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14화 (1,009/1,132)

< -- 1014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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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회의의 협의가 이루어지는 사실상 마지막 날인 5일차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 ‘공개적으로 드러난’ 회의 자체에선 누구나 다 아는 원론만 오갈 뿐 깜짝 놀랄 발표도, 합의도 없었다. 오늘의 안건은 수명개조 파괴에 대한 대응책이었지만 첫날 채취한 8백 명분의 샘플들 중에서는 변종 바이러스, 소위 [45호]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황제는 변종 바이러스를 찾아 황실에 보고하는 연구소나 가문에 1억 다리크의 포상금을 걸었고, 각 지역 제후들에게는 1달 이내로 제후민 중 1천 명씩의 샘플을 무작위로 뽑아 황실에 제출할 것을 명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회의장을 나선 황제는 초상집 분위기가 된 남부제후들의 동향을 보고받으면서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놀랄 만큼의 ‘표정관리’로 측근들마저도 속이고 있었다.

“칼릴 때문에 똥줄이 타겠군.”

황제가 보고서를 확인하며 한 말은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는 회의를 빙자해 빤한 주제, 빤한 내용으로 제후들, 그리고 제국민들의 관심을 모조리 이곳 수베르에 잡아놓은 채 뒤에서는 측근들을 총동원해 제국을 붕괴로 몰아가려는 남부의 꼼수를 하나 둘 소리 없이 부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날인 내일, 각 제후들에게서 최종 안건의 동의를 확인하고 회의가 열리는 동안 ‘회의장의 막후에서 진짜로 벌어진 사건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오늘 상품시장에서 곡물 가격은?”

카렐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오늘 황제의 따르는 신료들의 면면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문부 내각의 5명의 대신들 중 달라지지 않은 건 아리아노 라자루스 법무대신과 압둘 모투바 내무대신 둘뿐이었다.

카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번 개각에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평민 계급 출신 신임 재무대신 밀리타가 서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첫 황실대신이 되었던 볼토가 이미 있기는 했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재무대신은 내무대신과 함께 황실 5대신 중 가장 서열이 높았고, 지금껏 평민은 고사하고 웬만한 명문가 간판이 없는 귀족조차 후보 물망에도 한 번 못 올랐을 만큼 벽이 높은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번은 반란이 끝나고 난 직후 살벌한 분위기를 틈타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을 앉혔다고 비난할 거리도 없었다. 밀리타는 상급회계사와 법률사, 지금까지 쌓은 전문 경영인 경력도 파일 하나를 꽉 채울 정도였고, 이미 제후가에서 재무대신을 지내며 관직 경력도 갖고 있었다. 신분 문제만 아니라면 지금까지 왜 이런 자리에 못 앉았는지가 의아할 정도였다.

“오늘 상품시장의 곡물가격은 추가로 2할이 급락하고 있습니다. 회의 둘째 날 최고점을 찍었고 지난 3일간 절반으로 폭락했습니다.”

신임 재무대신 밀리타의 대답에 카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곡물가격은 테번이 황제의 아들 메네스를 죽이고 도망갔던 바로 그날 역사상 최고점을 찍고 단 3일 만에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밀리타가 작은 귀엣말로 덧붙였다.

“하디 델루지가 고문으로 있는 상품 트레이더 조합은 이번 폭락으로 2억 1천만 다리크의 환산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고용하신 암시장 트레이더들이 오늘까지 그네들을 몰아붙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오늘 포지션 정리하고 잠적하라고 일렀습니다.”

“굶어죽은 제국민들의 살점 값이군.”

카렐은 잠시 웃었지만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이젠 굶어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신이 다시 대기하고 있지만.”

카렐은 이번엔 밀리타의 등장 못지않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신임 공부대신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1번 프리깃에서 붙잡혀 지금 보안국에서 목숨을 빌고 있을 공부대신 셰니 펠머슨의 자리에는 8년 전 출혈열 창궐 당시 바이러스 샘플을 채취하려 감염자 수용소에 대담하게 들어갔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자그룰라 모렌 박사가 서 있었다.

지난 7년간 시라즈의 지하 별궁에서 약품에 파묻혀 살았던 그는 제국의 과학기술과 공업을 총괄하는 공부대신으로 화려하게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가 대체 무슨 이유로 죽음이라는 베일을 치고 7년이나 종적을 감췄던 것인지 너무도 궁금해 했지만 그는 ‘황상을 위해 음지에서 일했었다.’는 말 외에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오염된 곡물과 수명개조 파괴로 제국이 붕괴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제국 제일의 유전학 전문가를 제국의 과학기술과 산업생산을 총괄하는 공부대신으로 등용한 것에 불만을 품을 사람은 전부터 이 자리를 노리고 있던 몇몇 상류층 인사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대신은 간만에 돌아온 관직 생활이 어떠시오?”

