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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86화 (981/1,132)

< -- 986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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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스가 잠을 쫓으려 버둥대는 카렐의 얼굴을 웃으며 쓰다듬었다.

“그럼 주무시고 일어나 안아 줘요. 오늘부터는 당신 품에서 잘게요.”

“발작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전 안 다치게 하실 거 믿어요.”

아메스가 카렐의 품에 완전에 몸을 기댔다.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은 황후의 모습을 반쯤 잠에 취한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던 카렐이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헛것이 들리는 걸 보니 그새 꿈 속에 왔나봐.”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메스는 현실과 꿈 속을 오가고 있는 그의 머리에 손으로 베개를 대어 주었다.

“보세요, 꿈 아니에요. 이대로 있어 드릴 테니 편히 주무세요.”

아메스가 카렐의 얼굴을 벗은 가슴에 꼭 안으며 속삭였다. 조강지처의 따뜻한 손길과 달큰한 살내음을 느낀 황제는 엷게 숨을 내쉬며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아메스가 쌔근거리는 그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자요?”

카렐은 아직 옅은 잠에만 들었는지 무심결에 고개만 끄덕였다. 아메스는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가슴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카렐의 숨소리가 느려진 것을 확인한 아메스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살을 섞고 사랑을 속삭였던 배우자의 급소를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손목에 간지럼을 느낀 카렐이 잠든 얼굴에 살짝 웃음을 품었다.

“제발 웃지 좀 말아요.”

아메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이 약해진 아메스는 시녀장이 있는 커튼 밀실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눈동자만 내놓은 채 황후를 재촉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면 예민한 황제가 바로 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메스가 완전히 잠든 카렐을 자리에 눕혀놓고는 이마와 코끝, 마지막으로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해 주었다. 그리고 베개 속에 숨겨두었던 뼈칼을 조심스레 꺼내어 손에 쥐었다. 황제는 아메스의 칼끝이 손목에 와 닿을 때까지도 여전히 웃음을 품고 있었다.

아메스는 칼끝을 카렐의 손목에 세우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짧은 심호흡 몇 번으로 결심을 굳히고는 체중을 실어 힘껏 찔렀다. 손가락만한 날이 그의 굵은 손목을 단번에 꿰뚫어 반대편으로 쑥 관통해 나갔다.

“우윽!”

잠들었던 카렐의 눈이 번쩍 열리더니 벌떡 일어나려 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메스가 팔꿈치로 막았지만 황제는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부르르 떨며 아메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핏발이 선 카렐의 눈이 손목을 관통한 칼과 아메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후……?”

카렐이 한 손을 더듬거리며 아메스의 목을 덥석 붙잡자 아메스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손아귀힘 한 번으로 그의 목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황제의 큰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그의 목을 꺾지는 않았다. 놀라고 겁먹은 아메스는 칼 손잡이를 쥔 채 인형처럼 얼어붙어버렸다.

“칼 빼세요! 빨리요!”

보다 못한 시녀장이 커튼 밖으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아메스는 무릎으로 카렐의 손을 꽉 누르고는 그의 손목에 박힌 칼을 힘껏 비틀어 빼냈다. 뼈칼의 돌기에 살점이 뜯겨 나오면서 붉은 피가 공중으로 분수처럼 솟구쳐 아메스의 얼굴과 가슴을 적셨다.

“……왜?”

분노가 아닌, 슬픈 눈빛으로 아메스를 보고 있던 카렐은 그의 목을 쥔 손을 스르르 풀었다. 지레 당황한 아메스는 베개를 덥석 집어 카렐의 얼굴을 힘껏 내리눌렀다. 급소를 찔린 황제는 그의 힘에 맥없이 밀려 침대 위에 쓰러졌다.

“죽어요, 빨리 좀 죽으라고요!”

피와 눈물로 젖은 아메스가 악을 쓰며 황제의 얼굴을 덮은 베개를 힘껏 내리눌렀다. 하지만 쓰러진 황제는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메스는 무슨 오물이라도 내던지듯 베개에서 손을 떼고 얼른 물러났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고, 황제는 미동도 없었다.

