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1화 (986/1,132)

< -- 991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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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사령본부 짬장놈 잡아 족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옷을 다 벗은 채 흐트러진 침대에 엎드려 있던 발리가 화장실에서 거의 30분만에 돌아나온 제네르에게 뚱한 얼굴로 물었다.

“상장군 배탈 나게 한 죄에 5일만의 장군 잠자리 개판 친 죄까지 얹어줘요.”

발리가 혀를 쑥 내밀며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제네르가 잔뜩 삐져있는 남편의 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틀 전에 나 낮잠 잘 때 잠깐 들어왔었으니 5일은 아니지.”

“냄새나요. 저리 가요.”

발리가 엄살을 부리며 제네르를 밀어내려 했다.

“기다리는 동안 푹 죽어버렸으니 책임져요.”

제네르가 이 황소만한 덩치 남편의 등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냄새라니? 코가 삐었나봐?”

“예?”

제네르는 몸을 일으키려는 발리의 등에 몸을 포개며 꾹 내리눌렀다. 그는 발리의 손을 잡아당겨 침대 밑에 넣어 놓았던 검 자루를 잡게 했다.

“아무래도 커튼을 바꿔야겠어.”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 챈 발리가 나머지 한 손으로 제네르를 살며시 자신의 가슴 밑으로 감쌌다. 그리고는 바닥까지 축 늘어진 담요를 추켜올리는 척 검을 슬쩍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어느 쪽이죠? 몇 놈인지 보셨어요?”

발리가 제네르의 고운 금발을 헤치고 귀에 입을 맞추는 척 물었다. 제네르가 그의 양쪽 뺨을 붙들고 쓰다듬어주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사방에, 아주 많아.”

순간, 아내를 안은 발리의 굵은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병부대신 관사 주변에는 평소 이곳을 지키던 사령부 헌병들이 모두 물러나고 대신 50여명의 슬레이프니르의 문장을 단 헌병들이 서 있었다.

“안에 있습니다.”

주먹만한 소형 정찰셔틀로 2층의 상장군 침실 안을 확인한 기술병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셋째 남편 발리 힐거 장군과 함께 있습니다. 비무장입니다.”

“됐다, 셔틀 철수시켜.”

슬레이프니르 갑옷 차림의 호리호리한 남자 비장이 투구를 꾹 눌러쓰며 헌병들 앞에 나섰다.

“지금은 비상상황이다. 지금 역적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느냐?”

그 장교는 긴장된 표정의 헌병들을 돌아보며 사뭇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스페이스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황상과 우리 대장군님의 원수를 갚는 거다. 그 수괴가 저 안에 있다.”

비장은 직접 그린 관사 내 평면을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각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위치를 가리켰다.

“너희 30명은 주변을 포위하고 너희는 창문을 차단하고 있어. 너희 분대 10명은 1층에서 창문을 담당하고 너희 분대는 날 따라 내부에 진입한다. 내 이미 내부에 여러 번 들어가 봤으니 내가 선두에 서겠다.”

장교의 손짓을 받은 30여명이 재빨리 주변으로 흩어졌고, 2명씩이 각각 창문, 그리고 5명의 정예병이 출입문 앞, 나머지 5명은 비장의 옆에 대기했다.

“난 창문으로 들어가 죄인을 붙들고 있을 테니 출입문 팀은 재빨리 아래층을 통해 위로 올라와라.”

비장의 손짓에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장은 다른 3명의 병사들과 함께 사다리를 걸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2층에 접근했다. 그가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현관의 병사들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공격!”

5명의 중무장한 슬레이프니르 헌병들이 군부의 최고권자이고 황실 내 서열 3위인 상장군의 처소 문을 순식간에 때려 부수며 뛰어들었다.

평소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짓이지만 황제와 슬레이프니르 지휘관 베아트릭스가 이곳으로 오던 중 상장군의 암살 음모로 죽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 헌병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에게서 황제의 붕어를 전해들은 헌병들은 놀라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지기까지 했었다. 보통의 비장 따위가 밑도끝도 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몰매부터 맞았겠지만, 지금 그들을 이끄는 이 ‘비장’은 보통의 하급 무장이 아니었다.

“들어가! 들어가!”

방패를 앞세운 병사들이 비장이 알려준 대로 재빨리 거실과 주방을 장악했고 뒤이어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2층에는 계단 홀을 빙 둘러 상장군의 세 남편들과 양자 자말의 방이 있고 복도 안쪽으로는 상장군 제네르의 개인침실과 서재가 있었다.