카렐은 그들의 뒤쪽에 보이지 않게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는 늙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평소에도 워낙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렸던 그 남자는 황제의 시선을 받자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황제의 곁에 바싹 다가섰다. 레곤 대공주의 측근이었던 푸아킨 케레부스는 골 아픈 관직 같은 건 안 맡겠다며 끝까지 고사했지만 황태후 세네피스가 남부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루게까지 직접 찾아가 설득을 한 끝에 가까스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이번에 등용한 세 사람 모두 그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이번 인사에 불만이 많은 페로조차도 최소한 인물 자체에는 뭐라고 지적할 것이 없었을 만큼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포진이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분명한 황제의 강력한 친위체계 구축이었다.

다행인 건 모렌 박사, 아니 자그룰라 모렌 대신과 밀리타 레즐린 대신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까지 의사와 환자 신분으로 시라즈의 지하기지에서 유별난 친분을 쌓았던 이 둘은 함께 내각에 들어와서도 여전했다. 심지어 자그룰라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도’ 의사 출신이고 같은 순혈 R의 그레이오팔인 밀리타를 반드시 곁―그저 단순히 아랫사람 수준 이상으로―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카렐은 신임 대신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번엔 군부 쪽을 돌아보았다.

“제네르 경, 아라무트 쪽은 어떻게 되어 가나?”

황제의 물음에 제네르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영감’이 아직도 못 들어오게 고집을 부리고 있나?”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제네르의 모습에 카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국회의 전날, 토로 시의 반란 당시 본가에 중요한 일이 생겼다며 체포 직전 도망친 서부 아라무트의 영주 5제후 사이르 경의 흔적이 도무지 잡히지를 않고 있었다.

반역사건에 연루된 지방제후가 출신들은 꽤 여럿이지만 그 중 ‘상급제후 본인’이 직접 연루된 건 그자 하나였다. 그자는 황제가 탔던 1번 프리깃에서 반역자들이 탈출한 후 그들의 탈출정을 ‘구조’할 수송선을 파견했다가 보안국의 감시에 꼬리가 밟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자가 자신의 영지로 빠져나가버렸으니 카렐로서는 이만저만 허탈한 일이 아니었다. 카렐은 즉시 황실군 서부 파견군에 그자의 영지인 아라무트의 종가를 접수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암살교단 쪽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신중한 제네르가 결국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전 근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먼 과거의 교단 시대 코메트나 헤네티들도 유독 아라무트에는 쉽사리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라무트 암살교단의 ‘영감’이 [우리 지역에 군대를 들여보내는 외지인이나, 우리 지역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은 더 이상 아침 해를 못 보게 될 것이다.]라며 선언한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언은 절대 공갈포가 아니었다. 먼 옛날 이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라무트에 이단 심문관과 헤네티 부대를 들여보냈던 2명의 대신관은 정말로 ‘다음날 해를 못 보게’ 되었다. 심지어 간 큰 세나우스 2세 유평황제도 공포정치 시절 이스마엘 가의 세금 탈루를 조사하기 위해 보안국 헌병대를 파견했다가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난 베개 밑에서 날이 선 단검을 발견하고는 파랗게 질려 철수시켜야 했다. 그리고 당시 보안국장과 법무대신의 침대에서도 똑같은 단검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1만이 넘는 황실군을 아라무트에 들여보낸다는 건 사실상 황제를 포함해 황실 주요 인물들 모두의 목을 걸어야 할 일이었다.

“일단 법무부 수사관들을 파견했는데 올 테면 와 보라는 분위기입니다.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막무가내로 떼만 쓰고 있습니다.”

황제가 얼굴을 찡그리자 법무대신 아리아노가 얼른 변명처럼 뒤를 이었다.

“종장만 자수하면 연좌제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 설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막 집무실에 들어선 카렐을 맞아 준 건 창백한 얼굴의 딸 마하였다. 마하는 황제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와 그의 가슴에 훌쩍 뛰어올라 망토 안을 파고들며 꼭 안겼다. 병이 난 것이 과연 맞기나 한 것인지 말 그대로 번개처럼 빠른 동작에 대신들도 어어 하면서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안아주기로 하셨으면서.”

마하가 카렐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앙탈을 부렸다.

“아까 두 번이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왜 안 오셨어요?”