“돌아가셨나요? 확인해 보십시오.”

시녀장의 물음에도 아메스는 카렐의 얼굴을 덮은 베개를 멍하니 보기만 할 뿐 차마 들어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시녀장이 직접 다가오려 하자 아메스가 얼른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다가오지 마, 오지 말라고!”

신경이 곤두선 아메스가 악을 썼다. 잠시 마음을 다잡고 베개를 들어낸 아메스가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30년간 개혁정치로 제국을 다스린 가디언 출신 황제 카렐 대제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아닌, 황후와 함께한 따스한 비단침대 위에서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겨 있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 아메스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라도 감고 가시지.”

눈시울이 붉어진 아메스가 여전히 무지개빛 광채를 내고 있는 그의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황제의 얼굴을 더듬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시녀장이 죽은 황제의 가슴 위에서 차마 못 떠나고 있는 아메스를 옆에서 계속 재촉했다.

“피범벅이시니 씻고 나오세요, 빨리 옷 갈아입고 1초라도 빨리 여길 나가셔야 합니다. 누가 언제 황상을 찾을지 모르는데 울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요.”

아메스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내려가 무거운 걸음으로 욕실로 사라져갔다.

혼자 남은 시녀장은 죽은 황제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아메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조심조심 그 옆으로 다가가 혹시나 하며 목에서 맥박을 짚어보았다. 황제의 몸은 차가웠고, 맥박은 없었다.

황제의 죽음을 확인한 시녀장은 일단 할룩스부터 켰다. 그곳엔 이번 일을 위해 부수적인 임무를 맡은 자들의 이런저런 보고가 차례대로 쌓여 있었다. 프리깃 내에서, 그리고 수베르의 본부에서도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만을 기다리며 거사를 위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그쪽에서도 작전 시작하십시오.”

시녀장은 목소리로 보냈지만 건너편에서 돌아온 건 밋밋한 문장이었다.

- 나올 때 물건 잊어버리지 말고 챙겨라. -

시녀장은 내심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에게 이렇게 메시지로만  명령을 내리는 윗사람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여기서 황후를 데리고 탈출하겠습니다.”

- 알았다. -

건너편에서 돌아온 대답은 힘든 임무를 수행해 낸 시녀장에겐 맥 빠질 만큼 단조로웠다. 그는 할룩스를 끄며 짜증부터 냈다.

“젠장. 어떤 놈이야?”

그는 아메스가 침대 밑에 내던져놓은 뼈칼과 피 묻은 수건, 카렐을 눌렀던 베갯잇을 재빨리 주워 봉투에 담았다. 그곳엔 황제의 살점과 피, 그를 죽인 아메스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메스뿐만이 아니고 이번 계획에 이용한 그 아비 페로의 파벌 전체를 충분히 파멸시킬 수 있는 물품들이었다. 그는 아메스가 몸을 씻고 돌아 나오기 전에 봉투를 재빨리 가방에 챙겨 넣었다.

때맞춰 욕실 문이 열리고 몸의 피를 씻은 아메스가 물기를 닦으며 허둥지둥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 이제 어떡해야 된댔지? 창고? 무슨 창고로 가라고 했었던가?”

경황이 없어 할 일의 순서까지 까먹어버린 아메스는 황제가 죽어 있는 침대 위를 몇 번이나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밖에 있던 루스탐 놈은 의전대 녀석들이 주의를 돌려놓았다고 하니 이걸로 갈아입으시고 일단 여기서 나가세요.”

시녀장은 반쯤 이성을 잃은 듯한 그에게 갈아입을 옷과 망토를 내밀며 침착하게 계획을 다시 설명했다.

“여기 6층의 특급선실 전용 탈출정은 비서관들 객실 앞을 지나야 해서 안 됩니다. 5층과 4층도 객실 복도를 지나야 하니 위험하고요. 서비스 층인 3층만 비어 있습니다.”

“거기 가면 탈출정으로 갈 수 있는 거지?”