이들에겐 퍽이나 다행히도, 제일 무서운 가디언 남편 시로는 내일의 회의 점검을 위해 밤새 아스트라이아 홀에 머물 예정이었다. 헌병들은 계단 바로 옆의 남편 시로와 네자드의 침실을 건너뛰어 발리의 침실에 뛰어들었다. 이미 상장군이 어느 방에 있는지를 확인했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반역도 제네르 하크로딘을 체포하러 왔다!”

복도로 진입한 헌병들이 문을 때려 부수었고, 같은 순간, 반대편에서도 유리창이 산산조각 부서지며 사다리를 타고 비장과 헌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어?”

앞장서 뛰어든 비장이 순간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커튼 너머로 분명 제네르가 남편 발리와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던 방 안에는 흐트러진 채 텅 빈 침대뿐이었다.

“어디 갔지?”

혼란에 빠진 비장과 헌병들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냐? 어디로 도망간 거야!”

비장은 병사의 할버드를 빼앗아들고 방 안쪽 화장실 문과 붙박이장 문을 힘껏 찍었다. 누군가 문 뒤에 숨었다면 즉사했을 테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문을 열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때, 헌병들을 이끌던 사관은 비장의 이상하리만큼 거친 행동에서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눈치 챈 듯 조심스레 물었다.

“대장님, 지금 우린 반역도당을 사살하는 게 아니고 체포하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어느 쪽이든 좋으니까 당장 찾기나 해! 집 안에 있을 거다!”

비장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그는 짜증을 내며 투구를 확 벗어던졌다. 암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앳된 기운이 감도는 혈기방장한 청년의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길고 갸름한, 고집이 배어나는 얼굴 속에는 한때 교단과 제국 모두를 쥐락놔락했던 조상의 얼굴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때, 방금 무시하고 지나 온 네자드의 방 쪽에서 웬 병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비장이 칼을 꽉 쥐고 달려나갔을 때, 비어 있는 줄 알았던 네자드의 침실 밖 복도에는 배를 찔리고 쓰러진 헌병 한 명이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계단 위쪽으로…….”

“염병할!”

비장이 헌병 3명을 거느리고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 홀로 되돌아가 보니 가운만 걸친 제네르가 발리, 네자드와 함께 3층 다락으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상장군 일가가 짧은 시간동안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안전룸이었다.

“잡아! 못 도망가게 해!”

헌병들이 재빨리 그쪽에 대고 볼트를 쏘았지만 제일 뒤에서 쫓아가던 네자드의 허벅지를 맞춘 것이 고작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네자드를 제네르와 발리가 다락 안으로 힘껏 끌어당겨 문을 잠가버렸다.

“씨이! 절단기 가져와!”

비장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의 고함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절단기를 가진 2명의 병사들이 다락으로 후다닥 달려 올라왔다.

방금 전 비장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했던 사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전 공병대에 있는 저런 절단기는 아무나 쓸 수도 없을뿐더러 원한다고 바로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장이 절단기를 든 병사에게 다급히 물었다.

“몇 분 걸리나!”

“문이 금고처럼 강한 건 아니라서 10분이면 될 것 같습니다.”

병사들 즉시 다락의 철문에 절단기를 대고 문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긴장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비장에게 내내 불만이던 사관의 할룩스로 무언가 짧은 연락이 들어왔다. 그가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건물 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런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엉?”

비장이 급히 집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집 주변에는 시로가 이끄는 친위군 가디언 여단이 도끼눈을 하고 자신이 데려온 헌병들을 이미 포위한 상태였다. 언뜻 보아도 100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이미 치밀하게 준비한 듯 완벽한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함정?”

비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네르가 미리 도망친 것도, 가디언들이 헌병들의 반란을 기다려 때맞춰 바로 나타난 것도 이미 알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비장이 어딘가로 막 연락을 하려는 그때, 막 연락을 끊은 사관이 불쑥 나서서 그의 손목을 칼집으로 사정없이 후려쳐 할룩스를 떨어뜨리게 했다.

“이놈, 감히!”

발끈한 비장은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헌병들까지 일제히 그 사관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우리가 이놈한테 속았어!”

그 사관이 노기 띤 얼굴로 자신의 할룩스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녹음이 흘러나왔다. 누구도 감히 흉내 못 내는 거친 쇳소리 비슷한 음성이었다.

- 제국회의를 앞둔 오늘밤 짐의 죽음을 기다렸던 자들이 오보(誤報)에 속아 일제히 발호할 것이니 그들의 피로 몸을 씻고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을지어다. -

“비장 테번 슈트란 델루지, 황상의 뜻에 따라 반역죄로 체포한다.”

