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1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
.
.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은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살름과의 데이트인줄로 알고 나왔다가 난데없이 얼굴이 가려진 채 끌려 온 그는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괴한들은 할룩스를 포함한 소지품들을 모조리 압수했고, 심지어 몸 안에 장치가 없는지 정밀 스캐너로 확인까지 마친 후에야 그를 셔틀에 싣고 어딘가로 움직였다.
셔틀에 오르자마자 그는 이상한 음료를 마시고 잠이 들었고, 깬 곳이 바로 지금 앉은 이 자리였다. 오는 동안은 아무 기억도, 심지어 시간관념도 끊어져 없었다.
머리의 자루가 벗겨지며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의 앞에는 길이가 족히 600척(180m)은 되어 보이는 타원형의 거대한 극장 모양 홀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을 전혀 찾지 못한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그렇지만 10층 건물 높이의 천장도 거대한 금속 트러스 구조로 꽉 막혀 밖을 내다볼 수는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눈에 익숙해야 했지만 왠지 느낌은 낯설고 차가웠다.
홀에 버글거리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느낀 그는 자신이 교단의 심장에 좀 더 가까이 온 것을 직감했다.
“후우.”
조금씩 시력을 찾은 그는 긴장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세세히 둘러보았다. 그는 3층 정도 높이의 고립된 발코니석에 앉아 있었고, 뒤에는 경비병 둘이 있었다. 옆자리에는 그가 데이트를 하기로 했던 살름이 그 건너편의 딸 하페즈와 손을 꼭 잡고 귀엣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황제에게 잡혀있는 줄 알았던 하페즈의 모습에 케스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여자를 풀어주셨나? 그럼 뭘 받으셨지?’
카렐의 포로교환 소식까지는 못 전해 듣고 끌려온 상태였지만 그는 바로 상황을 유추해냈다. 살름은 딸의 얼굴을 쓰다듬고 껴안아주느라 아직 케스난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리 상상하고 싶지는 않은 광경이지만 마구스 가문의 관습을 생각하면 저 둘은 단순한 부녀관계 그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케스난은 질투하는 티를 내려다가 생각을 접었다.
대충 눈이 적응된 케스난은 난간 아래 홀을 둘러보았다. 홀에는 코런덤의 뱀 문양 군기가 사방에 수십 개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보랏빛 망토를 어깨에 두른 2, 3천 정도의 헤네티들과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정규군이 정복 차림으로 줄을 맞춰 서서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거의 1만에 육박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교단 병력을 이렇게 한 번에 보기는 케스난도 처음이었다.
‘대체 어딜까.’
케스난은 이곳의 위치를 파악해보려 했지만 아무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혹 배신자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주변의 다른 테라스석을 살폈다. 하지만 테라스석마다 양옆에 가림막이 쳐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바로 왼쪽 아트위야의 테라스석만은 이곳과 트여 있었다. 그곳에 홀로 우두커니 앉은 아트위야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케스난은 아트위야의 아들 시체를 황제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페즈가 돌아오면서 그 시체도 함께 송환된 모양이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마구스라는 신분 때문에 울지도 못한 채 혼자 슬픔을 곱씹고 있는 그의 모습이 ‘같은 엄마로서’ 어딘지 안쓰러워도 보였다.
그때, 반대편인 오른쪽 가림막 너머에서 굵고 거친 남부 사투리가 케스난의 귀에 들어왔다.
“에이, 씨! 뭐야! 이게 대체 어디냐고!”
케스난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 자신처럼 얼떨결에 끌려 온 자가 무례한 처우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가 케스난의 귀에도 꽤 익숙했다.
‘마누엘 델루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로 알아낸 케스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곳까지 올 정도라면 이제 꼬리를 완전히 밟힌 셈이었다.
‘저놈이 웬일이야?’
케스난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그가 아는 마누엘 델루지는 겁 많고 소심한 속내를 난폭한 태도와 거친 말씨로 감추고 있는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최고제후였던 형과 조카 제롬의 사후 몇 십년간 가문 원로회를 이끌면서 나름 정치 감각이 늘기는 했지만 앞장서서 반역 도당과 손을 잡을 만큼 그새 간이 커졌을 리는 없었다.