겁쟁이가 되어버린 아메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시녀장의 손을 꼭 붙들고 이미 몇 번이나 알려주고 확인했던 물음을 또 던졌다.

“중앙 계단을 타고 3층으로 내려가 왼쪽으로 300척(90m) 정도 죽 가서 왼쪽으로 다시 꺾으시면 11번 탈출정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복도에 셔터가 다 내려져 있을 텐데 괜히 건드리시면 시끄러워집니다. 3층 초입의 주방 내부를 통과해 식자재 창고를 지나시면 셔터를 열지 않고도 건너편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아메스가 마구 뛰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정은 평상시엔 잠겨 있어서 마스터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 알려주고 가시면 더…….”

“나도 바보는 아니야.”

아메스가 눈을 흘겼다.

“내가 탈출정에 타기 전엔 비밀번호는 절대 못 알려준다.”

아메스가 딱 잘라 거절했다.

관례적으로 황후가 설정하는 12자리의 마스터 비밀번호는 함선을 버려야 할 만큼의 비상상황시 자폭이나 탈출 장치를 작동하는, 함 전체의 마스터키와 같았다. 평상시엔 함장이 관리하지만 이번처럼 황실 일행이 탈 때는 황후 혹은 황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관례였다.

“탈출정 출입문 위엔 보안카메라가 있으니 어차피 함장이 내가 누르는 걸 보고만 있으면 번호를 알 수 있을 거 아냐?”

“알겠습니다. 그러라고 하지요.”

아메스가 쉽사리 넘어오지 않자 시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함장이 비밀번호를 확인하는 대로 이 프리깃 전체의 통신을 외부와 차단할 겁니다. 그래야 수베르의 황제 심복들에게 이곳 연락이 전해지지 않고 깨끗하게 마무리될 수 있습니다. 프리깃 전체에 비상경보가 울릴 테니 놀라지 말고 탈출정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여기서 이부대신과 뒷정리를 하고 뒤따라가겠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아메스는 시녀장이 내민 간단한 원피스로 급히 갈아입고 짙은 진홍색 망토도 머리끝까지 푹 눌러썼다.

문을 나서려던 아메스는 황제가 죽어 있는 침대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잠깐만.”

아메스는 침대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는 피웅덩이가 된 침대 위에 여전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황제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이제 갈게요. ……그동안 너무 미안했어요.”

아메스는 카렐의 관자놀이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헐레벌떡 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 침실엔 시녀장 혼자만이 황제의 시체와 함께 남겨져 있었다.

의전대 경호원들의 의도적인 무관심 속에 허둥지둥 특등 선실을 나선 아메스는 망토를 여미며 혼자 6층 복도를 후다닥 달려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의 5층과 4층은 일반 객실이, 3층엔 로비와 서비스 시설이 있고 주방도 그곳에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탑승을 끝내면서 용무가 없는 시종이나 시녀들도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있다 보니 의전대 경호원들을 몇을 빼면 텅 비어 있었다. 모퉁이마다 배치된 경호원들은 무슨 명령이라도 받았는지 눈에 확 띄는 진홍색 망토를 입은 황후를 의도적으로 못 본 척했다.

3층까지 내려온 아메스는 들은 대로 왼쪽으로 틀었다. 3층 전체가 사실상 폐쇄되는 시간이다 보니 복도는 컴컴했고, 안쪽엔 셔터가 내려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시녀장에게서 들은 대로 메인 주방을 열고 들어가 반대편에 있는 식자재창고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으슬으슬한 식품창고 안에 들어선 아메스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고엔 그가 들어온 주방 쪽 문 말고도 반대편에는 복도로 나가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창고 안엔 내일 아침식사에 쓸 갖은 채소와 곡물들이 쌓여 있고 네페티가 황제를 위해 특별히 함께 실은 양고기와 사과도 보였다.

아메스는 진홍색 망토를 끄르며 안으로 더 깊이 다가갔다. 그가 낮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공기 속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티틀, 어디 있느냐.”

