. 발길질에 쓰러질 상태였다면 그 전에 투구를 벗어놓았다는 뜻이니까 뒤에 흘려놓은 채로 도망갔을 수도 있지.”
“그건 아닐 거예요. 두께하고 완충재를 보니까 흉갑하고 허리를 받치는 요대예요. 전장에서 맘대로 벗을 수 있는 부위도 아니라고요. 게다가 안쪽엔 불탄 사람의 살점도 붙어 있었고요. 워낙 많이 타서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이 정도 압력과 온도를 받았다면 이걸 입은 사람도 폭발로 즉사했을 거예요. 분명해요.”
“이런 빌어먹을.”
할룩스를 쥔 베흔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바에자의 정체가, 아니, 바에자라고 알고 있는 자의 정체가 두려워졌다. 그는 할룩스를 쥔 채 허둥지둥 울피에게 달려갔다.
“이봐요! 지금 그 관 어디 있습니까!”
어리둥절해진 울피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바위 꼭대기요. 거기에 신전이 있거든요.”
“잠깐, 거기에 공중 에너지장벽 포스트도 있지 않아요?”
“신전 바로 옆에 있죠.”
울피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흙빛이 되어버린 베흔이 울피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빨리! 빨리 그 관을 밀봉하고 제대로 지키라고 연락해요!”
“예……에.”
울피는 영문도 모른 채 할룩스를 들고 정상의 신전을 지키는 크바르나 위병들을 불러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답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크바르나들이 4명이나 있는데 이렇게까지 대답이 없을 리가 없었다. 베흔이 구석에 밀어놓았던 플람베르주를 덥석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빌어먹을! 자이납 너 따라와! 저 위에 올라가야겠다!”
바위 꼭대기의 신전에서 ‘바에자의 관’을 지키던 크바르나 헤네티가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 아샤드가 내려가고 약 10분 정도가 지난 때였다. 관 뚜껑에서 무언가 기척을 느낀 그들은 잠시 당황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사실 시체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시체가 사후경직으로 약간씩 움직이는 때도 있고 보존처리가 잘못되면 내장이 부패하며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열어 볼까?”
서로 눈치만 보던 그들은 관 뚜껑이 확 열리자 기절할 듯이 놀라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안에서 튀어나온 건 시체가 아니고 루토였다.
“으익!”
기겁을 한 크바르나들이 반사적으로 폴암을 들고 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칼이 아니고 마우저였다. 바에자의 예상대로, 신전을 지키는 크바르나 위병들은 갑옷만 입었을 뿐 방패가 없었다. 루토와 바에자가 쏜 마우저가 순식간에 두 크바르나들의 눈 사이를 박살을 내며 관통해 지나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신전 밖을 지키던 두 명의 크바르나들이 허겁지겁 출입문으로 달려왔지만 정예병답게 섣불리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내부를 향해 슬쩍 눈을 디밀었다.
“으웁!”
딱 한 발, 단발의 마우저 한 발이 보일 듯 말 듯 문 틈새로 들이민 크바르나의 눈을 정확히 관통하면서 비명을 지르며 신전 밖 계단을 나뒹굴었다.
“나가서 잡아!”
놀라운 사격 실력으로 크바르나를 일격에 잡아낸 바에자가 함께 관을 타고 온 루토에게 카랑카랑하게 고함을 질렀다. 밖에는 아직 한두 명이 더 있는 듯했다. 깜깜한 밖으로 번개처럼 달려 나간 루토는 신전 한쪽의 에너지장벽 포스트로 달려가고 있는 크바르나를 발견했다. 혼자 남았음을 직감한 병사는 무모하게 적과 맞서는 대신 카히나 성의 가장 중요한 방벽으로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대장! 신전에 적의 매복입니다! 방금 들여온 관에…….”
할룩스에 대고 막 목소리를 높이던 크바르나 헤네티의 다리를 루토가 쏜 마우저가 갈가리 찢고 지나갔다.
“끄아악!”
허벅지 아래가 절반 찢겨나간 크바르나가 바닥을 뒹굴었지만 그대로 무너져 주지는 않았다. 자신을 향해 마우저를 겨눈 루토와 눈이 딱 마주친 그 크바르나 전사는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적이 아닌, 등 뒤에 있는 포스트의 비상 박스로 힘껏 던졌다. 뒤이어 채 0.1초도 지나지 않아 루토가 쏜 마우저가 크바르나의 머리를 관통해 박살을 냈다.
“이런 빌어먹을!”
루토가 비명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마지막 크바르나가 죽기 직전 던진 단검이 장벽 포스트의 비상 박스 스위치를 후려치면서 포스트와 제어장치 주변을 투명한 강화커버가 순식간에 에워쌌다.
“멍청하게! 빨리 잡으라고 했었잖아!”
뒤에 나온 바에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황한 루토는 제어장치를 에워싼 투명 강화커버에 마우저를 쏘았지만 거미줄 모양 실금만 났을 뿐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부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루토는 죽은 크바르나의 폴암을 들고 금이 간 강화벽을 악을 쓰며 두들기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어긋나자 화가 난 바에자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멀리 지평선 부근으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근위대의 강습 셔틀들이 보였다. 바에자의 원래 계획은 이곳의 공중 에너지장벽을 해체해 저들이 공중 강습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크바르나의 선방에 실제 강습 개시가 몇 분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곧 놈들이 올라올 거다! 내가 계단 지킬 동안 책임지고 부숴 놔!”