마누엘의 난동은 계속 이어졌다.
“어떤 개새끼가 감히 나한테 약을 먹이고…….”
‘조용히 하십시오, 들으면 누가 손해를 볼지 생각하시고요.’
남자의 거친 목소리를 막은 건 웬 여자의 부드럽고 기품 있는 말씨였다.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서부 말씨 같기도, 동부 말씨 같기도 한 것이 먼 기억에만 가물거릴 뿐 알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마누엘이 여자에게 바로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그냥 이들 행실이 무례해서…….”
“쉿. 제가 줄곧 지켜드렸으니 그만하시고요.”
여자의 경고 이후 마누엘의 목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떤 여자지?’
케스난의 호기심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 쪽에 쏠렸다. 마누엘의 본처는 7년 전 출혈열로 죽었고, 말투를 보아 첩과의 대화도 아니었다. 마누엘은 다른 건 몰라도 여자에는 무관심하기로 유명했다. 70대 가까운 나이에 수명 개조된 노구로도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형 테번과는 달리 마누엘은 출중한 외모가 무색하게 사교계에서 추문 한 번 낸 일 없는, 좋게 말하면 점잖고 나쁘게 말하면 둔해터진 사내였다.
그렇던 마누엘의 입을 말 한 마디로 막아버린 것이 케스난 생각에도 정말 신기했다. 그를 저리 다룰 정도면 남자를 다루는 재주건 혹은 미모건 보통내기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때, 다하카르 성직자 로브를 입은 백여 명이 단상 모퉁이를 따라 세워놓은 12개의 나무 기둥 사이를 촘촘히 세우고 섰다.
“이제야 시작이군.”
그때까지 딸과 회포를 나누던 살름도 두 미녀를 모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듯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둘의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무시했던 것이 미안해졌는지 케스난의 어깨를 안고 품 안으로 살짝 잡아끌었다.
“거칠게 데려와 미안하다. 하지만 이젠 너도 여기서 내 여자로 위치를 확실히 해야지?”
살름의 뜨거운 입김이 케스난의 귓가를 맴돌았다. 케스난은 교태를 부리며 그의 굵은 팔뚝을 파고들었다.
“미리 말씀만 주셨다면 훨씬 좋았을걸요.”
케스난의 눈동자는 다시 단상을 향했다. 불이 꺼지고 깜깜해지더니 단상을 둘러싼 성직자들 손에 들린 횃불을 타고 불꽃이 하나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엄숙한 시간이었지만 케스난은 이 어둠을 놓치지 않고 살름의 손이 밑에서 허벅지를 살살 더듬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남자의 엉큼한 손을 일단 그냥 놔두고 단상과 그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움?”
제단에 정신이 팔려있던 케스난은 제단 훨씬 더 높은 곳에 이 테라스석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큰 테라스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흰 형체가 하늘거리는 것이 저곳에도 사람이 있는 듯했다. 케스난은 언젠가 보았던 옛 교단 전통을 생각해냈다.
‘대신관이다.’
케스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스탈과는 크테시폰에 처음 갔을 때 마주한 일이 있었으니 초면은 아니었다.
제단에 오른 정복 차림의 슈라가 문제의 테라스석이 있는 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2천 2백 코런덤 전사들이 태어난 생일이옵니다. 우리를 창조해주신 위대한 현신의 은총을 찬양하나이다.”
그와 동시에 아래 홀에 도열했던 코런덤 수천이 그를 따라 바닥에 일제히 꿇으며 공중으로 양 손을 치켜 올렸다.
“그대들의 헌신은 항상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엇?’
문제의 윗 테라스에서 들려온 낯선 여자 목소리에 케스난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는 하마터면 ‘저게 누구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그렇지만 놀란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횃불을 들고 단상에 선 성직자와 군인들, 심지어 바닥에 엎드려 있던 코런덤들 사이에서도 일순간 파문이 번졌다. 때맞춰 슈라의 다음 대답이 이어졌다.
“새 몸으로 갈아입으신 위대한 현신께 믿음으로 충만한 우리 전사들 모두는 앞으로도 무한한 헌신과 복종을 맹세하나이다.”
