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1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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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트라스의 대신전 앞 광장에 차를 세운 수우는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출입문 쪽을 응시했다. 쿠트라스의 대신전은 교단 전성기에 아케메니안 궁, 남극성당과 함께 3대 성소의 지위에 있었지만 교단의 몰락과 함께 다른 두 곳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곳만이 사실상 유일한 초대형 신전으로 남아있었다.
이곳도 한때는 트라카 교단이 하마타를 이끌던 중심지였지만 교단 통합 신전이던 아케메니안 궁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12개 교단들―정확히는 ‘이디나의 교단’과는 무관한 합법적인 교단들―이 단칸방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선황들 치세에는 종교 탄압으로 공개된 예배와 확장이 금지되어 큰 건물들 대부분은 병원과 의학교, 신학교로만 쓰였었다.
지금은 표준시로는 2시가 넘은 한밤중이지만 쿠트라스는 하루가 20시간이라 표준시와는 때가 잘 맞지 않아 조만간 해가 뜰 참이었다.
“그래, 별 수 없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수우는 하디에게서 받은 상자를 가방에 넣고 차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질러 대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애매한 새벽 시간이어도 사람들은 군데군데 제법 보였다. 심야기도를 하러 온 신도들도 있었고, 병원에 입원 중인 가족 친지를 보러 온 사람들이나 그들을 상대하는 장사꾼들도 군데군데 있어서 특별히 밤 시간의 두려움을 느낄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전 계단을 올라 트라카의 혜성 문장이 새겨진 거대한 문을 통과하던 수우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잠시 멈칫거렸다.
‘병신, 신도도 아니면서.’
수우는 황궁 광장에서 산 채로 찢겨 죽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꾸 흔들리려는 스스로의 맘을 가다듬었다. 교단 성직자의 길을 택한 아내를 위해 상급귀족의 지위를 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내를 따라서 개종을 한 건 아니었다. 남극성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아버지, 개종해서 골수 교단 성직자가 된 어머니, 그리고 종교 자체에 냉소적인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집안에서는 예민한 종교 이야기를 적당히 피하는 선에서 지금까지는 나름 그럭저럭 잘 살아왔었다.
“어휴, 왜 이제야 오셨어요?”
아내 구르베스의 상급자인 지도 성직자가 신전에 들어온 수우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수우도 안면이 있는 이 인상 좋은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트라카 교단 14신관이라는 이 남자의 이마에는 간택자 출신을 뜻하는 토파즈도 박혀 있었고 머리를 빡빡 깎아 제대로 성직자의 냄새를 풍겼다. 사실 4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외모였다.
교단에 포용적인 카렐 황제 즉위 후, 최소한 양지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교단 사람들이나 신도들의 사정은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황제가 신전의 증축 제한을 풀어 준 덕분에 이젠 교단별로 예배당을 세워 이전처럼 한 예배당을 돌려서 쓰던 궁색한 처지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직자의 용모와 복장 제한 규정도 없어져 이젠 성직자들이 옛날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로브 차림으로 길거리를 다녀도 치안군이나 황실군에 잡혀가 ‘풍기문란’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태형을 당할 일도 없어졌다.
이렇게 황제가 ‘양지의 사교’를 지원하는 것이 정권 전복을 노리는 호전적인 교단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것이라는 이런저런 음모론 해석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공개적인 사교도들 사이에서 황제의 너그러움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아내는 괜찮은가요?”
수우가 불안한 내색을 최대한 감추며 물었다.
“쉬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요. 원래 오늘 성소 지킴 담당이긴 한데 다른 사람 시킬 테니 나오지 말라고 해도 부득불 말을 안 듣고 거기 버티고 있어요. 안쓰러워 보여서 음료수하고 먹을 걸 좀 갖다 줬어요. 계속 여기 있다가는 생사람 잡게 생겼으니 설득해서 집에 좀 데려가 봐요.”
“집엔 아들놈 방이 그대로 있어서 아마 오기 싫을 겁니다.”
수우의 대답에 지도성직자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랬군요. ……그럼 제가 신전 내에 따로 있을 곳을 마련해 주는 게 낫겠군요.”
“제가 성소에 직접 가서 아내를 만나 설득해 봐도 될까요?”