바에자는 거추장스런 로브를 벗어 내던지고 계단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마지막 죽은 놈이 본대에 연락을 했으니 이곳으로 올라오는 유일한 통로인 이 계단으로 곧 크바르나들이 올라올 판이었다. 원래는 크바르나들이 올라오는 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시설들이겠지만 이젠 도리어 그들의 발길을 붙드는 수단이 될 터였다.
“내가 막아야 하나.”
바에자가 마우저의 카트리지를 확인했다. 그때, 밑에서 다급히 달려 올라오는 크바르나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에자는 눈을 부릅뜨고 표정을 돌변하며 루토에게 외쳤다.
“거기 빨리 안 끝나!”
“조금만! 5분만 주십시오!”
그때, 어두운 하늘을 뚫고 성 위에 도착한 근위대의 강습셔틀 20여대가 쌕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거의 20여대의 강습셔틀이 에너지 장벽 때문에 접근을 못 한 채 주변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바에자는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보았다. 크바르나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들이 여기에 내리기 전에 크바르나들이 먼저 도착한다면 명색이 마구스인 그가 저들과 피를 말려가며 싸워야 할 판이었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이들에게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모두 처음에 놓친 크바르나 한 명 때문이었다.
- 놈들이 거의 도착했다고! -
낭떠러지에 몸을 걸치고 밑을 내려다보던 바에자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소리 없이 머릿속으로 전했다. 적이 가까울 때, 소리를 내지 않고 머릿속으로 의사를 전하는 그의 능력은 정말로 쓸모가 많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바위 중간 감시초소에 있던 2명의 크바르나 초병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 모퉁이를 돌기 직전, 이미 머리 위에서 명사수 바에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머리를 내민 바에자가 올라오고 있는 크바르나들의 정수리에 대고 마우저를 당겼다. 머리 위에서 울린 찰칵 하는 소리에 놀란 크바르나들이 바위에 몸을 찰싹 붙였다. 바에자가 쏜 마우저는 벽에 몸을 붙인 크바르나들의 가슴 앞을 휙 스쳐 수직의 바위절벽에 걸려 있던 철제 계단의 발판을 단번에 박살을 냈다.
“우앗!”
부서진 발판을 디디고 있던 크바르나는 바닥이 꺼지며 1스타디아 아래 까마득한 바닥에 곤두박질칠 뻔했지만 재빨리 동료의 손을 잡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동료를 끌어올린 크바르나가 슬며시 머리를 내밀어 위를 살피려 했지만 또다시 날린 바에자의 마우저 사격에 투구 한구석이 쩍 하며 갈라져버렸다. 얼른 물러난 그가 피 묻은 얼굴을 싸쥐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여길 어떻게 올라가!”
대담한 크바르나의 X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위 꼭대기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할룩스에 대고 동료에게 외쳤다.
“방패! 방패하고 발판하고 리프트 케이블 가지고 올라오라고 해!”
이들의 머리 위엔 근위대의 강습셔틀이 에너지장벽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빙빙 선회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시간이 없고, 절망적이었다.
크바르나들이 바위에 매달린 채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에너지장벽 포스트를 보호하는 투명 벽에 막혀 10분 가까이를 쩔쩔 매고 있던 루토는 폴암의 날이 뭉그러질 만큼 죽어라고 두들겨 가까스로 벽 한쪽에 구멍을 낼 수 있었다.
“됐다!”
그는 가까스로 낸 구멍에 폴암의 자루를 넣어 안쪽에 멀찍이 있던 포스트의 제어장치 뚜껑을 몇 번을 찍어 부숴버렸다. 부서진 뚜껑 안쪽에서 나타난 포스트의 빨간 전원이 그에겐 세상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는 폴암 자루 끝의 작은 날로 전원을 확 내렸다. 그 순간, 하늘을 가리고 있던 푸른빛 에너지장벽 한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껐습니다!”
루토의 의기양양한 고함이 한밤의 절벽 꼭대기를 뒤흔들었다. 400년간 크바르나의 본거지였던 카히나 성에 최악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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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3부의 전환점이 되는 전투가 드디어 시작입니다. ㅎㅎㅎ
그런데 오늘이 일요일이군요;;; 개인적으로는 주말연재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주말에 올린 글은 조회수나 코멘트나 추천수나 다 나쁘거든요. ^^;;
* 출판본 3부 5/6권이 현재 주문게시판에서 예약중에 있습니다. 이번엔 크리스마스 전에 배송을 끝내려 예약기간을 조금 짧게 잡았으니 서둘러주시고요,~~
출판본 교정을 담당해주실 분을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이전에 교정해 주셨던 분이거나 책을 구매해서 출판본의 스타일을 아시는 분이면 좋겠고요, 전처럼 출판본 1권 값을 빼 드립니다. ^^ 제게 쪽지 주시거나 메일 보내주시면 됩니다.
(덤으로 출판본을 조금 일찍 보실 수 있는 특권도;;;;.)
전자책 1부 5~8권이 대형서점들에도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스24에는 시리즈에 묶이지 않고 따로 놀고 있네요;;; 어쨌든 '혈맥'으로 검색하시면 8권과 공짜책인 미리보기까지 총 9권이 나옵니다;;;) 조만간 교보문고도 서비스가 가능해질지 모르겠네요.
1월엔 나머지 9, 10권까지 내어 전자책도 1부를 완결할 참입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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