‘새 몸’이라는 한 마디에 일순간 홀 안에 소름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었다가는 목숨이 온전치 못할 분위기 같았다. 케스난의 옆 테라스에서 당황한 마누엘이 내는 낮은 헛기침 소리가 귀에 거슬릴 지경이었다. 케스난은 윗 테라스를 다시 슬쩍 올려보았다. 수십의 수행원을 거느린 누군가가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너희도 꿇어라.”
살름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서며 양옆의 케스난과 하페즈에게도 사뭇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 누구도 대신관의 머리 위에서 앉아 내려다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케스난도 얼떨결에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주변 상황을 계속 살폈다. 살름과 아트위야 같은 잔뼈 굵은 마구스들도 양 손을 모으며 부동자세로 서서 예를 표하는 것을 보아 저 ‘새 대신관’에 대한 내부 지지는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누가 그자의 후계자였지?’
새 대신관이 제단에 내려서자 횃불을 든 백여 명의 성직자들도 모두 바닥에 꿇어앉으며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케스난은 투명한 난간 너머로 새 대신관의 외모라도 일단 확인하려 했다. 그렇지만 치렁치렁한 케이프와 검은 로브, 얼굴 전체에 드리운 베일 때문에 북부 억양을 쓰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제단을 가로질러 계속 내려갔다.
‘뭐 하자는 거야?’
케스난은 새 대신관이 제단 설교단에서 일장 설교를 할 줄로 예상했지만 보기좋게 빗나갔다. 대신관은 그 옆을 무심하게 지나 코런덤 전사들이 있는 홀 제일 밑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갑자기 자신들 사이로 들어온 위대한 현신의 모습에 그들도 놀란 듯 일제히 옆으로 갈라지며 대신관의 앞에 길을 터 주었다. 그러면서 헤네티 무리의 앞쪽에 실려 와 있던 웬 병상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영웅이로구나. 부대원 모두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아라무트에서 돌아온 사카는 얼굴을 다정히 어루만져주는 대신관의 손길에 감격하며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암살교단의 궁전에서 등과 턱, 팔에 중상을 입은 채 자신보다 더 큰 중상을 입은 부하까지 데리고 정글을 빠져나온 그였다.
‘아라무트에서 도망친 코런덤 사령관?’
케스난은 황제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병상에 있는 남자의 신분을 바로 유추해냈다. 코런덤의 창립 기념행사는 장황한 설교가 이어지는 빤한 행사가 아닌, 비록 패했지만 사투를 치르고 돌아온 사카에 대한 환영회 같았다.
“이번 작전에서 위대한 현신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사온데…….”
“그대와 코런덤 모두가 나의 자식이며 힘이다. 그러니 빨리 나아 일어나거라.”
이디나는 일어나려는 사카의 가슴을 누르며 몸소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망사를 살짝 치우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널 이렇게 만든 자는 곧 운명이 다할 것이니.”
이디나가 엷게 웃었다.
“내 천상에서 나의 옆자리를 허하노라.”
“32번째 위대한 현신 아스탈 이디나 빈트 다하카르를 찬양할지니!”
슈라의 선창에 뒤이어 홀 안을 떠나갈 듯 우렁찬 함성이 뒤흔들었다.
‘이디나?’
케스난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온몸의 힘이 풀린 그는 엎드려 있지 않았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너의 신성으로 내 전사들 모두에게 축복을 내리노라.”
고개를 든 이디나가 자신을 둘러싼 사나운 광신도 전사들에게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새 대신관은 코런덤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대신 사령관 사카를 통해 모두를 축복해주고 있었다.
이디나가 바닥에 의료진에게 일렀다.
“사지에서 돌아온 영웅이다. 미녀들로 수발을 들게 하고 원하는 것은 나의 이름으로 다 들어 주거라.”
이디나는 그대로 돌아 다시 제단을 한 발 한 발 오르기 시작했다. 뒤돌아선 그를 향해 코런덤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새 대신관은 경전의 ‘경’자도 꺼내지 않았고, 설교 비슷한 말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이 자리의 그는 그저 신이었다. 그는 제단 꼭대기에 미리 마련된 자리에 말없이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 뒤로 대신관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었다.