수우의 물음에 지도성직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성소는 성직자 외에는 드나들 수가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거기 버티고 있으려고 한다면서요? 방금 수베르에서 온 길인데 다녀온 얘기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한참을 고민하는 듯 싶던 지도성직자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빨리 얼굴만 보고 나오세요, 아무리 성직자 남편이라 해도 일반인이 거기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어렵지 않게 허락을 얻어낸 수우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재빨리 신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우는 수백 년 세월의 켜가 쌓인 거대한 신전 로비를 가로질러 제일 안쪽,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잘 꾸며진 목조계단을 내려가니 옛날 지하 강당으로 쓰였었다는 넓은 홀이 나타났다.
홀의 제일 안쪽에 난 작은 문 앞에는 언젠가부터 헤네티 출신 용병 두 명이 석궁과 할버드를 쥐고 항상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안쪽에 있는 ‘성소’는 원래부터 성직자들의 폐쇄적인 기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엔 이렇게 헤네티들까지 동원해 막고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수우는 그제야 자신이 가져온 ‘가짜 팔찌의 진품’의 가치를 실감했다.
지도성직자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은 두 용병들은 수우의 얼굴만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수우는 난생처음 성소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별 것도 없네.’
수우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름 40척(12m) 될까말까한 원형의 방 안에 주변을 빙 둘러 니치와 석상이 있고 중앙에 사각의 텅 빈 제단이,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 방석과 독서대 수십 개가 줄을 맞춰 죽 놓여있었다.
‘저건가?’
가장 중요한 건 제일 한쪽, 어른 얼굴 정도 높이의 움푹한 니치에 있었다. 그곳엔 파란 불꽃이 타고 있는 작은 화로가 하나 보였고 그 앞에는 하얀 광택을 내는 물건이 자그만 유리 상자 안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누구냐.”
누군가 무기를 집는 철크덕 소리와 위협적인 목소리에 수우가 고개를 휙 돌렸다.
“구르베스, 나요.”
제단 밑 독서대에 엎드려 졸고 있던 삭발한 여자 성직자가 눈을 비볐다. 그는 잠에서 막 깬 퀭한 눈으로 옆에 있던 칼을 움켜쥔 차였다. 그는 쌍꺼풀이 진 눈을 애써 뜨고는 수우의 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수우……당신?”
구르베스가 그제야 안도하며 칼을 내려놓았다. 팔찌를 지키느라 군 경력이 있는 6명의 성직자들이 이 성소 내부를 무장을 한 채 교대로 불침번을 선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밤은 구르베스의 차례였다. 매사 철저한 구르베스가 불침번 도중 졸 만큼 오늘 하루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해버린 모양이었다. 밤새 해쓱해진 아내의 모습이 수우에겐 더 안쓰러워 보였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요?”
“허락받고 들어온 거니까 염려 말아요.”
수우는 쑥 들어간 아내의 뺨을 만져주며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구르베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수우는 더듬거리며 아내를 달래주려 했다.
“테번 그 애는 아직 괜찮고…….”
“그냥 얘기하지 말아요. 어찌될지 알고 갔잖아요.”
구르베스가 고개를 저으며 따뜻한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숨을 내쉬며 아내를 토닥여 준 수우는 집에서 만들어 온 요구르트 병을 가방에서 꺼내 내밀었다. 유목민 출신의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거라도 좀 먹어요. 종일 굶었다며요?”
구르베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수우는 아내의 눈을 보며 재차 요구르트와 숟가락을 내밀었다.
“집에서 일부러 가져왔어요.”
사양하던 구르베스는 좋아하는 것을 챙겨 온 남편의 정성에 하는 수 없이 요구르트를 받아 떠먹기 시작했다.
수우가 힘이 없는 아내를 보며 말했다.
“여기 며칠 안 나와도 된다고 했어요. 당신까지 혼자 여기 처박혀 있으면 나 혼자 집에 있기 얼마나 괴롭겠어요.”
수우의 말에 구르베스는 요구르트를 먹다 말고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워낙에 잔정 없는 군인 출신 엄마지만 그렇다고 자기 배 아파 낳은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들보다 못한 건 절대 아니었다. 수우는 요구르트를 떠먹는 아내의 숟가락 끝이 그릇을 제대로 못 건드리고 헛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에 잠이 잔뜩 들었어요. 과로 때문이잖아요.”
“있을만……해요.”
어렵사리 요구르트 한 숟갈을 다시 삼킨 구르베스의 눈이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느낌이 꼭 뭐에 취한 것 같아요.”
구르베스가 어눌해진 말투로 중얼거리며 다시 요구르트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곧 숟가락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에 굴렀다.
