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82화 (977/1,132)

< -- 982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

.

.

그때, 내장을 쏟아내며 매달린 시트르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문은 부활했어.”

앞에 선 슈라가 입을 다물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배가 갈린 채 말뚝에 묶여 죽어가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더 큰 소리로 웃으며 세 황족들의 처참한 신음소리를 압도했다.

“슈라.”

뒤에 있던 대신관이 손가락을 살짝 들어보이자 헤네티 한 명이 넓적한 창으로 그의 입을 사정없이 쑤셔버렸다. 창끝이 뒤통수로 쑥 빠져나가면서 시트르의 웃음소리도 마지막 짧은 비명과 함께 끊어졌다. 동시에 살름의 팔을 움켜잡은 케스난의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 끔찍했지만 시트르에겐 차라리 축복이었다.

살름이 자신의 팔뚝을 쥔 케스난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홀에 매달린 3명의 황족들을 가리켰다.

“다섯을 채웠어야 하는데, 고작 셋이라니.”

그의 말뜻을 알아챈 케스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섯’이 먼 옛날 샤미르 리쿠에게 처형당한 다섯 마구스들을 뜻한다면 당초 의도한 황족 희생물은 더 있던 모양이었다.

“그 서생 놈하고 뚱땡이를 놓친 게 아깝단 말이지.”

케스난의 입술 끝에 ‘하마타 마구스들을 죽게 놔두고 도망친 건 너네 아니었나?’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지금은 입을 가볍게 놀릴 때가 아니었다.

“이런 자리인지 알고 절 데려오신 건가요?”

케스난은 겁먹은 척 몸서리를 치며 살름의 팔을 더 꼭 안았다. 살름은 공포에 질려 품을 파고드는 여인의 모습이 흡족한지 움츠러든 그의 어깨를 돌려 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이거 잘 데려온 것 같아 보이는 게 왜지?”

살름의 엉큼한 생각과는 별개로, 케스난의 눈과 머리는 여전히 연단에 멎어 있었다. 그때, 황족의 비명이 다시 울리자 케스난은 놀란 척 갈고리에 걸고 있던 잔을 뚝 떨어뜨렸다.

“이렇게 무서워할 줄 알았으면 진작 이런 거 보여줄걸.”

살름은 케스난의 깨진 포도주잔을 보며 히죽거렸다,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이미 치마 안쪽 깊숙이까지 들어와 더듬고 있었다.

“못됐군요.”

그는 이 순간에도 귓가에 울리는 황족과 스파이들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머리에서 지우며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유치하실 줄이야, 고작 여자를 겁줘서 안으시려는 거였어요? 제가 어떤 곳을 원하는지 물어본 일도 없죠?”

케스난은 적당히 발톱을 드러내는 척 하며 한 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다. 케스난에게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살름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어딘지 말만 해. 널 내 배 밑에 눕힐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데려갈 테니까.”

케스난의 눈앞이 막막해졌다. 저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며 내빈들까지 억류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시트르를 고문해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교단이 이렇게 일부러 살려둔 채 외부와 고립시켜 ‘더 큰 것을 노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니면 저들이 내부의 스파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신임 대신관이라는 큼직한 미끼 정보를 보여준 후 ‘누구든 밖에 알리려 드는 놈은 걸려 봐라.’라며 사방에 그물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었다.

케스난은 다시 연단 위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죽은 시트르를 뺀 10명의 희생물들은 여전히 숨이 덜 끊어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들 주변에서는 공포의 화신 다하카르를 찬양하는 불꽃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케스난은 지금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저들이 무얼 계획하고 있는지도 아직 알지 못했다.

“당신도 여기 4일 내내 계실 건가요?”

케스난은 작전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 물음에 살름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내가? 미쳤나? 이 불쾌한 데 뭐 하러?”

“그러면서 나보고는 여기 4일이나 있으라고요? 당신도 없는 곳에?”

