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0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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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가 늦은 저녁 황후전 알현실을 찾았을 때, 칸막이 너머 당상에 앉은 아메스의 앞에는 경호대에서 보낸 보고서류가 뒹굴고 있었고, 그는 평소보다 더 불안정해 보였다.
“종친들이 내 속을 또 썩이는군.”
“하루이틀 일입니까.”
볼토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타르서스인 치고는 밝은 피부에 곱슬머리, 작고 다부진 체구의 이 남자는 평민들 사이에선 가히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명문 예리노프 가의 하인으로 시작해 집사, 보석상, 부동산 개발업자를 거쳐 타르서스의 재벌이 될 때까지 갖은 풍파를 다 이겨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난 제위전쟁 때도 딱 적절한 순간 베흔을 버리고 페로 수하로 들어가 지금의 지위를 꿰찰 수 있었다.
“광림대군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젠 셋이야.”
아메스가 서류철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샤미르의 이복동생 둘도 오전에 광림대군의 연락을 받고 나가 여지껏 행방불명이라는군. 유유상종이겠지 뭐.”
아메스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그는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쪽으로 다가갔다.
“오후에 시녀장 통해서 물은 건 확인했는가?”
“무슨 의도로 하명하신 건지는 소신도 모르겠사옵니다.”
볼토는 유권해석에 관해 묻는 아메스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려보였다.
“그저 정실이 사망한 후 첩실의 자녀를 그 양자로 들이는 데 법적인 하자가 없는지 조사를 명하셨고, 정확히 누구를 염두에 두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아메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황제가 자신의 불륜을 눈치 챘다면 정말로 폐위 혹은 제거를 염두에 두고 물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볼토가 머리를 조아렸다.
“유권해석은 법무부 소관입니다. 이부는 공부(公簿) 기록만 담당합니다. 그 문제는 법무부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에게 문의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아리아노 경?”
아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은 내각에서 손꼽히는 전문 행정가이고 황제의 충복이었다. 제위전쟁 당시에는 내내 수우 황제의 수하였고, 거의 마지막의 사오시안트 전투에서야 카렐 편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황제는 도리어 그런 완고함을 높게 사는 듯했다.
“아리아노 경이 그런 걸 내게 답하겠는가.”
아메스의 짜증 섞인 물음에서 그의 두려움을 읽어 낸 볼토가 좌우의 황후 경호원들을 둘러보며 낮게 헛기침을 했다.
“움?”
아메스의 표정이 긴장되었다. 잠시 고민을 한 그는 경호 가디언들에게 나가라며 손짓했다. 가디언들은 규정에 따라 볼토의 몸 검사를 한 후 방음장치가 된 뒤쪽의 투명한 칸막이 너머로 일단 자리를 옮겼다. 최소한 황궁 내에서는 황후가 가족이나 같은 내명부 소속이 아닌 자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독대를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볼토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법무부에서는 가능하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메스가 대답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황제가 불륜을 저지른 자신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카이를 제거하고 황제를 과할 만큼 잘 따르는 장녀 마하를 새 후계자로 올리는 끔찍한 상상이 맴돌고 있었다. 아메스의 눈치를 힐끔 본 볼토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은 황상의 의중을 모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최악의 경우라도 황상께서 장태자 전하를 해하실 리는 없을 겁니다. 황후 폐하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네놈은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고 있는 것이냐?”
황당해진 아메스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지만 볼토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사실 그가 황후와 만남을 시도한 건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제가 방금 내의원에서 정보를 하나 받았습니다. 장태자께는 기쁜 소식입니다.”
“내의원에서 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메스가 버럭 화를 냈다. 볼토가 그런 황후에게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장태자께서 쓰고 계신 면역억제제를 양산하는 법을 황상께서 찾아내셨다 합니다. 지금 남은 약에 전전긍긍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아메스의 눈이 확 커졌다. 기대도 못 했던 놀라운 소식에 그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볼토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약의 주성분을 생산하는 종균이 곧 내의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제 황자들께서 급사하실지 모른다는 걱정은 접으셔도 될 듯합니다.”
“저, 정말이냐? 이제 그걸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다고?”
눈물이 핑 고인 아메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카이의 약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로서는 조금 전의 무서운 걱정을 잠깐이나마 잊게 할 어마어마한 희소식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상님들의 은공입니다.”
