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0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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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쿠트라스 기준으로 자정도 넘어간 밤 시간, 시내의 작은 극장 앞에는 남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혼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공연도 다 끝나고 관객은 물론이고 배우, 직원들도 모두 퇴근한 후였지만 그는 한참이나 매표소 앞에 웅크리고 울고만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에겐 삶이나 다름없는 극장까지 아랫사람에게 맡겨둔 채 아들을 구하러 수베르로 달려갔던 수우는 결국 아무 수확도 거두지 못한 채 보안국 요원들 손에 죄인처럼 질질 끌려 강제로 쿠트라스에 돌아와야 했다.
오는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그를 끌고 온 보안국 사람들은 이곳 극장 앞에 도착해서야 ‘황상의 은혜에 감사하시오.’라는, 별 우습지도 않은 헛소리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그가 가족들과 사는 집이 극장 옆에 있지만, 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집에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를 않았다.
오늘 아침에 수베르에서 있었다는 끔찍한 1차 집단 처형 소문은 이미 알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 퍼져 있었다. 상상하기도 소름끼치는 그 자리에 아들이 없었던 건 일단 다행이지만 따져보면 도리어 아들이 주모자로 낙인찍혀 나중에 더 끔찍한 처형에 처해지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테번, 그 철없는 녀석 같으니.”
차가운 감방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떨고 있을 아들 생각에 수우가 다시 눈물을 훔쳤다.
황실 군사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슬레이프니르의 요직인 참모부 장교로 승승장구하며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아들 테번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들이 헌병대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트라카 교단 성직자로 있는 아내 구르베스는 ‘이젠 신의 뜻’이라며 신전에 처박혀 일체의 연락을 끊어버렸고, 수우는 오늘 있을 공연도 모두 조연출에게 넘겨버린 채 혼자 수베르로 달려갔던 터였다.
‘……아니, 뭔가 잘못된 거야.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지. 제네르 그년이 뭔가 착각했을 거야. 아냐, 어쩌면 함정에 빠진 건지도 몰라.’
누구든 책임을 돌리고픈 대상을 찾고 있던 그의 화살은 당연히 카렐과 제네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들이 이대로 나갔다가는 거열형이나 타살형, 은사를 받아 봤자 참수형이라는 보안국 요원의 귀띔을 들은 후, 아들의 끔찍한 시체를 떠올린 수우는 반쯤 얼이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그랬어도 그렇지. 그깟 일 좀 눈감아주면 어떻다고.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실패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수우는 깜깜하니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린 하늘을 올려보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지가 정치를 못 하고 주변 단속을 못 한 거지. 아직 철도 없는 애한테 나쁜 놈들이 접근할 때까지 황제라는 놈이 대체 뭘 한 거냐고.’
원망할 대상을 찾아낸 수우가 다시 자리에 웅크리며 주먹을 쥐고 바르르 떨었다. 생각할수록 카렐, 제네르가, 심지어 어머니 네페티도 미워 미칠 것 같았다.
카렐에게서 아들의 사면을 거부당하고 나온 후, 그에겐 찾아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오늘 황제가 황비 침소에 들 것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허둥지둥 별궁을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본 광경은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어머니 네페티는 꼴도 보기 싫은 황제에게 오늘 밤 올릴 다과상과 보양식을 확인하느라 바빴고, 딸 마하가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는 걱정뿐 잡혀간 테번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심지어 황제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아들 걱정으로 찾아온 수우에게 처음 한 말도 ‘황상께서 많이 마르셨더구나.’라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을 죽이고 테번의 구명을 ‘침대에서라도’ 부탁해 달라며 애원했지만 역시 소득이 없었다. 네페티가 대답 대신 보여준 건 반역도 트라우제 대신과 의전대 경호원에게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 살아 돌아왔지만 그 충격에 병세가 더 나빠진 여동생 마하와 피로 범벅이 된 1번 프리깃의 황제 침대 사진이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테번이 문제가 아니고 수우 네가 위험한 상황이니 제발 황제에게 고분고분 복종하고 소리 없이 숨죽이고 있으라는 황당한 조언으로 그를 분개하게 만들었다.