케스난이 대뜸 앙칼지게 발톱을 드러냈다. ‘자신이 없는 곳’이라는 말이 내심 맘에 들었는지 살름이 그의 코끝을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난 이틀 이따가 갈 테니까 이틀만 ‘나 없이’ 있으면 돼.”

“싫어요, 차라리 나 데리고 나가요.”

케스난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로 이 남자라도 붙들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보내 달라는 의도는 매한가지였지만 말만 조금 바꿔 표현하면 이 남자의 단순함을 충분히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 없이는 이런 데 못 있어요.”

케스난이 살름의 굵은 팔뚝에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항상 앙칼지고 도도하기만 하던 이 여자의 눈물에 살름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케스난도 지금껏 감추고 감추어 온 마지막 무기를 이제는 쓸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누그러든 살름이 케스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오늘 밤은 다른 일이 있으니……내일 밤이 비었구나.”

케스난이 눈물을 훔치며 이 남자를 힐끔 올려보았다. 살름이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몸에 내꺼라는 도장을 찍을 수 있게만 해 주면……이틀 후에 함께 데리고 나가주지. 어떠냐?”

케스난은 쉽사리 대답을 못한 채 침만 삼켰다. 그때, 밑의 홀에서 말뚝에 박혀 있던 황족 하나의 어깨가 체중을 못 이기고 북 찢기면서 끔찍한 단말마의 비명이 홀을 울렸다. 그리고 케스난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대담한 케스난이어도, 공포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10년이 넘게 지켜 온 몸이었지만, 이 지옥을 빠져나가려면 케스난으로서도 이제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황제령으로 향하는 전용 셔틀에 오른 카렐은 비엔에서 합류한 코나 시디크에게 이런저런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난처하게 하고 있는 아들 주페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태자 처지에 보기 힘든 ‘엘리트급 노예’를 만난 주페는 황제의 셔틀에 왜 노예문을 가진 사람이 탔는지, 황제의 개혁을 노예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의별 질문을 다 던지며 그를 곤혹스럽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운동가인 코나도 이 어린 태자의 호기심과 안목이 내심 감탄스러운지 그리 싫은 표정만은 아니었다.

“주페, 너도 좀 쉬려무나.”

카렐은 눈이라도 붙이려 의자도 잔뜩 뒤로 밀어놓았지만 자신의 운명도 모르고 여전히 명랑한 아들의 모습을 보니 도무지 맘 편히 잠이 오지를 않았다.

“16번.”

카렐의 입에서 이 말이 맴돌았다. 병원셔틀에서 촬영해 본 주페의 머릿속에는 분명 잔딕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쓰인 숫자는 마지막 번호인 16번이 분명했다.

“15번은 있는데……17번이 없다면?”

카렐의 머릿속에 갖은 추리가 맴돌았다. 주페의 잔딕을 빼 주려면 15번 ―다행히 이미 가지고 있는―, 그리고 있지도 않은 16번의 뒷 번호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1번 잔딕…….”

카렐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타리프 신관이 왜 앞 번호 잔딕들을 고향행성에 남겨둔 채 뒷 번호만 가져온 것인지, 아니 그보다 앞서 고향행성이 대체 어디인지가 문제였다. 타리프의 일지를 구해야 했지만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 풀지 못한 몇 개의 숙제를 떠안은 채 이젠 한 달간의 외도를 마치고 다시 황제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추워어어.”

아이의 잠꼬대에 카렐이 움찔하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위에 엎드린 마리안이 끙끙거리며 몸을 더듬고 있었다. 얼떨결에 코리온을 따라가 슈발츠발트에서 겪은 고생이 아이에겐 힘들었는지, 지금은 황제의 품에서 꿀잠이 들어 있었다.

“괜히 딴생각했구나.”