“미안해요, 여보.”
수우는 요구르트에 섞어놓은 독한 수면제에 취해 바닥에 축 늘어진 아내 구르베스를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이 화낼 거라는 거 알아요.”
수우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아내 구르베스의 로브 옷깃을 풀고 목걸이를 끌렀다. 그곳엔 이 성소의 관리자들이 교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마스터키가 달려 있었다.
“내가 부탁해도 안 할 거라는 거 잘 알고.”
의식이 없는 아내의 목에서 마스터키를 빼내며 수우는 흰자위를 드러낸 채 떨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거열형을 당할 아들을 살리는 일이라 해도 아내는 절대 마구스의 성물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었다.
“나 혼자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아요. 당신은 아무 책임도 없어요.”
수우는 구르베스의 키를 가지고 성소 안쪽 니치에 있는 유리상자에 다가갔다. 그 안에는 그가 가져온 것과 똑같은 모양의 손등 가리개가 달린 왼쪽 팔찌와, 그 한 벌이 되는 나머지 오른쪽 한 짝의 팔찌가 노란빛 쿠션 위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바로 수나 마구스가 남긴 마구스 팔찌였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후계자로 지명한 코리온이 물려받아 차고 있어야 하지만 그가 수령을 거부하면서 결국 ‘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이곳 성소에 이렇게 모셔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우는 하디가 가르쳐준 대로 팔찌와 함께 받은 작은 필름을 상자 문틈에 꽂고 아내의 마스터키로 뚜껑을 조심조심 열었다. 문의 센서가 오작동할 거라는 하디의 말대로, 정말로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수우는 가져간 가짜 팔찌를 상자 안의 왼쪽 한 짝과 조심스레 바꿔치기한 후, 다시 뚜껑을 닫았다.
겉보기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후우.”
몇 초 걸리지도 않는 짧은 작업이었지만, 수우의 이마에는 이미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진짜’ 마구스 팔찌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아내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까짓 거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게 할 순 없잖아요.”
수우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드리운 동전만한 칩에 무언가 대단한 기능이 있는 듯했지만 지금의 수우에겐 그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저들 손에 들어가는 순간 수백, 수천만, 어쩌면 그 이상의 목숨이 죽음의 나락으로 밀려나게 될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설사 안다고 해도 이 선택을 바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내 잘못이 아니에요. 카렐 그놈 때문이에요. 우리 아들한테 못된 짓 한 만큼 받는 거예요.”
모진 표정을 지은 수우는 훔쳐낸 마구스 팔찌를 잘 숨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방금 쓴 마스터키도 다시 아내의 목에 걸어주었다. 구르베스는 여전히 의식을 못 찾은 채 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수우는 들어왔을 때처럼 아내를 독서대에 엎드린 모양새로 조심조심 세워주고는 입고 온 외투를 벗어 등에 덮어주고 일어났다. 약기운에 취해 있지만 몇 분 후면 그냥 한숨 푹 잔 줄로만 알고 깨어날 터였다.
쌔근거리고 있는 아내를 한 번 돌아본 수우는 가방을 질끈 둘러메고 성소를 서둘러 나섰다.
“생각보다 일찍 나오시는군요.”
문 앞에는 들어올 때처럼 용병 두 명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안쪽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한 번 힐끔 눈으로 확인했을 뿐 그 이상까지 체크하지는 않았다. 구르베스는 처음처럼 잠들어 있었고, 방 안의 물건은 겉보기로는 모두 온전했다.
“아내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요. 그냥 자고 있으라고 했어요.”
“하긴, 교대시간도 다 됐으니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게 낫겠죠. 어차피 저희가 지키고 있으니.”
용병들도 하루 종일 식음을 전폐한 채 맘고생을 하고는 이제야 졸고 있는 불쌍한 여자를 굳이 불침번이라며 깨울 맘은 없어보였다.
맘먹은 일을 마친 수우는 용병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광장 건너편 자신의 차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올 때처럼 하디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져왔어?”
하디가 수우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수우는 그에게 대답 대신 팔찌를 내보였다. 진짜 마구스 팔찌를 확인한 하디의 눈에서 반짝거리며 빛이 보였다.
수우가 팔찌를 다시 품에 감추며 따지듯 물었다.