‘다 소용 없어. 카렐 그놈한테 푹 빠져서 이젠 자식도 안 보이는 거야.’
수우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엉엉 울었다. 사실 그 역시도 아들 생각에 빠져 어머니건 여동생 마하건 앞뒤 못 가리고 있지만 지금 그에겐 아무런 조언도, 경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할룩스를 열어보았다. 그곳엔 식음을 전폐한 채 신전 예배당에 하루 종일 앉아있던 아내 구르베스가 탈진해 쓰러졌으니 빨리 신전에 와 줬으면 좋겠다는 지도 성직자의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젠장, 거기 있는다고 누가 해결해 줘?”
수우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들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내는 당황하긴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우 자신만큼 크게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전부터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듯 한숨만 몇 번을 내쉬며 보일 듯 말 듯 눈물만 글썽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결국 이렇게 됐군요.’라는 말만 남긴 채 신전으로 나가 버렸다.
의리에 목숨을 거는 자존심 강하고 상무적인 유목전사 출신의 아내에게 ‘반역자’ 아들의 목숨을 애걸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아내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 모든 감정을 안으로 삭여야 할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수우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극장 앞쪽, 길 건너편에 웬 차 한 대가 한참 전부터 서 있었지만 그는 눈치 채지도 못 하고 있었다.
울던 수우가 지쳐 기운이 빠질 무렵, 차 안에서 단정한 비단포 정장을 차려입은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나와 극장 매표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차가운 땅바닥에 웅크린 채 말라버린 눈물을 훔치고 있던 수우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응?”
수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남자는 팔에 걸고 있던 망토를 수우의 떨고 있는 어깨에 덮어주었다.
“수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디 형?”
수우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이젠 델루지 가에서 공식적으로는 파문당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옛날에 알고 지냈던 가족 친척들과 사적으로까지 남남이 된 건 아니었다. 그에게 따뜻한 망토를 덮어준 이 키 큰 남자는 아버지의 첫째 첩 예레니가 낳은 이복형 하디 델루지였다.
“세상에나, 이 추운 데서 이게 뭐냐고. 어휴.”
하디가 수우의 망토를 여며주며 고개를 몇 번이나 저었다.
“형이 여기 쿠트라스에는 웬일이에요?”
수우가 억지로 눈물을 감추며 물었다.
“웬일은, 가문 일로 왔지. 내가 가문 조달계약 담당인 거 알잖아. 계약 건이 있어서 이틀 전부터 와 있었어.”
하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법률사로 있는 이 남자는 죽은 아버지 테번을 쏙 빼닮은 외모에 성격은 야무진 엄마 예레니를 닮아 단순하고 고집 센 남부인답지 않게 사업수완이 좋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서자 신분임에도 아버지 테번의 생전에 형 제롬 못지않은 신임을 받았던 터였다.
“테번한테 안 좋은 일 있다길래 걱정 많을 것 같아서 와 봤다. 집에 갔더니 비어 있어서 극장은 괜찮나 하고 와 봤어. 어떻게 된 거야? 수베르에 갔었다고 들었는데?”
“고마워요. 형이 엄마보다 낫네요.”
수우는 조카 소식에 달려와 준 형에 대한 고마움에 갑자기 울컥해졌다. 사실 이 이복형과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황제는 테번 살려 줄 맘이 없나 봐요. 아주 끔찍하게 죽일 거라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젊은 놈이 여자한테 홀려서 잘못된 말 듣고 제네르 그년 집에 가서 난동을 부린 것뿐인데 그런 죄로 죽이기까지 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냐고요?”
하디는 사뭇 다정하게 축 처진 수우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디언 때 습관 못 버리고 아직도 그러는군.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이 황제라고 앉아 있으니……. 그때 네가 황제에 올랐으면 좀 좋았었겠냐. 그랬으면 테번은 감옥이 아니고 황궁 148층에서 장태자로 살고 있었겠지.”