무거운 생각에 몸이 차게 식었던 것을 깨달은 카렐은 팔다리를 한 번 비틀어 최대한 열을 내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온기를 느낀 아이는 그제야 조용해지며 카렐의 가슴 옷깃에 얼굴을 푹 묻었다. 비엔의 탄광에서 탈출하기가 무섭게 돼지고기 스튜에 찐감자까지 한 소쿠리를 게 눈 감추듯 없애버린 덕분에 아이의 배가 볼록했다.

“폐하께서도 이거 드시고 좀 주무시죠.”

상선 루스탐이 가져온 우유를 받아든 카렐은 천사같이 착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딸아이의 적갈색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평소 정원에 갈 때 빼고는 같이 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인지 아이는 모처럼 독차지한 황제의 품에서 어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녀석, 제 엄마 품 같지 않아서 딱딱하고 불편할 텐데.”

카렐은 마리안을 옆자리로 조심조심 옮기려 했지만 아이는 잠투정을 부리며 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가슴 위에 놔둔 채 우유를 들이켰다. 루스탐이 그런 황제를 보며 실없이 웃었다.

“한 달만에 황제로 돌아가시는 것이니……흐흐흐. 비빈 다섯 분께서 칼을 갈고 계실 테니 오늘밤부터 엄청 바쁘실 겁니다. 미리 푹 주무셔 두셔야죠.”

루스탐의 능글능글한 웃음에 카렐이 눈을 흘겼다.

“아이가 다 들어.”

“뭘, 그 정도를요. 저희 부족에선 가족이 한 천막에 살다보니 볼 거 다 보는걸요.”

“베아트릭스 황빈도 그리 컸지만 엘룬한테 침실 구석 내주지는 않던걸.”

뭐라 더 쏘아붙이려던 카렐은 담요를 들고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아들 주페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마리안이 춥다고 하죠?”

주페는 누이동생과 황제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자신도 그의 팔베개를 베고 나란히 누워 가슴을 꼭 안았다.

“그동안 저 찾느라 힘드셨죠?”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딸의 체온과 옆에 누운 아들의 힘찬 숨소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두 아이를 이렇게 동시에 안고 있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말로 한숨 자긴 해야겠네.”

카렐이 아들의 몸에도 담요를 당겨 덮어주며 루스탐을 흘끔 보았다.

“내 지금 자려는 게 방금 자네 말 때문은 아냐.”

“네, 네, 압니다.”

좌석 주변의 불을 끈 루스탐이 슬쩍 웃어보이고는 주변에 큐비클을 치고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카렐은 모처럼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두 아이들을 품에 안고 얼마간 잠에 빠져있던 카렐은 할룩스 소리에 눈을 다시 번쩍 떴다. 그리고는 행여 아이들이 깰까 조심하며 스위치를 켰다.

“사에나입니다. 통화할 수 있으십니까?”

“중요한 용무라면 할 수 없어도 하게 해야겠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카렐은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곧 후회해야 했다. 사에나는 양 손에 검붉은 피를 잔뜩 묻힌 채 황궁 지하 감옥 고문실에 서 있었다.

“이런.”

카렐은 두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가슴 위의 마리안은 침까지 흘려가며 쿨쿨 자고 있었고, 옆에서 팔에 안긴 주페는 그간의 피곤이 몰려왔는지 눈썹까지 파르르 떨며 꿈나라로 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아이들을 놓아두고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카렐은 두 아이들의 눈을 큰 손으로 슬며시 가리고 다시 물었다.

“3일째인데 놈이 뭘 좀 불었나?”

“약 좀 먹이고 공짜 다이어트 시켜줬더니 좀 불더군요.”

사에나는 누런 기름과 피가 둥둥 뜬 통을 옆으로 툭 밀어내며 호드르 시의 반란에서 사로잡힌 벨 시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터질 만큼 살이 붙어 있던 그자의 얼굴은 며칠간의 고문에 절반으로 오그라든 듯했다. 의자에 묶인 그는 배에 난 칼집들에서 흘러나오는 기름과 그런 자신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황제의 모습에 이성을 잃고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시끄러.”

사에나에게 뺨을 얻어맞은 벨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옆으로 축 늘어졌다.