비장이 바닥에 떨어뜨린 할룩스의 코드를 얼른 해제하려 했지만 속은 것을 깨달은 헌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의 팔을 비틀고 바닥에 때려눕혔다. 비장을 따라 다락문을 부수려 했던 병사들도 기계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계단 밑을 지키고 서 있던 시로에게 막혀 얼른 바닥에 꿇어앉았다.

“이놈들, 대체 언제…….”

헌병들에게 붙들린 비장 테번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잠겨 있던 다락 문이 안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방금 전 이곳으로 헐레벌떡 도망쳤던 상장군 제네르가 가운자락을 여미며 태연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 일당이 통신소를 장악하고 나 몰래 헌병들을 동원하는 건 지켜보고 있었지만 솔직히 너인 줄은 몰랐다.”

제네르가 험악한 얼굴로 테번 델루지 비장의 얼굴을 강제로 들게 했다. 선한 인상의 친아버지 수우 대신, 그에게 이름을 물려준 표독스런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곳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사실 제국민들 상당수에겐 그다지 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지만, 최소한 남부인들에게 테번이라는 이름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했던’ 강력한 최고제후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죽은 친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수우가 자신의 아들에게 그 이름을 물려주면서 그도 조금씩 할아버지의 영혼에 빙의된 야심찬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헌병들을 선동한 게 너라는 연락을 받고도 믿기지는 않더군. 황상께서 널 수양아들로 삼을 만큼 아끼셨는데.”

제네르의 말에 청년이 눈을 부라리며 이를 드러냈다.

“날 아껴? 허, 수양아들? 개나 주라고 해! 그랬다면 세데스라는 미친년 대신 이미 내가 델루지 가 종장이 되어 있어야 하지. 황제가 될 뻔했다가 극단 사장님으로 몰락한 보잘것없는 평민 아들이 아니고!”

“입 닥쳐, 조금이라도 선처 받고 싶으면.”

시로가 묶여 있는 테번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청년은 시로의 이런 ‘조언’이 맘에 들지 않는지 계속 욕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그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제네르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수우의 아들 테번은 황제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아이였다. 황제는 남부 델루지 가의 오르테 부인과 딸 세데스가 제롬의 원수를 들먹이며 반 황실 경향을 보인다면 그들의 후계권을 뒤집어엎을 비장의 카드로 내심 맘에 두었던 것도 같았다. 어쩌면 테번 본인도 자라나며, 혹은 아버지의 귀띔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후, 연금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황궁을 찾아온 소년 테번의 모습에 황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은 나름 똑똑했지만 버릇없고 거칠기만 했다. 들리기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강압적인 훈육에 자신의 예술적인 영감을 거의 살려보지 못했던 수우가 아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다보니 엄하게 가르치려는 성직자 아내 구르베스와 마찰이 잦다는 소문이었다.

황실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필수과정인 야전 지휘관으로 보내지 않고 슬레이프니르의 참모부에 넣은 것도 황제의 특별한 배려였다. ‘만일을 대비해’ 정치 교육을 하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굴 제대로 지휘할 놈이 못 되니 엄한 지휘관 밑에서 박박 굴려 정신 좀 차리게 해 달라.’는 구르베스의 개인적인 부탁 때문이었다. 베아트릭스를 비롯해 상무적인 플라칼 가 출신 무장들이 즐비한 슬레이프니르의 참모부 정도면 그 역할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노력 모두가 이 사건으로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제네르는 사관의 기지로 코드가 해제되지 않은 채 구석이 약간 부서지기만 한 테번의 할룩스를 집었다. 할룩스를 작동시켜 본 제네르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제네르가 테번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널 이 일에 끌어들인 게 대체 누구냐?”

“끌어들여? 대우 못 받아 억울해서 나선 거다! 끌어들이긴 누가 누굴 끌어들여!”

“닥치고, 여기 ‘그림자’이라고 써 놓은 자가 누구냐고!”

제네르의 격분한 모습에 놀란 시로가 얼른 할룩스를 넘겨받아 켜 보았다. 그곳엔 ‘그림자’와 주고받은 대화가 줄줄이 남아있었다.