고개를 푹 숙인 수우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구르베스를 위해 제위 후계자 자리를 버렸고, 사교 성직자가 된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 파문과 상급귀족 박탈까지 감수했었다. 그리고 예술가로 찾은 자신의 새 삶에도 나름 만족하며 살아왔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때의 선택 모두를 뼈저리도록 후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바보짓만 안 했어도……테번 그 애는 장태자가 됐겠죠. 카이인지 뭔지 하는 비실거리는 꼬마놈이 아니고…….”
눈물을 글썽거리던 수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참, 형 법률사지요?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제발요. 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하디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여기저기 지인들 통해서 좀 알아봤는데 난 군 수사관이 아니라서 도움은 못 줘. 이번 건은 민간 법률사가 끼어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걔가 현역 장교라 헌병대로 갔다던데 일단은 다행이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보안국으로 잡혀갔다는데 보안국장 어떤 여자인지 알잖아?”
보안국장 사에나의 악마같은 얼굴을 떠올린 수우가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하디의 말대로, 불쌍한 아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살 떨리는 보안국이 아닌 군 헌병대로 갔다는 사실이었다.
수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헌병대에 있으면 살 수 있는 거예요?”
“너무 기대는 마. 듣기로는 내일부터 이번 사건 관련자들 다 보안국으로 이첩된다니까 테번도 그리로 보내질 거야.”
하디의 말에 수우의 손끝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복형은 가뜩이나 겁에 질려있는 수우를 완전히 패닉으로 몰아붙였다.
“이런 얘기 뭣하지만 솔직히 테번 걔 힘들어.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살해 미수라라고. 걘 또 현장에서 붙잡혔으니 아무리 억울해도 빼도박도 못 해. 지금 페로 대공의 숙부까지 처형을 당하게 생긴 마당에 누가 누굴 살리겠어? 그러니 너도 일단은 인정하고…….”
“걔가 그 사건이랑 연관되었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걔가 그 프리깃에 탔던 것도 아니고 누굴 죽인 것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걔가 그 건에 엮이냐고요!”
“수우,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수우의 생떼에 하디도 답답한 듯 혀를 끌끌 찼다. 수우는 무조건 그를 붙들고 울 듯이 애원을 했다.
“제발 좀 도와줘요, 걔 살릴 수 있으면 뭐든지 다 할게요. 애가 좀 거칠어서 그럴지 타고난 성품은 정말 착해요. 돈 필요하면 내 극장 팔아서라도 해 줄게요.”
“그만 둬, 내가 설마 니 돈 탐나서 이러겠냐. 니가 무슨 부자도 아니고.”
수우를 말리던 하디는 무언가 갈등하는 듯 입술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취객들 몇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소리에 하디가 갑자기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이 다 지나가고 극장 주변이 다시 한산해지자 하디가 작은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너 그래도 옛날에 가문 때문에 고생 많이 했었으니……그럼 최대한 힘써서 도와볼게.”
“정말요? 무슨 방법 있어요?”
하디의 말에 수우의 표정에 잔뜩 기대감이 번졌다. 하디가 주변을 몇 번이나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내가 몇 군데 구명할 방법을 좀 찾아봤는데, ‘합법적인’ 절차로는 힘들어. 그건 알아야 돼.”
“으, 응. 아무래도 괜찮아요. 걔만 살릴 수 있다면.”
아들이 다섯 갈래로 찢겨 죽는 끔찍한 모습을 떠올린 수우에겐 이제 가릴 것도 없었다. 하디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도망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황제가 계속 살아서 집권한다면 말이지.”
속이 달아오른 수우는 뜸을 들이는 형을 계속 채근했다.
“빨리, 빨리 얘기부터 좀 해 봐요.”
“내가 아는 교단 사람이 몇 있는데…….”
하디가 살짝 운을 띄워봤지만 수우는 ‘교단 사람’이건, 뭐건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그냥 눈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토로 기지의 헌병대 영창에 아는 사람이 있대. 이번 황제의 숙청으로 그 사람도 궁지에 몰려서 탈영을 계획 중이라더군. 교단에서 탈영병을 구하러 올 때 테번 그 애도 함께 데려갈 수 있게 손써줄 수 있다고 했어.”