울컥해진 아메스가 휙 돌아서며 가슴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어른이 된 카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동시에 지난해 죽은 딸 크낙스 공주 생각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낙스가 1년만 더 버텨주었더라면…….”
“지난 슬픔은 잊으시옵소서. 이젠 장태자께서 늠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황상께 불상사가 생겨도 자이센 가의 핏줄이 제위를 잇는 데 문제가 없으니 이만한 경사가 어딨겠습니까?”
힘이 들어간 볼토의 목소리에서 아메스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메스는 눈물자국을 지우고 남자를 힐끔 째려보았다.
“엄청난 경사를 놓고 네 말투가 심히 불쾌하게 들리는구나.”
아메스의 말투에 노기가 묻어났다. 대신 따위가 감히 황제의 죽음을 언급했으니 아버지의 심복만 아니라면 당장 귀싸대기를 날렸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볼토도 물러나지 않고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소신 황실에 몸담고 있지만 본디 자이센 가의 충실한 가신입니다. 그래서 충심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무언가 이상한 냄새를 맡은 아메스는 볼토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노려보기만 했다. 예상대로, 볼토는 바로 묻어왔던 말을 끄집어냈다.
“방금 전의 걱정을 그새 잊으시고 약 하나 따위에 그리 기뻐하십니까.”
아메스의 짧은 기쁨을 볼토의 이 한 마디가 그대로 앗아가 버렸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실에서 소신이 처한 상황은 황후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아버지가 황상과 마찰을 감수해가며 그대를 세 번이나 유임시키지 않았는가. 그게 이 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냐.”
“대공 덕분에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로는 소신과 황후 폐하의 처지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드린 말씀이옵니다.”
“이놈이 감히!”
발끈한 아메스의 언성이 알현실을 쩌렁 울렸지만 볼토가 질세라 한 마디 덧붙였다.
“황상께서 황후 폐하의 불륜을 의심하고 계신다는 건 아십니까?”
“무어?”
아메스의 두 다리가 휘청했다. 이부대신의 입에서 자신의 불륜이 튀어나올 정도라면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아메스는 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당장이라도 뛰쳐들어올 듯 서성대고 있는 유리벽 바깥 경호 가디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손짓했다. 볼토는 패닉에 빠진 황후의 모습에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님과 자이센 가의 충복으로서 드리는 간언입니다. 황상께서는 어차피 얼마 못 사십니다. 이번에 운 좋게 구하신 약도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닙니다. 발병하지 않은 건강한 동생들이 여럿인데 황상께서 다른 선택을 고려하시는 게 이상할 건 없지요. 거기에 황후의 외도까지 아셨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살기에 찬 볼토의 두 눈을 보며 아메스는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볼토가 머리를 조아리며 마치 투사라도 되는 양 목소리에 사뭇 힘을 주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30년간 황상께선 4백년 제국의 근간인 귀족과 지도층을 핍박하셨고 수양과 도리를 모토로 삼은 제국에서 배운 것 없는 무학의 가디언이 황제가 되는 나쁜 선례를 남기셨습니다. 명문가와 지도층을 대표하셔야 할 황후께서 더 뭘 망설이십니까?”
볼토의 강한 어조는 아메스의 약해진 의지력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았다. 볼토가 바닥에 이마를 대며 사뭇 비장하게 말했다.
“뜻을 같이하는 충신 여럿이 모였고 도움을 줄 지도층도 모았습니다. 30년간 정은 드셨을지 모르나 어차피 곧 돌아가실 분 조금 일찍 보내드려 제국을 구원한다 생각하시고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지금까지는 장태자의 환우로 황실의 대가 끊길까 걱정이 되었으나 이제 약도 찾아냈으니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30년을 되돌려야 합니다!”
“네 이놈이 설마…….”
그제야 조금 정신을 되찾은 아메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30년 전에도 총리께서 제위를 이으셔야 했습니다. 애당초 가디언 따위를 황제로 옹립한 게 잘못이었습니다! 황상께서 붕어하시면 황후께서 섭정을 지명할 수 있으시니 아버님 총리를 지명하십시오. 총리께서 기회를 보아 몸소 제위에 오르시면 황후께선 장태자가 되십니다.”
“이, 이…….”