“이거 가져가면 그 애 확실히 살려주는 거 맞지요?”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 영창에서 빼내준다는 거지 무조건 살 거라고 장담은 못 해. 영창에서 나와 도망쳐서 살아남는 건 그 애 능력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하디가 법률사답게 아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수우도 이 이상의 대답은 바랄 수 없음을 잘 알고는 있었다. 하디가 이미 대기 상태에 있는 할룩스를 내보이며 수우를 재촉했다.
“빨리 줘, 내가 연락하면 그때부터 작전 개시한댔어.”
수우도 자신의 이번 선택으로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의 경계에 선 아들을 놓고 그에겐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수우는 결국 가져온 팔찌를 하디의 손에 건네주었다. 수나 마구스의 팔찌를 건네받은 하디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감돌았다.
“약속은 지킬 테니까 걱정 마.”
하디는 할룩스를 켜고 옆에 있는 수우 보라는 듯 또렷한 발음으로 연락을 보냈다.
“비엔의 키 입수했습니다. 이제 그쪽에서 시작해 주십시오.”
움찔하며 잠을 깬 카렐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침대의 투명한 베일 너머로 침소를 지키는 시녀 둘이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다. 자신이 자다 말고 왜 놀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비?”
카렐이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네페티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품 안을 더 깊이 파고드는 정도로 반응했을 뿐이었다. 가슴을 스치는 그의 매끄러운 알몸과 폭신한 젖가슴이 여느 때처럼 카렐을 기분 좋게 했다.
“읍.”
네페티의 귀에 입을 맞추려던 카렐이 다시 움찔했다. 조금 전 그를 잠에서 깨웠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폐하?”
네페티가 카렐의 움직임에 놀란 듯 눈을 번쩍 뜨며 가슴을 짚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네페티가 카렐의 얼굴과 목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
“맙소사, 왜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설마 그건 아니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카렐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하가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어둠 속에 보이는 네페티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크낙스 공주와 갓난 아들 오렌의 급사 이후로 불안을 느낀 그는 매일 아침저녁 딸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일과였다.
“맙소사.”
네페티가 얼른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려 했지만 카렐이 얼른 그를 붙들었다.
“내가 나가서 확인해 볼 테니 황비는 더 자요. 나하고 있으면 덜 아파하니 내가 있어주는 게 낫지.”
“하지만……종일 피곤하신데. 차라리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하죠.”
“괜찮아요, 황비 덕분에 푹 잤어요. 원래 쪽잠 자는 거 알잖소. 기분도 이상한 게 확인할 것도 있고.”
카렐은 네페티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 주고는 침대를 나섰다.
“계속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오. 내일 오후에 내 낮잠 좀 자러 잠시 들릴 테니 꼭 있으시오.”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던 네페티는 카렐의 묘한 눈짓에 비로소 슬쩍 웃으며 그에게 직접 가운을 입혀 주었다. 대충 가운만 걸친 카렐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가디언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눈짓한 카렐은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오늘밤 괜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비빈들의 처소에 하나하나 들러 깨지 않게 확인을 해 보았다. 기병대 병영에서 자고 있을 베아트릭스를 빼면 다들 어제의 피로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만 에스더는 만삭의 배로 불편한지 계속 뒤척거리며 제대로 잠을 못 이루는 듯했다. 카렐은 불편해하는 그의 다리 사이에 살며시 쿠션을 끼워주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비빈들 처소를 둘러본 카렐은 아래층의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황제 옆에서 회의를 지켜보느라 종일 피곤했을 맏이 카이는 장태자를 24시간 지키느라 보조침대에서 자고 있는 주치의 하심과 함께 아기처럼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그 옆방에서는 포로 생활에서 태자로 비로소 돌아온 주페가 동생 마리안과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시종 말로는 오빠에게서 ‘아이 잡아먹는 광산귀신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은 마리안이 엄마 방까지 가기 무섭다며 오빠 침실에 눌러앉아버린 모양이었다.
주페의 침대 머리맡에는 세데스가 ‘다친 발이 빨리 낫기를 바랍니다.’라는 쪽지를 얹어 보낸 백합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옆방의 엘룬은 여느 날처럼 이불을 다 걷어차고 세상만사 편하게 큰대자로 드르렁거리고 있었다.
식솔들을 다 확인한 카렐은 제일 마지막에야 비로소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마하의 방에 들어갔다.
“아, 아앙.”
마하의 침실에 막 들어선 카렐이 제일 먼저 느낀 건 으슬으슬한 느낌과 아이의 고통스런 신음이었다. 방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시녀가 황제가 드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마하?”