잠시 얼떨떨했던 카렐은 그제야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미안하다, 회의 쉬는 시간에 왔어야 하는데 자꾸 다른 일이 생기더구나.”

원래 마하에게 주기로 되어 있던 약을 더 위중한 상태인 칼릴의 요아킴 딸에게 보내면서 대신 카렐은 새 약이 나올 때까지 아이의 상태를 두 시간마다 직접 확인하고 함께 있어주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약속을 안 지켰으니 카렐도 할 말이 없었다.

“다섯 시간이나 저 내버려두셨으니 지금부터 두 배하고 반 같이 있어줘요.”

아이는 카렐의 목을 껴안고 절대 안 떨어지겠다는 듯 눈까지 꼭 감아버렸다.

“알았으니 25분 후엔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야 된다.”

카렐은 무겁고 거추장스런 망토를 벗기라며 한쪽 팔을 벌려보였다. 평소엔 이런 손짓이 나오면 문 앞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시녀가 다가와 얼른 황제의 망토를 끌러 받아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망토 버클을 풀려 겨드랑이 사이로 쑥 들어온 손은 평소의 기계적인 시녀의 손길이 아니었다.

“움?”

카렐이 뒤를 휙 돌아보았을 때, 그곳엔 ‘과잉충성’ 한 번 해 보려다가 황제의 가슴 버클이 생각같이 잘 안 풀려 쩔쩔 매고 있는 신임 재무대신의 얼굴이 있었다.

그때 마하의 표정이 갑자기 사나워지더니 황제의 가슴에 닿아 있는 밀리타의 손을 확 쳐냈다. 그는 자신과 황제 둘만의 공간인 망토 안을 지키려는 듯 손으로 망토 버클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못써.”

카렐이 버클을 움켜쥔 아이의 손을 슬며시 치워냈다. 어렵사리 버클을 풀어내고 망토를 벗겨낸 밀리타는 망토를 달라며 손을 내미는 시녀의 손을 슬며시 무시하며 그대로 품에 껴안고 황제를 따라 집무실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한 팔에 마하를 안은 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자리에 앉은 카렐은 뒤따라 들어온 2품, 3품의 공직자들에게 앞의 자리를 가리켰다. 부총리 대리를 맡은 아리아노를 선두로 문부를 대표하는 5명의 대신들과 병부를 대표하는 제네르와 황실군 각 군단급 부대를 대표하는 대장군급인 릴라크, 시로와 제파, 조페가 자리를 잡았다.

베아트릭스도 병부의 대장군으로 이 자리에 있어야 했지만 오늘 오전, 칼릴의 충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황실 특사] 자격으로 딸 엘룬, 보안국장 사에나와 함께 떠나 이 자리에 없었다. 물론 정치 감각 빵점의 베아트릭스에게 황실 특사라는 감투는 황제가 이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제네르는 여전히 황제의 망토를 팔에 안고 있는 밀리타와 황제의 목에 매달린 마하를 보며 이 자리에 베아트릭스가 안 들어온 것을 퍽이나 다행으로 여겼다.

자리에서 잠시 이리저리 기지개를 켠 카렐은 내각 대신들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의사나 유전학 전문가가 둘이나 있어서 묻는 건데.”

“예?”

자그룰라 모렌 대신과 밀리타 레즐린 대신이 동시에 어깨를 들썩하며 되물었다.

“5천명의 샘플을 추가로 검사하면 키니에 저항하는 [45호] 바이러스를 과연 찾아낼 수 있겠소?”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이 일제히 이 둘을 향했다. 결국 모렌 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명개조 발견 과정은 잘 모르지만 공생 바이러스는 한 명에게서 나온 유전형이 같은 바이러스를 증식시킨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백 년간 수많은 변종을 만들기는 했지만 핵심 코드는 같습니다. 애당초 단일 바이러스에서 분열한 개체라는 게 문제입니다. 키니는 핵심 코드를 노리고 있어서 변종이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그 말은 기존 제국민들을 아무리 뒤져도 변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요?”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그때,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생 바이러스의 출처는 고향 행성 생존자의 골수입니다.”

카렐의 눈이 확 커지며 방금 입을 연 밀리타를 향했다. 지금껏 공생 바이러스의 구체적인 출처에 관해서는 그 어디서도 공식적으로 언급된 일이 없었다. 밀리타는 더 말해야 하는 것인지 머뭇거리며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카렐이 굳은 얼굴로 계속 물었다.