“현실을 제대로 보십시오, 유평제 손에 죽은 바니샤드 대공 꼴이 되시겠습니까? 운 좋게 죽임을 면하신다 해도 황상 붕어 후엔 골방에서 썩는 과부 신세밖에 더 되겠습니까? 미래의 황제 자리를 팽개치시고요?”
“이놈이 정말 미쳤구나!”
폭발한 아메스가 결국 알현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유리벽 너머에서 초조하게 안을 지켜보던 경호원들이 흥분한 황후의 모습에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와 볼토의 양옆을 붙들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경호원이 얼굴이 시뻘개진 아메스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이유인지 말씀주시면 지금이라도 체포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지금 이 기회를 놓치시면 나중에 골방에서 영영 후회하실 겁니다.”
볼토가 양 팔이 붙들린 채 마치 최후통첩처럼 말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아메스가 휙 돌아섰다. 황제의 배우자가 되어서 산 지난 수십 년간의 기억들이 그의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이미 물은 엎질러져 있었고, 궁지에 몰린 그에게 다시 주워 담을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무서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아메스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오팔 결혼반지를 한참이나 더듬거렸다. 그의 손바닥 안과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가득했고 머릿속은 황제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아들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복잡한 계산으로 가득했다. 결론이 가까워지면서 그의 눈꼬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래, 네 말대로 진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예?”
볼토를 끌어내가려던 가디언들이 황후의 이 말에 멈칫거렸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나가라.”
어리둥절해진 가디언들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부대신을 도로 놓아주고는 다시 유리벽 뒤로 사라졌다.
아메스는 의자를 짚고 뒤로 돌아선 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누가 뜻을 모았느냐?”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중신 5명과 제후 12명, 그리고 실무적인 도움을 주기로 한 요인 16명이 있습니다.”
“33명이나?”
의자 등받이를 짚은 아메스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대신을 포함해 30명이 넘는 지도층이 관여했다면 그저 단순히 암살이 아닌 반란 수준이었다. 아메스가 자꾸 떨려오는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다시 물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냐.”
“……알려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메스는 볼토에게 등을 보인 채 한참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메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아들 카이가 투명문 밖에서 환한 얼굴로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저녁 카이는 아메스와 특별한 약속이 잡혀 있었다. 태어나 처음 엄마와 연극을 보게 된 14살 소년의 얼굴이 기대감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 기다릴게요. -
입놀림으로 말을 전한 카이가 유리벽에 호 하고 입김을 불고는 손가락으로 크게 ‘사랑’ 표시를 그려보였다. 아들의 뜬금없는 애교에 웃어야 했지만 지금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 곧 나가마. -
아메스가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껏 있어도 없는 듯 관심도 주지 않았던 아들이었지만 페스트의 전장에서 내내 엄마 생각을 했었다는 아이의 말을 차마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와의 외출을 앞둔 아들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환했다. 거기에 곧 황제가 돌아온다는 소식까지 접하면서 카이는 하루 종일 기분이 둥둥 뜬 것 같았다.
아들을 보는 황후의 시선을 유심히 살피던 볼토가 슬쩍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후계자를 얻으셨고, 약도 구했으니 이제 황상은 더 이상 쓸모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메스는 유리벽 너머 아들의 환한 인사에 형식적인 눈웃음으로 화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내 볼토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너희 계획을 설명해 봐라.”
“황상께선 궁에 들르시지 않고 셔틀로 궤도 밖에서 황실 프리깃에 바로 옮겨 타실 예정입니다. 수베르의 아침시간에 맞춰 쭉 수침하실 수 있도록 느리게 비행할 예정이니 아마 9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프리깃’이라는 말에 아메스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세나우스 3세가 뼛조각조차 변변히 남기지 못한 채 한 줌 재가 되어버린 것도 제후지역을 순방하던 전용 프리깃의 폭발사고에서였다.
아메스는 볼토를 잠시 돌아보았다. 이번 제국회의의 실무 준비 총책임자가 바로 이부대신인 이 남자였다.
“거긴 황실 일가의 절반이 타기로 되어 있는데 설마 그걸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후환이 없게 하려면 다 보내야지요.”
아메스가 턱에 힘을 꽉 주며 유리벽 바깥에 있는 아들을 내다보았다. 장태자는 바깥에 있는 경호가디언들과 허물없이 환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칼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는 걸 보니 페스트에서의 전투 이야기로 또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듯했다. 난생처음 전쟁을 경험하고 온 소년은 정신적인 후유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세간의 걱정이 무색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그곳 이야기로 입이 근질거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아들은 타고난 전사의 핏줄이었다.