황후의 속삭임에 채소꾸러미 사이에 숨어 있던 청년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추운 식품창고에서 한참을 버티느라 입술까지 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저린 손발을 연실 비비며 황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대로……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잔뜩 얼어붙은 티틀의 음성이 어눌했다.

아메스는 황제의 죽음 앞에서 벌벌 떨던 조금 전의 겁쟁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서릿발처럼 엄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비밀번호는 다 외웠느냐?”

“최선을 다했습니다.”

티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메스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네가 잘못하면 여기 사람들이 다 죽는다. 다시 대답해라. 외웠느냐?”

기가 팍 죽은 티틀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다, 당연히 외웠습니다. 혹시 몰라 몸 곳곳에 나눠서 써 놓았습니다.”

아메스는 그에게 방금 벗은 진홍 망토와 주머니에 가져온 녹음기를 내밀었다.

“이걸 입고 11번 탈출정으로 가라. 비밀번호 누르면 문이 열릴 테니 안에 타고 안전벨트 매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지휘소에서 네가 탄 탈출정을 이탈시켜 줄 테니 이탈하는 대로 탈출정에 있는 비상통신기 채널 99번으로 이 녹음을 전송해라. 하크로딘 상장군에게 보낼 때 쓰는 채널이니 이상한 내용이 나와도 놀라지 마라.”

망토를 받아든 티틀이 황후의 눈빛을 힐끔 올려보았다. 황후의 눈빛은 여전히 무서웠다.

“명심하겠습니다.”

“탈출정엔 엔진은 없지만 며칠치 산소와 물과 식량이 있으니 유영하며 기다리고 있으면 거사가 완료된 후에 내 사람을 보내어 널 구해주마.”

“알겠습니다. 꼭 성공하십시오.”

티틀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내 시킨 건 어찌했느냐?”

“베아트릭스 황빈께도 약속장소와 편지 전했습니다. 에스더 귀인께는 자칫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절대 비밀로 하라고 전했고요.”

“잘했다.”

“말씀하신 건 저기 가져다놨습니다.”

티틀이 황후에게 자기가 숨어있던 채소꾸러미 사이를 가리켰다. 그곳엔 황후가 되기 전 아메스가 썼던 할아버지 투모카프의 시미터와 의전대 갑옷이 숨겨져 있었다.

“외람되오나……황빈께는 왜 이제야 사실을 전하셨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황후는 아주 짧게만 대답했다.

“황빈은 누구 속일 줄을 모르니까.”

움찔한 티틀은 이 무서운 황후에게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부디 성공하십시오. ……꼭이요.”

티틀은 아메스의 진홍색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반대편 출입문으로 총총걸음으로 걸었다. 아메스의 성공 여부에 이제 자신의 목숨까지 걸려 있었다.

출입문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던 티틀은 황후의 벗은 뒷모습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얼음장 같은 창고에서 옷을 모두 벗어던진 황후는 준비해 온 갑옷과 검으로 무장을 하고는 방금 들어온 주방 쪽 문으로 서둘러 나가는 모습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메스 대신 진홍 망토를 뒤집어쓴 티틀은 혼란스런 느낌을 애써 추스르며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황후는 그에게 ‘이번 일에 성공하면 공신이 될 거다.’ 라는 말을 했을 뿐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황후가 그에게 시킨 일은 공신이라는 대가가 민망할 만큼 아주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후한 대가에는 그에 비례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필 또 내가 이리 된 거냐?’

불빛도 없는 깜깜한 3층 복도를 총총걸음으로 걷던 티틀은 망토깃을 잔뜩 여미며 ‘어쩌다 또 이상한 일에 얽혀버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고 출발 전의 일을 생각했다.

출발 한 시간 전, 황자들의 공부방을 느닷없이 찾아온 황후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빼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난데없이 ‘너도 수베르에 가 줘야겠다.’는 말로 티틀을 당황하게 했다. 공부방 청소나 감독하고 자료 관리하는 것이 일인 그는 애당초 수베르에 갈 대상도 아니었다.