그제야 말길을 알아들은 수우가 두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정말요? 정말이지요? 테번도 함께 구해줄 수 있다는 거지요?”
흥분한 수우의 목소리가 커지자 당황한 하디가 얼른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좀 해, 지금 다 같이 죽고 싶어?”
“아, 알았어요.”
온통 암흑뿐이던 상황에서 작은 희망을 찾고는 기쁨에 겨워진 수우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따위는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생때같은 아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사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조카 하나 구하겠다며 위험천만한 계획에 앞장서 다리를 놓아 준 이복형을 당연히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수우는 이미 그런 것을 따질 만큼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아니, 의심이 든다 해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수우의 기쁨이 막 절정에 다다랐을 그 때, 하디가 살짝 한 마디를 다시 꺼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무슨 조건이요? 돈이요?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다 해 줄게요. 내 재산 다 팔아도 상관없으니 말만 해요.”
“너한테 뭘 뜯어내자는 건 아니야.”
잔뜩 흥분해 있는 수우에게 하디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냥……작은 일 하나를 해 줬으면 해.”
수우가 별 생각 없이 상자를 열어보니 굉장히 화려한 세공의 백금 팔찌가 하나 들어있었다. 팔찌에는 손목으로 늘어져 있는 작은 전자인식 칩도 함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내 구르베스가 있는 트라카 교단을 상징하는 혜성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데요?”
“그건 진짜가 아니고 가짜야. 트라카 교단 마구스의 팔찌랑 흠집 하나까지 진짜하고 구분 못 할 만큼 똑같은 완벽한 모조품이지.”
하디가 훨씬 더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수우가 고개를 다시 갸우뚱거렸다.
“마구스 팔찌 모조품이요?……이걸 어쩌라고요?”
“얼마 전에 트라카 마구스가 죽었어. 근데 후계자로 지명한 놈이 승계를 거부하고 있어서 팔찌는 지금 여기 쿠트라스의 트라카 대신전에서 임시로 보관하고 있다더군. 구르베스가 6명의 관리자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고.”
하디가 수우에게 이를 드러내고 음흉하게 웃었다.
“6시간씩 돌아가며 지키는데 지금 시간엔 구르베스라지, 아마?”
순간 당황한 수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팔찌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아내는 테번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은 할 리가 없어요!”
“넌? 그럼 넌 아들이 찢겨 죽어도 좋아?”
하디가 유난히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하루 일정을 다 소화한 카렐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베르 별궁의 황비 침실에 들 수 있었다. 서부 제후들과의 안건을 다 마친 네페티도 응접실에 조촐한 다과상과 함께―덧붙여 카렐이 가장 먹기 싫어하는 ‘보양식’까지― 차려둔 채 딸 마하와 함께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카렐을 보자마자 품에 달려든 마하는 아주 작정을 한 듯 목을 꼭 껴안고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젠 정말 안 아픈 거니?”
“저녁때 좀 안색이 안 좋긴 했어요.”
네페티가 대신 대답하며 딸을 떼어내려 했지만 아이는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하가 눈까지 꼭 감은 채 냉큼 대답했다.
“이러고 있으니 하나도 안 아파요. 정말이에요.”
“면역수치 검사는 해 봤고요?”
카렐이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네페티에게 물었다. 네페티는 이번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카렐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카이를 덮치고, 크낙스와 오렌을 하늘나라로 보낸 자가면역질환이 이젠 마하를 제물로 달려들고 있었다.
카렐은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의원에서 아이들 약 첫 시제품이 나왔다고 해서 보내달라고 했어요.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거요.”
카렐은 꼭 매달려 있는 이 아이를 단번에 떼어낼 비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빨간 구두를 쓰윽 내밀었다.
“뭐, 이것도 약이라면 약이고.”
“우와아.”
예상대로, 아이는 구두를 보자마자 폴짝 뛰어내려 냉큼 받아들었다. 깃털 모양의 은제 장식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자의 품격에 손색이 없을 훌륭한 구두였다.
“타르서스 장인이 어린 대군이 신을 거라고 수작업으로 정성들여 만든 거니까 아껴서 신어.”