볼토도 덩달아 장태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황상과 장태자는 한 함선에 탈 수 없습니다. 서열에 따라 장태자께선 황태후, 네페티 황비, 솔 황빈, 엘룬 옹주와 4번 프리깃에 탑승하실 겁니다.”
“황상의 프리깃엔 나와 베아트릭스 황빈, 에스더 귀인, 마하, 마리안이 타겠지.”
아메스가 턱에 흐르는 땀을 슬쩍 닦아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거냐?”
“황상께선 선황의 일로 프리깃의 안전 문제에 예민하십니다. 가족이 탄 프리깃이나 여객선은 반드시 측근 베네루스에게만 맡기십니다. 두 척일 때는 한 척을 베네루스에게, 또 하나는 몸소 함교를 지키실 겁니다. 그분도 면허가 있으시니까요.”
“내 프리깃 2척을 무작위로 이미 빼어내 어제부터 점검중인데 무슨 재주로 그걸 날려버리겠다는 거냐? 내가 뽑은 프리깃이라는 것도 모르느냐?”
아메스가 언성을 높였다. ‘황제는 제국을 지키고 황후는 황제와 황실을 지킨다.’는 전통에 따라 황실의 큰 행차를 조율하는 건 황후의 임무였다. 공개적인 황실 행사에서 황제와 황후를 빛내는 의전부대도 황후 직속이고, 총 5척의 황실 전용 프리깃 중 2척을 무작위로 뽑아낸 것도 바로 아메스였다. 그런 프리깃에서 사고가 난다면 아메스가 의심을 받을 건 뻔했다.
“선황의 사고 때처럼 쓸데없는 증거가 남지 않도록 함선을 아예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아메스의 입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통신을 끊은 후에 자동 운항 시스템을 조작해 워프 오류가 나게 설정하면 됩니다. 여객선은 워프 중간쯤 궤도를 이탈해 스페이스 어딘가에 공중분해되어 흩어질 겁니다. 그 일을 맡을 함장도 뽑아 놓았습니다.”
“허, 함선을 속속들이 아시는 황상께서 옆에 계신데 어떤 멍청한 함장이?”
“그래서 황후 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동운항 프로그램과 통신망을 손대려면 함선의 마스터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볼토가 입술에 잔뜩 힘을 주며 재차 아메스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저희가 그 작업을 할 동안 그분께서 함교에 오지 못하시도록 선실에 잡아놓아 주십시오. 한 달 만의 상봉이니…… 방법은 제 입으로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아메스가 순간 얼굴을 붉혔지만 볼토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잠드시는 대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처리라니?”
“궤도가 이탈하면 함 내에 한동안 경보가 울릴 텐데 몸소 수습하려 나서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내 손으로 황상을 해하라는 뜻이냐?”
아메스의 물음에 볼토가 사뭇 비장하게 대답했다.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는 ‘등급 없는 가디언’의 급소를 조강지처가 아니면 누가 찌르겠습니까?”
가슴이 먹먹해진 아메스는 다시 아들이 있는 유리벽 너머를 돌아보았다. 수다 거리도 떨어졌는지, 아들 카이는 엄마가 나오기만 기다리며 얌전히 서 있었다. 안에서 오가는 대화 내용은 꿈에도 모른 채 엄마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들의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지금까지 저런 착한 아이를 왜 그리 미워했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요철이 있는 뼈 송곳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한 번밖에 못 쓰지만 검문에도 안 걸리고 상처 주변을 갈가리 찢어 치명상을 낼 겁니다. 이전에 무장이셨으니 저보다 칼은 잘 다루실 줄 압니다. 전담경호도 없어졌으니 잠자리에서 훼방 놓을 자도 없습니다.”
아메스는 무심결에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잠든 황제의 손목을 호기심에 만져 본 일이 있었다. 황제는 그가 가디언 팔찌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급소를 더듬었어도 전혀 경계하지 않은 채 도리어 잠결에 그의 품을 파고들었었다.
아메스가 낮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렵지는 않겠군.”