카렐이 허탈한 얼굴로 물었다.

“내 물어보라고 한 건 확인했나?”

“고향행성의 위치는 정말로 모르는 건지, 감춘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말년의 오르마즈 경도 ‘타리프의 일지’ 3권 한 세트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르마즈 경의 개인 서재의 자물쇠 달린 서가에서 분명 봤답니다.”

“그럼 교단이 가진 건?”

“타리프 신관이 원본은 대신관에게 바치고 사본 한 세트는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카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일지 중 가장 중요한 고향행성의 최후를 담고 있을 3권을 구할 수 있다면 제국민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검은 재와 잔딕의 비밀도 모두 풀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 사본이 지금은 어디 있단 말이냐?”

“알아봤더니 서재에 있던 자료는 멸문 직후 보안국에서 전량 압수했습니다. 그래서 보안국 자료실에서 다시 찾아봤는데 당시 압수 목록엔 그런 책이 없었습니다.”

“보안국 자료실은 내가 통달하고 있지만 그런 책을 본 기억이 없다. 그놈 증언이 정확한 거냐?”

의심에 찬 황제에게 사에나가 오래된 파일 하나를 내보였다.

“이게 당시 오르마즈 경의 서가를 압수하러 간 장교의 보고서입니다.”

- 시건장치가 된 서가에서 자료 일부가 누락된 상대. 책 서너 권 분량으로 추정됨.

자물쇠를 파손한 흔적은 없음. 반역도가 미리 빼돌린 것으로 판단됨 -

“하임달의 전장에 있던 오르마즈 경 막사에선?”

“당시 카파키 군에서 약탈한 문서 모두를 검색했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양반 자신의 중요한 유품들을 내가 주워갈 수 있도록 사방에 하나씩 뿌려놓았으니 그것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었을 게야. 당연히 무언가 나왔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온 곳이 하나 있지?”

고개를 갸우뚱거린 사에나가 조금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아샤드 경이 그분의 중요한 유품이라며 목숨 걸고 지키고 있던 레즐린 가의 창고에선 아직까지 아무 것도 안 나왔죠.”

“아샤드 경한테 제국회의 안 와도 좋으니 거길 모조리 털어보라고 해야겠다. 고향행성만 알아내도 교단 놈들 절반은 잡는 셈이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사에나는 피 묻은 손을 닦고는 감옥 옆에 딸린 작은 임시 사무실에 들어서며 문을 잠갔다. 무언가 더 예민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광림대군과 종친들의 실종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경호대에선 별 것 아닌 걸로 말하던데? 평소에도 종종 행방불명되셨던 양반 아닌가.”

“이번엔 좀 이상합니다. 조금 전 남부 루게의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레곤 대공주에게도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순간 아이들을 안은 카렐의 두 팔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대공주에게도?”

“비슷한 시간에 세닉 가 종가에서 대공주가 시가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에 괴한 셋에게 납치당할 뻔했습니다.”

“괴한이라니? 어떤 괴한?”

“아시다시피 루게는 치안도 훌륭하고 제후에 대한 지지도 확고해서 현지인이 대공주를 공격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공주도 종가와 붙은 공원 안이라 별 걱정 없이 두 대군들과 산책 겸 걸어서 사저로 돌아가다가 변을 당한 듯합니다.”

“가만, 대공주도 싸움을 아주 못하는 건 아니고, 상지와 에우테르는 둘 다 무장들인데 고작 괴한 셋이 가족을 공격했다고?”

“아무래도 가디언이나 헤네티였던 것 같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부마 예르마크 세닉 경이 비명을 들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부마를 따라간 종가 근위병 셋이 죽었고 가디언 경비대장도 중상입니다. 예르마크 경도 가슴과 손을 베이는 중상을 입었고 상지대군도 팔이 부러졌지만 대공주는 무사합니다. 괴한들은 다 놓친 듯 합니다만.”