“생존자? 그게 누군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7번’이라는 여성 실험체입니다. 고향행성 생존자 중 유일하게 성체로 콜로니에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공생 바이러스는 당시 7번에게서 추출한 여러 변형의 공생바이러스 중 가장 변이 가능성이 적은 것을 찾아내 약간의 손을 본 겁니다. 자칫 콜로니 주민의 체내에서 병원체로 돌변해서는 안 되니까요. 변종을 찾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성체’라는 말을 붙인 건 다른 상태로 들어온 자도 있다는 의미겠지?”

“어린 상태에서 들어온 실험체가 둘 있었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체의 공생 바이러스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노화가 진행되었지요.”

“그렇다면 그 7번을 찾아내야 비로소 다른 형태의 공생 바이러스를 찾을 수 있다는 건가? 500년 전의 사람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지?”

카렐이 눈살을 찌푸렸다. 밀리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험체 7번은 야푸르 대신관의 연구소에서 달아났다가 콜로니인들의 유전자 오염을 막기 위해 사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표본화된 기록이 없으니 그때 관례대로 소각했을 겁니다. 변종을 찾는다면 지금의 제국민들보다는 고향행성의 생존자 중에서 찾을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야, 그네들은 다 죽었잖아? 생존자가 어딨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리아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불쑥 끼어들자 밀리타도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그게 문제죠. 그 말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졌지만 자그룰라의 표정만은 여전히 진지했다.

“물론 고향행성에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야 없겠지. 그렇다면……고향행성을 찾아내어 그네들의 유해를 찾아낸다면 그 바이러스의 형제들을 구하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할까?”

모렌 대신의 조금은 황당한 물음에 밀리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부터 50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당시에 생존자들은 거의 원시상태 비슷하게 살고 있었으니 바이러스까지 생존할 만큼 유해를 기술적으로 처리할 상황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지막 생존자들을 사살한 코메트들이라도 당시 기술수준의 사후처리를 해 줬다면 또 모르지만 장례는 고사하고 모조리 다 태워버렸고요. 제국민 중에 찾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내기를 걸어야 한다면 힘들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어쨌든 제국민을 뒤지는 것보다 확률이 높다는 건 사실이군.”

또다시 문제가 ‘고향 행성’, 그리고 결국은 ‘타리프의 일지’로 수렴되자 카렐이 낯빛을 찡그렸다. 자신의 손목에 박힌 잔딕, 검은 재, 심지어 수명개조의 비밀과 자녀들의 생존 문제까지 모두 어디 처박혔는지도 모르는 옛날의 문서와 이젠 잊혀진 과거의 땅덩이에 얽혀 있었다.

“아라무트에 가 있는 학장이 타리프의 일지 마지막 권을 제발 찾아내야 하는데…….”

카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타리프의 일지 3권에 온 제국민들의 목숨이 걸린 고향행성의 정체가 담겨 있었다.

레즐린 가가 정착한 아라무트의 ‘카히나 성(城)’은 암살교단이 자리를 잡고 있는 정글 바로 바깥의 사막에 위치해 있었다. 아라무트라는 이 황량한 행성에서 사람이 숨 쉬고 살 머물 수 있는 곳은 스페이스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큰, 소위 ‘산소지대’라 불리는 우묵한 대접 모양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지대뿐이었다.

그 산소지대 중앙에는 암살교단의 본거지인 고지대 정글이 위치했고, 정글을 빙 둘러 있는 도넛 모양 저지대는 정글보다 훨씬 크지만 사실상 그곳에서 나오는 산소와 물에 전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는 기생체 신세였다. 카히나 성도 바로 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평상시엔 제국 어디보다 조용하던 이 외진 카히나 성이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시끄러웠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교단의 것이라면 무조건 알러지를 일으키는 누군가가 이곳에 오면서부터였다. 어제 저녁, 이 성의 외진 병영 서고에서 찾아낸 대신관의 유품 상자를 놓고 카히나 궁의 꼭대기 베란다에서는 코리온과 베흔이 마치 결투라도 하듯 마주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은 유교 국가이니 이런 흉물들은 모조리 태워버려야 한다.”

사람 몸뚱이만한 상자 앞에 우뚝 선 코리온은 수베르에서 달려온 베흔 앞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자에는 이미 한 번 불을 붙이려 했던 듯 그을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학장님……제발……이건 좀…… 참아주세요.”

뒤늦게 소화기를 들고 달려온 자이납만 양쪽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감히 교단 물품에 해를 끼쳤다는 데 격분한 코나 시디크가 철퇴를 쥔 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고, 우베는 당장이라도 코리온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기세로 서 있는 그 전직 헤네티를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코리온의 이런 황당한 결벽증에 기가 막혀진 베흔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임무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이곳에 오신 건 황상과 제국을 구할 수 있는 교단 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으고 분석하는 겁니다!”