- 이번엔 제발 허락해 줘요. 그날 내 품에 있던 당신 모습 생각하면 미치겠어요. -

- 지금은 안 된다는 거 얘기해 줬잖아. -

- 주변 눈치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그럼 그날은 왜 그러셨는데요? -

- 그건 세상이 바뀐 후에 다시 생각해. -

- 오늘은 올 수 있는 건가요? 내일이 그날이잖아요? -

- 미안해, 내일은 내게도 중요한 날이야. 너도 마음 다잡고 준비만 하고 있어. -

- 성공하면 정말로 내게 올 거죠? 약속부터 해 줘요. -

- 세상이 바뀌면. -

- 그건 걱정 마세요. -

“네가 어떤 놈, 아니 어떤 년 손에 놀아난 거냐고!”

제네르가 잡힌 테번에게 이를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그렇지만 테번은 그의 얼굴에 침을 내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배신자 새끼!”

제네르의 손에 얼굴을 얻어맞은 테번이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시로가 그를 거칠게 잡아당겨 바닥에 동댕이쳤지만 테번은 시로의 발밑에 깔린 채 계속 몸부림을 쳤다.

“그냥 날 찢어 죽여! 이 황제의 더러운 암캐 같으니!”

제네르의 눈짓을 받은 가디언들이 버둥대는 테번을 밖으로 질질 끌고 사라졌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한 제네르는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며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사령부 통제실로 간다.”

잠도 덜 깬 채 경비탑 위에서 아리아노와 억지로 술을 마시고 있던 타슈카는 일부러 보란 듯 크게 하품을 했다. 하지만 법무대신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못 본 척 하는 건지, 도리어 그의 잔에 술을 더 채워 복수를 했다. 타슈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결국 본심을 드러냈다.

“마누라들이 내일아침 절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을 겁니다.”

“걱정 말게, 자네 아내들은 지금쯤 자네 걱정을 하고 있을 게야.”

아리아노가 바닥에 조금 남은 술을 입에 탈탈 털어 부으며 냉큼 대꾸했다.

“걱정이요? 하이고, 대신님께서 제 마누라들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퇴근했건 말건 때 되면 자기 방에서 곯아떨어지는 여편네들인걸요. 둘이라 잘 보이려고 경쟁이라도 할까 했더니만 이건 20년 넘어가니까 둘이 똑같이 펑퍼짐해져서 틈만 나면 같이 바가지를 긁는데 집안에 암호랑이 한 마리에 불곰 한 마리씩 키우는 느낌이라니까요.”

“거기에 소나기 잔소리까지 곱배기일걸.”

처지가 비슷한 친구 베레트라가 옆에서 냉큼 거들었다.

“전 황소 같은 사내 둘이 양쪽에서 쌍으로 쏘아대면 머리가 흔들려서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라니까요. 까딱 비위 잘못 맞추면 둘이 싸워대기나 하고, 아휴, 남편 바가지가 더 무서운 거 모르시죠?”

두 장군들의 엄살에도 아리아노는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른 채 피식 웃기만 할 뿐 ‘그만 끝내자.’는 말은 끝까지 해 주지 않았다.

“하여간, 33년차 과부 앞에서 못 하는 소리들이 없네.”

아리아노의 이 일격에 두 장군들이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행히’ 남편이 하나뿐인 릴라크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베레트라 자네 남편들도 마찬가지야. 지금쯤 우리 떡대 마누라 어쩌냐고 황소 같은 두 사내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걸.”

아리아노가 새 술을 뜯는 모습에 세 사람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노는 할룩스로 몇 번 연락을 받는 것 같았지만 앞에 앉은 세 사람에겐 일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때,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를 먼저 들은 건 릴라크 쪽이었다. 그는 이 탑을 둘러싼 도넛 모양 숲을 둘러보며 옆에 끌러놓은 무기벨트에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갔다.

“누구 싸우는 거 아니에요?”

“응.”

아리아노가 아무렇지 않게 새 술 한 잔을 삼켰다. 그 말에 당황한 셋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놀라지 말게. 여긴 안전하니까. 고개만 내밀지 말고 있어.”

아리아노가 마지막 병에 남은 술을 네 개의 잔에 고루 나눠 담고 번쩍 들었다.

“나방처럼 미끼를 쫓다가 처형대에 물려버린 숱한 영혼들에게 명복을.”

“무슨 말씀이시냐고요? 이모님?”

릴라크가 벌떡 일어나 경비탑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칼 부딪치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소리, 살려달라는 애원과 놓치지 말라는 째지는 고함이 늦은 밤 시간의 숲을 메아리쳤다. 아리아노가 이 조카를 경비탑 난간 밑으로 거칠게 잡아끌었다.