불이 다시 켜지고 그는 비로소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케스난의 맘은 여전히 땅바닥에 처박혀 있을 만큼 무거웠다. 대신관이 바뀌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어떡해서든 바깥에 전해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위대한 현신의 새 육체와 저희들의 출정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했나이다.”
슈라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던 케스난은 축하음식이라도 나오려니 했지만 뒤이어 들려온 비명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철크덕거리며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방문객들의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사악한 가짜 신성을 물리치려는 이 위대한 원정을 앞두고, 우리 신성한 교단에 발톱을 감추고 숨어든 황제의 앞잡이를 이 자리에서 처단해 우리 스스로를 청결히 하겠나이다.”
케스난의 뒷목이 순간 서늘해졌다. 헤네티들 사이로 끌려나오고 있는 건 그간 보안국과 법무부에서 교단에 어렵게 심어놓았던 프락치들이었다. 그 중엔 ‘교단에 최대한 호의적으로 대해라.’라는 특명을 받고 30년간 그들과 연줄을 쌓아 왔던 카파키 가 제후총리 시트르 카파키의 모습도 보였다.
타리프의 서손(庶孫)인 그는 카파키 가의 멸문 이후 몇 안 남은 방계들을 이끌며 어렵게 가문을 지켜 온 원로였고, 지금은 세네피스를 대리해 카파키 가의 실무를 이끌고 있는 가문 2인자였다. 그리고 케스난이 황제의 프락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맙소사.’
케스난은 자꾸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옆에 앉은 살름이 부디 눈치 채지 않기를, 시트르가 제발 자신의 정체를 누설하지 않았기를 기원했다.
‘대체 누가 찔렀지?’
케스난은 포도주를 입술에 대며 애써 두려움을 감추려 했다. 시트르는 물론이고 서로의 정체도 모른 채 파견되었을 저 많은 프락치들이 한 번에 걸려들었다는 건 누군가 내부의 높은 사람이 정보를 흘렸다는 의미였다.
그때, 공포에 질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트르의 눈동자와 테라스에 있는 케스난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시트르는 헤네티가 잡아끄는 쇠사슬에 이끌려 연단 위에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케스난은 연단에 세워져 있는 12개의 나무기둥이 무얼 뜻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끌려나오는 포로들을 지켜보던 케스난은 마지막 줄에서 눈을 찡그렸다. 그곳엔 유평황제의 동생이었고 황실 종친 중 가장 큰 권력가인 광림대군과 ―한때 마구스들 다섯을 말뚝에 박아 죽였던― 샤미르의 배다른 동생 둘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단상에 세워져 있는 넓적한 나무기둥 세 개를 보고는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리쿠 가에 대한 갈 곳 잃은 신의 분노로다.”
성직자들 몇이 저주를 퍼붓자 헤네티들은 세 황족들을 제일 먼저 끄집어내어 말뚝에 묶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박힐 손가락만한 나무송곳을 보며 자비를 호소하고 울부짖는 동안 베일 뒤 대신관은 미동도 없었다.
‘이놈들 이제 움직이는 거냐.’
케스난이 자꾸 마르는 입 안을 포도주로 몇 번이나 적셨다. 내빈까지 불러 모은 자리에서 3명의 유력 황족과 제후 총리들을 처형한다는 건 황실에 대한 공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어깨에 뭉툭한 말뚝이 박힌 광림대군의 찢어지는 비명이 홀을 뒤흔들었고 헤네티들의 함성이 동시에 울렸다.
“어맛.”
케스난이 부르르 떨며 살름의 팔을 안았다. 세 황족들의 어깨에, 팔에, 다리에, 심지어 손발과 눈, 귀, 성기에까지 산 채로 말뚝이 박히면서 차마 귀를 열고는 듣기 괴로운 비명소리가 홀 전체를 공포로 휘감았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황실 세작들은 졸도해 정신을 잃었고 시트르 카파키는 운명을 직감한 듯 눈을 꽉 감고 미동도 없었다.
‘미안해요, 시트르.’