“죽음을 확인하시면 옷만 갈아입고 조용히 나오십시오. 바로 조종사에게 알리고 그 길로 탈출정에 타시면 됩니다. 탑승자 대부분이 죽을 테고 저희와 뜻을 함께한 자들만 남을 테니 그럴싸하게 입만 맞추면 됩니다.”
“너희가 그때 가서 날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믿지?”
“생각해 보십시오, 황후 폐하께도 일이 생기면 세네피스 황태후가 섭정이 됩니다. 설마 저희가 일을 그렇게 만들 바보로 보이십니까?”
“함교엔 무장요원도 배치되지 않느냐?”
“어차피 의전대(儀典隊)요원입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볼토의 모습에 아메스는 전율을 느꼈다. 대외 행사에서 황제의 위엄을 보이는 황후 직속의 의전대는 황족 출신 대장 휘하에 군악대와 군기대(軍旗隊), 경호대로 이루어져 있는 비전투부대였다. 애당초 황제의 장식품 역할을 혐오했던 아메스는 그런 부대가 자신의 밑에 있다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렇다보니 지금은 사실상 아버지 페로―좀 더 정확히는 아버지의 심복들―손에 운영되고 있었고, 경호요원들은 상당수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다.
“베티 황빈과 황자들은?”
“황상과 운명을 함께해야겠죠. 조카 마리안 옹주가 신경 쓰이시겠지만…… 옹주는 함께 죽어주는 편이 의심을 더는 데 좋습니다.”
볼토가 눈을 슬쩍 치켜뜨며 황후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돌아선 채 여전히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병부대신 제네르 경이나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이나 보안국장 사에나 경 같은 걸출한 황상 심복들이 아이 하나 더 죽는다고 속아 줄 만큼 만만해 보이나?”
“프리깃의 내외 통신을 모두 끊어버릴 것이니 황궁이나 수베르에선 프리깃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황후께서 탈출정의 비상통신으로 수베르에 그자들의 체포를 명하시면 우리 동지들이 위험분자들을 쓸어낼 겁니다. 황제가 붕어한 비상상황에서 뭐는 불가능하겠습니까?”
아메스는 단 하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황제 수하의 핵심인 그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볼토 이자보다 더 중요한 위치의 누군가가 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메스는 다시 아들을 돌아보았다. 14살 소년의 갸름하고 잘생긴 얼굴과 붉은 톤이 감도는 머리칼, 크고 야무진 눈매에서 황제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아메스는 오팔 결혼반지를 다시 꽉 움켜쥐었다.
“제국회의장이 시체도 없는 국상(國喪)이 되는 건가.”
아메스가 울먹이려 하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그가 수 년, 아니 수십 년간 진절머리나게 상상하고 지워냈던 똑같은 광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발작으로 죽은 황제의 시신 앞에서 아들과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처량한 과부의 모습이었다.
“그럼 황후 폐하만 믿겠습니다.”
볼토가 바닥에 이마를 대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메스는 별 대답도 없이 휙 돌아서서 알현실의 유리문을 나섰다.
“149층에 강아지가 없던데요? 같이 데려가려고 했는데?”
지금껏 아메스를 기다려 준 카이가 엄마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강아지 이야기에 아메스의 표정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강아지에 물려 깊게 상처가 난 손을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잠깐 다른 데 보냈다.”
“예에? 아직 어려서 낯선 곳에 가면 무서워할 텐데.”
엄마의 강아지를 유독 예뻐하던 카이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어디 이상한 데 보내신 거 아니죠? 다시 오는 거죠? 제가 말썽 안 부리게 할게요.”
“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안 써도 돼.”
아들의 얼굴이 당장 울 듯 일그러지자 아메스가 소년을 꼭 안았다.
“엄마?”
지금껏 애정표현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이 무뚝뚝한 엄마의 포옹에 카이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메스는 이번은 아들을 안은 팔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이 아이가 이렇게 소중하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엄마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구나. 우리 아들 그래도 엄마 미워하지 않지?”
“그럼요. 제가 엄마를 왜 미워해요? 근데 엄마 왜 이렇게 땀을 흘려요?”
“앞으로도 엄마 믿고 ……누가 뭐라고 해도 엄마 미워해선 안 돼.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건 다 가족을 위한 거니까. 알았지?”
“그럼요, 저도 황상만큼 엄마 사랑해요.”
카이가 엄마 아메스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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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 메인 스토리에 슬슬 돌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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