“일어나지 말라니까, 예쁜 얼굴 있는 머리통 건사하려면.”

잠시 후, 경비탑을 둘러싼 숲 곳곳에서 100명이 넘는 경호대 가디언들이 손에손에 무언가를 들고, 혹은 누군가를 질질 끌고 나오고 있었다. 타슈카가 벌벌 떨며 물었다.

“저, 저게 뭐죠?”

“여기로 우리를 잡으러 오던 놈들.”

“예에?”

릴라크가 칼을 꽉 움켜쥐었다. 반역도들의 절반 이상은 산 채로 붙잡혀 있었고, 일부는 가디언 손에 머리만 매달린 채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장교 차림새였다.

그때, 별궁이 있는 북쪽에서 들려온 셔틀 엔진 소리와 큰 함성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탑의 망원경으로 그쪽을 살폈다. 아메샤 스펜타 군단 문장을 단 병력수송셔틀 수십 대가 별궁을 에워싸고 착륙하더니 중무장한 수천의 광신도 병사들을 풀어놓았다.

잠시 후, 대형차량 한 대가 그 앞에 멈춰서더니 정복으로 갈아입은 병부대신 제네르가 남편 시로, 발리와 함께 잔뜩 화난 표정으로 별궁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아메샤 스펜타들 수십이 그 뒤를 따랐다.

“대신님! 네 분을 추격해 오던 놈들은 다 잡았습니다!”

그새 탑 밑으로 다가온 경호대장 카토가 멱살을 쥐고 온 한 중랑장을 바닥에 동댕이쳤다.

“대신들과 상장군 관사를 습격했다가 잡힌 놈들까지 합쳐 고급장교 29명, 하급장교 58명, 사관과 병 324명입니다. 별궁에서 통신소와 제어실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도 체포중이고, 그들이 반역 직전 접선했던 자들과 통신 내역도 파악되었으니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릴라크와 두 장군들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리아노는 그 자신을 포함해 저들의 표적이 될 것이 확실한 네 사람을 이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일부러 저들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제발 내가 알 만한 자들이 없다고 말해 주게나, 카토.”

아리아노가 마지막 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자들이 이곳에 오기 직전 공부대신 셰니 펠머슨 경을 만난 것이 확인되어 방금 체포팀을 보냈습니다. 영외로 도망치려던 것을 방금 잡았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대신이 섞여있다는 말에 아리아노가 눈가를 찡그렸다. 카토가 위에 대고 말을 이었다.

“별궁을 봉쇄하기 직전에 두세 명이 빠져나간 듯합니다. 상장군께서 격노해 계시니 빨리 가 보셔야 할듯합니다. 자칫 우두머리를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리아노가 그제야 술병을 밀어놓으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빌어먹을, 가뜩이나 바쁜데 며칠은 퇴근하기 글렀네. 요 며칠 데이트도 못 했는데. 내 팔자야.”

탑에서 제일 먼저 허둥지둥 뛰어내린 타슈카와 베레트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카토의 팔뚝을 붙들었다.

“이, 이봐, 내 가족들은? 마누라들은 별일 없는 거야? 집은 무사하냐고!”

“내 남편들은?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어디 나갔다가 봉변당한 거 아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자리에서 별 소리를 다 했던 둘은 집이 있는 쪽을 연신 돌아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걱정 마십시오, 경호대에서 내내 지키고 있었으니. 가족들과 떨어져 계신 편이 더 안전한 것 같아 세 분만 이리 모신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경비탑에서 내려온 아리아노는 카토와 가디언들이 끌고 와 꿇어앉혀놓은 무장들의 소속부대 문장을 보며 혀를 찼다.

“황상께서 왜 에키트 족들을 그리 아끼시는지 알겠네.”

카토에게 잡혀온 자들 중에는 사령부의 참모본부는 물론이고 야전 보병대,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까지, 야만족 용병대인 에키트 보병대만 빼면 황실군 부대들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아리아노는 그들 중 제일 계급이 높은 중랑장에게 얼굴을 바싹 대며 속삭였다.

“내 장담하네만, 내일 뵙는 황상의 용안은 이전하고는 많이 다르게 보일 거야.”

============================ 작품 후기 ============================

오늘 제 동네에도 비가 엄청나게 왔습니다~ 출판본 책이 젖을까봐 잠도 제대로 못 잔 하룻밤이었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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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발자국 한 번 남겨주고 가시는 분들께선 복받으실 겁니다. 의욕 올려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평점테러하는 분이 여기도 등장하셔서요 하하하;;; ~~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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