카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닉 가 군 사령관이고 제국의 손꼽히는 맹장인 예르마크에게까지 중상을 입히고 흔적 없이 도주했을 정도라면 단순한 강도 수준이 아니었다. 황제령에서 행방불명된 광림대군과 두 황족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심증이 가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여지껏 황실에 안 알렸단 말이냐?”

화가 난 카렐이 얼굴을 붉혔다. 사에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워낙 수치스런 사건이라 세닉 가에서 자체적으로 잡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정보원을 통해 조금 전에야 알았습니다. 제국회의 문제로 저희 보안국엔 여력이 없어 일단 종친회와 법무부에 요청해 종친 전원의 안부를 확인 중에 있습니다.”

사에나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하는 모습이었다.

“폐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 알지만.”

“음?”

카렐도 그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망설이던 사에나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아무래도 페로 대공 측을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광림대군이 실종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대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정파 대신들과 오찬 중이라 비서관이 대신 받은 듯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군의 연락을 비서관 따위가 막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카렐의 눈꼬리가 잠시 사나워졌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본심을 감추고 되물었다.

“대공도 아랫사람일 뿐이다. 눈치 보지 말고 계속 말해라.”

“지난번 말씀 주신 관료 16명의 행적을 폐하께서 안 계신 한 달간 추적했습니다. 그 중 페로 대공 정파에 속한 몇몇이 의심스런 행보를 보였습니다. 갑자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가문 경호원들의 무기를 교체한답시고 무기시장에 들락거리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딱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추적 결과는?”

카렐은 페로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맘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본격적으로 미행을 시작하려는데 페로 관 정보파트에서 먼저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대공이 절 불러서는 물증 없이 정파 공직자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화를 내어 일단 팀을 철수시켰습니다. 대공이 파견한 가디언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어 지난 보름간 뒷조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수고했다.”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는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가문은 황제령에서 꼭대기를 다투는 재벌가이고, 그의 정파에는 황제령의 부호와 엘리트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들도 황제령이 강해져 제국을 압도하길 원하지만 그 주체는 황제나 시민이 아닌 귀족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페로 자신의 사심이야 어쨌든, 그의 정파 중 대다수는 분명 카렐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었다.

“총리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니 그렇게 믿는 것이겠지.”

카렐은 겉으로는 윗사람인 페로 편을 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찜찜했다. 정적에게는 서릿발같이 잔혹한 페로이지만 일단 믿음을 주면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이었다.

30년 전, 그가 카인에게 배신을 당해 종가까지 내준 것도, 카렐을 죽이려는 샤자한 공의 반란을 미리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가깝게는 아트위야를 비롯한 교단 의사들에게 황자들의 목숨을 무더기로 바칠 뻔했던 것도 그런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내 곧 수베르에 도착하는 대로 총리를 불러 무슨 생각인지 확인할 테니 걱정 말고 넌 네 일만 열심히 해라.”

“감사합니다.”

어렵게 말을 꺼냈던 사에나가 안도의 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통신을 끊었다.

다시 혼자가 된 카렐은 워프비행을 빠져나오는 느낌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

카렐은 여전히 잠들어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새삼 만져보았다. 그때 앞쪽에서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께서 타고 계신 1번 프리깃이 예정대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20분 후 도킹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

.

.

조아라의 유료란인 노블레스란에 무삭제 출판본이 연재중입니다.  뷰어 왼쪽에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통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노블레스 이용해주시는 분들께선 흔적 남겨주시면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1부 1권부터 시작했고요, 매일 조금씩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만 양을 조절해야 하는 연재라는 특성상 완결도 종이책 쪽이 훨씬 빠를 겁니다. 제 글만 보시거나, 맥이 안 끊기고 죽 보기를 원하신다면 종이책 출판본을 권해드립니다. ^^ (물론 눈도 편하고요....구세대인가봅니다.)

* 시스템 특성상 종이책에 있는 도표나 삽화, 조판이나 첨부되는 사은품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