구두를 한 번 신고는 몇 발짝 여기저기 뛰어 본 아이는 도로 벗어 가슴에 꼭 끌어안고는 맨발로 다시 카렐을 와락 안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몇 번이나 뽀뽀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잘 신을게요. 정말이에요. 저한텐 폐하뿐이에요.”
“어차피 다 크고 애인 생기고 가족 꾸리면 그땐 내가 이런 거 사 줄 일도 없어질 텐데. 지금 실컷 사 줘야지.”
먼 미래를 말하는 카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말이 마치 소원에 가깝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속이 먹먹했다. 그때까지 자신이 과연 살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 그는 아직 사제의 키를 찾지 못했고, 잔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빼내는지도 그 방법도 모르고 있었다.
“싫어요, 오빠들이랑 동생들은 딴사람이랑 결혼시키고 저랑은 계속 같이 살아요. 저도 엄마처럼 아침저녁 안기고 입술에도 뽀뽀받을래요.”
카렐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아이를 살짝 밀어냈다.
“그런 말은 대여섯 살 애들이나 하는 거란다. 10살 넘어서까지 그러면 철이 없는 거지.”
시무룩해진 마하는 마지못해 그의 허리를 놓아주고 한 발 물러났다.
카렐이 마하의 이마와 콧잔등에 살짝 뽀뽀를 해 주었다.
“오늘 시간만 많다면 저녁도 같이 먹고 해 줄 이야기도 많았는데 너무 늦어서 네 잘 시간이 다 됐구나. 아케메니아에 돌아가면 꼭 같이 하자꾸나.”
마하가 막 입술을 떼려는 카렐을 붙들고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이번엔 소원 안 물어봐요? 이번 생일엔 저 소원 안 들어줬잖아요.”
“여보게.”
카렐이 아이에게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네페티 쪽에서 아이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하의 담당 시녀가 다가와 아이에게 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대군마마, 주무실 시간이 훨씬 지났습니다.”
축 처진 마하는 선물받은 구두를 품에 꼭 안고 문으로 향했다. 아이는 다과상 옆에 마주선 황제와 엄마를 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아픈 걸 느껴요.”
카렐이 다과상에서 차를 집어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비도 오늘 고민거리가 많았겠습니다.”
“그래 봤자 황상만 할까요.”
네페티는 의자에 앉은 카렐의 뒤로 다가가 거추장스런 케이프와 머플러를 벗기고 뻣뻣해진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그래도 황상께서 수우 그 애를 강제로 돌려보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네페티가 카렐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 ‘세련된 청탁’에 카렐이 피익 웃었다. 네페티는 어차피 가망 없는 테번을 포기하고 수우라도 지켜주려 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날 많이 원망하고 있긴 할 겁니다. 어쩔 수 없죠.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내 핏줄이라도 용서 못 할 겁니다. 황비도 날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카렐이 네페티의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처럼 황제로 살기 힘든 때가 또 있었나 싶군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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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드디어 편수가 네자릿수가 됐네요. (그것도 딱 추석연휴에!!!)
솔직히 편수 늘어나는 게 그리 기쁘지만은 않네요. 편수에 부담을 느낀 분들이 도리어 안 읽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1000회 기념 이벤트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출판본 3부 5,6권 작업에 전자책까지 좀 바빠서요;;;...... (도망;;;) 이렇게 자축을 하고 넘어갑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전자책은 유페이퍼에서는 정상적으로 잘 판매되고 있고..... 예스24에 이번주중에 올려 줄 줄 알았더나 아직도 안 올랐네요. ^^; 판로를 넓히고 싶어도 맘에 드는 전자책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참 찾기 어렵네요.
전자책은 기간제한이 없어서 쫓기며 볼 일이 없고 삽화나 부록, 목차나 폰트 등도 그대로 살아있으니 제 글만 보실 분이라면 본문 텍스트만 들어간 프리미엄보다는 유리할 겁니다.
1000회 기념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모두 대환영이고요, 다들 앞으로도 복받으실 겁니다.
(그냥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미워요오~~)
즐거운 추석연휴들 보내시고요~~~~(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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