케스난이 끔찍해 못 보겠다는 듯 살름의 품을 더 파고들며 속으로는 이 말을 백 번도 더 곱씹었다. 온몸에 나무못이 박힌 세 황족들이 꿈틀거리며 마지막 목숨을 이어가는 동안, 뒤이어 끌려나간 시트르와 7명의 보안국 프락치들이 차례대로 산 채로 배가 갈린 채 내장을 쏟아내며 말뚝에 매달렸다. 그리고 무슨 이유엔지, 마지막 말뚝 하나는 빈 채로 남아있었다.
“끄, 끄으윽.”
쏟아져 나온 자신의 내장을 보며 패닉에 빠져 있던 시트르가 다시 케스난이 있는 곳을 힐끔 보았지만 이미 흐려져 있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테라스 밑 단상에서 들려온 2신관 야투 박사의 목소리가 공포와 충격에 사로잡힌 청중들 사이를 울렸다.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 이 빈 말뚝에 매달렸어야 할 영혼이 있습니다. 그자가 이 광경에 얼마나 떨고 있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군요.”
그때까지도 살름의 팔을 안고 있던 케스난은 공포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케스난이 아는 한, 이제 자신은 교단에 남은 황제의 유일한 거물급 프락치였고, 저 말뚝은 분명 자신의 몫이었다. 저 말뚝이 교단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고 일부러 파 놓은 공포라는 함정인지, 아니면 그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연출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야투 박사의 협박은 계속 이어졌다.
“곧 있을 거사를 위해 내빈 중 거사에 참여할 일부를 제외한 모든 분들은 지금부터 4일간 이곳을 나가실 수도, 외부와 접촉할 수도 없습니다. 그동안 일체의 숙식과 편의를 제공할 것이니 내빈들께선 이곳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마누엘과 ‘그 여자’가 있던 옆자리에서도 밖으로 나서는지 부스럭거리며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누엘과 여자는 ‘거사’에 무언가 계획이 있는 듯했다.
“전 나갈래요, 제국회의에 초청장 받아놨어요.”
숨도 못 쉬고 있던 케스난도 이때다 싶어 급히 옆에 벗어놓은 숄을 챙겼다. 잘 하면 문제의 여자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살름의 우악스런 손이 케스난을 억지로 잡아끌어 옆에 앉혔다.
“넌 해당 없으니 여기 있어. 거사에 참여할 자들만 나간다.”
당황한 케스난은 자신을 의심어린 시선으로 보는 살름에게 도리어 버럭 화를 냈다.
“제국회의에 가서 사람들 얼굴 익혀놓으라 한 건 당신이잖아요. 애 딸린 어미를 말도 없이 데려와 4일이나 잡아두면 어쩌라는 거예요? 발렌틴은 고작 10살이라고요.”
“아, 그랬지.”
살름은 케스난의 반발에 바로 꼬리를 내렸지만 풀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람 보내서 네 아랫놈들한테 며칠 못 올 거라 알리지. 제국회의는 안 가도 돼.”
“그러지 말고 나도 내보내 줘요. 마스터가 4일이나 없으면 조직은 어쩌라고요.”
“어허. 저 빈 말뚝 차지하고 싶어 몸이 달았나봐?”
살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내 한 마디면 너도 저 빈 말뚝에 매달릴 수 있어. 알아? 네가 이렇게 오래 날 거부한 이유가 정말 궁금하거든.”
순간 바싹 얼어붙은 케스난은 단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피비린내로 물든 단상에선 아직도 숨이 안 끊어진 황족과 세작들이 내장을 모두 드러낸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말뚝 한 개가 계속 케스난의 속을 어지럽혔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는 이곳 소식을 반드시 황제에게 전해야만 했다.
++++++++++++++++++++++++++++++++++++++++++
============================ 작품 후기 ============================
사정상 출판본을 구매하지 못하는 분, 혹은 책을 살까말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출판본을 조만간 조아라 성인 전용 유료란인 노블레스 혹은 ebook 서비스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출판본은 성인용으로 나온 책이라 이곳의 연재분과는 구성과 이벤트, 노출 수위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시스템상 종이책에 있는 표나 삽화, 부록 등은 넣기 어렵고요, 본문 텍스트만 들어가게 될 듯합니다. 연재 개시하면 많은 호응 부탁드립니다. 물론 종이책 출판본은 얼마 안 남은 대단원까지 지금까지처럼 계속 출간하고요, 개인지 사이트에서 계속 판매합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