카렐이 서둘러 아이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하얀 레이스 잠옷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을 흘리며 우는 것처럼 끙끙대던 아이는 카렐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 와중에도 저녁에 선물로 받은 빨간 구두는 아이의 품에 보물처럼 꼭 안겨 있었다.
아이는 카렐을 보자마자 한 팔로 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절 낯선 사람한테 떠넘기고 깜깜한 굴로 혼자 들어가시는 꿈 꿨어요, 너무 무서워서 막 울었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카렐은 땀방울이 송송 맺힌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아이의 몸이 얼음장 같았다. 방 안은 훈훈한데도 아이는 몇 번이나 마른 기침을 했다.
“절대 그런 일 없단다. 황제가 가긴 어딜 가겠니.”
“그쵸? 그렇죠?”
아이가 카렐의 목을 껴안고 마구 얼굴을 부볐다.
“새 잠옷과 물 가져오고 넌 나가 있어라.”
카렐이 대군을 제대로 못 지킨 시녀에게 사뭇 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파랗게 질린 시녀는 황제에게 새 잠옷을 가져다주고는 허둥지둥 밖으로 사라졌다. 땀을 흘려 목이 말랐는지, 아이는 물 한 통을 벌컥벌컥 다 들이키고서야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오늘은 같이 자자꾸나.”
카렐이 침대에 먼저 누워 팔베개를 대 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정말이요?”
그제야 표정이 환해진 아이가 좋아라하며 카렐의 가슴에 와락 안겼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카렐이 발쪽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아이 몸에 맞춘 이불이다보니 그의 발이 이불 밖으로 쑥 나와 있었다. 아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렐의 팔을 베고 누워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아참, 그리고 이거.”
카렐은 손톱만한 오팔이 박힌 작은 팔찌를 아이 손목에 채워주었다. 너무 눈에 띄지 않을, 아이에게 딱 적당한 수수한 은팔찌였지만 아이는 표정 가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안 아파요, 정말이에요.”
마하가 화사하게 웃었다. 분명 빈말은 아니었다. 아이는 이제 마른기침도 하지 않았고, 몸에서도 조금씩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땀도 흘리지 않았다.
“내일부터 주사 맞으면 계속 안 아플 거다.”
“주사보다 그냥 이렇게 안겨서 안 아픈 게 더 좋은데.”
“내가 계속 이렇게 안아주고 있을 수도 없잖니.”
카렐은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딱히 아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냥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읊는 소리였다. 카렐이 목과 가슴을 울려 내는 낮은 허밍이 아이의 작은 방 안을 낮게 흘렀다.
“우와, 이 소리 정말 좋아요. 무슨 노래에요?”
마하는 카렐의 가슴에 귀를 댄 채 마치 환각에 빠진 사람마냥 흐릿해진 눈을 껌벅거렸다.
“글쎄다.”
새삼 생각해 보니 평소 자신이 내던 쇳소리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지 들어본 소리 같기도 했지만 딱히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불러 줘요…… 매일 밤이요…….”
그렇게 절반 넋을 놓고 있던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갖은 아양을 부리며 이야기를 해 달라 뽀뽀해 달라 졸라댔을 아이가 수면제라도 먹은 듯 그대로 꾸벅꾸벅 잠이 들어갔다. 그리고 카렐도 아이의 조금씩 강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함께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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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가 초대형사고의 시작을 제대로 끊는 날입니다. ^^;;
그래도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모두 대환영이고요, 그냥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미워요오~~
( ̄∇ ̄)ブ~~★
추석들은 잘 보내고 오셨는지.....전 3부 출판본과 1부 전자책 준비하느라 명절 같지도 않은 명절을....^^;;
그나저나 유페이퍼 전자책은 정상적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예스24, 리브로, 반디앤루니스, 영풍, 알라딘은 올라가는 게 늦어지고 있네요. 올릴 책이 밀려서 그렇다고 하는데 끙~ 잘하면 오늘이나 내일중엔 오를지도 모르겠네요.
전자책은 기간제한이 없어서 쫓기지 않고 삽화나 부록, 목차나 폰트 등도 살아있고 검색기능 같은 것도 있으니 소장하고 느긋하게 보실 분이라면 전자책이 유리할 겁니다. 반면 다른 작가님들 글도 함께 보는 분들이나 텍스트만도 무방하니 날 잡아 몰아서 왕창 보려는 분이라면 노블레스가 유리할 수도 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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