황후가 찾아온 이유는 분명했다. 티틀은 궁 내에서 황후가 의심받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아랫사람들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고, 충분히 똑똑하고, 황후 자신과 체격과 걸음걸이가 가장 비슷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황후는 속 보이게 그에게만 수베르 행을 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국회의 기간에 원래는 궁에 남기로 되어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이고 내각 요인들과 황제 비서관, 거기에 외부 손님들까지 여럿 초청해 모두 1번함에 탈 것을 명했고 사실상 황궁을 텅 비운 채로 떠나온 상태였다. 덕분에 이 1번함은 여객용으로 쓸 때의 정원인 5백 명을 거의 꽉 채운 상태였다.

그때, 기척을 느낀 티틀은 몸을 바싹 움츠렸다. 자세히 보니 머리 위의 천장 안에서 보안카메라가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아마도 그를 아메스로 착각하고 있는 누군가가 함교에서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후도 저 카메라를 피해 냄새나고 추운 식자재 창고에서 옷을 바꿔 입은 게 분명했다. 티틀은 저 카메라를 보고 있을 자들을 의식하며 아메스가 준 진홍망토를 보란 듯 더 깊숙이 조였다.

사람이 없어 난방을 거의 하지 않다보니 절대온도 가까운 스페이스와 맞닿은 3층 복도도 꽤 추웠다. 티틀은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카메라가 계속 따라오고 있어서인지 300척의 멀지 않은 거리도 내관 체력시험 마지막코스 달릴 때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의 초조함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복도 건너편에서 아메스의 말대로 ‘11’이라는 비상등이 깜박거리고 있는 큰 문 하나가 보였다. 이 함선에 실린 17대의 탈출정 중 하나였다.

“휴우.”

그는 머리를 잔뜩 웅크리고 총총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갔다. 보안시스템을 통해 함교에서 이곳을 보고 있는 자에겐 영락없이 황후 아메스로 보일 게 분명했다.

- 탈출정 11 / 지시 없이 손대지 말 것. -

티틀은 문 앞에 붙어 있는 스크린의 비밀번호 입력장치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 숫자가 사용되는 순간, 함선 전체에 비상상황을 알리는 경보가 울리게 될 터였다.

‘왜 하필 또 나냐고.’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12자리의 긴 비밀번호가 바로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티틀은 손바닥에 대충 써온 힌트를 보아가며 하나하나 숫자를 입력장치 화면에 집어넣었다.

- 524931467697 -

티틀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확인’ 버튼을 눌렀다. 순간 눈앞의 문이 확 열리더니 동시에 함선 전체에 찢어지는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함선 전체가 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메시지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이제 황제의 전용 프리깃 ‘1번함’은 외부와―황제의 친위세력은 물론이고 황제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외부의 반역도당 한패거리들에게서도― 완전히 고립된 셈이었다.

티틀은 탈출정 안에 뛰어 들어가 얼른 안전벨트를 매고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만큼이나 지났을까, 그가 탄 탈출정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더니 엄청난 중력가속도와 함께 ―황제와 황후의 메시지를 쥔― 티틀이 탄 작은 탈출정이 고립된 1번함에서 먼 스페이스로 튕겨나갔다.

‘반역도들을 이 한 번에 싹 쓸어 버리겠다’ 다짐하던 황후의 계획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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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하하;;; 놀라셨죠;;; (짱돌 피해 잠시 도망갔다가 슬그머니 돌아오는 중;;;)

*추천, 코멘트, 높은 평점 모두 좋으니 발자국 한 번 남겨주고 가시는 분들께 꽃비 한 움큼 뿌려드립니다. ( ̄∇ ̄)ブ~~★

아참, 중요한 설문이 진행중입니다. eBook 판매 여부와 (판매시) 판매처 선정을 위해 수요와 단말기 사용 현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 ePub통일 규격이 없다보니 모바일 단말기에 따라 최적의 포맷과 판매처가 조금씩 달라지거든요.

아참, PC뷰어는 물론 공통으로 다 지원하니 PC에서 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참여도와 결과에 따라 판매 여부, 그리고 판매처가 결정될 테니 구매의사 있으신 분들의 열렬한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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