“저것들은 자료가 아니고 그 변태 괴물이 남긴 쓰레기일 뿐이다. 황상께서 명하신 그 일지는 아직 찾지도 못했다. 내가 자료와 흉물도 구분 못 할 바보라고 여겼나? 라스! 뭐 하냐! 빨리 태우라고!”

코리온은 라이터와 연료통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는 몸종 라스에게 악을 썼다. 하지만 라스도 이번만은 주인의 명령을 선뜻 따르지 못한 채 양쪽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금 전에도 화학 전공의 불 전문가인 우베가 자이납의 망토를 다짜고짜 벗겨 씌워 재빨리 불씨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당황한 사람들이 불타는 연료 위에 물을 끼얹어 상자를 한 번에 재로 날려버리는 대형 참사가 될 뻔했었다.

“내, 참 미치겠네.”

저 벽창호를 이미 몇 번이나 상대했던 베흔은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학장님을 안으로 모셔라.”

베흔의 명령을 받은 크바르나들이 코리온을 힘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라스도 차라리 다행이라는 듯 얼른 연료통과 라이터를 내려놓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놈이 감히! 황상께 당장 연락하겠다! 그분의 허락을 받았는가!”

“황상이 지 밥상이냐, 부르라 말라 하게. 무슨 저 따위 놈이 다 있어.”

멀어지는 코리온의 뒷모습을 보며 베흔이 혀를 끌끌 찼다. 소화기를 든 채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있던 자이납도 소화기를 내던지고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휴, 늦었다가는 저 인간 시체처리나 할 뻔했네.”

베흔은 상자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슬쩍 들여다보며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상자를 안 태운 것보다는 학장의 정반대편 쌍둥이 벽창호인 코나 시디크가 학장의 머리통을 박살내기 전에 온 게 더더욱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나오라는 건 안 나오고 뭐 이딴 쓸데없는 것들만 나와.”

베흔이 상자를 툭툭 차며 짜증을 냈다.

“타리프의 일지는 검문에 걸려 도착 못 한 것 아닐까요?”

우베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베흔이 뚱한 얼굴로 상자 안쪽을 뒤졌다. 상자는 2중으로 만들어져 눈에 보이는 위쪽엔 쓸데없는 제식용 양초 더미가 잔뜩 쌓여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저 쪽지만 아니었어도 학장님이 그리 광분하지는 않으셨을걸요.”

우베가 상자 안쪽의 비밀공간을 가리키며 머쓱한 얼굴로 코리온 편을 들었다. 그곳엔 [다음 대신관에게.]라는 글자가 타이프로 찍한 큼직한 종이가 들어있었다. 그 밑에는 지금까지는 그림이나 자료로만 남아 있던 대신관의 정식 예복이 속옷부터 시작해 속바지와 치마, 로브와 에이프런, 금빛 머플러는 물론이고 가죽신까지 완벽하게 한 세트로 들어있었다.

그 한쪽엔 용이 새겨진 반지와 서클렛, 목걸이, 갖은 모양의 브로치와 발찌, 그리고 이상한 칩이 달린 백금 팔찌 한 벌까지 안 보이게 숨겨져 있었다. 이 당초 물건을 받아 보관했던 크바르나들도 미처 몰랐던 내용물이었다.

화려한 내용물에 비하면 상자 자체는 정말로 초라했다. 싸구려 합판과 철물로 된 외피 안쪽에 누런 종이를 겹겹이 붙여 속을 댄, 한 번 쓰고 버리면 딱 적당할 싸구려 상자였다. 그러니 이 어마어마한 내용물들을 품고서도 사람들 눈에도 제대로 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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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시던(?) 자이납 컴백입니다. 이번 편부터 파트 엔딩을 장식하는 카히나 성 전투가 시작됩니다. 대단원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만큼 이런저런 스토리가 얽혀서 좀 깁니다. ^^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23일)부터 출판본 3부 5~6권 예약을 주문게시판에서 개시합니다. 예약 개시하면 이곳에 공지글로 올리겠습니다.연말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책을 낼 예정입니다. 6권은 이 파트의 엔딩까지 들어갈 예정이니 연재분보다 진도가 상당히 앞서갈 것 같습니다. ^^

아참, 지난번 말씀드린대로 어제부로 전자책 1부 5~8권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유페이퍼는 이미 승인이 나서 판매 시작되었고요, 다른 대형서점들은 다음주쯤 판매시작될 것 같습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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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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